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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癌)도 두손 든 노(老)화가의 '미술 열정'

대한인 2013. 12. 8. 15:02

 

75세 정문규 화백, 말기 위암 이기고 개인 미술관 열며 창작활동
시한부 선고받은 후에도 15년이나 더 살고있어…
사람들이 내 그림 보러 찾아오는 것 자체가 좋아

1992년 8월 27일 오전 서울 사당동 작업실에서 붓을 들려던 정문규(75) 화백은 속이 쓰렸다. 전날 밤새 담배를 피우고 커피를 마시며 그림을 그렸던 탓이려니 했다. 그런데 그날은 달랐다. 약을 먹어도 속이 편해지질 않았다. 인근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방사선 검사 결과를 보더니 큰 병원으로 가란 말만 되풀이했다.

"어떻게 지금까지 몰랐단 말입니까. 위암 말기입니다. 수술이 아무리 잘돼도 2년 넘기기 힘들 겁니다." 서울 여의도의 한 종합병원 의사는 그에게 시한부 인생을 선고했다. 하루 10시간씩 그림 그리느라 아픈 줄 알고 먹었던 진통제 탓에 암을 느끼지 못한 것이었다. 5일 후 그는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60살을 바라보던 정 화백에게 항암 치료는 쉽지 않았다. 75㎏이었던 몸무게는 1년 넘게 항암치료를 받으며 60㎏이 됐고 치아와 머리카락도 모두 빠졌다. 4번째 항암치료를 받고 나서는 일주일 동안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정 화백은 오로지 붓을 다시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고통을 참고 또 참았다.

항암치료가 끝난 후 정 화백은 2년 동안 하루 세 끼를 암에 좋다는 된장만 먹어가며 하루 5~6시간씩 운동을 했다. 1995년 가을 정 화백은 암 완치를 통보받았다. 조각가인 막내아들 종산(46)씨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고 했다.

28일 오후 정문규 화백이 대부도에 있는 자신의 미술관 작업실에서 그림을 손질하고 있다. 1992년 위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정 화백은 투병 끝에 암을 이겨내고 붓을 다시 들어 이제 자기 이름을 딴 미술관도 열었다./김용국 기자 young@chosun.com

그는 처음 의사가 길게 잡았던 시한보다 15년을 더 살았고 지금도 건강에 별문제가 없다. 지난 6월에는 안산시 대부도에 3층짜리 미술관도 열었다. 개관한 지 이제 막 100일이 지났다.

"내 작품을 보여줄 수 있는 미술관을 가지는 게 평생 꿈이었어. 하루에 10명도 안 와. 그래도 10명이라도 와서 내 그림 보고 간다는 것 자체가 좋아."

정 화백은 1934년 경남 진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일본인 교장이 전교생 앞에서 "정문규는 나중에 동경예술대학에 가서 그림을 배울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동네에서 소문난 '환쟁이'였다. 정 화백은 어려운 집안사정 때문에 사범학교에 진학해 초등학교 교사가 되었지만 '화가'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2년 동안 교사를 해서 모은 돈으로 홍대 미대에 입학했다.

"전업작가는 꿈도 못 꿨지, 극장 간판 그림 그리던 동기도 있었으니까. 난 낮에는 마포 근처 2평짜리 가게에서 애들한테 군것질거리 팔고, 밤에 그림 그렸어. 62년에 개인전을 열었는데, 우리 학교 교수들이 와서 보더니 '학교로 와라'고 하더라고. 진짜 '화가'가 된 거지."

그때부터 암 진단을 받을 때까지 30년 동안 정 화백은 일주일에 16시간씩 강의를 하면서 1년에 50~60편의 그림을 그렸다. 개인 전시회도 20번 넘게 열었다. 미술공부를 더 하기 위해 68년과 80년에는 일본프랑스에 유학하기도 했다.

미술관에는 총 100여점의 그림이 전시돼 있다. 2층과 3층에 전시관이 하나씩 있다. 2층은 데뷔 초기에서 투병 생활 전까지의 그림이 걸려 있고, 3층에는 붓을 다시 든 이후의 작품들이 있다. 두 전시관의 그림은 완전히 다르다. 2층에는 사람의 인체를 스크래치 기법(캔버스에 칠해진 물감을 칼로 긁어내는 표현방식)으로 표현한 무채색 작품이 대부분이었다. 3층은 노란색, 붉은색, 푸른색 등의 원색을 사용해 꽃과 나무 등 자연을 묘사한 그림으로 채워져 있었다.

정 화백은 "아프기 전에는 그림 하나 그리는 데 몇 달씩 걸릴 정도로 고민 많이 했는데 지금은 주위 환경을 보고 떠오르는 이미지를 그대로 옮긴다"며 "그때 그림이 예술적으로는 더 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그림 그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며 웃었다.

 

                                                                                                    <출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