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스쿨 '에스모드 서울' 20년 이끈 박윤정 이사장
'미스 박 테일러'로 이름 날려…
영부인 옷 만든 톱 디자이너
뉴욕·파리에서 주목 받는 정욱준·박윤정씨 등 배출
"후배들 보며 점점 젊어져"
바늘과 실을 쥔 작은 손가락이 꼬물거렸다.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꼬마는 자리에서 움직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날카로운 바늘 끝에 다치기라도 할까 봐 여간 걱정되는 게 아닌데, 아이의 입에선 '아얏' 소리 한 번 나지 않았다. 어느새 아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엄마는 걱정한다. '찔렸나?' 아이의 손엔 어느덧 예쁜 인형 옷이 들려 있었다. 여섯 살 박윤정은 "옷이 정말 좋아요. 모양 내는 게 좋아요"라고 말했다. 야무진 입매와 여문 손끝은 닮아 있었다.
아이의 손이 커지는 것 이상으로 솜씨는 몇 배 늘었다. 경기여고를 다니면서 교복을 고쳐 입었다. 알아주는 멋쟁이가 됐다. 그래도 부모는 그녀가 언니처럼 약대에 들어갈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원서에 적힌 건 이화여대 의류직물학과. 어른들은 낙담했다. '바느질장이가 되려 하다니'. 동그란 얼굴에 새까만 눈동자가 돋보이던 박윤정은 이렇게 말했다. "'바느질장이'가 아니라 '디자이너'예요."
14일 오후 서울 신사동 '에스모드 서울' 4층 이사장실. 50여년 전의 그 발랄한 여학생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오는 18일 '에스모드'의 서울 창립 20주년을 앞두고 만난 박윤정(77) 에스모드 이사장에게서 '세월'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대목은 화려한 이력뿐이다.
- ▲ 88년 에스모드 파리 교장과 계약 당시./에스모드 제공
깊은 주름 하나 발견할 수 없는 하얀 피부, 여든을 눈앞에 두고도 5㎝ 구두 위에 사뿐히 올라선 꼿꼿한 자세의 이 디자이너는 '기분 좋은 배신' 자체였다. 심지어 박 이사장은 인터뷰 초반 한 시간가량은 앉지도 않고 서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허리가 아픈 건 오히려 기자 쪽이었다.
"친구들은 리프팅(피부를 팽팽하게 하는 것)이다 뭐다 여러 가지 잘 하는 것 같은데 난 무서워서 한 번도 못했어요. 대신 헤어 스타일 관리에는 굉장히 신경 많이 써요. 계란 노른자 오일을 써봤는데 두피랑 모발 영양에 정말 좋더라고요. 어때요? 괜찮죠?"
미국 유학과 프랑스 연수 뒤 1966년 명동에 세운 '미스 박 테일러'로 이름을 날리며 영부인 의상까지 제작할 정도로 인정받았고, 20년 전엔 파리의 유명 디자인 스쿨 에스모드의 서울 분교를 직접 세웠고, 그 공로로 2001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 훈장 기사장도 받는 등 디자이너와 교육자로서 독보적인 인생을 살아왔던 그녀다.
'성공한 여성'을 조명하는 인터뷰 요청도 끊임없이 들어왔지만 그때마다 박 이사장은 물러섰다. "제가 아직 성공하지 못했으니까요. 이 학교를 열면서 적어도 10년 이내 세계적인 디자이너를 배출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도 세계를 뒤흔들 디자이너가 나오지 않았거든요." 물론 이 학교 졸업생 중에선 파리와 뉴욕에서 주목받고 있는 정욱준 디자이너를 비롯해, 에스모드 서울을 거쳐 에스모드 파리를 졸업한 뒤 파리 명품 브랜드 스말토의 총괄 디자이너가 된 박윤정씨 등 이미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은 이가 상당하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만족하지 못했다.
"20년 전 에스모드 파리측은 '한국은 카피(copy·복제) 왕국이라 돈은 많이 버니 학교는 필요없을 것 같다. 거리를 봐도 일본 패션을 옮겨다 놓은 것 같다'며 냉대했어요. 하지만 설득 끝에 학교를 세웠고,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베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 줄 알게 됐으니 이제 세계를 놀라게 할 때가 온 것 같아요."
그녀는 "24시간을 에스모드와 함께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이 너무 좋아 결혼도 안 했으니 자신의 시간과 돈, 에너지를 모두 에스모드에 투자한다. 젊은 디자이너들에게서 '희망'을 발견할 때 점점 더 젊어지는 걸 느낀다고 했다.
그녀는 패션을 꿈꾸는 이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디자이너인 크리스토프 데메르(에스모드 파리 교수)가 이런 말을 했어요. '브랜드에 속한 디자이너라면 자기 디자인뿐 아니라 그 집 옷이 잘 되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몸이 부서져라 일하지 않고서는 좋은 디자이너가 될 수 없다.' 바로 그겁니다. 디자이너뿐만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도 몸이 부서져라 일하지 않고선 성공을 자신해선 안 됩니다."
<출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