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년 이후 160호 제작 서길수 서경대 교수
가족 대소사(大小事)·연구 성과 지면에 꼼꼼하게 기록
새로운 공부 전념 위해 정년과 함께 '폐간'… 두 아들이 이어가기로
고구려사 전문가인 서경대 경제학과 서길수(65) 교수는 40대 초반에 접어들던 1985년 4월 15일 조그만 신문을 창간했다. 제호는 '우리집'. 서 교수 부부가 막 초등학교 2·3학년에 올라간 두 아들과 함께 A4용지 2장에 손으로 기사를 쓰고 그림을 그린 다음 20부를 복사해서 가까운 친척들에게 우편으로 보냈다.
서 교수 가족은 이후 24년간 꼬박 가족신문을 만들었다. 주요 필진인 아이들이 대학 가고 군대 가고 장가가느라 드문드문 나올 때도 있었지만, 한두 달에 한번은 꼭 발행하는 걸 원칙으로 했다. 아이들이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한참 필봉에 물이 올라 신문 분량이 A4용지 16매까지 늘어났다. 발행 부수도 500부에 달했다. 입소문을 들은 주위 사람들이 너도나도 "한부 보내달라"고 청한 것이다.
지난 4일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 자택에서 만난 서 교수는 누렇게 바랜 24년간의 가족신문을 일일이 펼쳐보이며 "최전성기(90년대 말)에 500부 찍을 때는 신문을 접어서 우편봉투에 넣고 주소 쓰고 우표 붙이는 데만 7~8시간이 걸렸다"고 했다. 2000년부터는 서 교수가 이메일을 만들어 독자 600명에게 온라인으로 발송했다.
"시작은 소박했어요. 경남 거창에 사는 지인이 초등학생들의 학급 문집을 보여주기에 '가족끼리도 서로의 글과 소식을 나누면 좋겠다' 싶었어요. 매달 첫째 주에 가족들이 모여앉아 누가 무슨 기사를 쓸지 정하고, 둘째 주에 완성된 신문을 독자들 수만큼 복사해서 발송했지요."
서 교수는 "가족끼리 공동작업을 하다 보니 서로 이야깃거리가 생겼고, 20년 넘게 계속하다 보니 가족의 문화가 됐다"고 했다. 서 교수가 한 달 이상 해외에 체류할 때는 부인이 '편집국장 대행'을 맡았다. 두 아들은 고3 때도 기사를 썼다.
'우리집'은 서 교수 가족이 지나온 길을 생생하게 기록한 '사료'(史料)다. 386 컴퓨터를 장만했다는 소식, 모뎀을 달았다는 소식, 돈을 모아 20평대 초반의 연립주택에서 20평대 후반의 연립주택으로 이사했다는 소식 등 살림살이의 변천이 세세히 쓰여 있다.
- ▲ 지난 24년간 가족신문‘우리집’을 만든 서길수 서경대 교수(오른쪽)와 아내 이은금씨가 4일 서대문구 창천동 자택에서 손녀와 함께 지난 신문집을 보고 있다./정경열 기자 krchung@chosun.com
서 교수의 두 아들은 초등학생 시절 '만화책을 사야 하니 용돈을 올려달라'는 기사를 썼다. 고등학교에 올라간 뒤에는 논리가 한결 유식해졌다. 차남 상욱(32·서울대 박사과정 졸업)씨는 고2 때 '용돈의 지방자치체'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를 썼다. "중앙정부가 돈 쓰는 권리를 지방정부에 이양했던 것처럼 용돈 액수를 책정하고 쓰는 것도 부모가 아니라 자녀가 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서 교수는 "한마디로 하면 '용돈 더 주세요'라는 얘기"라고 했다.
1995년 3월에는 10주년 특집판을 냈다. 특집판에는 서 교수가 전 세계에 7명뿐인 에스페란토어 세계협회 임원에 당선됐다는 뉴스, 장남 상원(33·방위산업체 직원)과 차남 상욱씨가 한 해 간격으로 잇달아 연세대에 합격했다는 뉴스, 온 가족이 유럽에 다녀왔다는 뉴스 등 가족들이 꼽은 '10년간의 10대 뉴스'가 실렸다.
1998년에 낸 가족신문에는 서 교수가 중국 요서지방의 고구려 산성을 돌아본 기행문도 실려 있다. "옛 조상의 웅대한 기운에 가슴이 벅찼다"는 내용이다. 서 교수는 한국 경제사를 전공했다. 한국의 고대 경제사를 연구하다 1990년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둘러보면서 고구려·발해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중국이 자기네 국익에 맞춰 고대사를 곡필하는 이른바 '동북공정'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반대해, 고구려연구소(현 고구려발해학회)를 세워 활발하게 활동해왔다.
'우리집'을 본 아동문학가 고(故) 이오덕 선생이 '글 쓰는 법'에 대한 기고문을 보내며 가족신문 발행을 응원하기도 했다. 서 교수는 "그분과 일면식도 없었는데, 다른 분에게 보낸 '우리집'을 보고 '아이들 글이 재미있으니 나도 보내달라'고 연락해오셨다"고 했다.
애로사항도 있었다. 부인 이은금(61)씨는 "가끔씩 잘 모르는 사람이 '여행 잘 다녀오셨어요?' 하는 식으로 우리 가족 사정을 속속들이 아는 질문을 던져서 당황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초창기 '우리집'에는 40대의 서 교수 부부가 등산복을 입고 산에 놀러 간 사진이 실려 있다. 두 아들은 야구모자를 쓰고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는 개구쟁이였다. 세월이 흐르며 서 교수 부부는 반백이 됐고, 두 아들은 각자 어엿한 가장이 됐다.
서 교수는 지난달 31일 발행한 160호를 끝으로 '우리집'을 폐간했다. 지난달 29일 정년퇴직한 서 교수가 부인과 단둘이 강원도 산 속에 있는 조촐한 산사에 들어간 까닭이다. 지난 5일 강원도로 떠나기 앞서 부부는 휴대전화와 집 전화를 해지하고 홈페이지와 이메일 계정도 닫았다. 서 교수는 출발 하루 전 기자와 만나 "3년간 산속에 틀어박혀 마음먹고 불교 공부를 할 계획"이라고 했다. 어느 절에 가는지는 두 아들만 안다. 서 교수는 "원래 아이들도 안 가르쳐주려다 짐꾼으로 데려가야 해 어쩔 수 없이 알려줬다"고 했다.
'우리집' 마지막 호에 실린 기사는 지난해 8월 차남 상욱씨 부부가 낳은 손녀 민선이의 돌잔치 소식이다. 상욱씨는 "학창시절 매달 신문을 만들면서 글쓰기 실력이 많이 늘었고, 친구들과 선생님에게 보여주면서 뿌듯해하곤 했다"고 말했다. 상욱씨는 지난해 딸을 낳은 뒤 육아일기 형식으로 독자적인 가족신문을 펴내고 있다. 그는 "'우리집'은 폐간되는 게 아니라, 아버지가 내시던 '1기'에서 우리 형제 세대가 중심이 돼서 만드는 '2기'로 넘어가는 것뿐"이라고 했다. 제호는 '민선이네 우리집'이 될 예정이다.
<출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