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희망을 주는 동기부여

인간의도리인오대덕목(五大德目)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지키자. 태극기, 애국가, 무궁화, 한글 사랑은 애국입니다

조경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

카테고리 없음

"유일하게 자유로이 움직이는 손에서 희망 찾았어요"

대한인 2013. 12. 8. 15:42

 

지체장애 1급 장애인 장승공예가 김윤숙씨
대학 1학년때 불의의 사고 겨드랑이 밑 감각 사라져… 목공예 시작하며 새로운 삶
"켜켜이 쌓인 내면의 슬픔 웃는 장승으로 만들어 恨을 풀고 싶었어요"

경기도 고양시 산황동에 가면 초록빛으로 물든 논 옆에 장승공예가 김윤숙(38)씨의 작업실 겸 침실 겸 사랑방이 있다. 장승과 솟대 위주의 장식용 생활용품을 만드는 '뭐만들까공방'이다.

촘촘히 늘어선 나무로 울타리를 대신한 단층 주택 입구에서 키 1m짜리 장승이 헤벌쭉 웃으며 방문객을 맞이했다. 휠체어를 탄 채 마당으로 쭉 내려오는 김씨의 눈과 입이 장승처럼 활짝 웃었다. "어휴, 금방 찾으셨네"라며 쏟아내는 목소리가 큼직하고 윤이 났다.

김씨는 지체장애 1급 장애인이다. 한양여전(지금의 한양여대) 문예창작과 1학년이던 1992년 2월, 학교 6층 옥상 난간에 걸터앉아 수다를 떨다가 아래로 쿵! 떨어졌다. 흉추, 경추, 요추가 모두 끊기면서 겨드랑이 밑으로 모든 감각이 사라졌다. 평생 누워서 변을 받아내야 한다는 진단을 받았다. 문득 '발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빠져나가는 느낌을 더 이상 만끽할 순 없겠구나'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정작 그는 "병원에 5년간 입원해 있으면서도 장애인이 될 거라곤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언젠간 낫겠지, 언젠간 일어서겠지'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퇴원해 부모님과 언니, 오빠가 함께 사는 집으로 오자 현실은 꽉 막힌 벽처럼 그를 좌절케 했다.

스물다섯을 넘긴 처녀가 부모 앞에서 똥오줌을 못 가렸다.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마침 IMF가 닥치면서 언니, 오빠는 서른이 넘도록 결혼을 못하고 있었다. '나 때문에 못 하나'란 생각이 들었다.

1997년 단돈 2만원만 손에 쥐고 집을 나왔다. 하반신이 마비된 뒤 다리 역할을 하는 낡은 자가용 승용차를 집 삼아 경기도 이천에 있는 장애아동수용시설로 무작정 찾아갔다. 먹여주고 재워달라는 그의 청을 원장이 받아줬다. 비어 있던 창고에 작업실을 차리고 1년 동안 단가 400원짜리 하회탈을 조각해 납품하는 일을 했다. 그렇게 해서 250만원을 모았다.

그는 원래 연극배우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피를 끓게 하는' 연극을 하기 위해 학교를 그만두고 극단에 들어가려던 찰나 사고가 났다. 연극에 대한 열망도 싹 없어졌다. 그의 몸 중에서 유일하게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는 손, 그 손으로 무엇이든 하고 싶었다. 귀금속 가공, 지점토 등 손으로 하는 건 한 번씩 다 해봤다. 그러다 고양 일산직업능력개발센터에서 목공예의 맛을 알게 됐다.

강원도 홍천에서 매년 반 트럭씩 직접 가져 오는 쪽동백나무는 껍질이 눈에 띄게 얇고 결이 고와 김윤숙씨가 장승을 새기는 데 더없이 알맞은 재료가 된다. 김씨가 고양시 산황동에 있는 자신의 공방에서 나무에 장승의 눈과 입을 새기고 있다./김건수 객원기자 kimkahns@chosun.com
"정말 재미있었어요. 미술 과목은 만날 양 아니면 가였는데 나무는 아무리 붙들고 있어도 싫증이 안 났어요. '이거다! 이젠 나무가 내 피를 끓게 하는구나!'란 느낌이 확 들었죠."

대중 속에 살아 숨 쉬는 일본 전통 '고케시 인형'처럼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이면서도 동시대인들에게 사랑받는 나무인형을 만들고 싶었다.

그가 잡은 건 옛날 마을이나 절 입구에 세워져 액운을 막고 수호신 역할을 한 장승이었다. 껍질이 1㎜ 두께로 얇고 결이 고운 쪽동백나무를 벗 삼아 장승을 깎기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장승과 장애인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바람 맞으면서도 그 자릴 꿋꿋이 지키며 방문객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잖아요. 판소리에서 가장 비극적인 부분을 해학으로 승화하듯이 내면의 슬픔을 웃는 장승으로 만들어 한(恨)을 풀고 싶었어요. 분신처럼…."

1998년 250만원 가운데 170만원으로 13㎡(약 4평)짜리 컨테이너박스를 사 일산 탄현의 농지 한 귀퉁이에 놨다. 남은 돈으로 중고 침대와 살림살이를 장만했다. 2만원어치 강냉이와 두유만으로 매달 허기를 달랬고, 추위는 포도주 한 잔으로 삼켰다. 돈이 생기면 조각도와 기계를 샀다.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옮겨오기 전까지 그렇게 5년을 살며 공방을 열었다. 수강생도 17명 받았다.

2002년엔 부산아·태장애인경기대회에 펜싱 플뢰레 종목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외국 선수와 맞붙어 20대0으로 와장창 깨지면서 긴 칼과는 안 맞다 싶어 선수식당 앞에 좌판을 펼치고 자신이 만든 장승 액세서리를 팔았다.

그 사이 목공예기사 2급, 칠기기사 2급, 귀금속가공기사 2급 자격증을 땄고, 전국장애인기능대회 목공예 부문 은상, 지방장애인기능대회 나전칠기 부문 은상을 받았다. 2004년엔 그의 장승이 외국선수들도 참가한 휠체어테니스대회 수상자에게 트로피로 수여됐다. 작년엔 베이징장애인올림픽대회에 장승 휴대전화 고리 800개를 납품해 목돈 1000만원도 만졌다.

지난달 29일까지 서울장애인미술창작스튜디오 갤러리에서 열린 '2009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사람들―제14회 사단법인 한국장애인미술협회전'에는 그의 작품도 전시됐다. 서양화, 한국화, 서예, 공예 등 4개 분야 10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 전시회에서 그의 작품 '해학장승'은 눈길을 끌었다. 키가 30㎝ 안팎인 꼬마 장승 7점이 전시장 한곳을 조르륵 차지하고 서서 입 꼬리를 양쪽 귀까지 바짝 추켜올린 채 얼굴 가득 웃음을 띠고 서 있었다. 보는 사람을 압도하는 전통 장승과 달리 그저 따라 웃고 싶게 만드는 소박한 미소다.

그는 "요즘 나의 꿈은 이웃을 생각하고 나눌 줄 아는 아름다운 '쟁이'가 되는 것"이라고 했다. "남은 인생 신나게 살고 싶어요.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해외 전시도 하고…." 그러면서 그는 "예전엔 거미줄 한가운데 존재하는 여왕거미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거미줄 곳곳에 달라붙은 수많은 거미 중 하나일 뿐임을 깨달았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비워지는 것도 있다"며 웃었다.
 
<출처: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