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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망하게 한 매국녀 민비

대한인 2013. 12. 19. 20:22

<본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민비일 것이라고 추정되는 사진과 상상해서 그린 초상화>

 

민비라는 호칭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데 순수하게 우리 선조들이 붙혀 준 명칭이다. 고종을 세우는데 힘을 실어 준 왕비도 조대비라고 불렀다. 흥선대원군도 명성황후 식으로 따지면 흥선대원왕이라고 불러야 할 것이다. 고종은 광무제라고 불러야 한다.

조선왕조실록은 자세히는 고종, 순종실록이라는 식으로 부르며, 다만 일본인의 개입으로 철종실록까지만 인정하는게 대세다. 명성황후라는 명칭은 살아 생전의 호칭이 아니고 무덤에 쓰는 묘호일 뿐이다.

 

(왜 왕들을 부를 때는 묘호를 쓰는 것일까? 살아 생전 모든 왕들은 유일무이하다라는 뜻에서 단순하게 왕이라고만 불렸다. 그렇기 때문에 붕어 후에 추증되는 묘호로 구분하지 않고는 그 왕이 어느 왕인지 모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묘호를 왕의 호칭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민비는 살아 있을 때에도 민비라고 불렸기 때문에 이미 민씨 성을 가진 비라는 구분을 확실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구지 묘호로 부르지 않아도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조선의 멸망을 크게 앞당긴 민비가 어느 새 조선의 잔다르크가 되어 버렸다. 민비는 조선을 망하게 한 천하의 악녀였다.

민씨가 비가 되자 그 동안 존재하는지 조차도 몰랐던 민씨들이 너도 나도 없이 나타나 민비의 친척이라고 나섰다. 민비는 민씨 성만 가지면 벼슬을 나눠 주면서 조선의 고질적 병페였던 외척세력의 준동을 다시 일으켰다.

 

민비는 왕비로 간택되기 전에는 좌씨춘추전을 읽고 있을 정도로 공부를 열심히 했지만 너무 가난한데도 친척 중 어느 누구 한 명도 돌봐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안동 김씨 60년 외척 준동에 치를 떨던 흥선대원군에게 친척이 없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선택되는 영광을 누린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초상 행렬이 10리에 이른다는 말이 있듯이 민씨가 비가 되자 수 많은 민씨들이 친척이라며 나타났다. 이로써 다시 외척의 준동이 시작되게 된다. 그들의 외척들의 무능은 잘 알려져 있다.

민비는 무당을 궁궐로 초빙해서 모시고 무당의 점괘대로 움직일 정도였는데 신하들은 민비보다 무당에게 더 잘 보이려고 노력했으며, 첫째 아들이 항문이 없는 기형아로 태어나 며칠만에 죽자 둘째 아들을 낳고는 전국에서 국고를 탕진하며 푸닥거리를 벌였다.

 

첫째 아들이 항문이 없는 기형아였는데 여기에는 여러가지 이야기가 전해 온다. 외과수술로 치료할 수 있었는데도 왕자의 몸에 칼을 대는 것을 금했기 때문에 그냥 죽고 말았다는 것으로 흥선대원군이 반대했다는 말도 있으나 흥선대원군이 산삼을 먹였다는 것과 아직은 둘 사이에 갈등이 없었던 시기인 점으로 보아 궁중법규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당시 민비는 경쟁관계에 있던 상궁이 완화군을 낳았다는 소식을 듣자 곧바로 아들낳기를 펼쳐 첫째를 낳았지만 잃고 둘 째인 순종을 낳고는 전국 명산 대찰을 찾아 굿과 기원을 하면서 엄청난 국고를 탕진했다.

가난하게 자란 탓인지 돈을 너무나 밝혔는데 매관매직은 민비의 전매특허였다. 돈을 받고 벼슬자리 임명장을 주고 그가 대궐 문을 나서기도 전에 더 많은 돈을 바친 사람에게 그 벼슬을 내려 같은 날 임관과 해임이 이루어질 정도였다. 같은 종씨가 벼슬자리를 얻기 위해 황금으로 만든 소를 바치자 충성스런 신하라고 할 정도였다.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이 때처럼 매관매직이 극성을 부린 때는 없었고 당연히 돈을 주고 벼슬을 산 벼슬아치들은 본전을 뽑기 위해 고을민들을 수탈하기 일쑤였다. 민비는 당시 조선의 국고를 텅비게 할 정도로 돈을 쓰고 그 것도 부족해서 그토록 가렴주구를 일삼았는데도 그 돈이 어디로 다 사라졌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국세의 몇 배를 거둬 들여도 탕진하기 바쁜 민비는 돈을 더 얻기 위해 개화를 선택하게 된다. 그런데 조선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돈벌이 수단으로 개화를 선택한 것은 크나 큰 조선의 불행이었다. 당시 조선은 국고가 텅 비어 청나라의 차관으로 채웠지만, 이자에 이자가 불어 감당할 수 없어 원세개의 전횡하에 놓이게 된다.

 

결국 수탈을 견디지 못한 농민들이 동학 저항을 일으키게 된다. 이 것은 예고된 것이었다. 당시의 자본은 토지에서 나오는 것으로 지금으로 치면 노동자들에게서 세금을 엄청나게 거둬들이는 격인데 농민들은 민비와 그 일족의 수탈을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동학혁명의 불을 원인을 제공한 고부 군수 조병갑도 민비에게 돈을 주고 관직을 산 자였고, 고부 안핵사로 내려와 진압을 당담했던 장흥부사 이용태도 역시 민비에게 돈을 바치고 관직을 산 자였다. 이에 동학의 불길은 강해졌는데 자신이 돈 받고 판 자들의 수탈로 인해 농민들이 궐기하자 청나라의 병사를 바다 건너에서 불러와 자신의 백성을 죽이도록 하였으며,  만주와 조선을 지배하여 명치유신으로 무역 부채가 발생한 것을 갚는게 좋다는 정한론이 논쟁거리였던 일본의 군대 파견을 정당화 시켜 주고 말았다.

 

청나라 병사의 조선반도 진출은 결국 일본군의 조선 진출을 확대하게 되었고 조선 땅에서 청과 일본이 전쟁을 벌이게 되어 일본이 조선을 놓고 더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는데 매국적 기여를 하게 된다.

이어 민비는 다시 러시아에게 미소를 흘린다. 당시 동북아시아에서는 러시아의 남진이 중국 뿐만 아니라 유럽과 일본에게도 크나 큰 위협이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손을 잡는 형국이었다. 미련한 민비는 권력욕의 화신이 되어 조선이 망할 구덩이를 판 것이다. 이리하여 러일 전쟁이 일어나고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조선은 완전히 일본에게 점점 구속당하게 된다.

민비가 신식군대를 만들기는 했지만 자신의 권력 장악과 유지를 위한 사병에 불과했다. 민비 세력은 어느 쪽으로부터도 지지 받지 못했다. 개화를 반대하며 임오군란에 참가한 군중은 민비를 표적으로 삼았고, 갑신정변을 일으킨 개화파, 민씨 세력의 수탈에 항거한 동학혁명군 모두 민비와 민씨 일파 타도를 외쳤다. 결국 민비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여기 저기 외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동학혁명 진압은 중국 군대에 궁궐 수비는 미국에게 자신의 신변보장은 러시아에게 맡기는 수완을 발휘했지만  자주적 개화와는 거리가 너무나 멀기만 했다.

 

한편으로 민비는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맺어 조선합병의 길을 열게 된다. 민비는 일본의 요구를 모두 수용했다. 그러면서도 끝내는 일본인들의 칼날에 목숨을 잃고 만다.

 

민비의 악행은 고종 32년(1895) 8월 21일 조에 의하면 "내(고종)가 왕위에 오른 지 32년에 정사와 교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데 왕후 민씨가 자기의 가까운 무리들을 끌어들여 나의 주위에 배치하고 나의 총명을 가리우며 백성을 착취하고 나의 정령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고 탐욕과 포악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사직이 아슬아슬하게 위태로워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것을 뒤받침 하는 매천 황현이 쓴 매천야록에도 가까운 무리를 배치하고, 백성을 착취하고, 벼슬을 팔고,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났다는 민란과 동학혁명 등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충청도 청풍 북노리 이면재의 갑오일기에도 민비가 불러 들인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 사이에서 조선이 어떻게 전투에서 승리한 일본에게 조선이 침탈당해 가지는 잘 나와 있다.

 

야사에는 임오군란을 피해 신행으로 가장하여 달아나 한강을 건넌 민비의 가마를 보고 "새색시가 민비인지 여우인지 고년 때문에 고생한다"는 말을 했는데, 민비는 이에 앙심을 품었다. 뒷날 환궁하여 그 여인을 찾아내라고 명하니 죽음 앞이라 모두 시치미를 뗐다. 결국 온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켰다라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청일전쟁 승리후 일본군의 서울 용산에서의 승전 행사>

 

<청일전쟁, 프랑스신문 삽화>

 

 

1875년 8월 -일본 해군 운양호가 강화도 앞바다에서 무력 시위

1876년 2월 -조.일 수호조규(강화도조약) 체결

1882년 6월 -임오군란 발생. 구식 군대, 민비세력 척살하고 일본 공사관 습격, 민비 한강 건너 도망 

1882년 8월 -조.청 상민수륙무역장정 조인

1884년 10월 -갑신정변 발생. 청, 군대 파견하여 개화파와 일본군 진압

1885년 10월 -청의 위안스카이 조선 부임

1892년           - 민비, 충북 제천에 피신 궁궐 월악궁 건설시작

              12월  -동학교도 수천명이 전라도 삼례에 모여 교조 최제우 신원과 탄압 중지 호소

1893년 2월 -동학교도 40여명 서울 광화문에서  상소

              3월 -동학교도 2만여명, 충청도 보은과 전라도 금구에서 집회

1894년 1월 -전봉준 등 전라도 고부민들 고부 관아 점령

              3월 -동학농민군 전라도 고부 백산에서 본격 봉기하고 전봉준은 4대 강령 발표 

              4월 -전라병사 홍계훈을 지휘관으로 진압군 파견

                       동학농민군, 금구.부안 관아 점령. 황토재 전투에서 농민군 승리.

                       흥덕.고창.무장.영광.함평.장성 점령, 장성 전투에서 농민군 승리

                       27일 전주성 점령

                       29일 홍계훈의 청병필요 상소, 영돈령부사 김병시 '자기 백성을 외국군으로 죽일 수 없다'고 반대,

                                 끝내 청에 조선 백성을 죽여 달라고 진압군 파병 요청

              5월 -5일 청나라군 아산만 상륙, 6일 일본군 인천 상륙, 8일 진압군과 농민군 전주화약 합의 

              6월 -21일 일본군 경복궁 점령, 23일 청일전쟁 발발, 26일 일본군 청나라군 멸살

              9월 -일본군, 동학혁명군 학살만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