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용어
언문(諺文): 일반적으로 한글을 지칭하나 한자 외의 다른 나라 문자들을 오랑캐 글이라 하면서 비하해서 부르는 말
전문(篆文): 옛글. 한자에서는 진나라 이전의 한자
운서(韻書): 한자의 중국 표준발음을 표시한 책
운회(韻會): 명나라의 운서
사성(四聲): 육조 수 당나라 시대의 중국어 성조. 고저(장단과 강약). 평성(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入聲)
칠음(七音): 궁(宮) 상(商) 각(角) 치(徵) 우(羽)의 다섯 음(音)과 반치(半徵) 반상(半商) -홍무정음 서문
운(韻): 모음부분 이하. 예)산- ㅅ를 뺀 안(an) 부분. 시조에서 중요시하며 중국본토 발음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기준
운의 예 - 삼(싼)자운
일접상과삼(日接常過三) - 명나라 사신 예겸이 뗀 운
세간과비자 이진덕이삼(世間퉫毘子 利盡德二三) - 정인지
의도별전철 입취사무삼(意到瞥電立就思無三) - 신숙주
반절법(半切法): 한 글자를 읽을 발음기호로 다른 두 글자를 선정해서 각각 절반씩 발음을 가져다 합쳐 읽는 방법. 예) '동', 도종절. 동을 읽을 발음기호로 도와 종을 적고 도에서 ㄷ(d) 발음을 가져오고 종에서 ㅗㅇ(ong) 발음을 가져와 합쳐서 동(dong)이라 읽음
용음(用音): 소리의 운용법. 반절법과 한글조합법
합자(合字): 반절법과 한글조합법(예:ㅇ+ㅗ+ㅏ+ㅇ) 같은 글 조합법
<월인천강지곡>
1. 한글, 창조인가 모방인가?
한글창제에 세종을 빼고 누가 참여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달에 상께서 언문 28자를 친히 제정하였다(是月 上親制諺文二十八字)"라고만 쓰여 있다.(세종실록-세종 25년 12월조)
한글창제 이후 편찬된 훈민정음예의본과 훈민정음해례본(모두 세종28년)에서 훈민정음해례본 집필에는 정인지,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최항, 강희안, 이개, 이선로 등이 참여했다. 석보상절(세종28년)과 월인천강지곡(세종31년)을 수양대군이 관장했다. 용비어천가(세종29년)를 정인지, 안지, 권제 등이 쓰고 성삼문, 박팽년, 이개 등이 주석을 달았다.
운회(韻會)의 번역작업(세종26년)에는 동궁, 진안대군, 안평대군이 관장하여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선로, 이개, 강희안 등이 참여했다.
이로 보아 한글창제에는 정인지(대제학), 신숙주(부수찬), 최항(집현전 교리 정5품), 박팽년(집현전 부교리 종5품), 성삼문, 이선로, 안지, 권제, 이개(집현전 부수찬 종6품), 강희안(돈녕부 주부 종8품) 등이 참여했을 것이다.
언문청과 훈민정음 창제와는 전혀 무관하다. 훈민정음은 세종 25년에 창제되었지만 언문청은 세종 28년에야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글은 집현전을 중심으로 창제되었다고 할 것이다.
"~드디어 언문청(諺文廳)을 설치하여 사적(事迹)을 상고해서 용비시(龍飛詩)를 첨입(添入)하게 하니 ~" ~遂置諺文廳 考事迹 添入 龍飛詩~-세종 28년11월8일
전문(篆文)모방설
我朝自祖宗以來 至誠事大 一遵華制 今當同文同軌之時 創作諺文 有駭觀聽 曰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 若流中國 或有非議之者 豈不有愧於事大慕華 (언문 반대 상소문 중 일부- 세종26년2월20일)
한글 반대 상소문 서명자는 최만리(집현전 부제학:정3품), 신석조(집현전 직제학:종3품), 김문(집현전 직전:정4품), 정창손(집현전 응교:종4품), 하위지(집현전 부교리:종5품), 송처검(집현전 수찬:정6품), 조근(집현전 저작랑:정8품) 등이다.
"설혹 말하기를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본뜬 것이고 새로 된 글자가 아니라' 하지만 글자의 형상은 비록 옛날의 전문(篆文)을 모방하였을지라도 음을 쓰고 글자를 조합하는 것은 모두 옛 것에 반대되니 실로 의거할 데가 없사옵니다."(曰 諺文皆本古字 非新字也 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 盡反於古 實無所據)라는 대목을 가지고 중국의 전문을 모방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상소문의 전체 흐름과 문맥들의 뜻을 살펴보면 오히려 '왜 중국의 한자를 따르거나 모방하지 않고 새로운 오랑캐 글자를 만드느냐?'라고 하고 있다.
"(몽골 서하 여진 일본 서번 등 지방 문자는) 오랑캐의 일이므로 화하(한자)를 써서 오랑캐를 변화시킨다 하였는데 화하(한자)가 오랑캐로 변한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이제 따로 언문(오랑캐 글)을 만드는 것은 중국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와 같아지려는 것으로서"
"신라 설총의 이두는 비록 야비한 이언(俚言)이오나, 모두 중국에서 통행하는 글자를 빌어서 글자 만들어(어조) 사용하였기에, 문자가 원래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므로"
"언문을 시행하여 임시 방편을 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더디고 느릴지라도 중국에서 통용하는 문자를 습득하여 길고 오랜 계책을 삼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할 것입니다."
"어찌 예로부터 시행하던 폐단 없는 글을 고쳐서 따로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를 창조하시나이까."
"하물며 언문(한글=오랑캐 글)은 문자(한자)와 조금도 관련됨이 없고 오로지 시골의 상말을 쓴 것이겠습니까."
"옛 것을 싫어하고 새 것을 좋아하는 것은 고금에 통한 우환이온데, 이번의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 가지 기예에 지나지 못한 것으로서"
이렇듯 최만리 일파는 기본적으로는 한자를 중국발음으로 읽기 위한 발음기호 정비는 찬성했다. 막상 발음기호가 (최만리가 보기에는) 중국의 전문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성질의 문자임을 알고 반발했다.
당시에는 반절법을 이용한 한자음훈표기법을 사용하고 있었기에 이두 조차도 한자의 영역을 벗어 나지 않았지만 세종이 만든 발음기호는 한자에 예속되지 않으면서 발음기호 수준을 뛰어 넘어 완전히 새로운 글자였던 것이다.
그래서 최만리 일파는 한글이 한자를 보조하는 한자를 모방한 발음기호 수준에 머물지 않고 한자의 영역을 벗어나 조선의 독자적인 글이 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상소문을 둘러싸고 정전에서 세종과 최만리 일파가 나눈 대화에서도 확인된다. 최만리 일파는 "설총의 이두는 비록 음이 다르다 하나, 음에 따름과 해석에 있어서 글자 조합(語助)과 문자(한자)가 원래 서로 떨어지지 않사온데, 이제 언문은 여러 글자를 합하여 함께 써서 그 음과 해석이 변한 것이고 글자의 형상이 아닙니다."(세종26년2월20일)라고 한글이 한자와 닮지 않았기에 글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따라서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였다는 뜻은 한글의 자모음의 모양이 비슷하게 보인다는 것이지 고대 한자인 전자(篆字)를 베끼거나 변조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글에 대해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세종실록 세종25년12월30일자 기록에는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고"라고 적고 있으나, 세종28년 9월29일의 훈민정음 어제 서문에서 "물건의 형상을 본떠서 글자는 고전(古篆)을 모방하고"라고 하면서 고전을 모방했다는 것은 물건의 형상을 본딴 것이라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근거는 없지만 다른 시각에서 몇 가지 유추해 볼 수는 있다. 자음과 모음의 구성에 있어서 중국에서 유입된 육서론(문자학), 운성학(발음과 발성), 주역(음양오행론)의 이론들도 살펴 봤을 거라는 점이다.
자음에 있어서는 한글 28자 중에서 9개가 입모양을 본떠 만들었다고 하고 있는데 육서론(6가지 글씨 구분) 가운데 상형문자론에서 자음 구성의 이론적 틀을 얻었을 수도 있다. ("아음 ㄱ(기윽)은 혀뿌리가 목구멍을 막는 모습을 본뜨다" "치음(齒音잇소리) ㅅ(시읏)은 치아의 모습을 본뜨다" "후음(喉音목구멍소리) ㅇ(이응)은 목구멍의 모습을 본뜨다" - 훈민정음 제자해)
제자해에서 밝히고 있는대로 천지인의 삼재 도리를 따라 ' · '는 하늘을, 'ㅡ'는 땅을, 'ㅣ'는 인간을 본떳다고 적고 있다.(이 3개의 기본 모음을 바탕으로 초출자 재출자 등으로 모음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처럼 기본 모음 구성에 있어서는 주역의 음양오행에서 이론과 철학적 의의를 얻었을 것이다.
발음기관 분류에 있어도 오행의 원리에 따라 어금니 소리, 혀 소리, 입술 소리, 칫소리(앞니소리), 목구멍 소리로 다섯 부위로 나눴다. (역시 마찬가지로 자음의 형태는 모음의 확대처럼 모양에 추가적인 모양이 더해지면서 발전했다.)
천지의 도는 음양오행일 뿐이다. ~ 그러므로 사람의 소리도 모두 음양의 이치를 가지고 있건만 사람이 듣고 살펴서 돌아보지 않는다. 天地之道 一陰陽五行而已 ~ 故人之聲音 皆有陰陽之理 顧人不察耳 -훈민정음해례 제자해 서문
또한 세종이 운성학(음운론)에도 식견이 있었고, 4성7음을 기반으로 하고 소리의 맑고 탁함을 논한 것은 오행론적 관점에 더해서 운성학적 관점에서도 접근했다고 할 것이다. 즉 한글창제에 있어서도 중국의 운성학 이론도 참고했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당연히 중국의 것만을 참조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전자(篆字)를 모방했다는 것은 당시에서의 고대 한자를 그대로 옮겨 쓰거나 흉내낸 것이 아니라 이론적 틀을 구성함에 있어서 중국에서 형성된 이론들(원나라 때의 파스파 문자 포함)도 다양한 참고자료로 활용했다고 보는게 더 타당하다.
"전하께서 전해오는 문적을 널리 상고해 각각 고증과 빙거(憑據)를 두어 바른 음에 맞게 하시니, 옛날의 그릇된 습관이 이에 이르러 모두 고쳐진지라."(동국정운 서문)
한편으로 한글을 또 하나의 언문(오랑캐 글)으로 취급하며 거세게 반발하는 신하들을 다독거리기 위해 새로운 글자가 아니라 중국의 고전 문자인 전자(篆字)를 모방했다고 함으로써 무마시키려는 의도도 있었다고 추정된다.
한글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부분에서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 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대체로 동방에 나라가 있은 지가 오래 되지 않은 것이 아니나, 사람이 아직 알지 못하는 도리를 깨달아 이것을 실지로 시행하여 성공시키는 큰 지혜는 대개 오늘날에 기다리고 있을 것인져"라고 말하고 있다.(세종실록 세종28년 9월29일의 훈민정음 어제 서문)
즉 '한글창제는 옛날 것을 모방하지 않고 자연의 이치에 따라 이룬 것으로 새로운 이치를 깨달아 실제로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파스파 문자와 지구라트 문자 모방설
한글이 지구라트 문자와 유사하다는 주장은 거론할 가치조차 없기에 생략한다. (자음과 모음의 구성에서 기본조차 갖추지 못하고 그저 자음과 모음에 상관없이 조금이라도 모양이 비슷하면 한글과 연관지었다.)
파스파문자(八思巴文字)와의 유사설에 있어서도 역시 자모음의 구성원리를 따지면 전혀 연관성이 없다. 모음과 자음에 있어서 한글의 자음모음과 상관없이 어쨌든 몇 개라도 모양새가 같다는 것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몽골이 중국 땅에 세운 원나라 초기에 쓰이던 파스파 문자는 저 멀리 티벳의 문자를 약간씩 변형시켜 수용한 것이다. 건국초기 티벳 승려 파스파가 명령에 따라 제작해 쿠빌라이가 1269년에 배포했으나 널리 쓰이지 않고 사장됐다.
파스파문자는 중국어를 중심으로한 티벳어, 산스크리트어, 투르크어를 발음기호로 표기하는 자음30자와 모음 8자, 9개의 기호로 구성됐다. 이렇듯 어느 정도 효과적인 발음기호 역할을 했지만 독립 문자로서의 역할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한글의 파스파문자 모방설을 주장하는 콜롬비아대 명예교수 게리 레드야드는 1966년부터는 한글이 파스파 문자를 표절했다고 주장해 오고 있다. (파스파 문자가 저 멀리 그리스 문자와도 연관이 있다고 한다.)
'세종 당시 전서(篆書)에 대한 동경을 가지고 있었으며, 파스파 문자와 한글은 모두 전서(篆書)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예로 파스파 문자가 조선시대 1496년까지 통역교육기관인 사역원에서 교재로 사용됐다는 점도 한글이 파스파 문자를 모방했다는 증거로 삼고 있다.
흔히 말하는 전문(篆文)이라는 것은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왕의 명령에 따라 진나라 이전의 고대한자를 수집 정리한 것이다. 사역원에서는 매월 전문(篆文) 시험을 봤다. 전문은 도장 비석 등에도 쓰였고, 전문으로 작성된 책도 인조 때 복원했으며, 연산군은 공사장 인부들의 통행패도 전문으로 새겼다.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후이기는 하지만 사역원의 몽골어 교육에 주로 사용된 교재를 보면 몽골어 원문에 한글로 적어 발음을 익혔다.
하지만 한글이 만들어지기 전 원나라가 망하고 건국된 조선에서 쓰인 발음기호는 반절법이라는 한자음훈표기법이 주류였다는 면에서도 그렇고, 원나라 멸망 후 사역원에서 일시적으로 파스파문자로 몽고어를 익혔다는 주장만으로 한글이 파스파문자를 모방했다는 단정은 설득력이 없다.
역시 몇 개의 한글 자음이 모양과 발음에서 비슷하다고 하여 한글의 파스파문자 모방 주장도 납득하기 힘들다.
함부르크 대학 출신 도멜스는 고금운회거요에서의 자모음이 몽고자모운음과 많이 일치한다는 면에서 명나라 초기에 발간한 홍무정운을 단종 3년에 역훈했다는 것을 들어 한글의 파스파 문자와의 연관설을 말했다.
고금운회거요는 원나라에서 발간됐다. 세종 16년(1434)에 경상도관찰출척사 신인손은 고금운회거요가 사라지고 없다면서 역사자료 확보차원에서 다시 발간해야 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받아 들여져 경주부와 밀양부에서만 간행했다. 동국정운의 참고 자료가 됐다는 면에서 사료적 가치를 지니기는 하지만 중앙관청에서 발행한 것도 아니고 사역원 교재로 쓰인 것도 아니다.
몽골은 이미 멸망했고, 명나라는 중국어 발음 회복에 나선 때라서 세종도 역시 명나라 초기 간행 발음서인 운회를 들여 왔고, 단종은 홍무정운을 들여와 명나라가 정비한 중국어 발음 변화에 호흡을 같이 했다.
도멜스는 이런 상황에 대해 '명나라가 들어 선 이후에도 여전히 몽골식 중국어 발음 교재 때문에 부끄러웠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것을 벗어나기 위해 한글을 창제했다'라고 말했다.
분명하게 결론은 한글은 다양한 자료를 참고하여 이론적 검색과정을 통해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는 것이다.
한글 각 모음이나 자음의 모습에 있서서의 모방논란과 다르게 한글은 세계 문자 역사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계획되어 발명되고 활성화된 문자 창조였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계획적으로 만들어진 문자가 500년 넘게 이어져 민족의 중심 글자가 됐다.
자음과 모음의 분류에 대한 뚜렷한 체계와 그 자모음의 구성에 대한 철학을 처음부터 제시했다는 것은 역사상 모든 문자 발생에 있어서 단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던 사건이다. 중성을 독립시켜 초성과 더불어 제자하는 원리로 인류 최초의 자모문자를 만든 것이다.
<동국정음>
2. 한글 창제는 사대주의인가 나라 사랑인가?
중국어 발음기호
불행하게도 한글 창제의 목적은 한자 읽기에서 중국 본토 발음을 위한 발음기호적 의미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워낙 한글의 능력이 뛰어나 아에 독자적 글자로 자리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國귁之징語 音이
나라 말씀이
(國귁ㅇ 나라히라
국은 나라이라.)
異잉乎 中듕國귁ㅎ야
중국과 달라
(中ㄷ國귁ㅇ 皇 帝ㄷ 겨신 나라히니 우리나랏 常쌍談땀애 江ㄱ南남이라 ㅎㄴ니라.
중국은 황제가 계신 나라이니 우리 나라에서 늘 하는 말에 강남이라 하느니라.)
與영文문字ㅉ로 不ㅂ相ㅅ流ㅉ通통ㅎㅆ
이 문자로 서로 유통하지 못하므로
(文문字ㅉ와로 서르 ㅅㅁ디 아니ㅎㅆ
문자가 서로 같지 아니하니)
故고로 愚民민이 有 所송言 ㅎ야
고로 어리석은 백성이 아뢰고자 하는 말이 있을지라도
(이런 젼ㅊ로 어린 百ㅂ姓ㅅ이 니르고져 ㅎ 배
이런 까닭으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해도)
而 終ㅈ不ㅂ得득伸신其ㄲ情ㅉ者쟝 多당矣ㅇ라
끝내 뜻 펴기를 얻지 못하는 사람이 많으니라
(ㅁㅊ내 제 들 시러 펴디 ㅁㅎ 노미 하니라
마침내 자기 뜻을 실어 펴지 못하느니라)
予영 爲윙此ㅊ憫민然 ㅎ야
내 이에 가여운듯 하여 위하여
(내 이ㄹ 爲윙ㅎ야 어엿비 너겨
내가 이를 위하여 어엿비 여겨)
新신制ㅈ 二十씹八ㅂ字ㅉㅎ노니
새로 만든 스물 여덟 글자라 하노니
(새로 스믈 여ㄷ 字ㅉㄹ ㅁㄱ노니
새롭게 스물 여덟 글자를 만드노니)
欲욕使ㅅ人 ㅇ로 易잉習씹ㅎ야 便ㅃ於 日 用ㅇ耳니라
쓰기를 원하는 사람이 쉽게 익히게 하여 편하게 날마다 사용하게 할 뿐이니라
(사ㄹ마다 ㅎㅊ 수 니겨 날로 메 便ㅃ安 ㅋㅎ고져 ㅎㄹ미니라.
사람마다 하게하여 쉽게 익혀 날마다 쓰기에 편안하게 하고자 함 이니라.) - 월인석보
한음은 중국 소리라. 두는 머리라. 별(別)은 가리는 것이라. 중국 소리의 잇소리는 치두음과 정치음을 분별함이 있나니 이 소리는 우리나라의 소리보다 얇으니 혀의 끝이 윗니 끝에 닿느니라. ~ - 월인석보
<월인석보>
보다시피 의미적으로 한글을 통해 누구나 쉽게 중국 정통 발음을 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글에 있어서는 중국 한자이지만 한자를 읽는 발음에 있어서는 원나라 때 붕괴되어 뒤죽박죽된 결과 중국 정통 발음이 아니라서 어려움이 있었다. 더구나 애초부터 한자를 둘러싸고 조선어와 중국어가 다르니 더욱 힘들었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세워지면서 중국어 정통발음 회복운동이 일어나자 조선도 이런 변화에 대응해야 했다. 세종은 요동으로의 중국어 요원 파견교육을 논의 했으며(세종21년12월4일), 강이관과 별재학관을 증설하면서 학생들에게 생활비를 지급하며 중국어 교육을 독려했다(세종23년8월11일). 명나라 사신 예겸의 방문 때는 통역사 손수산이 운서로 중국어교육 논의를 하고, 정인지와 신숙주는 홍무정운으로 중국어에 대해 담론을 했다(세종32년1월3일).
"소방(小邦)이 멀리 해외에 있어서 바른 음을 질정(質定)하려 하여도 스승이 없어 배울 수 없고, 본국의 음은 처음에 쌍기학사(雙冀學士)에게서 배웠는데, 기(冀) 역시 복건주 사람입니다." (정인지)
"복건 땅의 음이 정히 이 나라(조선)와 같으니 이로써 하는 것이 좋겠소." (예겸) - 세종실록, 세종 32년 1월 3일
세종 26년 2월에 명나라 발음기호 정리 서적인 운회를 한글로 풀어 내고, 세종 29년 11월에는 조선 자체 중국어 발음서인 동국정운을 반포했다.
"옛사람이 글을 짓고 그림을 그려 음으로 고르고 종류로 가르며 정절과 회절로 함에 그 법이 심히 자상하매 배우는 이가 그래도 입을 어물거리고 더듬더듬하여 음을 고르고 운을 맞추기에 어두웠다.
훈민정음이 제작된 이후 만고의 소리가 한 소리처럼 되어 털끝만큼도 틀리지 아니하니 실로 음을 전하는 중심줄이라.
전하께서 전해오는 문적을 널리 상고해 각각 고증과 빙거(憑據)를 두어 바른 음에 맞게 하시니, 옛날의 그릇된 습관이 이에 이르러 모두 고쳐진지라."(동국정운 서문)
(성종 12년에는 동국정운의 치두와 정치 구분이 취약하다는 단점이 지적됐다. "동국정운을 살펴보니, 사(私)와 사(思)는 치두음(齒頭音)이고, 사(師)와 사(獅)는 정치음(正齒音)이여서 합해서 하나의 음이 되고, 비(卑)와 비(悲)는 순중음(脣重音)이고, 비(非)와 비(飛)는 순경음(脣輕音)이어서 합해서 하나의 음이 되며, 방(芳)자는 전청음(全淸音)이고 방(滂)자는 차청음(次淸音)이지만 역시 혼돈되고 분별되지 않아서 권인의 말과 같습니다." 성종실록, 성종12년12월22일)
동국정운의 효과는 매우 뛰어 났다. 정인지가 훈민정음해례에 밝힌 "지혜로운 자는 아침 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안에 배울 수 있다"라는 호언대로 였다.
최만리 일파는 "27자의 언문으로도 족히 세상에 입신할 수 있다면 누가 고심노사하여 성리의 학문을 배우려 하겠습니까?"(세종26년)하고 반발했다. 실제로 세종 28년에는 이과와 이전의 과거시험 과목으로 훈민정음을 추가함으로써 최만리 일파의 우려는 현실화 되는 것으로 보였다.
이조에 전지(傳旨)하기를, "금후로는 이과(吏科)와 이전(吏典)의 취재(取才) 때에는 훈민정음도 아울러 시험해 뽑게 하되, 비록 의미와 이치는 통하지 못하더라도 능히 합자(合字)하는 사람을 뽑게 하라." - 세종 28년 12월26일
예조에서 정문에 의거해서 "일찍이 교지를 받들어서 과거에 있어서 동국정운을 쓰게 되었으나, 아직 인쇄 반포되지 않았으니, 청컨대 옛날에 쓰던 예부운(禮部韻)에 의거하도록 하소서." -단종 원년 12월24일
강제적 훈민정음 사용 확대 추진은 계속되지 못했지만 꾸준히 사용이 증가했다. 세종은 이러한 반발 때문인지 동국정운을 각 도와 성균관, 4부학당에 비치하면서 "본국의 인민들이 속된 운을 익혀서 익숙하게 된지가 오래 됐음으로 갑자기 고칠 수 없으니, 억지로 가르치지 말고 배우는 자로 하여금 의사에 따라 하게 하라"고 하교했다.(세종 30년 10월17일)
송사 문서의 개선
행정 사법 체계에 있어서 관리계층의 한자와 당시 글이 없던 민중이 쓰는 언어가 달라서 발생한 폐단을 없애겠다는 것이다.
한자로 문서 작업을 하고 하위 관리직 문서 문자로 이두를 사용하고 있지만 심리과정과 판결에 대해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사또의 부조리한 판결이라도 억울해도 그대로 받아 들일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판결을 내리는 관리조차도 사건의 곡절을 이해하지 못했다.
"옛날에 신라의 설총(薛聰)이 처음으로 이두(吏讀)를 만들어 관부(官府)와 민간에서 지금까지 이를 행하고 있지마는, 그러나 모두 글자를 빌려서 쓰기 때문에 혹은 간삽(艱澁)하고 혹은 질색(窒塞)하여, 다만 비루하여 근거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언어의 사이에서도 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다. ~ 그런 까닭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이를 이해하고,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 만에 배울 수 있게 된다. 이로써 글을 해석하면 그 뜻을 알 수가 있으며, 이로써 송사(訟事)를 청단(聽斷)하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가 있게 된다." - 훈민정음 서문, 정인지
재판 과정에서 이두문자를 통해 한자와 민중을 연결시키고 있었지만 이두의 비효율성은 사건의 핵심에 대한 이해는 커녕 이두문자로 작성한 서류마저 그 뜻을 알기 힘들었기에 개선책으로서 훈민정음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최만리 일파는 상소문에서 이러한 뜻이 부당하다고 했다. "예로부터 중국은 말과 글이 같아도 옥송(獄訟) 사이에 원왕(?枉)한 것이 심히 많습니다. ~ 이것은 형옥(刑獄)의 공평하고 공평하지 못함이 옥리(獄吏)의 어떠하냐에 있고, 말과 문자의 같고 같지 않음에 있지 않은 것을 알 수 있으니, 언문으로써 옥사를 공평하게 한다는 것은 신 등은 그 옳은 줄을 알 수 없사옵니다"라고 하고 있다.(세종26년2월20일)
이 부분에 있어서 최만리 일파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그러함에도 주장의 본래 목적이 한글의 폐지에 있었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유교이념 충효의 전파
"삼강행실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서울과 지방의 양반 사대부의 가장 마을대표 또는 가르칠 만한 사람들로 하여금 부녀자 어린이들을 가르쳐 이해하게 하고~" -경국대전
성종은 언문삼강행실도, 언문열녀도, 언문효경, 언문내훈 등을 통치이념의 확대를 위해 널리 펴냈다. 기존에는 이두문자를 사용하거나 관리를 현장에 동원해 말로 전달해서 통치이념을 전파 시키는 방식을 개선하겠다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이제는 어려운 한자를 공부할 수 있을만큼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는 일반인들에게 쉬운 한글을 가르쳐서 한글로 쓴 통치이념 서적들을 읽게 하여 자발적으로 받아 들이도록 했다는 점에서 새로운 역사적 사건이라고 할 것이다.
세종 13년에 발간된 삼강행실도는 한자어였지만, 한글 삼강행실도 발간을 둘러싸고도 최만리 일파와 세종간의 설전이 벌어 진다.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 효자 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다."(세종)
"삼강행실을 반포한 후에 충신 효자 열녀의 무리가 나옴을 볼 수 없는 것은, 사람이 행하고 행하지 않는 것이 사람의 자질 여하에 있기 때문입니다. 어찌 꼭 언문으로 번역한 후에야 사람이 모두 본받을 것입니까."(정창손)
"이따위 말이 어찌 선비의 이치를 아는 말이겠느냐. 아무짝에도 쓸데 없는 용속(庸俗)한 선비이다."(세종) -세종실록, 세종26년2월20일
3. 한글의 수난
왕대비가 성종의 효성을 칭찬하는 글을 한글로 썼다. "왕대비가 행장수찬(行狀修撰)에서 언서(諺書)를 내렸는데, 한문으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연산군 1년 1월 2일
그러다 연산군 10년7월19일에 한글로 된 익명서 사건이 발단이 되어 한글은 대수난을 겪게 된다. 연산군은 다음날 20일에 한글 사용 금지령을 내리고 22일에는 일체의 언문이 적혀 있는 책을 불사르도록 했다.
전교하기를 "어제 예궐하였던 정부 금부의 당상을 부르라. 또 앞으로는 언문을 가르치지도 말고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하며, 모든 언문을 아는 자를 한성의 5부로 하여금 적발하여 고하게 하되,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이웃 사람을 아울러 죄주라. 어제 죄인을 잡는 절목(節目)을 성 안에는 이미 통유(通諭)하였거니와, 성 밖 및 외방에도 통유하라." - 연산군 10년 7월20일
전교하기를 "언문을 쓰는 자는 기훼제서율(棄毁制書律)로, 알고도 고하지 않는 자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 논단하고, 조사(朝士)의 집에 있는 언문으로 구결을 단 책은 다 불사르되, 한어(漢語)를 언문으로 번역한 따위는 금하지 말라." - 연산군 10년 7월22일
전교하기를 "경외(京外)의 언문 및 한자를 아는 자로 하여금 각각 한자·언문 4통을 쓰게 하여 책을 만들어서, 그 하나는 의정부에, 하나는 사헌부에, 하나는 승정원에 두고, 하나는 대내에 들여서 뒷날의 상고에 갖추라." - 연산군 10년 7월25일
(연산군 10년7월25일의 조치는 한글기록을 보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요즘 표현으로 하면 필적감정을 위한 지시였다. 아에 언문을 아는 사람들로부터 글을 미리 받아 놓고 다시 언문서 사건같은 것이 발생하면 필적을 비교해서 색출하겠다는 것이었다.)
광종 1년 9월 4일에는 언문청이 해체되었다.
4. 그래도 널리 쓰인 한글
대국민 교지와 공고문과 포고문 등은 한글과 한문으로 동시에 작성 했으며,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구황촬요 등 민간생활에 유용해서 직접 국민에게 전파해야 할 서적들은 한글로도 출판됐다.
이처럼 왕실을 비롯해 관리들 뿐만 아니라 일반에서도 꾸준히 한글을 사용했다. 아래는 왕실에서 보낸 한글 편지들이다.
"글을 보고도 더딘 것은 그 방이 [너의 역질 하던 방] 어둡고 날씨도 음[陰]하니 햇빛이 돌아 들거든 내 친히 보고 자세히 기별하마. 대강 약을 쓸 일이 있어도 의관의녀를 들여 대령하려 하노라. 분별 말라. 자연 아니 좋아지랴. 만력 31년(선조 36년) 11월19일 사시" - 선조가 정숙 옹주에게 보낸 편지
"명안공주방 전, 밤사이 평안 하옵시니잇가. 나가실제 내일 들어 오옵소서 하였삽더니 해창위를 만나 못떠나 하옵시니잇가. 아무리 섭하옵셔도 내일 부디 들어 오옵소서." - 숙종이 어머니 명성왕후에게 보내는 편지, 1680년경. 해창위:명안공주의 남편 오태주
"답상장. 장정승 댁. 신새해 기운이나 평안하옵신가 궁금하며 사신이 들어 오올제 쓰신 편지 보고 친히 뵙사오는듯 아무렇다 없사오며 청음은 저리 늙으시니 들어와 곤고 하시니 그런 (딱한) 일(이) 없사오이다. 행차 바쁘고 잠깐 적사오니다. 신사(인조 19년) 정월 초팔일 호" - 효종이 봉림대군 시절 심양에 볼모로 가서 장모에게 쓴 답장. 청음: 김상헌
"글을 보니 무양하게 있으니 기뻐하며 보는듯 반가와 하노라. 사연도 보고 못내 웃으며 아무리 그만큼 하여 두면 쓰랴 한들 임자 없는 일에 뉘라서 애써 할리가 있으리. 옷감? 지금 못 얻었으니 그것이 되기가 어려울까 싶으니 하죄오지나 마라. - 숙경이는 내일 나가게 하였으니 그것조차 마저 나가면 더욱 적막할까 싶으니 가지.. 마음을 평치 못할까 싶구나. 언제 너희가 들어 올까 눈이 감기게 기다리고 있노라." - 인선왕후(효종의 비)가 결혼해 분가한 둘째 딸 숙명공주에게 보낸 편지. 한글 편지가 70여편이나 된다. (- 표시와 .. 표시는 원문에 나오는 기호다. 그 시절에 벌써 - 기호와 .. 기호를 썼다는 것도 흥미롭다.)
"숙모님께. 상풍에 기후평안 하오신지 문안 알기를 바라오며, 뵌지 오래오니 섭하고 그립사와 하옵다가 어제 봉서 보옵고 반갑사와 하오며, 할아버님 께서도 평안하오시다 하오니 기쁘기 한없나이다. 손자" - 정조가 원손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문안 편지. 8살 이전에 보낸 것으로 추정됨.
"그새 망극한 일을 어찌 만리 외에 짧은 편지로 말하오리까. 마누라 께서는 하늘이 도우셔서 돌아가셨거니와 나야 어찌 살아서 돌아가기를 바라오리까. 날이 오래 되니 옥도가 엄정하시고 태평하시고, 상감과 자전의 안부 모두 태평하시고, 동궁마마 내외 편안히 지내기를 두 손 모아 빌고 또 비옵니다. 나는 다시 살아 돌아가지는 못하고 만리 밖 고혼이 되니 우리 집안 대 잇는 일이야 양전에서 어련히 보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다시 뵙지도 못하고 세상이 오래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으니 지필을 대하여 한심하옵니다. 내내 태평히 지내시기를 바라옵니다. 보정부 시월 십이일" - 흥선대원군이 청국에서 부인에게 보낸 편지.
"거년의 소식 들은 후 궁금하여 매양 말하고 있었더니 설 태평히 하오신가 싶으니 기쁘며 예서도 지내오던 생각이 지난 때에 미치면 이 몸이 없어지고자 하는 말씀을 한 붓으로 다하기 어렵사옵니다. 요사이는 성후(왕) 두루 평안하시고 예후(왕세자) 걸음걸이는 끝내 불편하시오나 (그 외) 세자들 평안하오시니 축하드리옵니다. 나는 신병이 성한 날이 없사오며 내내 지리하여 대강 적사옵나이다. 정월 이십삼일" - 깊은 병이 든 순명효 황후가 위관 김상덕에게 보낸 편지. 순명효는 이 편지 후 요절했다.
한글 창제의 가치론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말은 있으나 독자적인 글이 없는 민족은 국가 생존 경쟁에서 도태되어 사라진 것을 수 없이 보아 왔다. 입으로 전해지는 지식전달의 한계성은 명확한 것이고, 독자적인 문자로 전달되는 정보에는 정보의 손실방지와 더불어 그 나라 말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정서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 문화적 부흥 뿐만 아니라 공통체 의식을 굳건히 해줌으로써 생존력까지 향상시켜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