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남전서 꽃피운 海兵. 고 이인호 해병대수색대 소령
1931. 7. o2 o경북 청도군 청도읍 고수동 386번지에서 출생 1951. 7. 17 o대륜중학교 제7회 졸업 1953. 3. 23 o대륜고등학교 제2회 졸업 1953. 4. o5 o해군사관학교 입학(재학 중 럭비 선수로 활약) 1957. 4. 10o 해군사관학교 제11기 졸업, 해병 소위 임관 1959.oooooo미 해군 상륙전학교(上陸戰學敎)수료 1964.ooooo 육군 공수특전교육 수료, 해병 제1상륙사단 수색중 대장으로 보직 1966. ooooo해병대 청룡부대 제3대대 정보참모로 월남전 참전 1966. 8. 11o 월남전 해풍작전 중 투이오아지구 밀레마을 전투에서 동굴 수색 작전때 부하를 구하려고 적의 수류탄을 덮쳐 안고 산회. 태극무공 훈장, 미 은성무공 훈장, 월남엽성 훈장 추서. 1966.12. 19 대륜고등학교 교정에 기념비 건립 (비문은 모교 은사 손종섭 선생 지음) 1967. 2. 22o 충무회 및 해군·해병 장교와 진해 시민의 성금으로 해군사관학교 정문에 동상 건립(조각가는 홍익대 교수 김정숙) 1977. 8. 11 o전사일자인 8월 11일을 맞아 추모제인 '인호제'와, 해사 생도 및 해군·해병장교 중 타의 귀감이 되고 희생정신이 투철한 장교 7명에게 '인호상'을 수여 파도 높은 동해에서 이인호는 4년간의 사관생도 생활을, 럭비 선수로 활약하면서 활기차게 보내고, 졸업과 동시 해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해사를 졸업하면서 그는 해병대를 택했다. 이인호 사관 후보생이해병대를 택하기로 결심한 것은 해군사관학교가 전통적으로 실시해오는 4학년 생도들의 원양훈련(遠洋訓練) 때다. 원양함대를 타고 동해안의 여러 항구를 둘러보던 그는 해병이 되기로 결심했다. 해병이 되어 북한땅 어디엔가 상륙해 쳐들어가는 최선봉이 돼야겠다고 굳게 마음먹었다. 사나이 중의 사나이 수색중대장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는 해병대를 택했고, 서해지구에서 2년간 해병대의 소대장으로 복무하고 난 후, 1959년도에는 미 해군의 상륙전학교에 유학했다. 그리고 1963년, 해병대위로 진급한 그는 해병 상륙사단의 수색 중대장이 되었다.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알려진 수색 중대를 지휘하게 된 이인호 대위는 대원들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용광로 속에 집어 넣는 각오로 맹훈련을 거듭했다. 해병 상륙사단의 수색중대가 수행하게 되는 임무는 화약통을 걸머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다름없다. 해병 상륙부대가 상륙하기 전에 먼저 적진으로 뚫고 들어가서 적의 상황을 샅샅이 정찰하는 임무이기 때문에 언제나 적을 먼저 죽이지 않으면 내가 죽어야 하는 막다른 고비를 겪게 되는 것이다. 이인호 대위는 이 막중한 수색 중대장의 임무를 좀더 자신있게 수행하기 위해, 육군의 공수특전 교육을 자원했다. 낙하산으로 적진에 뛰어드는 경우를 생각해서였다. 해병이라 해서 곡 해안선의 개펄로만 상륙하라는 법은 없다. 때로는 낙하산으로 적의 후방에 침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그래서 1964년, 공수특전단에 입대한 이 대위는 격리지역 침투 훈련 (공중침투 특수훈련)을 받았다. 특전 부대원은 혼자서 1개 분대 또는 1개 소대와 맞먹는 전투 능력을 갖춰야하기 때문에, 낙하산 훈련과 폭파 기술을 비롯하여 모든 소화기(小火器) 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기술, 1분에 60자 이상을 칠 수 있는 무전기술, 자기 몸에 박힌 총알쯤은 뽑아낼 수 있는 의료 기술, 식량이 떨어진 상황에서의 생존훈련 등을 익혀야 한다. 군대에는 병과도 많고 부대도 많지만, 한 사람에게 여러 가지 전투 기술을 골고루 훈련시키는 부대는 공수특전단밖에 없다. 그는 해병 상륙부대의 최선두에 나서는 수색중대의 임무를 누구보다도 보람차게 수행하기 위해서 자진해서 이 고되고 어려운 훈련을 받았다. '한번 해병이면, 영원한 해병이다!'는 구호처럼, 예나 지금이나 해병대원들은 군복을 벗어도 해병이었던 것을 자랑삼고 있다. 그만큼 긍지 높은 해병대 중에서도 수색 중대장의 중요한 책임을 맡은 이인호 대위는 수색 중대를 아주 엄격한 규율로 지휘했다. 규율에 어긋나면 그 누구든 용서하는 법이 없었고, 그것은 부하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신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다음의 일화는 그의 이러한 인품을 잘 드러내고 있다. 엄격하고도 자상한 중대장 영일만의 바닷바람이 몹시 차가운 어느 겨울이었다. 기상 시간 전의 새별, 중대장 숙소 옆의 변소를 찾았을 때, 어둠 속에서 수하하는 보초의 목소리에 암호를 대며 경례를 받는 순간 그는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오른손을 바지 호주머니에 넣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중대원들에게 엄히 금지시키고 있는 것 중의 하나였다. 이른 새벽이라 아무도 보지 않았지만, 그는 스스로 부끄럽게 생각하여 그날로 모든 군복 바지의 호주머니를 꿰매버리고 말았다. 이토록 엄격하면서도 중대원의 신상에 대해서는 혈육에 못지 않은 정을 보이기도 했다. 한번은 한 사병이 부친의 갑작스런 병으로 외출 시간을 어기자, 그에게는 벌을 주면서도 그 가족에 대해서는 편지로 문병을 했다고 한다. 한 마디로 지극히 부하를 아끼고 사랑하는 중대장이었다. 고 이인호 소령 기념비 제막식 (옛 대륜교정, 1966. 12. 19) 청룡부대 지망, 월남전으로 1965년 6월 14일, 오랜 공산 침략에 시달린 자유 월남은 우리 대한민국에 도움을 요청했다. 한국 정부는 국군을 파견하기로 결정했고 해병대는 월남으로 보낼 1진 장병을 선발했는데 이 영예로운 제1전에 뽑힌 부대는 해병 제2여단, 곧 청룡부대였다. 이인호 대위는 여러 장교들과 더불어 청룡부대를 지망했다. 그가 배속된 부대는 청룡부대의 제3대대였으며, 직책은 정보 장교였다. 부대장이 정말 신임하는 장교가 아니고는 맡기지 못하는 매우 중요한 직책인 것이다. 1965년 10월 3일, 청룡부대는 고된 훈련을 끝내고 높푸른 가을 하늘을 뒤로 하고 고국을 떠났다. 남지나해의 거센 물결을 헤치며 항해한 지 6일만인 10월 8일 오전 7시, 마침내 자유 월남의 캄란 만에 도착했다. 태극기와 청료의 깃발을 휘날리며 월남땅에 첫발을 디딘 5천여 청룡용사들은 캄란 만과 투이호아에 이르는 해안지대와 밀림지대를 맡았다. 이인호 대위가 소속된 제3대대는 주로 투이호아의 남쪽 일대에 걸친 밀림지대 에서 베트콩을 소탕해 나갔다. 이 부대의 임무는 베트콩 소탕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놈들에게 시달리고 있는 월남 양민들을 보호하는 데에도 있었다. 이 양민 보호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양민과 베트콩이 섞여 있고 또 등뒤에서 갑자기 총을 쏘기도 해 매우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다. 어린소녀 구출 "다이한 깜온옹!" 어느날, 이 대위는 1개소대의 수색대를 지휘하여 붕로만쪽으로 출동했다.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한낮에 밀림 어귀에서 30여 명의 피난민들을 발견했다. 피난민 중의 어린 소녀 하나가 제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에게 무언가 졸라대고 있는 모습이 이 대위의 눈에 들어왔다. 몹시 목이 타는 지 입을 벌리고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여인이 쓰고 있던 갓을 벗어들고 둑밑으로 달려가 흙탕물을 떠와 소녀에게 먹이려 했다. 잠깐!"하고 소리치며 이 대위가 몸을 일으켰다. 피난민들이 일제히 움찔하며 둑 위를 쳐다보았다. 이 대위는 수통을 뽑아 사병에게 건네주었다. 내려가서 물을 먹이도록 했다. 그리고 1분대장에게 무전을 쳐 여단본부로 후송하도록 지시했다. 둑 밑으로 내려간 3명의 사병들이 자기들 수통까지 피난민들에게 나누어주자, 말이 통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은 연신 허리를 굽실거리며, "깜온옹! 깜온옹!" 했다. 고맙다는 뜻의 이월남어가 참 듣기 좋았고, 특히 그 소녀가 물을 마시고 생긋이 웃으며 한 '깜온옹'은 너무나 천진스럽고 귀여웠다. 고국에 두고온 7살 난 딸과 4살짜리 아들의 얼굴이 문득 떠올랐다. 이 대위는 둑 밑으로 내려가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C레이션 한 봉지를 손에 쥐어 주었다. 소녀는 처음 보는 것인지 눈망울만 깜박거렸다. 이 대위는 봉지를 뜯어 비스킷 한개를 입에 넣어 주었다. 소녀가 맛있게 먹기 시작하자, 지켜보던 피난민들 모두가 군침을 삼켰다. 이 대위가 둑 위로 손짓을 하자, 수색대원들이 우르르 몰려 내려와 C레이션을 뜯어 나누어주었다. "다이한 깜온옹!" "다이한 깜온옹!" 해군사관학교 정문에 서있는 이인호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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