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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월주의 임명과 세기

대한인 2013. 12. 24. 04:24

『화랑세기』를 보면 풍월주와 부제를 임명한 세력들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한 이해는 화랑도의 성격을 밝히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한 세력은 시간이 지나며 변동된 것도 보인다.

1세 풍월주 위화랑은 진흥왕이 즉위한 540년에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임명하였다. 2세 풍월주 미진부도 지소태후에 의하여 임명되었다. 3세 풍월주 모랑 또한 지소태후가 임명하였다. 4세 풍월주 이화랑(이화공)은 12살에 모랑공의 부제가 되었다. 지소태후는 이화랑을 매우 사랑하였다. 555년 모랑이 비사벌에 여행하다가 병을 얻어 길에서 죽었다. 낭도들이 "위(화랑)공의 아들이 앉지 않으면 누가 앉겠습니까?" 하여, 지소태후가 이에 명하여 이화공을 4세 풍월주로 삼았다. 이화공이 왕의 총애를 받아 낭도에 대하여 싫증이 나자 사다함5세 풍월주로 삼았다. 6세 풍월주는 지소태후와 태종공(이사부) 사이에 출생한 세종이었다. 6세 풍월주 세종은 부제를 거치지 않고 풍월주가 되었다. 그것은 사다함, 미실, 이화공의 합작 결과 가능하였다.

지소태후 다음으로 풍월주 임명에 힘을 발휘한 사람은 미실이었다. 미실은 원래 세종의 부인이 되었다. 7세 풍월주 설화랑(설원랑)부터 풍월주는 미실의 힘으로 임명되었다. 8세 풍월주 문노는 진지왕을 폐위한 공으로 아찬의 관위를 받았고, 비로소 미실에게 총애를 받아 선화의 위에 올라 풍월주가 되었다. 9세 풍월주 비보랑은 문노에게 나아가 검을 배우고 가장 뛰어난 제자가 되었다. 그는 문노를 힘써 보좌하여 그 공으로 부제가 되었다. 10세 풍월주 미생은 미실의 동생이었다. 미실은 그의 아들 하종을 풍월주로 삼기 위하여 미생에게 하종을 부제로 삼도록 하였던 것이다. 12세 풍월주 보리공의 임명 또한 미실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13세 풍월주 용춘공은 25대 진지왕과 지도태후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용춘공이 보리공의 부제가 된 것은 만호태후 때문이었다. 그리고 풍월주가 된 것은 그의 손위 누이 용명공주가 26대 진평왕을 섬겨 총애가 있었기에 용춘공의 처지를 열심히 도와 풍월주의 지위를 얻게 한 때문이었다.

14세 풍월주 호림공의 누이 마야부인은 그 때 진평왕의 황후로서 총애를 받았으므로 용춘공이 그를 발탁하여 부제로 삼았다. 용춘공이 물러나자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에 올랐다. 15세 풍월주 유신공은 12세 풍월주 보리공의 부제가 되었던 서현랑의 아들이다. 가야파가 유신공을 받들었다.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를 물러날 때 보종공이 유신공에게 중망이있다고 하여 지위를 양보하였다. 이는 대개 미실궁주가 만호태후를 위로하기 위하여 명한 것이라고 한다.

16세 풍월주 보종공의 임명에 대한 기록은 없다. 그러나 그가 미실과 설화랑(설원랑)의 아들이었던 점은 풍월주가 되는 조건으로 충분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보종공은 유신공의 부제로서 풍월주가 되었던 것이다. 17세 풍월주 염장공은 보종공의 부제로 풍월주가 되었다. 18세 풍월주 춘추공은 후일 왕위에 올랐다. 그는 유신공의 부제가 되었는데 보종공과 염장공에게 지위를 양보하여 기다렸다가 24살의 나이에 풍월주가 되었다. 19세 풍월주 흠순공은 유신공의 동생이다. 그는 처음에 염장공의 부제가 되었는데 유신공의 명으로 춘추공에게 풍월주의 지위를 양보하였다. 춘추공이 양위하자 흠순공이 풍월주의 지위에 올랐다. 예원공을 부제로 삼았다. 20세 풍월주 예원공은 보리공의 아들이었다. 예원공 또한 염장공과 같이 부제가 되기 전에 전방화랑을 거쳤다. 21세 풍월주 선품공은 예원공을 따라 화랑도에 들어갔고, 그의 부제가 되었다. 예원공이 누이 보룡을 처로 삼게 하여,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22세 양도공은 염장공을 따라 12살의 나이에 화랑이 되었다. 흠순공 때에 예원공에게 속하였는데, 선품공이 풍월주가 되자 예원공의 명으로 부제가 되어 선품공을 섬겼다. 선품공이 4년만에 풍월주의 지위를 양도공에게 넘겨주었다. 23세 풍월주 군관공은 어려서부터 양도공을 따랐다. 24세 풍월주 천광공은 흠순공이 풍월주로 있을 때(629-632) 화랑이 되었다. 25세 풍월주 춘장공은 천광공의 부제로서 그 지위에 올랐다. 26세 풍월주 진공은 춘장공의 부제로서 그 자리에 올랐다. 27세 풍월주 흠돌은 진공의 부제를 지내고 풍월주가 되었다.

28세 풍월주 오기공은 흠돌의 부제였다. 오기공이 흠돌의 부제가 된 사정은 『화랑세기』에 나오고 있다. 오기공 대(664-667)에 화랑도의 낭정은 진공·흠돌·흥원 등에 의하여 장악되었고, 낭정이 어지러워져 바로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29세 풍월주 원선공은 오기공의 부제였다. 원선공의 아버지는 유신공의 동생인 19세 풍월주 흠순공이었다. 30세 풍월주 천관은 23세 풍월주 군관공의 본처에게서 적자로 출생하였다. 31세 풍월주 흠언은 흠돌의 아들이었다. 흠언은 흥원의 조카로 흥원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화주로 삼았다. 32세 풍월주 신공은 진공의 아들이었고 흠돌의 조카로서 또한 흥원의 딸을 처로 맞아 화주로 삼았다. 26세 진공, 27세 흠돌, 30세 천관, 31세 흠언, 32세 신공은 모두 중복된 혼인관계를 유지하며 사병을 가졌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이 신문왕이 즉위하자 반란을 일으켰다.

풍월주의 임명과 관련한 부제, 화주 그리고 임명세력에 대한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여 표로 제시할 수 있다.


풍월주는 540년에서 681년까지 화랑도의 우두머리로 존재하였다. 32명 풍월주와 그의 부제에 대한 임명의 특징을 보면 이 기간 동안 몇 단계의 변화를 겪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첫째, 지소태후가 풍월주와 부제를 임명한 시기가 있었다. 1세 풍월주 위화랑에서 6세 풍월주 세종까지는 분명 지소태후가 그 임명의 중심에 있었다.

둘째, 미실이 풍월주와 부제를 임명한 시기가 있었다. 6세 풍월주 세종(561-568, 571)의 임명에 미실의 힘이 작용한 바 있다. 그리고 571년 세종의 풍월주 퇴임은 분명 미실의 요구에 따른 것이었다. 7세 풍월주 설화랑(572~579)에서 16세 풍월주 보종(?~621)까지는 미실의 영향권 하에 있었다. 미실은 비보랑공을 위로하기 위하여 그가 추천한 자를 많이 뽑았다고 한다. 보리공·서현공·용춘공 등이 모두 비보랑이 추천한 사람들이었다.

셋째, 전임 풍월주인 상선에 의하여 신임 풍월주가 임명된 것을 볼 수 있다. 8세 풍월주 문노가 비보랑을 부제로 삼아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준 바 있다. 그리고 9세 풍월주 비보랑은 문노의 명으로 부제 미생에게 양위하였다. 13세 풍월주 용춘공은 호림공을 부제로 발탁하였다. 그것은 호림공의 누이가 진평왕의 왕비인 마야부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상선이 풍월주와 부제 임명을 결정하는 일은 그 후에 더욱 빈번하여졌다. 19세 흠순공은 원래 17세 풍월주 염장공의 부제가 되었는데 유신공의 명으로 그 지위를 춘추공에게 양보하였다. 원래는 18세 풍월주가 되었어야 하였던 흠순공은 그 때문에 19세 풍월주가 되었다.

넷째, 상선의 처첩의 혈족을 풍월주와 부제로 임명하는 등 얽히고설킨 인척관계에 있는 자들을 임명하는 단계가 있다. 22세 양도공은 퇴임후 23세 군관공(640-643)에게 천광을 부제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천광은 양도공의 첩인 천운의 동생이었다. 양도공은 천운의 어머니 천장의 은혜를 갚고자 천광을 부제로 삼도록 하였던 것이다. 양도공은 24세 천광공에게 하장의 아우 춘장을 부제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25세 풍월주 춘장공(647-652)은 천광공의 누이 천봉낭주를 아내로 맞아 화주로 삼았다. 춘장공의 부제 진공은 천광공의 애첩 진수의 아우였다. 당시 낭정은 한결같이 천광의 명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한다. 이 때는 낭정이 무너지기 전 단계였다.

다섯째, 26세 풍월주 진공(652~656)에서 32세 풍월주 신공(681)까지는 낭정이 무너졌기에 바로 잡을 수 없게 된 때였다. 물론 이 때 예원공의 아들이고 김대문의 아버지인 28세 풍월주 오기공(662-664)과 흠순공의 아들인 29세 풍월주 원선공(664-667)도 있었으나 그들로서는 한번 무너진 낭정을 바로 잡을 수 없었다. 이 시기는 26세 진공과 27세 흠돌 그리고 흠돌의 부제 흥원이 작당하였고 흠돌의 사위인 30세 풍월주 천관, 흠돌의 아들인 31세 풍월주 흠언, 진공의 아들인 32세 풍월주 신공이 낭정을 장악하였다. 그 결과는 흠돌을 중심으로 한 반란으로 나타났고, 결국 화랑도의 우두머리였던 풍월주의 자리는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