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적에 들어 있던 많은 화랑도들을 거느리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였다. 실제로 신라의 화랑도는 잘 짜여진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화랑세기』를 통하여 그러한 사정을 알게 되었다. 화랑도 조직이 한번에 완성된 것은 아니었다. 화랑도 조직은 점차 발전하여 나갔다. 당시 화랑도는 화랑·낭두·낭도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화랑도와 관련된 여자로서 화주·봉화·유화 등이 있었다. 이들 집단은 낭문(郎門)을 구성하였다.
화랑도 조직은 일시에 편성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화랑도 조직의 발전에 대하여 볼 필요가 있다.
첫째, 풍월주가 설치되기 이전에는 원화를 우두머리로 하는 집단이 있었다. 그들을 화랑도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당시에는 원화가 우두머리였기 때문이다. 원화를 우두머리로 한 무리는 선도(仙徒)라 하였다. 이러한 선도는 그 규모가 크지 않았다. 원래 원화는 한 명이었다. 한 가지 더 알 수 있는 사실은 원화를 우두머리로 하던 시기에도 낭도를 거느린 화랑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진흥왕 원년(540) 풍월주를 설치하였을 때의 화랑도 조직을 볼 수 있다. 이 때 원화는 사라졌고, 풍월주가 화랑도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당시 여러 명의 화랑이 각기 낭도를 거느렸다. 풍월주 밑에는 부제(副弟)가 설치되었다.
셋째, 동시에 여러 명의 화랑이 존재하게 되며 화랑도는 새로운 조직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늘어난 화랑도는 점차 파가 나뉘게 되었다. 7세 풍월주 설화랑(설원랑) 조에는 문노일파가 설화랑에게 불복하고 일문을 스스로 세웠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문노의 낭도는 '호국선(護國仙)'이라 하였고, 설화랑의 낭도는 '운상인(雲上人)'이라고 하였다. 화랑과 낭도로 이루어진 화랑도의 형성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넷째, 8세 풍월주 문노 때에 화랑도 제도가 정비된 것을 알 수 있다. 문노 때 설치된 낭도부곡은 풍월주와 부제 밑의 화랑들에 대한 조직편성이었다. 당시 화랑도를 크게 3부로 나누어 각기 맡은 바 일을 달리 하도록 했다. 국선이었던 문노가 풍월주가 됨으로 인하여 이 때에 이르러 크게 늘어났던 화랑도가 하나로 통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여러 화랑들은 낭도부곡에 의하여 편제된 것이다.
다섯째, 화랑도에는 화랑들 밑에 낭두(郎頭)가 있었다. 이해를 돕기 위하여 비교하자면 낭두는 현재 한국 군대의 부사관에 해당하는 존재일 수 있다. 화랑들만이 아니라 낭두들도 여러 등급으로 나뉘었던 것이 확인된다. 이와 같은 낭두는 『화랑세기』가 출현함으로 밝혀진 존재다.
여섯째, 화랑 밑에 낭두, 낭두 밑에 낭도가 있었다. 낭도는 원화 밑에도 있었다. 이러한 낭도들 또한 일정한 체계로 편제하였다. 『화랑세기』를 통하여 낭도가 동도·평도·대도로 나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위의 기록을 통하여 대도 중 입망자는 망두라 하였고 망두는 낭두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낭도와 낭두의 관계도 밝혀지게 되었다.
일곱째, 풍월주나 화랑은 물러난 후 상선(上仙)·상화(上花)가 되었다. 9세 풍월주 비보랑 때 미실이 화랑도의 파가 갈라지는 것을 염려하여 상선과 상화를 회합하여 열선각(列仙閣)을 짓고 대의를 통과시켜 결단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파의가 비록 많았으나 또한 무사히 지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상선과 상화가 하나의 집단이 되어 화랑도의 움직임에 통제를 가한 것이다.
여덟째, 『화랑세기』를 통하여 화랑·낭두·낭도와 관련된 여자들의 존재를 찾게 되었다. 풍월주의 처는 화주가 되었다. 그리고 문노는 국선이 되며 그의 처 윤궁을 선모(仙母)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낭두의 처들은 봉화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한편 서민의 딸들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은 낭문에 속하고 유화가 되었고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화랑도 조직의 대강을 알아보았다. 신라의 화랑도는 시간이 지나며 늘어났고, 그들을 통제하기 위하여 화랑도 조직 또한 확대 편제된 것을 알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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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
신라에는 일정한 시점에 여러 명의 화랑이 있었다. 그들 화랑들은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하여 일정한 조직으로 편제되었다. 동시에 여러 명이 존재하였던 화랑들은 그 직책이 달리 정해져 있었다. 그러한 화랑도는 풍월주, 부제가 중심이 되고 좌삼부의 화랑(좌방대화랑·좌화랑·소화랑·묘화랑), 우삼부의 화랑(우방대화랑·우화랑·소화랑·묘화랑),전삼부의 화랑(전방대화랑·전방화랑(?)·소화랑·묘화랑) 등이 있다. 그리고 진골화랑·귀방화랑·별방화랑·별문화랑 등의 화랑도 있었다.
풍월주
신라 시대에는 1세 위화랑에서 32세 신공까지 32 명의 풍월주가 있었다. 풍월주는 화랑 중의 화랑으로 전체 화랑도의 우두머리였다. 32명 풍월주는 대부분 부제를 지낸 후 임명되었다. 부제가 되는 것이 풍월주가 되는 길이었다.
부제(副弟)
풍월주를 설치할 때 부제를 함께 설치하였다. 부제는 풍월주와 행동을 함께 하였다. 풍월주들은 부제를 사랑하였고 부제는 풍월주들을 힘써 보좌하였다. 부제들은 풍월주를 일찍부터 모시는 일을 볼 수 있다. 보종공과 염장공에서 그러한 예를 찾을 수 있다. 『화랑세기』 의 기록을 보면 보종공의 부제 염장공은 보종공이 부제가 되기 이전부터 그의 아우가 된 것을 알 수 있다. 보종공은 낭정을 본 일이 없고 염장공이 맡아서 하였다. 그런데 보종공은 내사에 관심이 없어 염장공이 보종공의 처 양명과 혼거하여 장명을 낳을 정도였다. 그러한 사정은 19세 풍월주 흠순공과 부제 예원공 사이에서도 찾아진다. 흠순공은 예원공의 누이 보단낭주와 결혼하였다. 그리고 흠순공은 재위4년 동안 한결 같이 낭정을 돌보지 않고 낭도를 거느리고 지방에 머물렀다. 낭정은 부제 예원공이 대행하였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32명 풍월주의 계승은 하나의 원칙이 있었다. 물론 예외도 없지는 않았으나 기본적으로 부제가 풍월주의 지위에 올랐던 것이다. 부제가 아니고서도 풍월주가 되었던 사람들이 있다. 6세 풍월주 세종은 사다함의 추천을 받았으나, 결국은 지소태후가 허락하여 그 지위에 올랐다. 8세 풍월주 문노는 미실궁주가 설화랑에게 양위를 명하여 그 자리에 올랐다. 10세 풍월주 미생은 원래 7세 풍월주 설화랑의 부제였으나 그 지위에 오르지 못하다 마침내 문노의 명으로 그 자리에 나가게 되었다. 15세 유신공의 부제였던 춘추공은 보종과 염장공에게 그 지위를 양보하다 18세 풍월주가 되었다. 29세 원선공부터는 『화랑세기』의 기록에 부제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기록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략이 되었을 뿐 실제는 다음 대의 풍월주들이 부제로서 그 자리에 올랐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한 마디로 풍월주는 기본적으로 부제의 지위에 올랐던 자들이 차지한 자리였다. 부제가 아니고서 풍월주의 지위에 올랐던 세종이나 문노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세종은 지소태후의 사자(私子)였다. 그리고 문노는 지도태후의 지원이 있었고, 진지왕의 폐위에 공을 세웠기에 풍월주가 될 수 있었다.
후대로 갈수록 부제의 지위는 전임 풍월주들의 개인적인 이유로 임명되는 예가 많아지게 되었다. 이는 낭정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특이 26세 풍월주 진공부터는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 때 낭정은 되 돌이킬 수 없게 무너지게 되었다.
부제가 된 이유는 풍월주가 된 이유와 대체로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부조(父祖)도 같았다. 즉 왕·왕자·풍월주가 부조에 들어 있는 예가 많았다. 구체적으로 낭정에 영향을 미친 지도태후, 미실 등의 친족들이 부제 나아가 풍월주가 되었다. 시간이 지나며 몇몇 풍월주의 아들들이 부제가 되고 풍월주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풍월주와 부제 밑의 여러 화랑들
화랑도에는 풍월주와 부제 외에도 여러 화랑들이 있었다. 화랑도는 시간이 지나며 그 규모가 커지고 조직도 발전하게 되었다. 문노가 풍월주로 있을 때(579-582)에 낭도부곡(郎徒部曲)을 만들었는데, 그것은 잘 짜여진 화랑도 조직이었다. 그 때 특히 여러 화랑들을 조직화한 것을 볼 수 있다. 좌봉사랑·우봉사랑·전방봉사랑을 각기 좌대화랑·우대화랑·전방대화랑으로 만들어 각기 3부의 낭도를 거느리게 했던 것이다. 3부는 좌삼부·우삼부·전삼부를 의미한다. 3부에는 좌화랑 2인, 우화랑 2인을 두었고 각기 소화랑 3인, 묘화랑 7인을 거느렸다. 이들은 현재의 군단조직의 군단장·사단장·연대장·대대장 등이 단위부대의 지휘관인 것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고 여겨진다. 각 화랑은 등급에 따라 격을 달리하였고 거느린 낭도의 수가 달랐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진골화랑·귀방화랑·별방화랑·별문화랑을 두어, 12·13살의 빼어난 진골 및 대족의 자제로서 속하기를 원하는 자를 뽑아 이를 삼았다. 이들 화랑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그들도 어떤 형태로던 낭도부곡에 속한 것은 틀림없다.
문노가 설치한 낭도부곡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7세 풍월주 설화랑 때(572-579)에 문노는 국선으로 임명되었다. 진지왕이 즉위한 후 지도부인이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國仙)으로 삼고 비보랑을 부제로 삼은 일이 있다. 국선은 풍월주와 별도의 화랑도를 거느려 그 우두머리가 되었다. 문노가 풍월주가 되자 국선을 우두머리로 한 화랑도와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한 화랑도를 합쳐 하나의 화랑도로 만들고 그 보직을 만든 것이 낭도부곡이었다. 이 때에 이르러 전국의 화랑도가 하나의 조직 속에 들어가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낭두
『화랑세기』에는 미생공에게 많은 폐첩이 있었다고 한다. 9부 낭두들이 모두 첩을 통하여 청탁을 하였다고 한다. 9부는 좌삼부·전삼부·우삼부의 9개 부를 가리킨다. 이는 문노가 설치한 낭도부곡에 따른 것이다. 각 부에 낭두들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면 낭두는 어떠한 존재였을까? 한마디로 낭두는 화랑과 낭도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위치에 있던 집단이었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현재 군대의 부사관(하사관)에 해당한다고 여겨진다. 수 백 명의 낭도를 거느리기 위해 화랑들은 낭두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낭두가 되는 길은 독특하였다. 낭도 중 23·24세에서 30세까지 집단인 대도 중 입망자를 망두라 하였다. 그 중 공과 재주가 있는 자를 천거하여 신두로 삼았다. 신두는 낭두가 될 수 없었고 오직 망두 만이 낭두가 되었다. 여기서 입망의 법을 주목할 수 있다.
낭두가 되기 위해서는 입망의 법을 따라야 하였다. 이를 위하여 낭두의 처들은 임신을 하면 선문에 들어가야 했다. 그들은 선문에서 임신한 아이를 상선과 상랑의 마복자로 만들어야 하였다. 마복자 만이 낭두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 폐단이 생기기도 하였다.
낭두들은 화랑도에서 하나의 세력을 이루고 낭정을 장악하기도 하였다. 24세 풍월주 천광공 조에 찰인은 나이 60살이 넘었는데 대노두로 있었으며 처첩 자녀가 백을 헤아렸으니 거동함이 상선과 같았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그의 세 아들로 모두 권세를 장악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된 까닭은 찰인의 처 옥두리가 절색으로 역대 상선을 섬긴 때문이었다.
낭도
낭도는 풍월주가 설치되기 이전부터 있었다. 원화들이 낭도를 거느렸던 것이다. 그러한 낭도는 서민들로만 편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화랑세기』 7세 풍월주 설화랑 조에 골품이 있는 사람은 설도(설화랑의 화랑도)를 많이 따랐고, 초택의 사람들은 문도(문노의 화랑도)를 많이 따랐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실제로 10세 풍월주를 지낸 미생도 처음에는 낭도가 되었다. 여기서 풍월주를 지낸 사람도 처음에는 낭도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낭도들도 일정한 조직으로 편제되었다. 『화랑세기』양도공 조를 통하여 그러한 사정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국초에 서민의 아들도 준수하면 곧 낭문에 나아가 (낭)도가 되었다. 13·14살에 동도가 되었고, 18·19살에 평도가 되었으며, 23·24살에 대도가 되었는데, 대도 중 입망자는 망두가 되었다"고 한다.
낭도 편제를 보면 대부분의 낭도들은 일반 서민들로 구성된 것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골품제 하에서 진골이나 두품신분을 가진 사람들도 낭도가 되었던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기본적으로 낭도들 중 골품이 있는 사람들은 화랑이 되었고, 두품신분을 가진 사람들은 낭두 등의 직을 차지하였던 것은 아니었을까 짐작이 간다.
그런데 서민 낭도들은 화랑도를 출세의 문으로 이용한 것을 볼 수 있다. 용춘공은 조정에 들어간 후 대사 이하에 재능이 있는 낭도를 많이 등용하였다. 골품제 하에서 대사는 4두품이 오를 수 있던 최고의 관위였다. 서민 낭도들도 대사까지 올랐다고 하면 평인·백성 신분을 가졌던 사람들도 화랑도에서 활동하여 대사까지 올랐고 4두품 신분을 갖게 된 것을 뜻할 수 있다.
국선
『화랑세기』에는 국선(國仙)에 대한 기록이 나오고 있다. 이화랑 조에 나오는 사다함에 대한 이야기가 보인다. 사다함이 언급한 국선이라는 것은 왕이 임명한 국선이 아니라 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화랑이라는 의미 정도로 생각된다.
그런데 왕이 국선을 삼은 예가 있다. 8세 풍월주 문노는 풍월주의 자리에 오르기 전인 576년 10월 지도황후의 명으로 국선이 되고 윤궁을 선모로 삼았다. 문노가 국선이 된 사실은 설화랑 조에도 나오고 있다. 진지왕의 왕비인 지도황후의 아버지 기오공은 문노와 종형제간이었다. 그러므로 지도는 본래 문노를 따랐다. 진지왕이 즉위하자 왕에게 권하여 문노를 국선으로 삼고 비보랑을 부제로 삼았다.
풍월주와 국선 사이에 경쟁관계가 벌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국선은 풍월주보다 아래가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선은 비록 진지왕이 설치한 것이지만 풍월 정통은 아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문노와 설화랑의 관계에서 문노는 도맥으로 스승이고, 통맥으로는 아우가 되었다는 사실도 주목된다. 이 때 문노의 부제였던 비보랑도 국선 계통의 선도(仙徒)의 우두머리가 되었던 것이다. 문노가 8세 풍월주가 된 후 국선이 계속 이어졌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 후 신문왕 원년(681) 흠돌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풍월주를 지낸 자들이 가담하였던 사건을 계기로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하는 화랑도가 폐지되고 국선을 우두머리로 하는 화랑도가 부활된 것으로 헤아려진다.
원화
540년 이전 원화는 어떤 존재였을까? 『화랑세기』 세종 조에 그 답이 있다. 미실은 황후궁 전주가 된 후 진흥왕에게 한 말 중 옛날 선제들은 총첩을 낭도로 하여금 받들게 하여 남도에서 조알을 받았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신라 선대의 왕들은 총첩을 원화로 삼았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진흥왕 원년(540) 지소태후는 원화를 폐지하고 풍월주를 설치하였다. 원화는 540년 이전에 존재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원화는 무엇을 하였을까? 540년 이후 설치된 풍월주 중심의 화랑도들도 실은 그 이전 원화 중심의 선도가 하던 일도 계속하였다고 여겨진다. 실제로 문노가 두었던 낭도부곡에 따르면 전삼부(前三部)에서는 유화· 제사(祭事)·공사(供事)를 맡았는데 원래 원화를 우두머리로 한 낭도들이 제사를 담당하였던 사실로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원화를 중심으로 한 선도는 김씨 왕이 등장한 이후 만들어졌다고 생각되는 신궁은 물론이고 그 이전 신라의 시조 혁거세를 모신 시조묘를 비롯하여 역대의 왕들을 모신 사당에서 제사를 행하던 집단이었을 수 있다. 남해왕 3년 시조 혁거세묘를 설치하여 4시에 제사를 지냈는데 왕은 그의 친누이 아로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 이후 역대의 왕들은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한 제사를 주관한 집단이 바로 원화를 우두머리로 한 선도였다고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남해왕의 친누이 아로는 1세 원화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그 밖에 신라에는 국초부터 많은 제사가 있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행했던 그러한 제사와 원화와 그의 낭도들이 무관할 수 없었다고 여겨진다.
상선(上仙)
상선은 풍월주를 물러난 사람들을 가리킨다. 『화랑세기』에는 보리공이 3년간 풍월주의 위에 있다가 부제 용춘공에게 그 자리를 전하였다고 한다. 보리공의 지위는 비록 상선이었으나 몸은 불문에 바쳐 형인 원광을 도왔다고 나오고 있다.
당시 상선은 한 사람이 아니라 풍월주를 지냈던 사람들 모두로 구성되었다. 그리고 11세 풍월주 하종공 대에는 미실이 파가 갈리는 것을 염려하여 상선과 상화가 회합하는 열선각을 만든 바 있다. 상화는 풍월주가 되지 못하였던 화랑들을 가리킨다.
상선들은 화랑들로서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들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상선들은 여러 화랑이나 풍월주들로부터 존중 받았다.
상선들은 낭정에 관여하기도 했다. 상선들의 낭정에 대한 간섭은 폭 넓게 이루어졌다고 여겨진다. 풍월주들이 상선의 명을 다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한편 상선들은 입망의 법에 의하여 임신한 낭두의 처를 총애하여 마복자를 만들기도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상선들은 낭두의 딸들을 첩으로 거느리기도 하였다. 염장공 같은 상선은 낭두의 딸들을 첩으로 많이 거느리기도 하였다. 그런가 하면 화랑도의 파가 갈린 후 상선들도 자유롭지는 않았다. 상선들은 화랑들을 이끌어 관직을 갖게 하고 승진시킨 것도 알 수 있다.
화랑도와 관련된 여자들
풍월주 중심 화랑도와 관련된 화주·봉화·원화가 있다. 그리고 원화와 관련된 화모, 국선과 관련된 선모를 주목할 수 있다.
화주
『삼국유사』 효소왕대 죽지랑 조에 화주(花主)가 나오고 있다. 지금까지 화주를 화랑단체를 관장하던 관직으로 파악하여 왔다. 그런데 『화랑세기』에는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화주는 풍월주의 아내였다. 25세 풍월주 춘장공은 24세 풍월주를 지낸 천광공의 누이 천봉낭주를 아내로 맞아 화주로 삼았다고 한다. 26세 풍월주 진공은 흠돌의 누이 흠신을 처로 삼았고, 풍월주가 되자 화주로 삼은 바 있다. 풍월주가 되면 그의 처가 화주가 되었던 것이다. 지금까지 『삼국유사』에 나오는 화주를 화랑도를 관장하던 조정의 관리로 파악한 생각을 버릴 필요가 있다.
화주에 대하여 두 가지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화주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화주가 되기 위하여 진골정통·대원신통의 통이 있어야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풍월주가 되기 위해서는 인통이 있는 여자를 화주로 삼아야 하였던 것도 생각할 수 있다.
화주들의 활동은 다양하였다. 화주는 낭정을 장악할 수도 있었다. 25세 풍월주 춘장공은 천광공은 늘 화주와 함께 낭두의 처와 딸들을 독려하여 정포(征袍)를 만들어 출전한 낭도들에게 보냈다. 그리고 몰래 서울과 시골을 다니며 가난하고 고달픈 사람들을 구휼하였다. 그리하여 인망이 크게 돌아왔다고 한다.
봉화
봉화는 낭두의 딸들이다. 봉화는 화랑도와 깊은 관련이 있던 여자들이다. 『화랑세기』에는 봉화(奉花)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낭두의 딸들이 봉화가 되어 선문에 머물며 일하는 동안 화랑들의 총애를 받지 못하면 시집을 갈 수 없었다는 사실이 새롭다. 옥로가 아니면 낭두에 오른 자들이 처로 삼지 않았던 데에는 이유가 있다. 위의 기록에 나오는 것과 같이 처로 인하여 귀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풍월주를 비롯한 화랑들은 봉화와 관계를 가진 후, 그가 혼인을 하면 그의 남편의 후원자가 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봉화를 거쳐 낭두의 처가 된 자들이 임신을 하면 다시 선문에 들어가 탕비가 되었다. 몇 날 또는 몇 달 만에 상선·상랑의 총애를 받으면 물러났다. 그 때 남편은 재물을 들여 예를 갖추어 맞이하는 사함을 하였다. 아들을 낳아 석 달이 되면 다시 선문에 들어가는데 양과 돼지를 예물로 하는 세함을 하였으며 총애를 받으면 물러났다. 이 때 남편은 다시 사함을 하여 맞았다. 이로써 낭두가 아이를 많이 낳으면 곧 재산이 기울게 되었다고 한다. 낭두는 그 딸과 처를 선문에 들여보내야 하였던 사정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낭두들이 처로 인하여 귀하게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낭두는 딸과 처를 상선·상랑에게 바쳐 낭두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낭두의 예속성이 드러난다.
유화
『화랑세기』양도공 조에는 유화(遊花)에 대한 기록도 있다. 유화도 새로운 존재다. 서민의 딸들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은 낭문에 속하여 유화가 되었고,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공이 또한 그 폐단을 바로 잡으니 향리 사람들이 크게 기뻐하였다고 한다. 유화는 일찍부터 있었다. 그 수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10세 풍월주 미생랑 조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미생랑이 남도에 갈 때마다 유화로서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는 자가 천백을 헤아렸다고 한다. 유화가 적은 수가 아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신라의 여자들이 모두 유화가 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대남보의 딸은 유화가 되는 것을 거부하고 용춘공을 모시고자 하였다. 한편 풍월주 문노는 유화로 인하여 더럽혀진 일이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