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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도의 설치와 기원

대한인 2013. 12. 24. 04:27

화랑도의 설치에 대한 기록 내용들은 사서에 따라 다르다. 『삼국사기』에는 진흥왕 37년(576) 봄에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삼국사절요』·『동국통감』에는 진흥왕 원년(540)에 풍월주를 설치하고 선사(善士) 즉 좋은 사람을 구하여 무리로 삼았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화랑세기』에는 화랑도의 설치에 대하여 새로운 사실들이 나오고 있다. 우선 그 서문에는 신라에서 여자를 원화로 삼았는데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으로 하여금 받들게 하였다고 나오고 있다. 이는 『삼국사기』와는 다른 내용이다. 오히려 『삼국사절요』·『동국통감』과 같은 내용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풍월주의 설치에 대한 기록은 다음과 같다.


이에 앞서 삼산공의 딸인 준정이 원화가 되었는데 많은 낭도를 두었다. 그 때 법흥대왕의 딸인 남모공주는, 곧 백제 보과공주의 소생인데, 또한 뛰어난 미인으로 공과 더불어 도탑게 사랑하였다. 태후가 공을 사랑하여 남모를 도와 원화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옥진궁주의 사부(私夫)인 영실공을 용양군으로 삼아 총애하며 높은 위에 있게 하고, (준정에게) 원화를 물러나도록 하였다. 그러므로 준정이 (영실공을) 부지런히 섬겨, 남모가 원화가 되는 것을 막으려 하였다. 태후는 비록 (왕의) 유명으로 영실을 계부로 삼았으나 실제로는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미진부)공에게 명하여 (준정이) 물러나도록 하였다. 태후는 또 (남모에게) 낭도가 부족한 것을 염려하여, 위화공의 낭도를 소속하게 하여 더하여 주었다. 준정이 투기를 하였다. 이에 술로 유혹하여 물에서 죽였는데, 남모의 낭도들이 그 것을 폭로하였다.

태후가 이에 원화를 폐지하고 선화(仙花)를 화랑으로 삼았다. 그 무리를 일러 풍월이라 하였고 그 우두머리를 일러 풍월주라 하였다. 위화공이 풍월주가 되고, (미진부)공이 부제가 되었다. 얼마 안 있어 (미진부)공이 풍월주가 되었다. (2세 풍월주 미진부공 조, pp. 53-54)


삼국사기』진흥왕 37년 조에도 준정이 남모를 죽인 사건을 계기로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둔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러나 『화랑세기』에는 보다 구체적인 모습들이 들어있다. 즉 그 안에는 남모가 법흥왕과 백제의 보과공주 사이에 출생하였다는 사실이 나온다. 그리고 남모를 지소태후가 원화로 삼고자 한 까닭도 나오고 있다. 원화를 폐지한 후에는 선화를 화랑으로 삼고 그 무리를 풍월, 그 우두머리를 풍월주라 하였던 사실도 보인다.

이것이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한 화랑도의 설치였다. 그 이전에는 원화를 우두머리로 한 선도가 있었고 원화 밑에는 낭도들이 있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원화와 낭도로 이루어진 조직이 언제부터 만들어졌는지는 검토할 문제다. 그것은 화랑도의 기원에 대한 문제가 된다.

1)화랑도의 기원에 대한 기존 연구와 그 문제

화랑도의 기원은 무엇이었을까? 이에 대한 해명을 하기 위한 전제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근·현대 한국사학이 만들어낸 신라사 체계를 버려야 한다. 지금까지 한국사학은 『삼국사기』 내물왕 이전의 기록을 불신하여 왔다. 2002년 제7차 교육과정에 의하여 편찬되어 고등학교 1학년부터 사용된 교과서 『국사』(이후 2002년 대신 7차로 표시하기로 함)에는 4세기 내물왕때 신라는 활발한 정복 활동으로 낙동강 동쪽의 진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고 중앙집권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는 한국사에 대한 하나의 국민적 상식이 되어 있다. 바로 이와 같은 신라사 체계를 버리지 않고는 신라 화랑도의 기원에 대한 해명을 옳게 할 수 없다.

실제로 『삼국사기』 에 나오는 신라의 앞부분 수백 년 역사를 말살한 것은 1945년 이전 제국 일본의 역사가들이었다. 그들은 일본사의 한 부분으로 임나 일본부 등의 역사를 날조하기 발명하기 위하여 한반도 남부 지역을 정치적 공백상태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러한 역사날조는 그 후 소위 삼한론으로 만들어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러한 역사 읽기로 인하여 신라 역사의 앞부분 수백 년 역사가 은폐·말살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인 내물왕 이후의 역사도 왜곡·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발명한 신라의 역사와 달리 실제 신라는 기원후 1세기 중반부터 이웃한 소국들을 병합하기 시작하여 3세기 중엽에는 진한의 소국들을 모두 병합한 왕국으로 성장하여 있었다. 이러한 역사를 은폐·말살하고 만들어진 역사읽기의 대표적인 희생물의 하나가 신라의 화랑도다. 실제로 화랑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역사적 실상을 벗어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화랑도에 대한 연구의 틀을 만든 것은 미지나 아키히데이다. 그는 『조선고대연구-신라화랑연구』(1943)을 통하여 화랑도에 대하여 정리하였다. 그 안에 신라 화랑의 원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삼국사기』진흥왕 37년(576)의 기록을 따라 진흥왕 대에 화랑이 제정되었다고 본 그는 화랑의 원류를 그 이전 원시 한족(韓族) 미성년집단의 남자 집회사에서 찾고 있다. 그는 한반도 남부 한족(韓族) 간에 3·4세기경 원시적 집회조직이 있어 젊은이 집회사가 운영되었다고 하였다. 이는 부족적 집회였다고 한다. 이들 한족으로부터 신라와 백제 등의 국가가 성립되었는데 4세기 후엽에는 왕권국가로서 부족통일을 이루어간 것으로 보고 있다. 마립간을 왕호로 한 당시 왕권은 부족회의에 의해 지탱하였으며 공화주의적 성질을 지닌 선거왕권 정치체제를 이루었다고 하였다. 이 때 삼한시대의 남자집회는 중요한 사회·정치적 기능을 지녔다고 보고 있다. 6세기 초엽 법흥왕·진흥왕 대에 이르러 신라는 국위가 신장되고 중국문물제도를 수용하여 국가내용이 새로워졌다고 하였다. 화랑제도의 제정도 그 신흥사회 제도의 하나였다고 하였다. 그는 화랑제도의 원류를 원시시대의 남자집회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그 사이 역사적 연관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의 역사를 은폐·말살한 미지나 아키히데의 이 같은 주장은 따를 수 없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같이 신라는 일찍이 진한의 소국을 병합하였다. 그 과정에 삼한 중의 하나인 진한은 사라지고 신라 왕국으로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신라를 원시 한족 사회로 볼 수는 없다. 따라서 신라 화랑의 기원을 원시 한족의 남자집회사에서 찾는 그러한 주장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한번 잘못 발명된 미지나 아키히데의 주장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어 문제다. 교과서 고등학교 『국사』 (7차, p. 192)에서 "화랑도는 원시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하였다"고 되어 있다. 또한 "화랑도는 미성년집단이라는 공동체적 전통을 계승하였다는 데에 특색이 있다"는 주장도 있다. 일제 시대 미지나 아키히데가 한 주장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화랑도가 기본적으로 미성년집단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으나, 그 기원을 원시 한족의 미성년집단으로 보는 미지나 이키히데의 주장은 처음부터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그 까닭은 분명하다. 국가 형성 이전의 못한 사회에서는 미성년집단이 하나의 연령집단으로 사회·정치적 기능을 하였다. 한국의 경우 신석기 시대, 부족사회가 그 단계에 해당한다. 그러나 사로6촌을 통합하여 국가를 형성하였던 신라는 일찍부터 진한 소국을 병합한 왕국으로 성장하였기에 지금까지 화랑도의 기원에 대한 이야기는 새롭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뒤에 보겠지만 신라의 화랑도에는 미성년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30·40이 넘어 풍월주로 재임한 화랑도 있었다. 낭두들은 그 직에 따른 한정이 있었으나 60살까지 재직할 수 있었다. 낭도 중 대도는 30살에 물러났다. 이는 화랑도를 미성년자 집단으로 본 견해가 잘못임을 뜻한다.


2) 화랑도의 기원으로서 선도(仙徒)

그러면 화랑도의 기원은 무엇일까? 『화랑세기』의 서문에 답이 있다.

화랑은 선도(仙徒)이다. 우리나라에서 신궁(神宮)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大祭)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燕)의 동산에서, 노(魯)의 태산에서 한 것과 같다. 옛날 연부인(燕夫人)이 선도(仙徒)를 좋아하여 많은 미인을 길렀는데 이름 하기를 국화(國花)라 하였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로써 원화를 삼게 되었다. 지소태후가 이것(원화)을 폐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받들게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랑을 사랑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을 받드는 것(奉神)을 위주로 하였는데, 국공(國公)들이 이것(봉신)을 베풀어 행한 후에(또는 국공들이 무리(화랑도)에 들어간 후에)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이에)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화랑세기』 서문, 1999, p. 45)


위 서문의 기록을 통하여 신라의 화랑도가 선도(仙徒)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선도는 옛날 연부인이 거느렸다는 선도와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한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 들어 신라에서도 여자를 원화로 삼았다는 사실이 주목하게 된다. 신라 선도의 풍습은 서쪽에서 온 것이다.

한편 선도는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옛날에 선도는 봉신을 위주로 하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 받드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국공들이 화랑도에 들어간 후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썼다고 한다. 『삼국사기』 에 따르면 소지왕(비처왕) 9년(487) 또는 지증왕 때 시조가 탄생한 나을에 신궁을 설치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를 보면 신궁의 설치시기는 그 이전일 수밖에 없다. 5세 풍월주 사다함 조의 세계(世系)에는 눌지왕이 심황을 명하여 내물신궁의 주로 삼았다는 사실이 나오고 있다. 눌지왕 대(417-458)에 신궁이 존재하였던 것이 확인된다. 여기서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를 지내던 선도의 기원을 새롭게 찾을 필요가 있다.

그러면 언제부터 그러한 선도가 만들어졌을까? 정확한 시기를 알 수는 없다. 단지 『삼국사기』 잡지 제사 조에는 남해왕 3년(6) 봄에 시조 혁거세묘를 세워 4시에 제사지냈는데 왕의 친누이 아로가 주제(主祭)하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는 아로가 시조묘에 신으로 모셔진 혁거세에 대한 제사를 주관 한 것을 의미한다. 남해왕 대에 신궁의 모습을 갖춘 것은 아니겠지만 후대 언제인가 설치된 신궁은 『화랑세기』에 나오는 선도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신궁을 받들어 하늘에 대제를 행한 선도는 일찍이 설치되었던 시조묘 등의 제사를 받드는 임무를 지닌 집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