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세기 (花郞世紀)
신라시대 학자 김대문(金大問)이 쓴 화랑 전기.
704년(성덕왕 3) 한산주도독으로 있던 지은이가 《계림잡전(鷄林雜傳)》과 함께 저술하여 후일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이 책은 신라시대 화랑들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으로, 《고승전(高僧傳)》과 함께 그의 저술 중 가장 중요하다. 1989년 이 책의 필사본이 발견된 후 진위 논쟁이 계속되어 온 이래 2004년 진짜라는 주장이 다시 제기되었다. 필사본에 나오는 송랑가(送郞歌)라는 향가를 분석한 결과 고려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되며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사서(史書)라는 주장이 나왔다.
《화랑세기》를 통해 본 신라의 역사
이 종 욱 (서강대 사학과 교수)
1. 머리말
《화랑세기》는 540년에서 681년까지의 기간 동안 임명되었던 32명 풍월주의 전기이다.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은 대를 이어 풍월주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풍월주 중 1세 위화랑-4세 이화랑-12세 보리공-20세 예원공-28세 오기공은 김대문의 직계 조상들이었다. 681년 김흔돌의 난에 전임 풍월주와 화랑도들이 관여하였던 까닭에 신문왕의 어머니 자의태후가 명하여 풍월주를 우두머리로 하는 화랑도를 폐지하였다. 이는 풍월주를 배출한 김대문의 가문으로서는 커다란 위기였다.
《화랑세기》는 바로 그와 같은 김대문 가문의 위기 때문에 저술된 책이다. 김대문으로서는 그의 가문이 화랑의 우주머리 풍월주를 배출한 대단한 가문이라는 사실을 밝혀두기 위하여 이 책을 저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당시 신라의 최고 지배세력은 왕을 중심으로 근친관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중복된 근친혼을 하며 지배세력으로서의 지위를 다른 세력들에게 개방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화랑세기》는 크게 화랑의 세보, 낭정의 대자, 파맥의 정사에 대한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각 풍월주의 전기에는 풍월주의 가문과 그가 어떤 사람이고 어떠한 일을 하였는지 등에 대한 전기, 풍월주의 행적을 정리한 찬(贊) 그리고 세계(世系)가 나오고 있다.
그 중 세계에는 풍월주의 부모를 비롯한 조상들에 대해 기록하고 있고 그들의 관계를 밝히고 있다. 세계는 각 풍월주의 사회·정치적 지위를 밝혀주는 좌표였다. 세계는 신라인들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장치였고 누구나 알고 있던 사실들이었으며 필요에 따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신라는 출생에 의하여 사회·정치적 지위가 정해지는 골품제사회였기 때문이다.
세계에 대한 이해는 신라사회를 옳게 인식하는 출발점이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등은 세계가 얼마나 중요한 장치였는지를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 현재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세계에 나오는 근친혼 등의 관계를 유교적·기독교적 관점에서 비판하여 《화랑세기》를 위작이라고 한다. 그러나 《화랑세기》를 위작으로 보는 발상 자체가 신라사회를 움직이던 원리를 옳게 파악하지 못한 것들이다.
《화랑세기》는 단순히 풍월주만의 전기일 수 없다. 그 안에 나오는 겹겹이 쌓인 많은 이야기들은 신라의 정치·사회·문화에 대한 이야기들일 수밖에 없다. 다른 어는 사서에서 구할 수 없는 생생한 신라의 이야기다.
2. 《화랑세기》의 시대
이 시대에는 왕권이 강화되었다. 24대 진흥왕에서 28대 진덕왕까지는 성골왕의 시대였고, 29대 무열왕에서 31대 신문왕까지는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한 후 행정적·정치적으로 왕권이 강화된 시기였다. 율령에 의한 통치가 강화되었으며 관직·관위·관부 등 정치조직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신라인들이 골품제에 편입되기에 이르렀다. 불교를 수용하여 왕국의 사상적 통합을 이루었다. 수·당과의 외교관계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풍월주의 시대는 신라가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성숙한 시기였고 중국문화를 직수입하여 왕국의 모습을 바꾼 시기였다. 《화랑세기》에는 다른 사서에 나오지 않는 그러한 사실들이 들어 있다. 《화랑세기》에 들어 있는 그러한 이야기들은 현재 우리들이 만들어온 신라에 대한 역사상과 크게 다른 것이다. 《화랑세기》에 들어 있는 암호를 해독할 체계를 가지고 있는 한 그 어떤 자료도 버릴 것이 없다.
3. 정치
《화랑세기》에는 정치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는 적지 않은 내용들이 있다. 그 중 왕위계승, 반란, 정부조직, 칭제건원 등에 대한 내용들을 주목할 수 있다.
첫째, 왕위계승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화랑세기》에는 22대 지증왕에 31대 신문왕의 왕위계승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그 중 21대 소지왕 대에 지증은 부군(副君)으로 있다가 왕위계승을 하였다. 부군은 왕자가 아니면서 왕위계승권을 가진 사람을 칭한 명칭이다. 23대 법흥왕에게는 적자(嫡子)가 없었다. 법흥과 옥진 사이에 비대공이라는 서자가 있었다. 법흥왕은 비대공을 태자로 삼으려 하였으나 옥진이 골품이 없었고 영실과 살았기에 비대공을 태자로 삼을 수 없었다. 이에 법흥왕의 동생 입종과 지소 사이에서 출생한 진흥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24대 진흥왕에게는 동륜과 금륜 두 아들이 있었다. 원래 동륜을 태자로 삼았는데 그가 진흥왕의 후궁인 보명과 관계를 갖기 위하여 보명궁에 들어가다가 큰 개에게 물려 죽었다. 이에 금륜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24대 진흥왕은 후일 풍질로 정사를 보지 못했다. 그 결과 내정과 외정을 장악하였던 사도·미실·세종·미생 등이 진흥왕의 죽음을 비밀로 하고, 사도가 미실로 하여금 태자와 통하게 하여 태자가 다른 마음을 가지지 않기로 약속 받고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런데 진지왕은 미실을 황후로 삼겠다고 약속하고 왕위에 올랐는데 색을 밝혀 방탕하였다. 사도 태후가 걱정하여 미실과 더불어 폐위할 것을 논하고 사도의 오빠인 노리부공으로 하여 진지왕을 폐위시키게 하였다. 폐위된 진지왕은 유궁(幽宮)에 3년간 살다가 죽었다. 그 때 도화녀와 관계를 가져 비형랑을 낳았다. 비형랑은 용수·용춘의 서제였다.
26대 진평왕은 동륜태자의 아들로 진지왕의 조카였다. 전왕의 조카가 왕위계승한 것은 진흥왕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진평왕과 그 형제들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진평왕은 용수를 사위로 삼아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으나 선덕이 점점 자라자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이 왕위를 이을 만했다. 결국 성골 남자가 사라진 상황에서 성골신분을 가지고 있던 여자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당시 남녀의 문제보다 성골을 왕으로 삼는 일이 더 중요하였다.
29대 무열왕은 원래 진지왕의 아들 용수와 천명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그런데 용수가 죽으며 천명과 김춘추를 동생 용춘에게 주었다. 그 결과 김춘추는 용수의 아들이라 하거나 용춘의 아들이라 하게 되었다. 당시 용수·용춘은 선덕왕·진덕왕과 가장 가까운 종족이었다. 따라서 김춘추가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둘째, 《화랑세기》에 나오는 반란에 대한 사실들을 볼 수 있다. 진평왕 53년(631) 이찬 칠숙과 아찬 석품의 난이 있었다. 《화랑세기》에는 칠숙의 난을 진압하는데 선덕공주가 활약하였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염장공이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난을 진압하고 선덕이 즉위하자 발탁되어 조부의 영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염장공은 김유신과 김춘추에게 재물을 나누어주었고 사적으로도 치부하였다. 그 때 사람들이 염장공의 집으로 금이 들어가는 것이 홍수같다고 하여 그의 집을 수망택(水望宅)이라 하였다고 한다.
선덕왕 16년(647) 비담의 난이 일어났다. 《화랑세기》에는 선덕왕의 병이 위독하여지자 비담이 난을 일으킨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 때 서울에 군대가 적어 24세 풍월주 천광공이 낭도를 동원하여 진격하자 비담이 패하여 달아나고 난이 평정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천광공은 그 공으로 호성 장군으로 발탁되었다.
신문왕 원년(681)에는 김흠돌의 난이 일어났다. 《화랑세기》에는 김흠돌이 신문왕의 어머니 자의태후에게 한 잘못이 무거워 모반을 꾀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이는 반란의 원인에 대한 새로운 사실이다.
셋째, 정부조직 중 관위에 대한 문제를 주목할 수 있다. 하나는 세종과 미실 사이에서 출생한 하종이 세 살의 나이에 사지에 올랐고, 진흥왕과 미실 사이에서 아이를 낳을 때마다 관위가 올라 수정이 태어났을 때 대나마가 되었다. 이는 지배세력들이 차지한 관위의 실상을 말해준다. 다른 하나는 서민 낭도들도 대사까지 올랐던 사실을 《화랑세기》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넷째, 《화랑세기》에 나오는 왕들은 대왕·대제 등을 칭하였고 건원을 하였다. 그것을 중국에서 문제 삼기도 하였다.
4. 사회
《화랑세기》의 세계 또는 세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출생에 의하여 사회·정치적 지위가 결정된 골품제 사회 신라에서는 세계를 통하여 지배세력들의 지위가 결정되었다. 《화랑세기》의 세계는 그러한 사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각 풍월주의 부모와 그 위의 조상들의 관계에 대한 사실들을 충실히 기록하고 있다. 그 중 근친혼 또는 사통 관계도 있었던 그대로 기록하였다. 그것은 당시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에 김대문으로서는 바꾸거나 은폐할 수 없었다. 그리고 신라인들에게 그러한 관계는 부끄러운 일이거나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들은 그들의 도(道)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신국의 도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몇 가지의 신국의 도에 대하여 보기로 한다.
첫째, 마복자를 들 수 있다. 21대 소지왕(비처왕)에게는 7명의 마복자가 있었고 그들을 마복칠성이라고 하였다. 미실이 세종의 아들인 옥족공을 임신하였을 때 진흥왕이 미실을 궁으로 불러 들이고 옥종공을 그의 마복자로 삼았다. 그런가 하면 낭두는 상랑과 상선의 마복자여야 하였던 것도 나오고 있다. 마복자는 현재 우리들이 중시하는 윤리로는 인정하기 어려운 제도이다. 그러나 골품제 사회인 신라에서는 신분이 낮은 자들이 그들의 아들을 신분이 높은 사람의 마복자로 만들어 아들의 사회·정치적 진출의 길을 열었다. 이는 신라 사람들에게는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들이 얼굴 붉히고 있을 뿐이다.
들째,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으로 나뉜 인통(姻統)을 들 수 있다. 진골정통은 미추왕이 광명을 왕비로 삼으며 옥모의 인통이 아니면 황후로 삼지 말라고 하였다. 옥모는 소문국왕의 딸 운모공주가 구도공에게 시집가서 나은 딸이었다. 대원신통은 보미에서 출발하였다. 인통은 왕비를 비롯한 부인들의 계통이었다. 두 계통은 여자를 통하여 이어졌다. 남자들은 한 대에 한하여 어머니의 인통을 이었다. 실제로 용수(대원신통)와 춘추(진골정통) 사이에 인통이 달랐던 것은 그 어머니의 계통이 달랐기 때문이다. 인통의 계승은 부계계승의 원리를 거울에 비춘 듯 반대로 유지되었다.
셋째, 골품제를 볼 수 있다. 성골은 왕을 중심으로 그와 그의 형제의 가족들로 이루어졌고 왕궁에 살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성골도 왕궁을 떠나면 족강이 되어야 하였다. 《화랑세기》에는 진흥왕의 왕비였던 숙명공주가 출궁하며 골품을 초개처럼 버렸다고 나오고 있다. 이는 숙명공주가 출궁하며 성골신분을 버린 것을 의미한다. 그런가 하면 골품은 왕위와 신위를 구별하는 것이라고도 나온다. 당시 골품제는 성골왕의 지위를 강화하기 위한 장치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왕국의 모든 사람에게 적용된 신분제로 발전하였다. 한편 문노는 아찬이 되어서야 골품을 얻을 수 있었다. 문노가 얻었던 골품은 진골이었다. 관위가 올라가면 골품을 얻었던 사실은 골품제의 발전·운용과 관련시켜 중요한 의미가 있다.
5. 문화
신라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삶을 즐기는 방법이 있었다. 그 중 향가도 있다. 《화랑세기》에는 <풍랑가>·<청조가>와 같은 신라의 노래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풍요도 나오고 있다.
《화랑세기》에는 불교에 대한 내용이 많이 나오고 있다. 풍월주 중 이화랑·설화랑·보리공·호림공 등은 불교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다. 특히 호림공은 낭도들에게 화랑도 불(佛)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신라의 불교가 널리 퍼진 이유 중 화랑도가 불교에 귀의한 것을 빼놓을 수 없다. 그 외에도 선품공은 선불(仙佛)에 통달하였고 양도공 또한 불교를 숭상하였다. 결국 성골왕 시대에 불교는 화랑도를 통하여 널리 퍼진 것을 알 수 있다.
《화랑세기》에는 화랑도에 대한 많은 사실들이 있다. 그러한 내용은 지금까지 한국 학계에서 만들어온 화랑도에 대한 이해의 체계를 바꾸도록 한다. 지금까지는 화랑도를 순국무사로 보아 왔다. 화랑도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애국을 강조하는 도구로서 이용되었다. 그런데 신라의 화랑도는 훨씬 중요한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삼한통합에 화랑도들이 기여한 바가 없지 않았던 사실이 나오고 있다. 그런데 화랑도는 13·14살에서 30살까지의 젊은이들을 동도·평도·대도로 나누어 골품제 사회의 성원으로 사회화시키는 기능이 중요하였다. 화랑도로서 활동하는 과정에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내어 나라를 위해 활동하도록 등용하기도 하였다. 아니면 병부에 들어가거나 향리에 돌아가 장이 되거나 농공으로 돌아갔다. 화랑도들은 도의·무사·문사·현묘·악사·예사·유화·제사·공사 등 다양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화랑도의 조직은 화랑·낭두·낭도의 셋으로 크게 나뉘었다. 그 우두머리가 풍월주였다. 화랑도에는 화주·봉화·유화로 나뉜 여자들이 관여하였다. 김대문의 가문은 풍월주를 세습하였다. 화랑도에는 파가 나뉘었다. 《화랑세기》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근대가 만든 왜곡된 화랑도를 신라의 화랑도로 알았을 것이다.
6.《화랑세기》가 말하는 신라의 중요성
《화랑세기》는 신국의 도를 말하고 있다. 이는 현재 우리들은 지난 세기 만들어온 신라의 역사상이 가지는 문제점을 잘 보여준다. 이제 근대가 만들어낸 신라를 넘어서는 것은 물론이고, 《삼국사기》가 말하는 신라를 넘어서서 《화랑세기》를 통하여 김대문이 말하는 신라를 찾게 되었다. 한마디로 100년 통설의 신라를 떠나, 신국의 도가 말하는 신라를 찾게 되었다.
출처 : 《화랑세기》를 통해 본 신라의 역사 - 이종욱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