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희망을 주는 동기부여

인간의도리인오대덕목(五大德目)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지키자. 태극기, 애국가, 무궁화, 한글 사랑은 애국입니다

조경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

카테고리 없음

화랑도의 활동

대한인 2013. 12. 24. 04:30

『화랑세기』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화랑도의 활동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 중 『삼국사기』의 기록은 20세기 한국사학을 만든 연구자들이 화랑도의 활동을 이해하는 기본적 자료로 이용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받든 이후 낭도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고 한다. 그들은 도의를 서로 연마하였고 가악(歌樂)을 서로 즐겼으며, 산수에 유오(遊娛)하여 멀리 가지 않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사람들의 사정(邪正)을 알게 되어 착한 이들을 뽑아 조정에 천거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대문의 『화랑세기』에서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같은 『삼국사기』의 기록은 화랑도의 활동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되어 왔다.

『화랑세기』에는 지금까지 상상도 하지 못한 많은 사실들이 들어있다. 그 중 화랑도가 행했던 공식적 활동을 보여주는 대목이 있다

좌삼부(左三部)는 도의(道義)·문사(文事)·무사(武事)를 맡았고, 우삼부(右三部)는 현묘(玄妙)·악사(樂事)·예사(藝事)를 맡았고, 전삼부(前三部)는 유화(遊花)·제사(祭事)·공사(供事)를 맡았다. (『화랑세기』, 문노 조, 1999, p. 98)

문노가 편제하였던 낭도부곡에 좌삼부·우삼부·전삼부의 9부가 설치되었다. 9부의 각 부는 담당하였던 업무가 정해져 있었다. 이를 통하여 화랑도는 적어도 9가지의 범주로 나뉘는 일을 맡았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좌삼부에서 맡았던 일들을 주목할 수 있다. 그 중 도의가 있다. 『화랑세기』서문에는 국공들이 봉신을 행한 후(또는 국공들이 무리에 들어간 후) 선도가 도의를 서로 힘썼다고 나온다. 세속5계가 있다. 그것은 중국인들도 중시하는 도의를 신라에서 받아들인 것을 뜻한다. 그로부터 신라인들의 삶은 유교와 불교의 도의를 수용하는 세계화·중국화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화랑도의 활동과 관련시켜 문사(文事)를 볼 수 있다. 문사에는 역사를 공부하고, 문장을 익히고, 서적들을 읽고 글을 쓰는 일들도 모두 포함된다. 문사는 단순히 한문을 익히고 문장을 작성하는 일에 그치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것은 중국의 문명을 받아들이는 길이 되었다고 헤아려진다.

화랑도는 무사(武事)와 관련되어 있었다. 화랑도들이 나라를 위한 군사적 활동을 한 것이 분명하다. 지금까지 순국무사로서 화랑도를 지나치게 강조하여 문제이지 사실 화랑도를 무사와 떼어 생각할 수는 없다. 7세 풍월주 설화랑 대에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를 좋아하였고 호탕한 기질이 있었다고 한다.

다음은 우삼부에서 맡았던 일들을 볼 수 있다. 우삼부에서는 현묘·예사·악사를 맡았다. 먼저 현묘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현묘는 미묘하고 심오한 도리라고 한다. 그러한 도리가 무엇을 의미할까? 『화랑세기』에는 9세 풍월주 비보랑 대에 대세라는 사람이 발분하고 써 공부하여 신선(神仙)의 진도(眞道)를 터득하고자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신선의 참된 도는 신선사상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화랑도는 신선사상과 깊은 관계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화랑도를 선도(仙徒)라고도 불렀던 것이다. 신라인들은 시간이 지나며 중국에서 만들어진 도교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현묘에는 도교적인 성격도 포함되었다고 여겨진다. 한편 신라인들이 노장사상을 더한 도교를 직수입한 것은 아닐 가능성도 있다. 오히려 화랑세기의 시대에 우삼부 중 한 부에서는 오래 전부터 존재했던 신선의 도, 신선의 진도를 계속 관장하였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648년 당에 갔던 예원에게 유향이 신선의 도에 대하여 물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악사가 있다. 당시 악사는 음악과 춤이 함께 하였던 것이다. 또한 비보랑과 설화랑이 함께 노래를 배웠고 피리를 배웠던 것도 볼 수 있다. 한편 예사는 무엇일까? 보종공의 조카 모종공은 빼어난 용모에다가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모종공에게 문장과 화법(畵法)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예사에 해당한다. 그 밖에도 예사에 해당하는 일들은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전삼부에서 담당하였던 유화·제사·공사는 무엇일까? 전삼부에서 맡았던 유화는 분명한 실체가 있다. 앞에서 본 것과 같이 서민의 딸들로 빼어나게 아름다운 자들이 낭문에 들어가 유화가 되었는데 30살이 되기 전에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전삼부의 한부에서는 남도에 머물던 유화를 관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화랑도는 제사와 관련이 있었던 것도 알 수 있다. 『화랑세기』의 서문에 선도인 화랑이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를 지냈다고 한 것은 그대로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이다. 화랑도는 신궁의 제사나 나라 안에서 행해진 수많은 제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고 각된다.

그러면 공사(供事)는 무엇이었을까?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공(供)과 관련하여 『화랑세기』에는 색공(色供)은 진골정통이나 대원신통에 속한 여자들이 왕 등에게 색을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전삼부가 관장하였던 공사는 단순히 색공만 뜻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화랑도에서 필요로 하는 여러 물품들을 공급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어쩌면 제사에 필요한 물건을 바치는 일도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공사에 대한 문제는 앞으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화랑도 9부에서 담당한 일은 생각보다 다양한 것들이었다

1 화랑도가 배웠던 것들

『화랑세기』에 나오는 기록을 보면 화랑들이 배웠던 것들은 역사·문장·음률·노래·피리·춤·검 등이 있다. 사실 화랑도들은 그 밖에도 화랑으로서 또는 신라인으로서 필요하였던 많은 것을 배워야 했다고 생각된다.

2 화랑도가 익혔던 궁마와 검

화랑도의 우두머리가 누구인가에 따라 각기 익혔던 내용이 달라지기도 하였다. 7세 풍월주 설화랑의 낭도들은 향가를 잘하였고 속세를 떠난 청유를 즐겼다. 그와는 달리 문노의 낭도들은 무사(武事)를 좋아하였고 호탕한 기질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화랑들은 기본적으로 누구나 익혀야 하였던 것이 있었다. 궁마와 검이 그것이다. 풍월주가 누구냐에 따라 무사(武事)를 강조한 바 있다. 8세 풍월주 문노의 문하에 있었던 화랑들은 무사를 중시하였다. 9세 풍월주 비보랑, 15세 풍월주 유신공 등이 그들이었다. 그리고 후에 천광공도 무사를 중시한 것을 알 수 있다. 천광공이 5년간 풍월주로 있는 동안 낭정이 무사로 많이 돌아갔다는 것으로 그러한 사정을 확인하게 된다.

3 화랑도가 익혔던 향가(鄕歌)와 노래들

23세 풍월주 군관공의 아버지 동란공은 음성서(音聲署)의 장으로 향가를 잘하였다고 한다.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음성서는 향가도 관장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7세 풍월주 설화랑의 낭도들이 향가를 잘하였고 속세를 떠난 청유를 즐겼다는 것은 이미 이야기 하였다. 설화랑의 낭도를 운상인(雲上人)이라 하였던 것은 옥보고가 지리산에 들어갔던 운상원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여하튼 향가를 즐겼던 화랑도가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풍랑가』·『청조가』를 비롯한 노래들은 당시 화랑과 낭도를 비롯하여 신라인들이 알고 있던 것들이다. 여기서 화랑도들도 많은 노래를 불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4 화랑도의 주행천하(周行天下)

화랑도들이 산수에 놀러 다녔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유신공 또한 풍월주가 되기 전에 지혜와 용기가 있는 낭도를 뽑아 천하를 주행(周行)하고 고사(高士)들과 결속을 맺었으며 중악에 들어가 노인에게 비결을 받았다고 한다. 그 때 신변에는 늘 신병들이 좌우에서 호위하였다고 한다. 그가 돌아오자 호림공이 풍월주의 지위를 물려주었다. 그런가 하면 풍월주의 지위를 물러난 유신공은 열국을 순행하여 뜻과 기개가 있는 사람들을 모집하여 삼한을 통합하였다고 나오고 있다.

화랑이나 풍월주가 천하를 주행할 때 낭도들도 따랐다. 화랑도는 군현으로 나갔던 것이다. 이는 천하를 주행하는 것이 단순히 놀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화랑도들은 후일 관직을 갖고 활동을 할 때를 대비하여 정보를 얻기 위하여 신라의 지방을 주류하였던 것이다. 화랑도의 주행천하는 지방낭정을 돌보는 길이기도 하였을 것이다. 또한 신라의 제사가 전국적으로 행하여졌다. 지방의 화랑도가 지방에서 행해지는 국가 제사를 담당하였을 가능성이 있지만 풍월주들이 나라 안을 돌아다니며 그러한 제사도 지낸 것은 아닐까 짐작하여 본다.



1 화랑도와 전쟁

『화랑세기』는 저술 목적이 따로 있었다. 그렇기에 화랑도들이 전쟁에서 벌인 활동에 대해서는 기록이 거의 없다. 실제로 화랑도의 구체적인 전쟁 장면은 찾을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20세기에 만들어진 순국무사로서의 화랑도상을 갖고 있는 연구자들이 『화랑세기』를 위작이라고 할 정도다. 화랑 중에는 풍월주가 되기 전부터 전쟁에 나가 공을 세운 사람도 있다. 문노가 그 예가 된다. 문노(538~606)가 진지왕에 의하여 국선이 된 것은 576년이었고 풍월주가 된 것은 진지왕이 폐위 된 후인 579년이었다. 문노는 554년에 유신공의 할아버지 무력(武力)을 따라 백제를 쳤다. 555년에는 북한(北漢)에서 고구려를 쳤다. 557년에는 국원에서 북가야를 쳤다. 모두 공이 있었으나 보답을 받지 못하였다고 한다. 세종이 진흥왕에게 말하여 급찬의 관위를 주었으나 문노는 받지 않았다. 그렇더라도 유신공이 삼한을 통합하고 나서 문노를 사기(士氣)의 종주로 삼았던 것은 의미가 있다. 문노가 화랑으로 있으며 전쟁에 참전하여 공을 세운 것은 화랑도의 사기를 세운 중요한 사건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사다함은 16살의 나이로 전쟁에 나가려 하자 왕은 그가 어리기에 허락하지 않았다. 실제로 13·14살에서 18·19살까지의 낭도들은 동도(童徒)로서 전쟁에는 참전할 수 없었던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화랑도들이라 하여 전쟁에 참전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평도와 대도는 전쟁에 동원될 나이였던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평도나 대도는 관직을 가지기도 하였고 전쟁에 나가기도 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2 반란 진압에 나선 화랑도

왕국 신라에서는 반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다. 『화랑세기』에는 반란 진압에 화랑도가 공을 세운 예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선덕과 진덕 두 여왕의 즉위 과정에 있었던 반란의 진압에 관여하였던 화랑도들을 볼 수 있다. 『화랑세기』에는 17세 풍월주 염장공이 선덕공주에게 몰래 붙어 칠숙의 난을 다스리고, 그 공으로 발탁되었다고 한다. 선덕이 즉위하자 조정에 들어가 조부(調府)의 장관인 영(令)이 되었다고 한다. 24세 풍월주 천광공은 풍월주로 있을 때 반란 진압에 공을 세운 바 있다. 선덕왕 대에 국사가 어지러워졌는데, 풍월주 천광공이 거느린 화랑도는 궁마를 익히고 무사로 돌아가 있었다. 비담이 난을 일으켰을 때 신라 왕경에는 군사가 적어 천광공이 화랑도를 모두 동원하여 비담의 진으로 돌격하여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운 것이다. 천광공은 그로 인하여 호성장군으로 발탁되었다. 이로써 화랑도가 유사시에 군대의 임무를 수행한 것을 확인하게 된다.

3 반란을 일으킨 화랑도

그런데 화랑도는 왕·왕정을 수호하기 위한 반란 진압에만 공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 화랑도들이 주도적으로 반란을 일으킨 일도 있다. 흠돌의 난이 그 대표적인 예다. 『화랑세기』에는 흠돌의 난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흠돌은 일찍이 후일 문무왕의 왕비가 된 자의의 아름다움을 듣고 첩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자의의 어머니 보룡이 막았다. 얼마 안 있어 보룡이 당원전군을 낳았는데 흠돌이 사람들을 시켜 보룡의 추함을 떠들게 하여 위협하였다. 그런데 흠돌은 무열왕(김춘추)이 보룡을 총애하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자의가 태자 법민(문무왕)의 비가 되자 자의가 덕이 없다고 험담을 하여 궁지로 몰았다. 그 때 흠돌이 문명황후의 조카로서 권세가 내외를 압도하였다. 자의는 마음을 졸이고 조심을 하였다. 흠돌은 문명왕후를 설득하여 자의가 후일 왕후가 되어 그 아들을 태자로 세우면 대권이 진골정통에게 다시 돌아갈 것이기에 가야파는 위태로울 것이라 하고 태자의 첩으로 되었던 유신공의 딸 신광을 태자비로 삼으라고 한 바도 있다. 흠돌 등이 일으킨 반란의 전개와 진압에 대한 기록이 『화랑세기』에 있다. 흠돌의 난에 가담하였던 주동자들은 풍월주나 부제를 지낸 자들이었다. 그리고 난에 동원된 병사들은 시위삼도가 중심이었는데 그들은 흠돌 등의 낭도들이 중심이 되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흠돌의 난은 상선과 상랑 그리고 풍월주가 가담한 반란으로 화랑도가 중심이 된 반란이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다.

4 왕의 폐위에 가담한 화랑도

579년에 있었던 진지왕의 폐위사건에 화랑도가 가담한 것을 볼 수 있다. 문노는 진지왕의 폐위에 가담한 공으로 아찬이 되었고 골품을 얻을 수 있었다. 흔한 일일 수는 없으나 화랑도가 왕의 폐위에도 개입한 것을 볼 수 있다. 화랑도는 언제든 군사적 세력으로 될 수 있었기에 그러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1 신들의 나라, 신국의 화랑들

신라인들이 신라를 신국(神國)이라고 불렀다. 신국에는 많은 신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죽은 사람들을 시조묘·신궁·사당 등에 모셔 놓고 신으로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한 신들도 격을 달리하였다. 그것은 살아있는 신라인들이 골품제의 규제를 벗어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화랑세기』가 나오기 전까지 신궁에 누가 또는 무엇이 모셔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위의 기록을 통하여 신궁에 법흥왕과 옥진의 상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다. 신궁에는 아시공의 상도 모셔져 있었다. 아시공은 하종의 어머니인 미실의 할아버지가 된다. 아시공은 비처왕의 마복7성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어쩌면 신궁에는 내물왕을 비롯한 김씨 왕들이 모셔졌는데 각 왕들과 관련이 있던 사람들 또한 모셔졌을 수 있다. 화랑도가 찾아간 곳은 신궁만이 아니라 능침도 있었던 것이다. 강조해야할 사실은 생각보다 많은 사당이 만들어졌던 것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그러한 사당에 화랑도들이 찾아가서 절하고 기도한 것으로 짐작된다. 한 마디로 신라는 신들의 나라였다

2 신선의 진도(眞道), 우주 청원(淸元)의 기를 찾는 화랑도

『화랑세기』에는 화랑들이 신선의 진도를 구하고자 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미생랑과의 갈등을 겪었던 화랑 대세는 비보랑의 보살핌을 입어 발분하고 힘써 공부하여 신선의 진도 즉 참된 도를 터득하고자 하였다. 대세는 벗인 구칠과 더불어 바다를 건너 서쪽으로 갔다. 구칠 또한 비보랑의 화랑이었다. 두 사람이 떠나자 비보랑의 심복 낭도들이 많이 불안해하였다고 한다.

화랑도들이 얻고자 하였던 신선의 진도는 무엇일까? 20세 풍월주 예원공이 648년 춘추공을 따라 당에 간 바 있다. 그 때 당의 유향이라는 사람이 예원공에게 여러 가지 질문을 하였다. 그 중 신선(神仙)의 도(道)에 대한 것도 있었다. 예원공은 보종공이 그 도를 능히 얻었다고 답하였다. 16세 풍월주 보종공 조에는 유신공이 낭도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선(仙)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보종형공을 따라야하고, 나라를 지켜 공을 세우려면 마땅히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 하였던 것으로 나오고 있다. 보종공의 무엇이 신선의 도와 관련이 있을까? 신선의 도를 얻는 것은 다름 아니라 우주의 진기를 깊이 살펴 어조·화목이 끊임없이 생기는 이치를 터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결과는 편작의학을 갖추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신라인들이 말하는 신선은 어떤 존재였을까? 앞에서 이야기한 우주 청원의 기나 우주의 진기는 구도의 결과 얻을 수 있는 것이었고 진생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이 화랑들이 얻고자 하였던 신라인들이 구한 신선의 도였다. 그러한 신선의 도는 신라에 일찍부터 자리 잡았던 샤머니즘 등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리고 아직 이 같은 화랑들의 신선의 도를 중국의 신선사상이나 도교와 연관시킬 준비가 안 되어 있다. 신선이라는 같은 용어를 쓴다고 하여 신라인이 생각하는 신선과 중국인들이 생각한 신선을 단순 연결시켜야 할지도 자신이 없다. 만일 그것이 같았다면 648년 유향이 예원에게 신선의 도에 대하여 물었을 까닭이 없다. 그 때까지 신라의 선도는 노장사상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렇기에 유향이 도교가 아니라 신성의 도를 물은 것이라 생각된다. 한편 신라에는 국초부터 신선의 도에 대한 사상이 널리 퍼져있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화랑세기』의 서문에 화랑은 선도(仙徒)라고 한 것을 통하여 그러한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3 화랑도와 불교

화랑도에 승려가 있었던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원화를 폐지하고 풍월주를 설치한 진흥왕 원년(540)에는 이미 왕실불교가 자리 잡았다. 화랑도들도 그와 같은 불교와 무관할 수 없었다. 『화랑세기』에 생각보다 적지 않은 불교관련 자료들이 들어 있다. 원광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 중 불교의 약사불이 등장한 것은 의미가 있다. 이로서 당시 불교가 받들어진 것을 알 수 있다. 이화랑과 숙명공주는 일찍부터 불교와 관계가 깊었다. 『화랑세기』에 7세 풍월주 설화랑이 양위를 하고 미실을 따라 영흥사에 갔던 것으로 나온다. 설화랑은 수도(手徒)를 택하여 미실이 출입하는 것을 호위하여 사신두상이 되었다. 후에 설화랑은 미륵선화라는 이름을 더한 바 있다. 설화랑의 경우 화랑도에 불교를 끌어들인 흔적은 찾기 어렵다. 596년 풍월주의 지위를 물러난 보리공은 상선의 지위에 있으며 불문에 몸을 바쳐 원광법사를 도왔다. 김대문이 지었던 『고승전』에 보리공의 전기가 있다고 한다. 보리공에 이르러 불교가 화랑도와 관련이 시작되었다.

화랑도와 불교가 깊은 연관을 가진 것은 14세 풍월주 호림공 때부터였다. 14세 풍월주 호림공은 보리공에게 나아가 계를 받았다. 이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실제로 그로 인하여 선불 즉 화랑도와 불교가 융화하게 되었다고 한다. 호림공은 천부관음을 만들어 아들을 기원하여 선종랑(자장)을 낳았는데 자라서 율가의 대성인이 되었다고 한다. 공은 부처를 숭상함이 더욱 깊어졌다. 이에 유신공에게 양위를 하고 스스로 무림거사라 불렀다고 한다. 호림공이 풍월주로 있을 때 화랑과 낭도들이 불교를 믿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21세 풍월주 선품공은 선불에 통달하였다고 한다. 22세 풍월주 양도공도 부처를 숭상하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한다. 양도공의 세 아들과 두 딸이 사문의 노비가 되었다고 한다. 신라의 왕실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후 화랑도들이 불교를 믿기 시작하였다. 이는 신라 불교의 성장에 화랑과 낭도들이 적지 않은 역할을 하였음을 말해준다

1 사적인 활동-사신(私臣)이 된 화랑들

낭정의 운용과 관련된 국법이 있었다. 『화랑세기』에는 도두 세기의 처 도리를 처벌하는 과정에 양도공이 도리를 잡아다 볼기를 치려할 때 도리가 한 말이 있다. "첩의 죄가 비록 중하나 효장과 유장의 어미입니다. 국법에 선종(仙種)을 낳은 여자가 볼기를 내놓고 매를 맞는 도리는 없습니다" 하였다. 이 말을 통하여 국법에 선종을 낳은 여자에 대한 처벌 규정까지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 당시 신라에는 그 외에 많은 법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2 공적인 활동-화랑도와 관위·관직

신라에서는 나라를 위하여 일하는데 대한 보수를 주기 위한 기준으로 관위를 설치·운용하였다. 그리고 관직에 임명됨으로 왕정의 업무를 담당할 수 있었다. 화랑도는 관위와 관직과 어떤 관계에 있었을까? 화랑도는 왕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동도의 경우 그 가능성이 적었으나 평도나 대도는 왕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 과정에 관위와 관직과 관계가 생겨났다. 여하튼 신라의 화랑도들은 나라를 위하여 일할 때 관위와 관직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퇴임 화랑도가 갈 길은 정해진 것이 없었다. 그들은 다양한 활동을 하였다. 낭도의 경우 대도로서 30살이 되면 병부에 속하거나, 농공(農工)에 종사하는 일로 돌아가거나 향리의 장이 되었다. 낭도 중에는 낭두로 올라가는 길도 열려 있었다. 한편 13세 풍월주 용춘공은 퇴임 후 조정에 들어가 요직을 거치며 대사(大舍) 이하에 재능 있는 낭도들을 많이 등용하였다고 한다. 그로 인하여 낭도로서 등용된 자들이 또한 용춘공을 위하여 모두 목숨을 바치기를 원하였다고 한다.

한편 12·13살의 빼어난 진골 및 대족의 자제로서 속하기를 원한 자들이 될 수 있었던 화랑들의 갈 길은 또 달리 마련되어 있었다. 물론 화랑도에서 퇴임한 화랑들은 상랑이나 상선이 되어 낭정에 간여하기도 하였다. 보리공 같은 사람은 조정에서 중용하려 하자 화랑 세습 가문으로 족하다고 하여 왕정에 참여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풍월주와 화랑들은 왕정에 참여하여 관위를 받고 관직을 차지하였다. 퇴임한 풍월주들은 왕사에만 몸을 바친 것은 아니었다. 7세 풍월주 설화랑은 영흥사로 간 미실을 호위하며 사신두상이 되기도 하였다. 12세 풍월주 보리공은 퇴임 후 불문에 몸을 바쳐 원광을 도왔다고 한다. 14세 풍월주 호림공은 퇴임 후 조정의 일에 간여하지는 않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