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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대한인 2013. 12. 27. 04:58

   

   여행보다 훌륭한 스승은 없다. 그 중에서 우리의 문화를 찾아가는 여행은 바로 우리의 길을 찾는 소중한 작업이다.
  20세기 근.현대화의 열병을 치르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잃었다. 또한 스스로 왜곡된 우리 자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선명히 보면서도 오늘을 변명하며 적당히 불의와 타협하면서 마침내 나의 모습과 우리의 존재 이유를 망각한 채 오늘을 산다.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우리는 문명의 이기와 편리만을 좇아 달려가면서 모르는 사이에 나의 생각과 길을 다 잃고만 것이다.
  문명으로 희미해진 옛 길을 더듬어 찾아 다음 사람에게 즐거움으로 환한 길을 열어 주며 우리의 정신을 찾는 여행을 떠나자.

 

금강산 탐방

   11세기 중국의 시인 소동파는 "願生高麗國 一見金剛山(원생고려국 일견금강산)" -일생에 고려의 금강산을 한 번 보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노래하였다. 그리고 스웨덴의 국왕 구스타프는 금강산을 일견하고 "하나님께서 천지창조하신 엿새 중에서 마지막 하루는 오직 금강산만을 만드는데 보내셨을 것이다."라고 하여 더 이상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찬사를 남겼다.
   언제나 우리가 가야할 산하,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담겨있는 금강산은 세상사 아랑곳없이 그대로의 자태로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단 50여년만에 영상으로 밖에 볼 수 없었던 북녘의 금강산을 내가 직접 대한다는 것은 다녀온 지금도 꿈만 같다.
   1999년 1월 18일. 그 어떤 여행보다도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중학교 다니는 딸 해원이와 함께 아침 일찍 동해시로 출발하여 먼저 두타산 무릉계곡에 있는 삼화사를 참배하고 동해항으로 향했다. 멀리 정박해 있는 유람선 봉래호가 보이니 마음은 더욱 설레인다.
   외국으로 갈 때처럼 세관검사를 마치고 봉래호에 올라 저녁 6시가 되어서야 출발한 유람선은 공해상에서 장장 12시간을 보내며 거슬러 오른 뒤, 19일 오전 6시가 지나서야 북한의 군사항인 고성(장전)항에 정박하였다.
   새벽 어둠이 걷히면서 봉래호 난간에서 바라본 항구는 육지가 빙 둘러싼 천혜의 요새와 같고, 고성 읍은 우뚝 솟은 외금강 천불산 아래 부연 안개에 잠긴 채 70년대 분위기의 회색도시가 눈에 들어온다. 항구에는 군함과 경비정들이 정박해 있고 마을 확성기에는 아침 선전구호가 울리고 있다. 날씨는 한겨울인데도 영상 9도의 포근하고 쾌청한 날씨다. 멀리 높은 산에는 흰 눈이 쌓여있다.
   모두들 이 낯선 풍경에 긴장하면서도 잔뜩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금강산으로 가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절차를 또 거쳐야 했다. 북한측 세관을 통과하고 물품 검사를 받아야 하는 거이었다. 나는 매번 군복을 입은 기관원으로부터 카메라 검사를 받았다. 작은 카메라가 아니고 수동식 큰 카메라여서 면밀히 검사를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름다운 북녘의 산하를 사진에 담아 학교에서 전시회를 열고자 하는 생각으로 준비를 했다.
    세관 검사에 잠시 긴장은 되었지만 금강산이 가까이 있다는 생각과 멀리 봉우리들이 보이는 곳이라 마음은 오히려 담담하고 가벼운 느낌이다.
   버스에 올라 외금강 온정리를 향해 출발하니 주변 도로를 정리 중인 근로자들이 반갑게 손을 흔든다. 마무리 공사가 한창인 북한 1호 현대 주유소 '오일뱅크' 앞을 지나면서 길 좌우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고, 200m마다 군인들이 권총을 차고 부동자세로 서서 우리를 주시하고 있다. 이 길은 관광객 차량만이 다니는 새로 만든 길이다. 주민들이 다니는 길은 아래쪽 도로인데, 이따금 짐을 지고 부지런히 걸어가는 사람들이 보이고 논에서 썰매를 타던 아이들이 우리가 탄 차를 향해 달려오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 일행은 모두 아무 말 없이 반갑고 감동적인 심정으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오가는 북한 주민들과 마을,집,아이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고, 보이는 모든 것이 낯설게 느껴져 사소한 것에도 눈을 뗄 수가 없는 것이다. 궁금한 것은 철조망 안으로 드나드는 남조선 인민들을 이곳 주민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온정리 마을과 우뚝 솟은 수정봉을 바라보며 김정숙 별장을 지나가니 바로 금강산 계곡으로 접어드는 길이다. 창터 솔밭의 울창한 미인송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붉은 빛이 감돌며 쭉쭉 하늘로 솟은 미인송의 자태는 우리가 흔히 보는 구불 구불한 소나무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문필봉 아래 한국전쟁 때 불타고 지금은 3층석탑과 주춧돌만 남은 신계사터는 내려오는 길에 들리기로 하고 주차장에서 내려 신계천을 따라 올라가니 장마 폭우에 뒤집혀진 오선암이 발아래 있고, 멀리 깊은 계곡을 뒤로 하고 지금은 잠겨있는 휴게소 목란관이 보인다.
   계곡을 따라 오르니 물은 얼음으로 덮여있지만, 얼지 않은 곳의 물빛은 비취 빛이고 얼음 또한 투명하기가 마치 수정 같다. 계곡이 깊어질수록 멀리까지 바라볼 수 있는 것이 겨울 등산의 참 맛이다. 여름에는 하늘이 안보일 정도로 녹음이 시야를 가릴 것이니, 지금은 겨울 금강산의 속살이 들여다 보이는 계절이다.
  산은 온통 화강암으로 그 웅장함에 압도당하여 조마조마한 가슴으로 오를 뿐이다. 한참을 올라 옆 바위산을 바라보니 '주체,자강,자주' 등 구호와 김정일, 김일성을 찬양하는 거대한 글씨들이 바위에 새겨져 있다. 산을 오르면서 이 곳이 북한 땅임을 깨닫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글씨들 때문이다.
   오를수록 계곡은 좁아지지만 왼쪽 오른쪽 그리고 하늘을 봐도 웅장하고 기묘한 바위산들이 늘어서 있다. 사람의 발길을 거부하는 듯 세찬 바람이 계곡을 흔들며 휘몰아치고, 세존봉과 아득한 능선에 쌓였던 눈발이 날리기 시작한다.
   다리를 건너 뒤를 바라보니 바위벽에 김일성이 쓴 '지원(志遠)'이라는 붉은 글이 보인다. 위쪽 평평한 바위가 앙지대인데 우리가 밟고 있는 바위에는 수많은 유람객들이 남긴 글씨들로 가득했다. 이 가운데는 조선시대 풍속화가인 단원 김홍도의 아들 긍원(肯園) 김양기(金良驥)와 문하생 김하종(金夏種)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전방의 기기묘묘한 바위산과 아득한 능선을 조망하기 좋은 이곳에 쉬면서 족적을 남긴 것이리라.
   완만한 계곡을 끝없이 오르니 산삼과 녹용이 녹아 흐른다는 삼록수도 얼어붙어 있고, 그 옆 바위에는 김일성이 직접 삼록수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 그 기념물을 북한 관리원이 지키고 있다. 이렇듯 금강산에는 400여곳에 달하는 어록 및 선전 구호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특히 김일성, 김정일이 다녀간 곳이나 교시, 어록이 새겨진 곳은 기념물로 조성하여 신성시 하고 관리원이 나와 엄격히 지키고 있다.
   만경다리를 건너면 큰 바위 문을 지나는데, 이곳이 옥류동 구룡연으로 가는 금강문이다. 이 바위 문을 지나면 탁 트이는 계곡이 드러나고 평평한 무대 바위를 지나 지금은 얼어붙어 볼 수 없으나 겨울이 지나면 비취색의 옥구슬 같은 물살이 고인 옥류담, 연주담이 나타난다.
   구룡폭포를 보려는 조급한 마음에 발길을 더욱 재촉하는데 오를수록 좁은 바위 길이 얼음에 덮혀 있어서 등산화에 아이젠을 차고 걸으니 쇠굽에 찍히는 얼음과 바위가 신음소리를 내듯 계곡을 울려 마음과 발걸음이 오히려 가볍지 않다.
  거대한 바위 절벽 사이로 점점 좁아지며 경사진 길을 따라 오르다 문득 고개를 드니 구룡폭포앞 관폭정 지붕이 보인다. 폭포를 감상하기에 적격인 누각 오른쪽으로 절벽의 높이가 100m 이상인 곳에 폭포의 길이만 82m나 되는 웅대한 구룡폭포가 나타난다. 지금은  겨울이라 폭포의 긴 줄기가 얼음에 덮여있어 고요하지만 물살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면 천둥소리가 온 산을 울렸을 것이다. 폭포 옆 절벽에는 미륵불(彌勒佛)이라는 큰 글씨가 새겨져 있다.  
   1919년 서예가 김규진이 쓴 글씨로 한 획의 길이가 13m나 되어 글씨 안에 사람이 들어가 누워도 될 정도라 한다. 아무리 예술적이고 불심이 담긴 글이라 해도 억겁 세월 자연의 예술을 바라볼 줄 모르는 인간의 오만함이 드러났을 뿐이다. 잠시 쉬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이곳 위쪽으로 더 길을 따라 오르면 상팔담과 마의태자릉으로 가는 길이고 금강산 최고봉인 비로봉에 오를 수 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아쉬워하며 구룡폭포에서 내려오니 휘몰아치는 설풍이 더욱 거세어 몸을 가누기조차 어렵다.
   금강산은 비단처럼 아름다운 산이 아니라 금강석같이 단단하고 웅장한 강건체의 문장으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산이다. 화강암의 거대한 숨결 앞에 사람의 오만함과 이념따위가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누구라도 말을 잊고 조용히 산을 내려 올 뿐이다.
   주차장으로 내려오며 얼어붙은 삼록수 한 모금 마시고 신계사터로 향했다.  유점사,장안사,표훈사와 더불어 금상산 4대 명찰의 하나였던 신계사는 지금 주춧돌과 3층 석탑만을 남기고 6.25 동란 중 사라졌다.1920년대의 온전한 신계사 사진을보면 또 다시 역사의 허망함이 밀려온다. 우리 나라 불교계에서 신계사 복원을 위해 북한측과 협의하고 있다는 말이 있으나 이미 수 백년의 긴 호흡은 끊어지고만 것이다.
                           다시 봉래호로 돌아오는 길에 멀리서 손을 흔드는 아이들을 보니 더욱 무거운 심정으로 한숨 지을 뿐이다. 지금은 우리밖에 다니지 않는 산,왠지 쓸쓸한 텅 빈 마음으로 돌아오는 산, 남한같으면 수많은 사람들로 붐빌 계곡이 여기선 우리들 뿐 소나무 바람소리만 가슴을 휘몰아 친다.
   한 밤중 봉래호 난간에서 고성읍의 불빛을 바라보면서 갈피가 잡히지 않는 20세기 분단의 현장을 이렇게 실감할 줄이야 !

   1월 20일(수). 어제보다는 5도 이상 차이가 나는 쌀쌀한 날씨다.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만물상을 향해 길을 나섰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다시 세관을 통과하고 버스로 온정리 금강려관을 지나가니 미인송이 좌우로 늘어서 있고 이따금 주민들이 차 옆으로 무심히 지나간다.
   구비구비 험하기로 이름난 온정령을 35인승 버스가 겨우 오르는 모습이 아슬하다. 좁고 가파른 길은 차가 교차할 수 없는 길로 한참을 오르니 육화암 주차장이 나타난다. 여기서 부터는 차에서 내려 걷기로 했다. 본래 위쪽 만상정 까지 차가 오르는데 요즘은 길이 눈과 빙판으로 덮여 걸어야 하는 것이다. 도로가 아닌 등산로를 따라 1시간 가량 오르면서 이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깨달았다. 아득한 원시의 계곡과 봉우리들을 바라보며 마치 신선이 된 듯 오르는 기분은 무엇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등이 땀에 젖고 때때로 바위에 달린 투명한 고드름을 깨물며 만상계의 깊은 골짜기를 꿈속처럼 걷고 있는 것이다.
   만상정 주차장에서 잠시 쉬고, 뒤쪽 좁은 길을 따라 오르니 왼쪽에 삼선암과 귀면암이 보인다. 만물상을 보고 싶은 마음으로 가파른 바위 길을 부지런히 오르니 온갖 형상의 바위와 봉우리가 이어진 천녀암과 도끼로 찍은 듯한 절부암이 나타난다.
   시선을 멀리 옮기면 기기묘묘한 바위가 마치 열병하듯 늘어선 만물상이 보인다. 이렇게 무수한 바위들을 바라보며 위쪽 천선대로 오른다면 만물상의 참 모습을 볼 수 있으련만 산길 공사 중이라 더 오르지 못한다고 하여 내려와야 했다.
   아득한 만상계로부터 세찬 바람이 몰아치고 희끗희끗 눈과 얼음을 이고 천년 만년 견뎌 온 바위 산들이 삭막한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그 기묘함과 산세의 장쾌함에 가슴이 시원함을 느낄 뿐이다. 바라보는 풍경마다 감탄사로 장식되는 경관을 오래오래 보고 싶으나 서둘러 내려 와야 하는 일정이 아쉬워 내내 뒤를 돌아보게 한다.
   금강산을 떠나면서 산의 일부만을 보고 금강산의 전부를 본 양 어찌 이야기할 수 있으랴. 또한 오며 가며 바라보는 북한 마을과 주민들의 일상을 마치 신기하게 바라보아야 하는 분단 시대의 아픔을 역사는 어떻게 오늘을 보듬고 이야기할 것인지 하늘을 바라보면 오늘의 우리가 슬프다 슬프다.  
 -끝-

 

      


1920-30년대의  금강산  안내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