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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도자기 상식

대한인 2013. 12. 28. 07:28

   전통 도자기 상식  

                  ※ 세계적인 우리의 문화유산인 고려청자,

           이조백자,조선분청,진사청자 바로 알기


         

  1. 고려청자 (高麗靑磁)  
고려시대에 제작된 도기와 자기.고려시대에는 선사시대에부터 발전되어 왔던 도기질 요업과 9세기경.중국으로부터 받아들인 청자 제작기술을 바탕으로 한 자기질 요업이 확대되면서 요업은 도기질과 자기질로 양분되었다.

도기질은 연질도기와 경질도기로 구분된다. 연질도기는 약 800c에서 불완전 번조하여 기명에 탄소를 침
투시킨 침탄도기로서 회색이나 회흑색을 띠며, 탄소의 작용으로 흡수성 거의 없게 된 것이다.연질의 침탄
도기는 청동기시대 후기의 흑도를 시작으로 널리 제작되었으며 삼국시대부터는 시루를 포함한 조리용기
자배기 등의 허드레그릇, 흡수성이 없는 성질을 이용해 기와 등이 제작되었으며 고려시대를 거쳐 현대까지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경질도기는 약1,100c에서 환원 번조한 것으로 흡수성이 없으며 회청색이나 회흑색을 띠며 종래에는 회청색 경질토기로 불렀다. 삼국시대에 완성된 경질도기는 항아리.병.발.접시 등
다양한 생활용기로 널리 사용되었다. 삼국시대 후기에는 경질도기에 회유를  씌운 회유도기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고려시대에 회유도기의 기술이 발전되었다.이러한 고화도 회유경질도기 제작기술로의 발전은 자기질 요업의 첫 단계인 청자제작의 기술적 기반을 형성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고려시대의 자기질 요업은 청자.백자.흑자 등 다양하지만 고려의 도자공예를 대표하는 것이 청자이다.청자는 제작기술, 장식의장과 조형성에 있어서 다른 종류의 도자기보다 뛰어날 뿐만 아니라 도자기 조형의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조선 전기까지 제작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삼국시대 후기부터 중국 월주요 청자를 받아들이면서 청자의 가치와 실용성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었다.남북국시대 신라지역의 안압지,황룡사지,미륵사지,부여 부소산 등에서 월주요 청자와 형주요.정요.백자가 발견되고 있어서 청자.백자에 대한 인식의 폭이 확대되어 갔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때에 전래된 중국자기의 기종들은 삼국시대의 것이 호.병이었던 것과는 달리 해무리 굽(그릇의 굽을 깍아낸 모양이 마치 해무리 같은 굽.)을 한 완과 대접이 주종을 이루었다.중국에서 해무리굽이 성행한 시기는 8~9세기이며 10세기로 오면 일반적인 윤형굽으로 바뀌며, 일본 회유도기에서도 10세기 이후 것에서는 해무리굽이 성행한 시기는 8~9세기이며 10세기 이후 것에서는 해무리굽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나라 초기청자 요지에서 출토되는 기종들 중 해무리굽 완의 존재는 한국 청자의 발생시기를 9세기로 추정하는 근거 자료가 될 수 있으며, 이러한 기술적 여건은 중국의 선진 자기질 기술의 도입 결과로 보는 것이다.특히 청자를 제작하는 기술 중 가마와 내화갑 등의 기술은 기존의 통일신라시대 경질도기 제작기술과 관련지을 수 없는 새로운 것으로 서 중국 월주요의 기술도입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 청자 발생은 중국 도자문화의 적극적인 영향에 의한 것이었지만 통일신라 사회가 이룩했던 청자 자체 생산의 욕구, 회유도기의 기술적 기반, 원료가 풍부한 자연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일본이나 유럽의 경우 고급기술을 받아들일 여건.즉 기술.원료 등이 마련되지 않아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8세기 늦은 17세기에, 유럽은 18세기에 비로소 자기질 요업으로 들어설 수 있었다.그러나 우리나라 청자의 조형적 요소들이 모두 중국적인 것만이 아니다.해무리굽 완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종(전접시.발.광.구병.매병.항아리 등)들은 통일신라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던 금속그릇, 칠기, 경질도기나 회유도기의 형식을 계승한 것이었다. 우리 청자가 중국도자문화의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도 한국적 조형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전 시대의 공예전통을 계승하면서 뒤떨어진 기술적 요소들을 극복하며 발전적인 방향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2.조선백자: 朝鮮白磁            
 정제된 백색의 태토로 형태를 만들고 그 위에 장석질의 투명유를 입혀1250 C의 고온에서 환온번조한 자기
사용되는 백토와 유약.구울 때의 온도와 기타 여건등에 따라 회백.유백.설백.청백.등 발색의 차이를 보인다. 백토를 이용해 기물을 만드는 것은 이미 중국의 은대(殷代)부터 시작되어 백자는 육조시대 이후 수대
(隨代)를 거쳐 꾸준히 제작되었다.그러나 당시는 도자생산에 있어서 청자가 주류를 이루었으며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는 것은 당대(唐代) 형주요 이후이다. 송의 정요(定窯)를 비롯해 원대(元代)에 이르러 경덕진요(景德鎭窯)가 크게 융성하면서 백자의 생산은 가속화 되었고 세계에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이후  명 (明).청(靑) 대에는 다양한 채색자기와 함께 백자중에서도 청화백자(靑華白磁)가 유명해 우리나라 .일본.동남아시아는 물론 유럽 각국에 전래되어 영향을 미쳤다.푸센성(福建省)덕화요(德化窯)는 지방의 백
 자가마로서 유백색의 치밀한 백자를 생산해 세계로 수출했다.

[백자의 유형] 백자는 문양장식 방법에 따라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가면에 안료를 사용하지 않고 무늬가 전혀 없거나 또는 단순한 음각.양각.투각(透刻)등의 기법으로 무늬를 넣은 것은 순백자(純白磁)또는
소문백자(素文白磁)라고 한다. 상감백자는 기면에 음각으로 무늬를 낸 다음 그 패인 홈을 자토나 점토로
메꾸어 넣어 구웠을 때 문양이 검은색 또는 회색으로 발색된 것이다.청화백자는 산화 코발트[CoO]성분
의 안료를 붓을 이용해 가면에 무늬를 그리고 유약을 입혀 구움으로써 번조 후 무늬가 청색으로 나타난다.철화백자(鐵畵白子)는 철회백자[鐵繪白磁]라고도 하는데 산화철[FeO]를 주성분으로 하는 안료로 문양을
그려서 문양이 검은색이나 짙은 갈색 등으로 발색된 것을 말하며 조선 전기에는 청화의 대용으로도 사용되었다.청화백자에 비해 문양이 서툴고 거친 것이 많으나 때로는 매우 정교하게 그려진 것도 있다.
진사백자[辰砂白子]는 산화동[CuO]을 사용해 문양을 그리거나 채색을 해 붉은색 또는 자주색을 띠는 것이다.진사는 고려청자의 소량으로 사용되었으며18세기 이후 조선백자에 자주 쓰였다.그밖에 조각칼로 깍거나 혹은 틀에 눌러 찍어서 문양이 철(凸)자 처럼 돌출되게 하는 양각배자(陽刻白磁)도 19세기 이후 일시적으로 증가했다. 또 상형백자(象形白子)라고 해 인물.동물.식물.건물 등의 갖가지 형상을 본떠 만든 것도 있다.

[한국의 백자] 우리나라에서는 통일신라시대 말엽경인 약 9세기 중반 이후부터 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현재 백자가 발견되는 고려시대 가마터로는 경기도 용인군 이동면 서리와 고려시대 요업의 중심이었던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 사당리.전라북도 부안군 보안면 유천리 등지가 있다.서리에서는 양질의 소문백자가.사당리.유천리에서는 소문.상감백자가 발견되는데 이들 고려 백자는 태토가 연질이며그 위에 얇게 유백색에 가까운 유약을 입혔다.유약은 대개의 경우 점도(粘度)가 낮아서 태토와의 밀착상태가 좋지 못해 부분적으로 떨어져나간 현상을 볼 수 있다.
        
상감백자는 상감청자와 문양이 거의 같은 양상으로 나타내며 청자와 함께 퇴보하나 조선초부터 16세기경까지 연질의 고려 상감백자 계열의 여운이 지속된다.고려의 전통을 이은  조선시대의 백자는 한편으로는 중국 원.명대 경질백자.[硬質白磁]의 영향을 받아
경질백자가 주류를 이루게 된다. 조선은 유교이념과 질서 속에서 일상 사용하는 음식기명(飮食器皿)은 물론 의례를 위한 기명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 했는데.그중 백자는<용재총화>.<세종실록>.<광해군일기>.등의 기록을 통해 볼 때 일찍부터 어용지기(御用之器)로 채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 광주군 일대에 설치했던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 사기제조자을 중심으로 가장 앞선 백자들이 만들어 졌다. 조선시대 백자의 발달을 시기적으로 구분하는 데는 학자들 간에 차이가 있으나 대략 전기.중기.후기로 나눌 수 있다.

 

3.조선분청: 朝鮮粉靑 

조선전기에 상감청자의 장식기법의 전통을 계승하여 회청색의 태토(胎土)위에 백토니(白土泥)를 상감하거나 분장한 자기. 조선전기에는 청자라 불렀지만 20세기 전반에 와서 고유섭(高裕燮:1905~44)이 '백토로
분장한 회청색의 사기'라는 의미에서 분청사기라는 명칭을 붙였다.여기서 사기(沙器)는 19.20세기전반에 일반인이 쓰던 백자들 중에서 비교적 조질(組質)을 가르키는 '상사기'(常沙器)에서 따온 것으로서 분청사기가 청자에 비하여 조질이 많았던 때문으로 생각된다. 분청사기는 유태(釉胎)나 장식기법에서 14세기의 상감청자를 계승한 것이지만,15세기 중기에 이르면 상감청자의 조형에서 벗어나 새로운 변모를 하면서 수요자 층이 확대되어 다량생산체계에 들어섰다. 즉 고려말기에 상감청자 요지는20여 개소에 불과 했지만
조선전기에 분청사지 요지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200여 개소에 이르렀다. 질적으로 양질과 조질 등 다양해졌으며 ,기종[器種].시문[施紋].기법.문양소재 등 다종다량[多種多量]생산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종류] 분청사기의 종류는 장식기법으로 분류하는데 우선 백토니로 시문하는 방법에 따라 상감분청계와
분장분청계로 나뉜다.상감분청계는 고려시대 상감청자의 기법을 계승하여 새롭게 변모시킨 것이다.우선
태토 위에 음각이나 압인[押印]을 한 다음 백토 상감한 것으로,음각을 사용한 것을 상감분청이라 하고 압인으로 상감한 것은 인화분청[印花紛靑]이라 한다.상감분청은 선[線] 상감과 면[面] 상감으로 나뉘며,상감청자의 섬세하고 조용한 문양에서 대담하고 박력있는 강한 문양으로 변모한다.1420년대에 제작된 정소 공주묘[貞昭公主墓] 출토 분청상감인화문상이호[紛靑象嵌印花紋四耳壺 :국립중앙박물관]는 문
양의 소재나 포치법[布置法]에서 이미 상감청자 유형에서 벗어나 조선적인 특징인 전면을 채우는 분청사기 특유의구도가 나타나 있다.반면에 전통적인 문양을 계승하고 있는 분청상감정통5년명연어문묘지
                  
  [紛靑象嵌正統五年銘蓮魚紋墓誌]도 제작되고 있어서 보수적 문양과 혁신적 문양이 공존했음을 알 수 있다.상감분청의 기법은 분장분청계의 새로운 기법의 유행으로 서서히 퇴조한다.인화분청은 같은 형태의 도장을 반복하여찍고 백토 상감한 것으로 양질의 인화 분청사기는 관납[官納]을 위하여 관청의 명
칭인 장흥고[長興庫].내섬시.[內贍侍].내자시.[內資侍] 등을 새긴 경우가 많이 전하고 있다. 특히 존속기간이 짧은 공안부[恭安府
1420~28] 등의 인화분청대접들은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15세기 전반에는 인화상감이 전면을 꽉 채우고 질도 고급화되었으며,상감분청과 공존했다. 16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분장분청계의 기법과 혼용되다가 16세기 중반에 소멸 되었다.분장분청계는 기명[器皿]에 우선 백토를 귀얕붓
 으로 분장한 다음 문양을 나타내기 위하여 백토를 선[線]으로 긁어 내고 바탕의 태토를 드러내면 조화분청[彫花紛靑] 면[面]으로 긁어 내면 박지분청[剝地紛靑],분장된 뒤에 철화[鐵畵]하면 철화분청이라고 한다.
또. 백토만 바르는 경우 귀얕붓으로 발라서 붓자국이 나타난 것은 귀얕분청.백토를 풀은 물에 그릇을 덤벙 담가서 백토를 쒸우는 경우는 덤벙분청이라고 부른다. 

     

  4.진사청자 : 辰砂靑磁        
   
  진사 辰砂cinnabar황화수은(Hgs)으로 구성된,수은의 주요광석물.진사다기(辰砂茶器)가마의 불의방향에  따라 녹색과 붉은색의 물결이 나타나며 우리나라에서는 18 ~19세기의것으로 수량이 적은 편이다
 녹색과 붉은색이 불길에 의해서 자연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진사청자라고 하지만 진사(辰砂)라고 한다.
 현존하고 있는 최고의 진사는 12세기의 것으로(청자진사당초문완靑磁辰砂唐草紋 )이며 영국 대영박물
관에 보관되어 있다.
 진사는 청자의 기법으로 보편화되지 못하고 전체 장식 가운데 일부나 상감문양에서 핵심적인 부분에  최소 한으로 사용하여 오히려 큰 효과를 내는데 쓰였다.이것은 녹색을 띠는 회청색의 청자 바탕에 보색의
관계를 갖기 때문에 시각적효과를 위해 절약하여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진사기법은 고려후기에는
수량이 적어지고 진사채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단지 상감문양 안에 용의 눈을 진사로 찍는 정도로 아
주적은 부분으로 사용되다가 고려말에 소멸되었다. 그러나 진사기법은 기법자체가 갖는 회화적 요소에   
 의해 조선 후기 백자의 회화적 문양을 그리는 데 다시 사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