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6군사혁명
1. 혁명 준비기
1)혁명의 원인
한국군 내부에 분 혁명에 대한 강한 열망은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크게 나누어 보면 고등교육에서 온 조국 현대화를 위한 민족주의 정신의 강화, 인사적체와 열악한 복무환경 개선에 대한 욕구, 좌파 통일운동과 사회혼란에 의한 안보 위기의식 등이 혼재되어 있었다고 할 것이다.
군인들이 미국 군사학교와 일반학교에서 조직 기술 행정 경영 등 지식 학습뿐만 아니라 국제현실을 알게 되면서 너무나 가난하고 낙후된 조국을 발전시켜야 겠다며 스스로 민족주의의자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국내 사법 행정은 여전히 일제시대에 습득한 일본어와 미군정시대 영어로 된 체제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당연히 행정기관은 미약한 생산성과 기술을 발휘하면서 인식과 전망 수준마저 낮아 군대의 질적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기에 군인들의 자신감은 넘쳤다.
(예를 들어 예산편성에서 당시 행정부는 부서별로 돈을 나누고 어디에 얼마가 소요된다는 식에 머물고 있었다. 반면에 국방대학원생들은 더 나아가 예산이 투입됐을 때 얼마만큼의 효과가 나올지 예측하고, 피드백을 통해 검증하고 개선하는 기법까지 적용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미국으로부터의 지식 도입은 한국을 영어 망국병에 들게 했다. 그처럼 가난했던 시절에 일본과는 원수가 되었기에 한국을 도와 준 미국으로부터 뭐라도 하나 더 얻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요했다. 당연히 그 당시 국비로 미국유학을 떠났던 수 많은 군인들도 일제식민지 유산을 떨쳐 버리기 위해 받아들인 미국식 기법들을 배우기 위해서는 영어가 필수였다.
이런 열등감은 나중에 영어 강제교육 실시로 표출된다. 지금은 필요에 따라 영어를 각자가 공부해야함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모두에게 강요하는 영어교육 난민사태는 너무나 과하다. 물론 오로지 취업이 목적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프랑스처럼 모국어를, 우리는 한국어에 충실해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을만큼 대한민국이 발전했다. 한국어를 세계어화 하는데 더 신경써야 할 것이다. 혁명군 중추였던 이석제가 나중에 상당할 정도로 일본식 한자와 미군정 영어로 된 대한민국 행정기록 문자를 한글화 하는데 많은 공헌을 세웠다.)
이로인해 그 당시 다른 나라들이 군사혁명의 명분으로 민족주의를 내세운데 반해 5.16군사혁명군은 보다 현실적이고 한국의 시대 상황에 맞으면서 한국에 필요했던 '조국 재건론'을 들고 나왔다.
한편 이러한 우수한 능력을 가지고 신민족주의로 변모한 군인들도 낙후된 조국의 경제적 현실 때문에 배고픔에서 벗어 날 수 없었다. 궁핍한 복무현실은 군대의 심각한 문제거리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적지 않은 장교들이 부정부패의 유혹에 빠져 비리를 저지르고 있었다. 뛰어난 군인들의 능력을 활용하기 보다는 아에 감축 정책으로 군인들을 줄이려고 하는 정부가 맘에 들리도 없었다. 이러한 정치환경은 능력상 앞서가던 군인들에게 국가미래를 위해 행정권에 강제적으로라도 참여해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 주었다.
(월급을 받아도 한 가족의 보름 정도 식량거리 밖에 되지 않았기에 많은 장교들은 숯을 구워 팔기도 했다. 영관급 장교들도 부대 내에서 점심을 굶고 식권을 '불식미 전표'로 바꿔 쌀로 교환해서 신문지에 담아다가 하루하루 식구들을 먹여 살릴 정도였다. 적지 않은 병사들이 휴가를 나가면 배고픈 부대로 복귀하지 않았다.
참고로 지금은 상황이 바껴서 지방직 공무원 과장급을 비교대상으로 삼는다면 같은 호봉수면 준위가 과장보다 실제 수령액이 더 많다.)
참모총장과 중령계급의 나이 차이가 불과 서너살 차이 밖에 나지 않은 상태라서 누적된 진급 적체는 더욱 군인들의 삶을 지속적으로 곤궁하게 만들어 평생직업 군인들마저 굶주리는 현실로 인해 변화를 모색해야만 했다.
민족주의 정신에도 눈을 뜬 군인들은 4.19시민혁명에 동조해서 시위대 진압시에도 사격명령을 어길정도였고, 새로운 시대에 대한 소망이 있었다. 일반인들보다 더 강화된 민족주의 정신은 이내 시민혁명정권의 구태의연함에 실망하게 된다.
시민혁명 정권은 불안정했고, 사회는 쉼없는 시위로 인해 혼란은 무정부상태 유형으로까지 치닫고 있었다. 시위대의 구호와 목적은 점점 사회주의화 함으로써 안보위기감는 커져 갔다. 불과 8년전까지만 해도 북한군과 직접 싸워 나라를 수호했던 군인들이 보기에는 통일을 빙자한 좌익들의 사회혼란 조장은 위태로웠다.
이런 상황에서 사상계 1960년 1월호에 실린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미상원외교분과위원회)이란 보고서는 한국 군인들의 자존심을 짓밟아 버렸다. 이 글을 읽은 군인들은 모두가 분노했다.
'지금까지 육군은 정부의 주인이 아니라 그 도구에 불과 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자유당 정부, 특히 이승만 대통령의 군부 조종 기술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정적이 될만한 사람은 실각당했고 강력한 독립성을 가진 지휘관은 냉대받았다. 만일 정부가 완전히 실패하게 되면 언젠가 한번은 군부지배가 출현하리라는 것은 확실히 가능한 일이지만 가까운 장래에 그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다.'
<1960년대 서울 일부의 모습>
2)혁명 준비
비단 박정희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혁명을 꾀하고 있었다. 군부에선 (나중에 통합되기는 하지만) 해병대 자체 혁명모의, 육군사관생도들의 모의 뿐만 아니라 민간에서도 민간인혁명을 꾀하다가 체포되기도 했다. 다른 한편에선 이범석 장군 계열인 민족청년단의 혁명시도가 있었다.
이 속에서도 박정희가 중심이 되어 육사 5기생과 육사 8기생이 주축이 된 혁명 추구세력이 가장 두드러졌다. 이들은 여러 번의 기회를 노리면서 하나 둘 혁명작전 뿐만 아니라 국정방향, 공약정책 등을 다듬어 나갔다.
그 이전에 정군운동을 주장했던 김종필, 오치성, 김형욱, 길재호, 옥창호, 김동환, 정문순, 신윤창, 우형룡 중령은 1960년 9월 10일에 정군운동에서 혁명으로 선회하기로 했다. 이들은 계획전반에 김종필, 정보담당에 김형욱과 정문순, 인사담당에 오치성, 경제담당에 김동환, 사법담당에 길재호, 작전담당에 옥창호 우형룡 신윤창으로 각기 역할을 정하기도 했다.
이들은 한신, 박병권, 박정희 가운데 한 명을 지도자로 선정하기로 하고 인물검증에 나섰다. 한신은 초기에 제외됐고, 박병권과 박정희 중에서 1940년대 좌익경력이 문제가 됐지만 가장 깨끗하다고 판단된 박정희를 선택하게 된다.
박정희가 군사혁명을 구체적으로 논의한 시기는 1960년 1월으로 포항 해병1사단장 소장 김동하와 혁명군 조직에 있어서 해병과 육군을 분담하는 것으로 결정하면서 확실해 졌다. 이후 정군운동파와 연계되어 김종필을 연락책으로 해서 육본 8기생을 기반으로 박정희가 가르쳤던 5기생들을 핵심참가인원으로 늘려갔다. 6관구사령부 대령 김재춘, 공수여단장 대령 박치옥 등이 참여하면서 조직구성의 안정적인 틀이 잡히게 된다.
(박정희는 혁명군 선정에 있어서 치밀함을 보여줬다. 내심 혁명을 결심했을 때부터 준비해 온 탓인지 거의 모든 장교들의 신상명세와 군부내 인맥, 개인의 성향과 역량을 파악하고 있었다. 미리 준비한 인물 정보를 바탕으로 쉽게 대상자를 선정해서 규합에 나섰다.
박정희가 타인에게 혁명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쓴 것은 1959년 육본군사참모부장 중장 김웅수에게였다. 이로보아 박정희가 혁명을 생각하게 된 것은 1956년 5월 15일 제3대 정부통령 선거 때 5사단장으로서 겪은 고초 때문으로 보인다. 어쩌면 1952년 5월 육본작전국장 이용문의 이승만 제거 혁명 발언의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른다.
부정선거를 실시하라는 3군단의 압박에서 예하 5사단장인 박정희도 예외는 아니었다. 비록 참모회의에서 "선거에 관한 한 지금부터 나는 사단장이 아니다"라면서 한 발 빼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부정선거가 5사단에서도 이뤄졌다.
선거가 끝난 후 소대장 1명과 병사 1명이 부정선거를 이유로 월북한다는 편지를 남기고 넘어가 버렸고, 소위 조규동은 출장명령서를 위조해 조선일보를 찾아가 부정선거 양심선언을 해버렸다. 이로인해 박정희는 1956년 7월15일 진해 육군대학교 학생 신분으로 추락해 버렸다.
참고로 박정희의 군 인사기록은 다음과 같다.
1946.9.24 - 조선경비사관학교 입학
1946.12 - 소위 8연대본부 작전참모대리(춘천)
1947.9.27 - 대위 조선경비사관학교 1중대장(서울)
1948.8.1 - 소령 조선경비사관학교 1중대장, 직위해제(1948.8. 육사생도 사고사 발생), 빨치산 토벌군사령부의 작전과(10월, 전남 광주), 여순반란'병력제공죄'로 파면(1949.4) (토벌사령부 작전참모라는 명칭은 박정희 기자회견 내용 보도한 평화일보 1948.11. 10)
1950.7.14 - 소령복직 육본정보국 전투정보과장(수원)
1950.9.15 - 중령 9사단 초대 참모장(10.25,대전)
1951.4.15 - 대령 육군정보학교 교장(5.25,대구), 육본 작전교육국 작전차장(12.10,대구), 포병학교 입교(1952.10,전남 광주), 2군단 포병단장(1953.2,전남 광주), 3군단포병단장(5.9,양구)
1953.11.25 - 준장 오클라호마 포트 실 육군포병학교 입교(1954.1), 2군단 포병단장(1954.7,전남 광주), 포병학교장(10.18,전남 광주), 5사단장(1955,양구), 5사단장 해임(1956.7.15), 육군대학 입교(진해)
1958.3 - 소장 7사단장(인제), 1군단사령부 참모장(1958.6.17,원주), 6관구사령관(1959.7.1,서울), 군수기지사령관(1960.1.21,부산), 1관구사령관(7.28,전남 광주), 육본 작전참모부장(9.10,서울), 2군부사령관(12.8,대구)
1961.8.10 - 중장
1961.11.4 - 대장
1963.8.30 - 예편)
혁명성격의 모색
"4.19학생 혁명은 표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타도하였지만 5.16혁명은 민주당 정권이란 가면을 쓰고 망동하려는 내면상의 자유당 정권을 뒤엎은 것이다." - 국가와 혁명과 나
"~ 정국은 난마와도 같이 헝크러지고 걷잡을 수 없이 혼란과 무질서만을 노정하고 국민들의 실망만 커가고 있다. ~ 이 정권 하에서 국민들의 원성의 대상이 되었던 자 또다시 고개를 들고 거리를 활보하며 세태를 비웃는다.
가도가도 시관이 보이지 않는 정국의 불안정, 국민생활의 궁핍, 도의의 타락, 윤리의 문란 이러한 도정을 줄달음질 친다면 그 다음에 올 것이 무엇일까. 공산당의 독소가 침투되고 잠식하기 쉬운 병약적인 사회 즉 공산당의 밥이 되는 길 밖에 더 있겠는가.
동포여! 겨레여! 과거 우리 조상들이 저지른 과오를 우리 다시 범할 것인가. 진실로 조국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우리 후손을 사랑하거든 우리 이제라도 늦지 않으니 사월혁명 정신을 다시 상기하고 젊은 학도들의 조국애의 대정신으로 돌아가자." - 박정희 개인적인 메모
"국가를 지도하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우선 두 가지 문제에 근본적인 대안을 가져야 합니다. 우선 국민들이 배고프지 않게 밥을 먹이고, 그 다음에 나라를 자기네 힘으로 지키게 하는 것이 통치의 근본입 니다." - 이석제와의 대화.
1960년 5월 27일 발생한 터키의 케말 파샤 군사혁명이 가장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60년 5월27일 터키 군부가 멘데레스 정권을 타도하고 터키 근대화를 목적으로 한 군사혁명을 일으키자 터키국민들이 대대적으로 환영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이집트의 나세르 군사혁명, 미얀마의 네윈 군사혁명 등이었다. 혁명후 정권의 민간이양 공약은 미얀마의 네윈 군사혁명의 영향이다.
(특히 반공을 강조했던 것은 6군단포병대를 비롯해 북한 출신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북한에 대해 극도의 불신감을 갖고 있었다. 또한 4.19정권에서 사회혼란은 좌익의 시위로 극에 이르렀다.)
1961년 4월 19일 기념일 목표 작전계획
4.19혁명 1주년 기념식이 대규모 폭력시위로 확대된다는 것을 전제조건으로 삼았다. 시위가 확산되어 폭동으로 변하면 장면내각이 군대를 동원할 것을 가정한 것이다.
작전명 '비둘기'로 6관구사령부 작전참모 중령 박원빈이 계획을 수립했다. 1단계로 시위가 폭동화 될 시 헌병대 5개 대를 투입한다, 2단계로 서울근교 주둔 30.33사단과 제1201건설공병단을 동원한다, 3단계로 1군 예하 1~3개 사단 및 해병대와 공수단을 충원한다로 되어 있다.
1961년 3월 6일부터 11일까지 이 작전계획에 따라 서울 한강변에 지휘소(CP)를 설치하고 훈련을 실시했다. 7일에는 박정희 2군부사령관 자격으로 영등포 6관구 사령부로 시찰을 나와 검점하기도 했다.
2. 혁명 작전전개와 완료
혁명 참여 인물 (가나다 순)
장교 250여명, 병사 3,500여명
행정반조직
이석제(중령 육본 군수참모부과장) 등.
행정 공보 선전
김종필(예비역 중령), 이낙선(소령 육본), 이원엽(대령 육군항공학교장), 이주일(소장 2군 참모장) 등.
작전반조직
박원빈(중령 6관구사령부작전참모) 등.
연락책임
오치성(대령 육본) 강상욱(중령 육본) 등.
출동 감독
장경순(준장 육본교육처장) 등
경호책임
한웅진(준장 육군정보학교장) 등
특수임무
김형욱(중령 육본), 박종규(소령 박정희부관), 오치성, 옥창호(중령 육본), 유승원(대령 육본) 등.
정치정보 수집과 정보공작
장태화(민간인)
작전조직
6군단포병단
구자춘(중령 6군단포병단 대대장), 김인화(중령 6군단포병단 대대장), 백태하(중령 6군단포병단 대대장), 문재준(6군단 포병단사령관), 신윤창(중령 6군단포병단 대대장), 정오경(중령 6군단포병단 대대장), 홍종철(대령 6군단 작전참모) 등.
해병단
김윤근(준장 해병1여단장), 문성태(중령 해병여단 통신참모), 오정근(중령 해병 대대장), 정세윤(대령 해병제2훈련소장), 조남철(중령 해병단 부연대장), 최용관(중령 해병대 인사참모) 등.
1공수여단
김제민(중령 1공수단대대장), 박치옥(대령 1공수단장), 차지철(대위 1공수단), 중대장(11명)특공대 등.
33사단
박계성(소령 33사단102연대), 백대숙(소령 33사단101연대), 오학진(중령 33사단 작전참모), 유기홍(소령 33사단100연대), 이병엽(대령 33사단연대장), 채희덕(소령 33사단) 등.
30사단
강오현(소령 30사단 헌병부장), 문정식(대령 30사단 부사단장), 이백일(중령 30사단 작전참모) 등.
제1지휘소 구축(6관구사령부)
계충의(소령 6관구사령부 본부사령), 김재춘(대령 6관구사령부 참모장), 서상린(중령 6관구 공병대대장), 황산웅(대위 6관구사령부 수송관) 등.
전방안정조직
1군사령부 - 김덕윤(소령), 김홍래(중령), 심이섭(중령), 박승옥(중령), 엄병길(중령), 오인태(소령), 이종근(중령), 조창대(중령) 등.
5군단 - 박임항(중장 5군단장), 이종학(중령 5군단작전참모) 등.
6군단 - 박배근(중령 6군단), 홍종철(대령 6군단) 등.
1사단 - 한윤찬(중령 1사단작전참모) 등.
5사단 - 채명신(준장 5사단장), 정봉욱(대령 포병참모) 등.
9사단 - 전병서(중령 9사단29연대부연대장), 조주태(중령 9사단작전참모), 한병갑(대령 9사단28연대장) 등.
12사단 - 박춘신(준장 12사단장), 이희성(중령 12사단 작전참모), 정순화(대령 12사단부사단장) 등.
후방안정조직
대구지구 - 김진국(중령 2군사133공병대대장), 김학묵(중령 5관구 통신참모), 박기석(대령 2군사 공병참모), 박승규(대령 2군사 통신참모), 성도환(중령 2군사 75통신대대장), 유치헌(중령 5관구 통신운영과장), 이신득(대령 2군사 작전참모차장), 이정형(소령 2군사 의장대장), 임광섭(중령 1건설공병대장), 장동운(중령 2군사208공병대대장), 허건공(대령 2군사 통신참모차장) 등.
안동지구 - 윤태일(준장 36사단장) 등.
청주지구 - 김진위(준장 37사단장) 등.
논산지구와 훈련소 - 최홍희(소장 훈련소장), 한관흥(대령 참모장) 등.
그 외 핵심세력
길재호(중령 육본), 김동복(중령 육본 전사과장), 김동하(예비역 해병대 소장), 김동환(중령 육본), 김성룡(?), 김용건(중령 육본), 김유성(?), 김원희(?), 김재후(?), 박순권(중령 육본), 석정선(예비역 중령), 손종호(?), 송찬호(준장), 유승원(대령 육본), 유원식(중령 육본), 윤필용(중령), 안태갑(?), 이종학(중령), 이지찬(중령 육본), 이창희(?), 이형주(?), 장수영(?), 전두열(대령 육본), 정문순(중령 육군대학), 정석윤(중령), 정치갑(중령 육본), 정치신(?), 최명도(?), 최재명(대령 보병학교참모), 최주종(소장 육본 전사감), 최홍순(중령 육본) 등등.
1961년 5월 16일 혁명작전계획 (5월14일 수립)
혁명지휘부 - 박정희 등.
작전반 - 중령 박원빈 등.
행정반 - 중령 이석제 등.
연락책 - 대령 오치성 등.
작전연락 - 중령 강상욱 등.
작전반과 행정반 통합 조정 - 예비역 중령 김종필 등.
행정반 준비사항
기획자 - 이석제, 김종필
임시헌법 제정, 국가재건최고회의 구성, 재건국민운동 전개,반공태세의 실질적 정비 및 강화, 민족자주외교의 정비강화, 민족예술문화의 진흥 등.
행정관리제도 개혁, 공무원 인사제도개혁, 공무원 처우개선, 세리부패방지 등.
수출진흥과 수입시책, 중소기업 육성, 세제개혁, 원조 효율의 제고,
금융민주화, 증권시장 육성, 부정축재자 처리, 밀수근절 등.
농협의 운영쇄신과 확대, 광산개발 촉진, 산림녹화 및 조림사업 강화, 수리사업의 혁신 등.
교통질서 확립과 공중도덕 앙양, 폭력배 단속과 사회정화, 병역기피자 처리 등.
(폭력배 단속은 해병장교 두 명이 종로 깡패들에게 맞아 해병단 트럭 두 대가 출동한 사건으로 인해 추가했다.)
작전반 준비사항
작전명 - 비둘기 (1961년 3월에 작성된 것을 모태로 함)
기획자 - 박원빈(중령 6관구사령부 작전참모)
제1대 - 1공수단(1개 대대). 점령목표: 반도호텔과 총리실. 단장 박치옥 대령, 대대장 김제민 중령.
제2대 - 해병여단(1개 대대). 점령목표: 내무부, 치안국, 서울시경. 여단장 김윤근 준장, 대대장 오정근 중령, 부연대장 조남철 중령, 인사참모 최용관 소령.
제3대 - 33사단(1개 대대). 점령목표: KBS1,2방송국, 기독교 방송국, 국제전신국, 중앙전화국. 33사단 작전참모 오학진 중령.
제4대 - 30사단(1개 대대). 점령목표: 중앙청, 청와대, 시경 탄약고, 서대문, 마포형무소, 연희송신소. 작전참모 이백일 중령.
예비대 - 6군단 포병단(5개 대대). 5월16일03시40분까지 육본에 집결. 6군단 작전참모 홍종철 대령, 대대장 신윤창 중령, 대대장 구자춘 중령, 대대장 백태하 중령, 대대장 정오경 중령, 대대장 김인화 중령.
출동차량주유 15일 16시
탄약분배시간 17시
편성부대 소단위로 막사배정 18시
통신망 절단시간
출동부대 집합시간
부대출동
특수임무대 - 오치성 대령, 옥창호 중령, 김형욱 중령, 유승원 중령, 박종규 소령. 목표: 요인체포.
16일02시30분에 영등포-김포 삼거리에서 대기하다가 공수부대의 병력들을 인수받아 임무를 수행.
내무부장관 대위 김상록(육)
외무장관 대위 오필생
국방장관 대위 손기훈
무임소장관 대위 이덕기
치안국장 대위 안충인
반도호텔(장면) 작전조
엘리베이터조 대위 차지철
계단조 대위 김인식
정문계단조 대위 유국준
우측계단조 대위 장식원
좌측계단조 대위 이동웅
우측문조 대위 차병섭
경호수행조 - 한웅진 준장. 육군정보학교생 배치.
선전문 작성배포조 - 김종필, 이낙선 소령, 이주일 소장. 목표: 선전물 35만∼50만장을 인쇄해서 배포.
보도방송조 - 이석제 중령. 목표: 16일 05시에 혁명방송.
가두선전조 - 유승원 대령
항공선전조 - 이원엽(대령 육군항공학교장)
제1지휘소- 영등포 6관구 사령부, 제2지휘소- 남산KBS방송국, 제3지휘소- 용산 육군본부.
혁명자금
박정희, 김종필, 김용태는 혁명에 필요한 자금 마련에 나섰다. 박정희가 40만환, 김종필이 90만환, 이주일(2군 참모장)이 50만환, 유원석(대령)이 10만환, 길재호(중령)가 40만환, 고진영(예비역 중령)이 45만환, 김용태가 150만환, 남상옥(실업가, 타워호텔)이 5백50만환을 지원했다.
(1961년 5월14일 서울 약수동 김종락(김종필의 형) 자택에서 25명이 참석하자 1만환씩 나눠 주고 해병대엔 30만환을 분배했다.
부산일보 사장 김지태는 박정희의 방문을 의도적으로 회피해 거부했다가 혁명 후 거의 모든 재산을 탈취당하게 된다. 한양건설 사장 오인환은 자금지원 요청을 듣고는 안면있는 국회의원에게 혁명모의를 고발했다.)
<군사혁명군 서울시내 진입도>
군사혁명작전 전개
작전 개시일시는 5월 15일 밤 11시이고 완료일시는 5월 16일 새벽 3시였다.
1961년 5월 15일
오전
9시경 - 박종규 소령, 자치철 대위 및 11명 반도호텔 옆 대호다방에 은신해 반도호텔 구조파악.
- 박정희, 정문순 중령에게 민주당사 점령 임무 지시.
10시경 - 박정희, 자택에서 친서를 5군단장 박임항 중장, 5사단장 채명신 준장, 예하의 포병참모 정봉욱 대령, 작전처 조창대 중령에게 인편으로 전달.
11시경 - 박정희, 광명인쇄소사장 이학수를 만나 각 종 전단의 인쇄를 16일00시를 기해 인쇄에 착수할 것을 부탁.
12시경 - 박정희, 전남 광주에서 훈련용 경비행기 2대를 이끌고 온 육군항공학교장 이원엽대령에게 2대를 더 준비할 것을 지시함. 이원엽은 즉각 항공학교에 16일 3시까지 여의도 비행장에 도착하도록 명령함. (혁명 당일 서울 상공을 날던 4대의 비행기- 기록 필름에 담긴 비행기는 모두 이 비행기임)
오후
13시경 - 친서 전달하고 돌아 온 이낙선은 문안 정서를 시작함.
박정희, 박종규 소령에게서 반도호텔 작전계획 보고를 들음.
- 박정희, 혁명공약에 정권을 이양하고 군은 본연의 임무로 돌아간다는 제6항을 김종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추가함.
- 박정희, 국방대학원 윤태일과 송찬호 준장에게 전화해 17시까지 방문해 줄 것을 전함.
16시경 - 해병여단 실탄 준비.
17시경 - 박정희, 윤태일과 송찬호 준장을 접견하며 이한림 설득을 논의함. 참모총장 장도영 앞으로 보내는 편지를 전달해 줄 것을 말함.
장경순에게 18시까지 방문해 줄 것을 전화함.
해병여단, 서울과의 전화선 절단.
18시경 - 박정희, 장경순에게 장도영 설득과 1공수단 출동을 감독할 것을 지시함.
- 조창대, 박임항 채명신과 여관에서 만나 박정희의 친서를 전함.
20시경 - 30사단에서 이백일에게 불만을 품은 박상훈 연대장과 이갑영 참모장이 배반하고 사단장 이상국에게 B형 전투단 훈련이 쿠데타 훈련이었으며 출동과 임무를 밀고해 30사단에 비상이 걸림.
문재준, 거사일시 변동상황 없음을 확인하고 돌아감.
21시경 - 박용기 집에서 조창대, 이종근, 심이섭, 안찬희, 김덕윤, 김수만, 박용기가 모임을 갖고 박정희 친서를 낭독하고 소거.
30사단장 이상국, 이후 가족을 피신시키고 총장 장도영에게 506보안대에서 보고.
정도영, 2개 헌병중대를 30사단으로 보냄.(급보라는 소리에 장도영은 김용배 장창국과 은성에서 식사도중 506보안대로 왔다.)
장도영, 506부대장 이희영에게 박정희를 미행하라는 지시를 내려 7명을 2대의 짚차로 신당동 박정희 자택으로 보냄.
해병단, 군단 전화선 절단.
21시 30분경 - 이백일, 6관구 사령부에서 대기중이던 박원빈에게 밀고로 인해 30사단은 출동불가능하며 자신은 피신해 있다고 전화.
6관구 사령관 서종철은 계속해서 박원빈의 소재 파악에 나섬.
박원빈, 본부사령 소령 계충의에게 사령부 경계강화와 자신의 허락없이는 누구도 출입을 금지시키라는 지시후 33사단으로 향함. (30사단 상황을 설명하고 33사단은 반드시 출동하라고 확인하고 귀대.)
- 김재춘, 시내에서 경등음을 듣고 6관구사령부에 전화해 상황을 묻고 박정희에게 연락한 후 6관구 사령부로 향함. 정문에서 혁명군 장교 20여명과 합류하여 사령부내로 들어감.
- 장도영, 육본장교 20여명이 6관구 사령부에 모여 있다는 소식을 듣고 훈련을 취소하고 귀가하라고 헌병대 급파.
- 6관구 사령관 서종철은 김재춘이 혁명군인줄 모르고 헌병대가 도착하면 색출하여 체포할 것을 명령함.
22시경 - 박정희는 항공 작업복에 모자를 쓰고 권총을 차고 김종필, 박종규, 이낙선, 이원엽, 최재명 등과 함께 집을 나설 준비함.
육영수가 마지막일지도 몰라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네라며 숙제를 도와 줄 것을 간청해 50분 정도 시간을 할애함.
30사단에서 거사 비밀이 누설됐다는 전화 연락이 옴.
박원빈, 6관구사령부에서 트럭 10대를 1공수단으로 보냄.
22시 30분경 - 참모총장 정도영, 33사단에 전화해서 훈련취소 명령을 내림.
1공수단장 박치옥에게도 전화해 훈련계획을 취소하라고 명령했지만 박치옥은 예정된 육본훈련이라서 취소할 수 없다고 대답.
- 6관구 참모장 김재춘, 출동한 헌병대를 속여 사령부내 제사공장으로 유인해 넣고 혁명이 시작됐다고 설득하며 혁명군 장교 20여명에게 캘빈 소총을 분배한 후 박정희를 기다림.
22시 50분경 - 박정희, 이낙선과 이원엽 등을 먼저 보내고 집을 나서다가 박정희의 연락을 받고 도착한 한웅진 장경순과 만남.
한웅진, 박종규, 장경순, 김종필 등과 함께 두 대의 짚차에 나눠타고 6관구 사령부로 출발함.
23시경 - 조창대, 이종근, 심이섭, 안찬희, 김덕윤, 김수만, 박용기 등은 16일05시 혁명방송을 신호로 지시 받은 목표를 수행하기 위해 조창대의 관사에서 대기.
- 1공수단 김제민, 6관구에서 트럭 10대를 조달받고 특수임무조 지휘팀을 기다림.(나중에 박종규만 도착했다.)
- 장도영, 다시 6관구 사령관 서종철에게 전화해 비상을 걸고 육본 장교 해산을 명령.(장도영은 다시 은성으로 돌아가 식사를 마치고 온 후였다.)
- 박정희, 한강 인도교에 잠시 정차하여 김종필은 안국동 광명인쇄소로 향함.
박정희, 506부대 미행차량을 따돌리던 장경순과 엇갈려 영등포와 김포 방향으로 갈라지는 삼거리에서 기다리다 다시 합류함.
16일 오전
00시경: 박정희, 6관구 사령부 정문에 도착함. 근처에 숨어 있던 혁명군 장교 20여명 합류하여 사령부로 들어감.
이석제, 6관구 사령부 정문에서 입장이 저지되자 실패한 것으로 판단하여 이형주와 서류를 태우던 중 박정희와 합류.
6관구 참모장실에는 송찬호 윤태일 최재명 등 혁명군 장교 20여명이 대기하고 있었음.
장경순, 공수부대 출동을 돕기 위해 공수여단으로 향함.
00시 15분경 - 30사단과 33사단 혁명군과 연락이 두절.
- 박정희, 혁명군과 진압군이 혼재된 상황에서 6관구 부사령관실에서 진압군측 20여명에게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함.(현병차감 이광선과 중령 정명환 등이 혁명군에 가담함)
박정희, 작전처 중위 송정택에게 참모총장 장도영에게 친서를 전달하도록 지시함.
장도영, 편지를 받고 전화해 혁명 시도를 중단할 것을 강권.
- 해병여단 선두가 출발하고 차례로 트럭 60대가 출동함. 시차를 두고 탱크부대가 출발함.
02시경 - 김재춘, 박정희에게 1공수단을 지휘할 것을 건의.
장도영, 총리 장면에게 30사단 반란기도를 저지하고, 해병대와 공수단을 한강에서 저지시키고 있다는 보고를 함.(장면의 증언).
박정희, 김재춘에게 6관구 장악을 지시하고 한웅진, 이석제, 이형주, 박순권과 함께 1공수단으로 출발함.
- 장도영, 육본직할 헌병대 50명과 트럭 8대를 동원해 한강 다리를 봉쇄하라고 명령.
- 박정희, 공수여단 정문에서 김제민에게 30.33사의 이동 불가능을 설명한후 출동을 지시하고 해병단으로 향함.
1공수단장 박치옥, 망설이다 차지철을 중심으로 한 위관장교들이 강행태세를 보이자 출동.
- 박정희, 김포가도에서 해병대 출동 지휘부와 합류.
박정희, 염창교 입구에서 6관구에서 출발한 혁명군 장교 10여명과 합류해 만세 삼창으로 지나가는 출동 해병대를 격려.
박정희, 연락책에게 33사단에 가서 병력을 출동시키라고 지시.
- 해병여단 출동병력 뒤로 공수여단 출동트럭이 합류.
03시 - 6군단 포병단의 전 혁명군 병력(장교68명, 사병1,283명)이 육본을 완전 장악함. 지시대로 목표지점으로 병력이동.
- 김종필, 안국동 인쇄소에서 6군단포병단의 전개 모습을 보고 안심함.
03시25분경 - 해병대와 공수대 한강 인도교 남쪽 노량진에 도착.
순찰나온 남한강 파출소 경찰관들에게 공포탄을 발사해 해산시킴.
한강교에서 해병여단 2중대가 헌병대와 교전.(헌병3명, 대위 이준섭 등 해병대원 6명이 부상).
6군단 포병단이 헌병대 배후 기습하여 공포탄 사격으로 가세.
박정희, 교전중인 한강교를 꼿꼿하게 걸어서 도하. (혁명군에게 신뢰를 심어 준 행동)
04시경 - 장도영, 대통령 윤보선에게 신변도모 전화연락. 윤보선, 가족들 피신시키고 청와대에 위치함.
04시15분경 - 한강교 돌파해 용산으로 진입. 해병대와 공수여단 육본으로 향함.
장도영, 국무총리 장면과 대통령 윤보선에게 피신을 요청.
- 장면 부부, 주한 미대사 사택으로 이동했으나 미대사와 길이 비켜 혜화동 카르멜 수녀원으로 피신.
- 박정희, 찾아 온 신응균 국방차관보와 면담.
- 박정희, 공수여단에게 방송국 점령을 명령. 제2지휘소 남산 방송국으로 출발.
04시 30분 경 - 박정희, 공수여단과 함께 KBS라디오방송국에 도착.
공약 선전물이 도착하지 않아 안국동 광명인쇄소로 향함.
05시 - 라디오 방송으로 혁명공약을 발표함.
07시 - 박정희, 제3지휘소 육군본부로 이동.
10시 - 박정희, 청와대에서 윤보선과 면담.
<5.16군혁명정부의 경제개발계획추진. 이후 안익태는 친일파로 분류된다.>
혁명작전 완료후 조치
군사혁명위원회령 제1호 비상계엄선포
혁명정권인 군사혁명위원회는 공공안영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단기 4294년 5월16일9시현재로 대한민국전역에 하여 비상계엄을 선포한다. -단기4294년5월16일 군사혁명위원회의장 육군중장 장도영(오전 9시)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1호
군사혁명위원회령 제1호로써 대한민국 전역에 하여 단기4294년5월16일 오전9시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선포 실시하였음.
본관은 계엄법에 정하는바에 따라 국내질서의 유지와 치안확보상 필요한 한도내에서 엄정하게 이를 운영할 것임.
국민제위는 군을 신뢰하고 국가재건을 위한 혁명과업수행에 적극적인 협조를 바라면서 다음 사항을 포고함.
1 일절의 실내외 집회를 금한다. 단 종교관계는 제외한다.
2 여하를 막론하고 국외여행을 불허한다.
3 언론 출판 보도 등은 사전검열을 받으라.
이에 대해서는 치안확보상 유해로운 시사해설 만화 사설 논설 사진 등으로 본 혁명에 관련하여 선동 왜곡 과장 비판하는 내용을 공개하여서는 안된다,
본 혁명에 관련된 일절기사는 사전에 검열을 받으며 외국통신의 전제도 이에 준한다.
4 일절의 보복행위를 불허한다.
5. 여하를 막론하고 직장을 무단히 포기하거나 파괴 태업을 금한다.
6. 유언비어의 날조유포를 금한다.
7. 야간통행금지시간은 오후7시부터 다음날 아침 5시까지 이상의 위반자 및 위법행위자는 법원의 영장없이 체포 구금하고 극형에 처한다. - 단기4294년5월6일 군사혁명위원회의장 계엄사령관 육군중장 장도영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2호
단기4294년5월16일 오전 9시를 기하여 국내 전금융기관의 일절 금융을 동결한다.
단 세부처리요항은 추후 공포한다.
군사혁명위원회령 제2호
계엄사령관
중앙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육군소장 박정희
전방
제1군사령관 육군 중장 이한림
후방
제2군사령관 육군 중장 최경록
서울 및 경기지구 계엄사령사무소장
제6관구사령관 육군 소장 서종철
충청남북도지구 계엄사무소장
제3관구사령관 육군 소장 김규완
전라남북도지구 계엄사무소장
제1관구 사령관 육군 소장 김익렬
강원경북지구 계엄사무소 소장
제5관구사령관 육군 소장 박기병
경남지구 계엄사무소장
군수기지사령관 육군 소장 박현수
혁명위원회 보도국장 육군대령 원충연
군사혁명위원회 포고 제3호
국내 전공항 및 항만은 4294년5월16일 상오 9시를 기하여 봉쇄하고 다음과 같이 시행한다.
1. 공항
가. 국제선의 운항은 제한하지 않는다. 단 대한민국 국적의 소유자는 출항기에의 탑승을 일절 금한다.
나. 일절 항공기의 이착육에는 군의 검열을 받아야 한다.
다. 국내선 운항은 별명 유할시까지 금한다.
2.항만
가. 외국선박의 입출항은 제한하지 않는다. 단 외국선원의 상륙과 대한민국 국적의 소유자의 탑선을 일절 금한다.
나. 국내선박은 별명 유할시까지 국제항로취항을 금한다.
다. 일절의 선박의 입출항에는 군의 검열을 받아야 한다.
군사혁명위원회 의장겸 계엄사령관 장도영
16일 하오 4시부터 혁명과업 완수를 위한 정무관계는 박정희 소장이 중심이 되고, 계엄업무에 대한 것은 육군참모차장 장창국 중장에 의하여 수행하도록 되었다고 전체참모회의에서 공표.
(이후 포고령 15호 이상 발령)
포고령 4호- 국회(민의원, 참의원)와 지방의회의 해산, 정부 인 수, 정당과 사회단체의 정치활동 금지, 국무위원 체포를 명령.
포고령 5호 -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예금인출을 1회에 10만환, 한달 에 50만환으로 제한.
포고령 6호 - 물가동결과 매점매석자에 대한 극형.
포고령 7호 - 외국인 재산 보호령.)
16일밤 7시 정권인수 완료 발표
16일밤 11시 첫담화문 통해 군사혁명위원회 공식업무 개시
5월 17일
경찰청 조직 임시임명
치안국장 조흥만 준장(육군헌병감) ->6월 17일 준장 이소동
보안과장 중령 이효인
조사과장 중령 어해성
정보과장 중령 허정도
서울시경찰국장 대령 이광선
경기도경찰국장 중령 정수남
충북도경찰국장 중령 이용기
충남도경찰국장 중령 정호진
전북도경찰국장 중령 유문식
전남도경찰국장 중령 권영주
경북도경찰국장 중령 강상희
경남도경찰국장 대령 박명엽
강원도경찰국장 대령 박영수
공화당 지지성명
일절의 정치적 보복행위 엄금.
국민이 신용하고 지지할 수 있는 인물로 15인 비상국가회의를 구성하라.
비상국가회는 입법 행정 사법의 전기능을 포괄행사할 것이며 그 재적기간을 2년으로 하라.
군사혁명기간이 경과한 후에 대통령 중심제로 환원하라.
반공구국사업에 유해한 일절의 악폐를 정비하라.
북한괴뢰의 재침에 대비하여 전선을 강화하고 후방방력을 국가재건사업에 동원하라.
즉시 양곡방출을 단행하라.
5월18일 군사혁명위원회를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변경.
6월 12일 국가최고재건회의 조직변경
의장 중장 장도영
상임위원장 육군 소장 박정희
법제사법위원장 육군 중령 이석제
내무위원장 육군 대령 오치성
외무국방위원장 육군 소장 류양수
재정경제위원장 육군 소장 이주일
문교사회위원장 육군 준장 송찬호
교통체신위원장 해병 준장 김유근
운영기획위원장 해병 소장 김동하
(국방부장관 육군 예비역 중장 송요찬
원자력원장 육군 대령 오원선)
7월4일 장도영 사임
의장 박정희 상임위원장 겸직
내각수반 송요찬
문교사회위원장 대령 손창규
<5.16군사혁명정부의 경제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