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부>
<후반부>
<미아리 눈물고개>
소련군은 1948년 12월 25일 북한철수 공식 선언 후에도 4,020명의 전투부대원(공군 211명 포함)과 273명의 군무원이 북한에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반면 한국에 주둔했던 미군도 한국정부가 수립되자마자 1주일 후부터 돌능금 작전을 펼쳐 대부분 철수하고, 5연대 7천명 선만이 남아 있었지만 철수 압박에 시달렸다. 소련은 1950년에는 북한군 각 사단별로 3~8명씩만 군사고문단으로 남겨두었다.)
북한으로부터의 소련군 완전철수를 공식보도한 48년 12월 모스크바에서 북한 소련 중공 군사대표자 회담을 열어 '18개월 이내에 북한군을 강성화 한다'고 합의했다. 이를 위해 주북한 대사로 소련군 대장 스티코프를 임명하는 방식으로 소련군 대장 스티코프를 단장으로 해서 장성 5명, 대령 12명, 영관과 위관 40명으로 군사사절단을 구성했다.
북한은 1949년 3월 3일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경제문화협력협정을 체결하는 형태를 갖추고는 실제로는 차관 형식으로 4천만 달러의 소총 15,000정, 포 139문, T-34전차 87대, 항공기 94대를 들여왔다.
1949년 3월 17일에 대외적으로는 경제문화협정이라고 발표하면서 '지원의 성격, 소련에서의 북한군 교육 및 경제관계의 발전과 기타 문제들에 관한 북소협정'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의 해공육군을 소련군사학교에 보내는 문제를 타결했다.
김일성은 이 협상 결과에 대한 만족감을 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귀국한 1949년 4월7일에 "우리 정부 대표단은 소비에트 동맹과 경제 문화협조에 관한 모든 교섭을 성공하고 돌아왔습니다. 공화국 남반부로부터의 외국군대의 철거와 조속한 조국통일과 완전독립을 얻기 위한 애국투쟁을 더욱 광범위하게 전개할 것을 나는 전 조신인민들에게 호소한다"라고 표현했다.
소련방문이 끝나자 김일성은 1949년 4월28일에는 중공을 방문하여 중공군에 편입되어 있는 조선인 공산군(주로 중국공산군 소속을 선택한 조선의용군, 또한 중국 모택동 공산정부의 대우가 나빠지자 이미 상당수가 북한으로 월경한 상태이기도 했다.)들을 보내 줄 것을 요청했다. 모택동은 "한국에서의 전쟁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으며 빨리 끝날 수도 오래 끌 수도 있다. 지구전은 북한에 유리하지 않을 것이다. ~ 당신들 곁에 소련이 있고 우리들이 만주에 있음으로 걱정할 필요 없다"며 장비와 인원 지원을 약속했다.
북한은 우선 옹진반도에 있는 한국군 2개 연대를 공격 섬멸한 후 개성까지 진출하여 일단 점령한 상태에서 한국의 군사적 대응력을 보아 방어선을 구축하던지 아니면 전면 남침으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세웠다.(툰킨의 보고1949.9.12) 다른 방법으로는 삼척을 점령해서 '해방구'를 구축해 놓고 한국군의 대응력에 따라 전선을 확대하려는 계획을 추진했다.(스티코프 보고1949.10.26)
북한이 남침을 서두르자 소련은 "한국의 통일투쟁을 위한 현안의 과제는 반동체제의 파괴와 전 한국의 통일과제 달성을 위한 한국에서의 전인민 무장봉기 확산전개와 향후 북한군의 강화에 최대한의 힘을 집중해야 한다"고 했다.
(실제로 6.25일 남침일까지도 한국에서는 전국에서 빨치산들이 테러만행을 저지르고 있었다. 또한 이같은 내용은 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보낸 1949년 9월 21일짜 비밀 텔렉스 전문에서도 확인된다.
북한은 1949년 3월 중순부터 38선에서 무력충돌을 자주 구사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분대 단위에서 시작해 점점 대대급 규모로 단위를 늘려 38선에서 무력충돌을 일으켜 한국군을 끌어 들이려고 했다.
1949년 5월 4일에는 개성 북동쪽(성균관 위쪽) 292고지를 시작으로 송악산(488고지)을 향해 북한군이 대규모로 무력충돌을 일으켜 왔다. 이로 인해 한국군 11연대 2대대는 292고지, 유엔고지, 비둘기 고지를 잃고 말았다.(조선일보1949.10.16) 북한군 기관총에 밀려 사상자가 많이 발생한 가운데 하사관교육대생들이 특공조를 결성해 박격포탄을 끌어안고 기관총 고지로 돌진해 자폭함으로써 겨우 탈환할 수 있었다.
5월 21일에는 옹진반도에서 북한군 1개 대대가 국사봉에 대한 무력충돌을 일으켰다. 이로 인해 국사봉과 두락산은 북한군에게 일시 점령 당하기도 했다.
북한군은 계속해서 이 번에는 금천 이남 배천지구에 대한 대대적은 무력충돌을 해왔다. 강원도에서는 북한군 유격대가 지속적으로 도발을 감행했다.
한국은 군사적 전면전으로 확대될 것을 우려해 주로 경찰병력이 나섰으며, 실제로는 한국군의 군사무장이 약해 대대급 규모로 수작을 거는 북한군의 무력충돌 기도에 말려 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이러한 북한의 국지도발에 대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이 세심한 관심을 보이자 김일성은 강원도의 예를 들면서 '북한군이 강력한 화력을 앞세워 공격하면 화력이 약한 국군은 도망갔다'라며 흡족해 했다.)
소련의 반대에도 북한은 1949년 10월 14일 제3 국경 경비여단을 동원해 옹진반도를 공격했다.(스티코프 보고1949.10.26)
1949년이 끝나가면서 소련은 적극적 남침 지지로 입장을 전환한다.
소련은 중국에서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어 중소우호동맹상호조약이 체결되고(1950.2.17),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자(1949.9.24) 북한의 남침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모스크바에서 중소우호동맹상호조약이 체결되자 김일성도 1950년 4월 제2차 모스크바 회담을 열어 3개 사단 무장을 위한 각종 장비와 탄약 등을 지원 받아 냈다.
김일성은 5월 13일에는 모택동을 방문하여 소련의 지지사실을 알리며 남침에 대한 확실한 동의를 구했다. 모택동은 스탈린에게서 직접 소련의 동의 사실을 확인하고자 했다. 스탈린은 "북한동지들과의 회담에서 필립포프(스탈린) 동지와 그의 측근들은 현재 국제상황이 변하였음으로 한국 통일사업에 착수하겠다는 북한 동지들의 제안에 동의하였음"이라고 공식확인했다.(필립포프가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1950.5.14)
<한국군의 후방 전면배치는 후방 친북좌파 빨치산들의 테러 난동 때문이었다.>
1. 북한의 남침계획
김일성의 소련 방문(1950.3) 직후 명령에 의해 북한군 총참모장 강건과 신임 바실리에프 고문단장은 두 달만인 5월 29일 남침계획서 '선제타격작전계획'(Preemptive Strike Opreration Plan)을 완성했다.
(러시아어 사본이 격퇴 중에 노획되었다. 북한군 참모부 작전국장 소장 유성철은 소련이 작성하고, 소련군 출신인 포병사령관과 공병국장 등이 한글로 번역했다고 증언했다.)
'북한군 남침 진행 집중공격은 금천-구화리, 연천-철원, 화천-양구 세 축을 중심으로 시작'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 공격부대인 1군단은 연천-동두천-서울, 운천-포천-서울, 서해안-김포반도-영등포.인천으로 진출한다. 보조 공격부대인 2군단은 화천-춘천, 동해안-정동진.임원진 방향으로 진출한다.
<실제 전개된 1단계 작전>
1단계 작전 계획
작전종심을 38선으로부터 남하해 90Km까지 수원-원주-삼척을 연결하는 지점까지 5일만에 확보하고, 2일째에는 서울을 점령한다.
북한군 1군단과 2군단이 협력해 한강 이북과 한강 이남에서 2차례 양익포위 공격하며, 2일차에 1,2군단 고속기동부대로 한강교를 조기점령하여 수원이남 지역의 한국군 진입을 차단한다.
서부전선 1군단은 서울을 목표로 직접공격 부대인 제1(수색방향),3(수유리방향),4(상봉동방향) 보병사단과 제105전차여단을 배치(한강교 점령)하고, 한강 이남 점령 목표로 제6사단(개성-김포, 영등포방향)을 배치했다.
중부전선 2군단은 한국군 후방 3개 사단의 서울 진입을 저지와 수원 진격 발판을 구축하기 위해 제2사단(춘천-하남, 한강이남방향), 제603모터사이클연대(홍천-수원,수원이남방향:경부선철도와 국도1번)를 추가배치했다.
2일차에 홍천-원주 선으로 1개 보병사단이 진격해 한국군을 동서로 양단시켜 상호협조하지 못하도록 한다.
강원도 지역에서 산악침투부대가 산을 타고 진출해 국군 8사단의 후퇴로를 차단하고, 강릉 남쪽으로 945유전대와 766 상륙부대를 전개해 7번 국도를 타고 역으로 북진하여 한국군을 후방공격한다.
<실제 전개된 2단계 작전>
2단계 작전 계획
작전종심을 1단계 작전종심으로부터 약 180Km 남하해서 군산-대구-포항으로 이어지는 지점까지 14일만에 이동한다. 신속한 전과확대와 한국군 예비동원 부대를 섬멸한다.
<실제 전개된 3단계 작전>
3단계 작전 계획
작전종심을 2단계 작전종심에서 80Km를 남하해 부산-여수-목포를 축으로 10일여만에 완료한다.
6월 16일 스티코프의 보고를 받은 스탈린은 최종보고에 동의했다.
북한군 지휘조직
민족보위성: 보위상 대장 최용건(인민군 총사령관)
전선사령관: 대장 김책
포병사령관: 중장 무정
공군사령관: 중장 왕연
해군사령관: 중장 한일무
문화사령관: 중장 김일(부상 겸직)
총참모장: 중장 강건
부참모장: 소장 최인
전투훈련국장: 소장 김웅
작전국장: 대좌 유성철
정찰국장: 대좌 최원
간부국장: 대좌 이림
통신국장: 대좌 박영순
공병국장: 대좌 박길남
군의국장: 대좌 이동화
문화부국장: 소장 김일
포병부국장: 대좌 김봉율
전투경험연구부장 대좌 유신
정치보위처장: 대좌 석산
후방국장: 소장 김영수
검찰국장: 소장 김학인
(최용건은 남침을 거의 유일하게 반대하며 소련군과의 합작도 거부의사를 표시했다. 이로인해 북한은 최용건을 따돌리고 전선사령부를 중심으로 남침을 했다. 전선사령부는 평양 근교 서포에 위치한 일본군이 화약창고로 쓰던 땅굴 속에서 6월에 지휘했다. 김책은 형식상 앉아 있었을 뿐이고 실제로는 총참모장 강건이 남침을 진두지휘했다.)
북한군 편성
육군: 182,680명
해군: 12,700명
공군: 2,000명
전차(T34): 242대
장갑차: 54대
자주포(SU76mm): 176대
고사포(85mm/37mm): 12/24문
야포(122mm/76.2mm): 172/464문
박격포(120mm/82mm): 244/1,223문
대전차포(45mm): 586문
항공기: 211대
경비정: 30척
1군단(금천, 중장 김웅):
1사단(구화리, 소장 최광- 2,3,14(해주.죽천)연대,포병연대),
4사단(연천, 소장 이권무- 5,16,18연대,포병연대),
3사단(운천, 소장 이영호- 7,8,9연대,포병연대),
105전차여단(연천, 소장 유경수-107,109,203(남천)전차연대,독립전차대대(인제)),
6사단(계정, 소장 방호산- 1,13,15연대,포병연대),
13사단장(금천, 소장 최용진- 19,21,23연대,포병연대),
3경비여단장(소장 최현- 1,2,3,4,5,6,7대대)
독립17포병연대(-1,2,3포병대대)
2군단(화천, 소장 김광협):
2사단(화천, 소장 이청송- 4,6,17연대,포병연대),
603모터사이클연대(- 4개 대대, 장갑차 1개 대대;BA64 54대, 대전차포 1개 대대;45mm 16문)
5사단(양양, 소장 김창덕- 10,11,12연대,포병연대-포병대대,자주포포대),
12사단(양구, 소장 전우- 30,31,32연대,포병연대),
1경비여단장(소장 오백룡- 1,2,3,4,5,6,7대대),
766상륙부대(원산.간성, 총좌 오진우- 1,2,3대대, 강.표대대, 포병대대, 통신대대)
945육전대(성진, 1,2,3대대, 통신중대,후방근무중대)
15사단장(화천, 소장 박성철- 45,49,50연대,포병연대),
예비사단: 10사단(소장 이방남, 평양 숙천)
해군: 원산 청진 진남포에 사령부 함정 30척(12,700 혹은 15,570명)
공군: 신안주 평양 연포 선덕 함흥 평강 신막 해주 항공기226대 혹은 211대(2,000 혹은 2,800명)
2. 한국군의 방어기본계획
한국군 편제
독립17연대(1,2,3보병대대, 7포병대대) (옹진반도, 대령 백인엽)
제1사단(11,12,13연대, 6포병대대, 공병대대) (고랑포-개성-연안-청단 정면, 대령 백선엽)
제7사단(1,9,25연대, 8포병대대, 공병대대) (동두천-포천 정면, 준장 유재홍)
제6사단(2,7,19연대, 16포병대대, 공병대대) (어론리-춘천-가평 정면, 대령 김종오)
제8사단(10,21연대, 18포병대대, 공병대대) (주문진-강릉, 대령 이성가)
수도경비사령부(제3,8,18연대, 육본직할 독립기갑연대) (서울, 대령 이종찬)
제2사단(5,165연대, 공병대) (청주-대전-온양, 준장 이형근)
제3사단(22,23연대, 보국대대, 공병대) (대구-부산, 대령 유승렬)
제5사단(15,20연대, 1독립대대, 공병대) (광주-전주, 소장 이응준)
육군: 67,416명
수도경비사령부: 7,061
1사단: 9,715
7사단: 9,698
6사단: 9,112
8사단: 6,866
2사단: 7,910
3사단: 7,059
5사단: 7,276
독립17연대: 2,719
해병: 1,106
해군: 6,956
공군: 1,897
장갑차: 27대
곡사포(105mm): 91문
박격포(81mm/60mm): 384/576문
대전차포(57mm): 140문
바주카포: 1,900문
항공기: 23대
함정: 71척
<북한 침공지연 계획도>
국군기본방어계획
1950년 3월25일 육군본부 작전명령 제38호를 확정했다. 이 작전명령38호는 국군기본방어계획이다. 1949년 12월 27일에 작성한 '1949년 말 종합보고서'와 1949년 11월에 작성한 '합동평가회의서'(각 사단장과 작전참모와 미 수석고문관)를 근거로 작성한 방어계획시안(육군본부와 참모학교)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이 것을 기초로 각 사단은 1950년 5월초부터 사단 작전계획 수립에 나섰다. 방어계획 위주의 기본계획서라서 여전히 화력계획, 역습계획 등은 작성되지 못했을 뿐더러 장벽계획마저도 시작단계로 변변치 못했다.
북한의 침략 주공격선을 철원-의정부-서울 축선으로 예측하고, 1차적으로 38선 방어계획은 옹진반도에서의 신속한 철수로 인천 사수, 개성지구는 지연전 실시하며 임진강 방어선으로 이동, 후방 예비사단은 신속한 역습 등으로 되어 있었다.
의정부를 중점 방어선으로 설정했다. 후방 2사단(대전)은 춘천-의정부선으로, 3사단(대구)은 의정부-문산선으로, 5사단(광주)은 문산-의정부선으로 출동한다는 내용이었다.
전방이 무너지면 후방 방어계획은 한강을 비롯한 큰 강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펼쳐 한강 방어선, 금강 대전방어선, 낙동강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정했다.
후방 방어는 경찰,청년방위대,대한청년단,특별경찰대,해안청년방위대(해상경비대) 등이 경비를 담당하도록 했다. (김대중이 활동했던 소속은 해안청년방위대 편제인 해상경비대였다.)
<옹진반도 방어>
<개성방어>
<춘천방어>
<강릉방어>
3. 북한의 기습 선제타격 남침
모란봉극장 회의(1950.5.16) 후 사단급 대기동 훈련을 한다며 6월12일부터 공격출발진지로 부대 이동을 시작해 6월 23일 완료했다.
(모란봉극장 회의는 '조국의 평화적 통일달성을 위한 회의'라는 이름으로 김일성 박헌영 민족보위상 겸 북한군 총사령관 최용건, 내무상 박일우, 민족보위부상 겸 북한국 문화부사령관 김일, 북한군 포병부사령관 무정, 문화선전상 허정숙, 북한군 참모장 강건, 사단장 전원이 참석했다. 여기에서 20일 이내에 한국을 점령할 수 있다는 호언과 남침의 정당성에 대한 발언들이 이어졌다.)
사단급 대기동 훈련을 한다면서 참모장 강건은 "본 기동연습은 다소 오래 걸릴지 모르나 2주일이면 족할 것이다. 특히 본 연습은 극비리에 거행되는 만큼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 것이며 가족에게도 알려서도 안된다. 명심하여 비밀을 지켜라"라고 지시했다.
정찰명령 1호(Reconnaissance No.1 1950.6.18)에 의거 각 사단 38선 이남침투로 국군상황 파악할 것.
민족보위성 전투명령 1호-1950.6.22는 '1950년6월23일12:00시까지 준비태세 완료하고 하달된 전투명령 1호에 기재된 기동계획에 따라 국군 방어선 돌파후 서울 방향으로 진출할 것'을 전달했다.
1950년 6월 25일 03:30~04:00 선제타격 기습남침 개시
25일
오전 1시: "현재 국사봉 북쪽 능선으로부터 병력미상의 북한군이 접근하고 있다."- 옹진반도 독립17연대
오전 3시: "적은 구화리에서 도하용으로 보이는 주정(舟艇)을 그들 전방으로 운반하고 있다." - 문산 북쪽 제1사단
오전 3시 30분: "적 포탄이 현재 모든 진지에 계속 떨어지고 있다."- 제7사단
오전 4시: 전 전선에서 북한군 시차를 두고 각 부대별로 포격개시. (한국군 첩보분석작업 혼란)
오전 5시: 동두천-포천 지구로 북한군 보병과 포병이 공동으로 남하 중이라는 보고 받고 참모장 채병덕은 전군에 비상령 발동과 육본장병 비상소집 구두 명령.
(한국내부 빨치산 토벌이 성과를 거두었고, 6월 농번기가 되자 장기간 비상사태로 인한 장병의 피로 누적해소와 농민들의 농번기에 방해가 된다면서 23일 24:00시를 기해 비상사태를 해제하여 연기됐던 휴가와 외출 외박 등이 한꺼번에 실시되어 비상소집이 늦어졌다.
노동절 비상경계 4월7일~5월3일, 5.30총선 비상경계 5.9~6.2, 평화공세 비상경계 6.11~6.23로 계속해서 한국군의 피로도가 누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서울의 경우 전화, 전령파견, 국방부 제2국인 정훈국의 가두 방송 등을 통해 신속한 원대복귀를 알렸으나 14:00시가 지나서야 80~90%가 소집됐다.
이후 후방사단 동원령은 작전명령 제84호로 정식 하달됐고, 지리산 빨치산 토벌중이던 5사단이 전방으로 이동하면서 대신에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해 호남지구전투사령부를 신설했다.
특히 예비군 제도인 호국군 제도가 1949년 8월 31일자로 폐지되어 예비병력 소집 동원은 불가능해져 남침에 대한 대응은 더욱 늦어지고 말았다.)
북한 포병의 포격과 보병의 공격으로 한국군 통신부대 붕괴로 상호연락 두절. 총참모장 소장 채병덕 국방부 장관 신성모와의 연락시도했으나 불통.
오전 5시 30분~: 작전국 대령 이치업, 정보국장 대령 장도영, 일반참모 등이 도착하여 비상사태 돌입.
오전 7시: 국방부 장관 관사로 가서 북한의 침공상황 보고.
KBS 라디오 방송 - 북한 남침 보도
오전 8시: 서울주둔 한국군 투입과 후방 3개 사단 동원 및 군수지원 명령 하달.
북한군 한국군 진지 후방 4~5Km 지점까지 기동 파괴 진출.
오전 9시: 해군본부 작전명령 갑 제18호를 동해 2정대와 서해 1정대, 해상경비부대에 내려 비상경계와 전투준비 명령.
(해군 제2함대는 25,26일 옥계(강릉남쪽 25Km)에서 상륙을 끝내고 물자를 하역중이던 북한군 766부대와 945육전대 선박 2척을 격파하고 1척을 노획했으며, 25일 밤 PC701함은 부산상륙을 시도하던 북한함정(특수부대원600명)을 격침시켰다. 인천 1함대는 해상경비부대와 함께 옹진지구 국군 제17연대 철수를 지원했다.)
오전 10시: 서울 상공 북한 정찰기 출현. 총참모장 채병덕 7사단사령부 방문 후 전면남침 의심.
(이 때 7사단은 보병 2개 대대로 북한군 105전차여단과 싸우고 있었다. 작전명령 85호로 7사단 증원병력 집결과 유휴병력 집결 명령을 하달했다.
육군본부는 6월24일에 정보상황실에서 6월22~23일간 북한군의 이동이 활발하다는 보고를 검토했으나 총참모장 채병덕은 첩보수집을 강화해 25일 8시까지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한편 24일 북한군 대위 박영철이 탈북귀순해와 자신의 부대가 38선 최남단까지 이동배치됐음을 제보해 확인 정찰 중이었다.)
국방부, 군 원로회의 개최에서 국방장관 신성모는 반격하여 북진중에 있다고 독단적 주장.
오전 11시: "북한인민군은 자위조치로써 반격을 가하여 정의의 전쟁을 시작하였다." - 평양방송
중앙청 비상 국무회의, 국방장관 신성모 "3~5일 이내에 평양까지 점령할 수 있는 만반의 준비와 강력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라고 발언. 총참모장 채병덕 "적을 의정부 밖으로 격퇴하였다. 3일 안으로 평양까지 점령하겠다"고 발언.
오전 12시: 북한군 YAK 전투기 4대가 김포와 여의도 공군비행장, 용산역, 서울공작창, 통신소, 육운국 청사 기총소사 및 폭탄 투하
(한국공군은 항공기 24대중에 10대는 훈련용이라서 제공권을 장악할 수가 없어서 해가 진 후에야 T-6기로 편대비행해서 북한군을 정찰할 수 있었다. 26일부터는 좌석에 폭탄을 실고서 맨 손으로 투하해서 폭격했다. 이후 7월에 일본 아타츠케로 가서 미군으로부터 F-51 10대를 인수 받아 대구기지에서 폭격에 나섰다.)
국방부 정훈국, 담화문 발표
(이 때 언론사 질의응답 중에 '옹진반도의 제17연대 장병들의 사기는 해주를 공격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오보를 내어 일간신문들이 '옹진 17연대 해주 진격'이라는 내용으로 그대로 보도함으로써, 이후 친북좌파들은 이 오보를 내세워 북침설의 증거로 활용하기도 했다.)
오후 12시 30분 - 2사단, 굴욕적으로 금오리 방어선에서 붕괴
(2사단은 의정부 함락이 눈 앞에 있는데도 전투태세마저 갖추지 못할 정도로 지휘 통제능력이 없었다. 사령부마저 전차 포격을 당하자 겁을 먹고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오직 포병대대 중령 김계원만이 유일하게 자체판단으로 북한군에게 포격을 가하여 타격을 주고 있었다.)
오후 1시: 국방부, 오보에 대한 정식 담화문 발표로 사실관계 정정.
오후 1시 35분: "남한이 북한의 모든 평화통일 제의를 거절하고 이날 아침 옹진반도에서 해주로 북한을 공격하였으며, 이는 북한의 반격이라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왔다"- 평양방송, 김일성.
오후 2시: 총참모장 채병덕은 긴급 국무회의에 참석하여 전황 설명 "적은 전면남침이 아니라 공비두목 이주하와 김삼룡을 탈취하기 위한 책략같으며 곧 남쪽의 부대를 집중하여 적을 공격할 것"이라고 발언했다.
(남로당 거물 이주하와 김삼룡이 체포되자 실제로 대구 팔공산 빨치산들이 경부선 군용열차를 탈취하여 서울로 공격해 들어가 구출한다는 작전을 세우기도 했다.
전면 남침전이라는 최종정보 판단은 오후 4시 무렵에 내려졌다.)
유엔, 유엔한국위원단 대책회의 시작.
7사단, 주저항선 포천 함락으로 동두천 방어선으로 철수.
오후 3시 20분: 참모부장 대령 김백일, 옹진반도 제17연대의 해상 철수명령 하달.
오후 10시: 7사단, 동두천 방어선 함락으로 철수.
심야 : 국방부 긴급대책회의, '미군의 직접 지원이 없으면 사태가 절망적이다. 육군이 패할 경우 유격전으로 끝까지 항전한다. 육해공 합동작전을 전개한다. 망명정부에 대비해 요인 수송대책을 수립한다'
심야 국무회의, '서울만은 고수한다' '반격하여 백두산에 태극기를 꽂는다'
26일
서울에서 생필품 매점매석으로 품귀현상과 가격 대폭등으로 생활에 대한 위협 증가. 경찰, 매점매석 통제 단속.
(25일 오후부터는 38선에서 피난 내려온 사람들로 서울 시내는 더욱 혼잡해졌다.)
정오 12시: 국군 1사단 역습으로 주진지 회복
(적의 공격이 거세 다시 봉일천으로 후퇴하여 28일 반격전을 재차 펼쳤으나 서울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듣고 후퇴했다.)
오후 2시: 옹진반도 17연대 해상철수로 인천도착.
7사단, 의정부 방어선 완전 함락으로 서울로 철수
오후 4시: 급 편성된 김포지구전투사령부(12연대 2대대,남산학교,보병학교,공병학교,보국대대,일부 기갑연대) 김포반도에서 적의 도하 저지 전투 개시.
(28일 새벽 탄약이 소진되어 김포로 후퇴했다.)
저녁 5시: 7사단 25연대, 백석천 방어선 혈투
(화기소대 분대가 백석교에서 다섯 번째로 진입하던 적 전차를 파괴해 10여대의 후속 전차를 의정부 방향으로 퇴각하도록 했다. 이로 인해 미아리 방어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된다. 이 화기분대는 여섯 번째 적 전차의 포격으로 적 전차를 파괴한 분대장이 전사했다.
16연대 혼성2대대도 호원동에서 백석교를 건넌 적 전차들을 맞아 역시 전사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가운데서도 기관총과 박격포만으로 적의 전차 진출을 격퇴시켰다.)
저녁 7시: 1사단 주저항선 임진강 방어선 함락으로 최후 저항선으로 철수
(주저항선이 무너져 1사단 주력부대가 최후 방어선으로 철수하고 공병대 부대대장 소령 김영석과 자원병사 22명은 결사대를 결성해 유서를 쓰고 마지막 술잔을 들어 조국을 위해 죽자는 결의를 다졌다. TNT20파운드와 수류탄1개를 조합해 만든 폭탄으로 적의 전차에 돌진하여 산화하려고 문산 봉암리에 진출해 대기하였으나 북한군 탱크와 만나지 못했다. 대신 이른 아침 고지 정상 공제선에 노출된 적1개 소대를 발견하자, 날이 밝았고 너무 빠르게 보병이 먼저 침투 했음으로 인해 자폭공격이 성공하지 못할 것임을 알고 대신해서 일제 조준사격하여 16명을 사살하고 노획물을 거두고 후퇴했다.)
27일
새벽: 제7사단 25연대 백석천 방어선 붕괴로 후퇴.
아침 6시: 중앙방송, 정부의 수원 이동 방송
이 때부터 피난민이 나타나 피난길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정부는 새벽 3시에 경무대를 출발해 오후12시30분에 대구에 도착했다가 오후4시30분에 대전(충남지사 관사)으로 이동했다. 이 때 대전 철도국 사무실에서 미 대사관 참사관 드럼라이트가 이승만에게 소련의 불참으로 유엔 결의가 통과되어 유엔이 한국을 돕기로 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오전 11시 김포지구전투사령부, 김포 장림 운유산 방어선 함락으로 철수.
밤 9시: 동부전선 최후저항선 춘천함락으로 6사단 7연대 철수.
(6사단은 최선을 다해 중동부전선에서의 북한군 남하를 27일까지 3일간이나 효과적으로 방어했다.)
밤 10~11시: 이승만, 3차례 녹음방송을 통해 "유엔에서 우리를 도와 싸우기로 작정하고 ~ 안심하라. ~ 정부는 수원이동을 중지하고 중앙청에서 근무 중"이라고 국민을 안심시키려 했다.
(결과적으로 이 녹음방송을 믿고 서울에서 피난을 떠나지 않은 사람들은 그 다음 날 서울이 함락되자 북한군에게 치욕적인 고통을 당하게 된다.)
<서울함락>
28일 새벽 1시 북한군 서울진입
새벽 1시: 북한군 105전차여단의 강습돌파로 도봉산 돌입. (행정구역상이 아닌 군사 수도방위 개념)
새벽 2시30분: 한강교 폭파
새벽 4시: 광진교 폭파
(이로 인해 후퇴병력 4만여명이 분산되고, 5사단 차량 1,318대를 한강 이남으로 후송하지 못했다. 공병감 대령 최창식은 한강교 조기 폭파의 책임을 지고 1950년 9월21일 부산 교외에서 처형당했다.)
오전 10시: 북한 105전차여단 일부 한강교 도달
정오 12시: 서울 창동 방어선 함락
오후: 김포지구전투사령부, 김포함락으로 영등포와 시흥으로 철수.
(서울 시내에서는 미아리 고개길을 타고 들어 오는 적 전차부대에 대한 소규모 게릴라전이 펼쳐졌다.
오전 11시경 수도경비사령부 18연대 1대대 1중대 3소대장 소위 강성탑은 소총으로 무장한 민간인 복장을 한 30여 명이 탄 트럭을 대전차포로 공격하여 섬멸했는데 북한군 편의대였다.
5연대 3대대 1등상사 백복성과 이등상사 8명이 9대의 전차에 뛰어 올라 7대의 전차 안으로 수류탄을 던져 탑승한 북괴군을 모두 죽였다. 4명은 공격시 전사하고 2명은 행방불명됐으며, 3명만이 약속한 집결지로 모였다.
참모학교 대령 이용문은 남산에서 유격대 백호부대를 결성해서 격전에 나섰으나 끝내 탄약이 완전 소진되고 사상자가 늘어나 자동해체되고 말았다. 이 때 이용문은 군인으로서 조국을 지키지 못한 책임을 진다면서 자결했다.)
29일
오후 3시 30분: 1사단,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최후저항선 봉일천에서 전투 중 한강 이남 시흥을 목표로 철수계획
(15연대 1대대 1중대 중위 신현조가 대전차포로 적의 탱크 1대를 격파하여 적군이 일시 후퇴하기도 했다.
한강에서 창고를 헐어 선착장을 만들고 배 2척을 연결해 도하선을 만드는 등 이산포와 행주나루를 거친 철수 준비 중에 삼각산을 거점으로 최후1인까지 전투를 수행하다 죽자는 주장이 대세를 이룬 가운데 미군의 폭격기가 문천 방향으로 폭격을 가하자 살아 남아 후방에서 다시 부대를 재건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1단계 방어선 사수 국군 혈투
옹진 방어선 6월25~30일
강릉지구 전투 6월25~28일
춘천-홍천 방어선 6월25일~7월4일
포천-동두천-의정부 방어선 6월25~26일
개성-문산-봉일천 방어선 6월25~28일
창동-미아리 6월27~28일
김포-오류동 6월25일~7월4일
한강-수원 6월28일~7월4일
7월 1일 스미스특수임무부대(대대급) 부산상륙
7월 4일 영등포-수원 방어선의 시흥지구전투사령부, 평택으로 철수
7월 5일 1군단 사령부 창설(수도사단,1,2사단)
7월 15일 2군단 창설(6,8사단)
4. 북한공산군의 대량 양민학살 범죄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양민 학살 피해
244,663사망 229,625부상 128,936학살 84,532납치 303,212실종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양민 학살피해 총계 지역별 현항
서울 129,908
경기 128,908
강원 130,777
충북 70,003
충남 75,409
전북 91,861
전남 193,788
경북 97,851
경남 72,306
제주 325
(사망자로는 전북-40,462, 학살로는 전남-69,787, 납치로는 서울-20,738, 실종으로는 강원-80,819명으로 제일 많았다.)
7월1일 한국내에서 전시동원령을 내려 한국인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전쟁터로 내몰았다. 초기에는 18~36세까지의 한국남성들을 징집했으나 이후에는 17~45세 까지로 나이를 정해 수 많은 한국인들을 피의 제물로 삼았다.
북한군은 징집인원 목표를 초기 48만명으로 세워 50년 7월에만 서울을 중심으로 10만명을 강제징집하다가 낙동강 전투가 치열해지자 50년 8~9월에는 50만명을 강제로 징집했다.
낙동강을 건너 진격에 성공한 국군은 강변 두 군데서 처참한 장면을 보게 된다. 북한군이 동원한 어린 중학생 나이또래가, 아마도 서울에서 7월에 강제징병된 것으로 보이는 어린 소년들은 기관총에 철사줄로 두 손목이 기관총 방아쇠를 중심으로 묶여져 있었다. 이 어린 애들은 북한군의 위협과 폭력 때문에 도망마저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북한군 및 친북좌파세력에게 학살당한 양민 피해사례 일부
1950년 6월 25일
강원 명주군 강동면 정통진리 4명 총살
6월27~28일
전남 무안군 망운면 연동마을 좌익폭도가 45명 학살(전원 구타 살해)
6월 28일
서울대학병원 500여명 학살
6월
충남 대덕군 신탄진 105명 총살
충남 금산군 군복면 호티리 18명 총살
7월 5일
충남 서산군 갈봉면 양길리 50여명 인민재판 총살
7월 10일
강원 명주군 주문진읍 수산고 100여명 총살
7월 19~20일
전남 영암군 도포면 구학리 영호리 60여명 학살(전원 구타 살해)
강원 중원군 엄저면 미내리 바마루고개 300여명 총살
7월 25일~8월 15일
충남 논산군 성동면 병촌리 500여명 학살(전원 고문,구타후 총살)
7월
서울 영등포구 용산 우체국 뒷편 30여명 총살 후 구덩이에 매몰
서울 영등포구 북부동 도로 500여명 총살
7월~9월
전남 무안군 일로읍 의산 6구 50여명 총살
7월~10월
강원 명주군 학산리 구정지서 앞 하천 37명 총살
강원 삼척군 원덕면 임원진리 해안 70여명 학살(방화 살해)
강원 강릉시 노암동 기차터널 100여명 총살
충북 청주시 무심천 50여명 총살
충북 옥천군 청산면 지전리 14명 총살
8월 7일
서울 불광동 소년원 뒷산 200여명 월남자 총살
8월 14일
충남 공주시 옥룡동 대추골 50명 총살
8월 16일
충남 서천군 서천면 창고 190여명 총살
8월 17일
충남 서산군 양대리 바다 수문 350여명 총살
8월 19일
전남 무안군 청계명 복길리 (당시 전남도지사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86명 학살(전원 죽창 대검 흉기 살해)
8월 20일
충북 홍성군 결성면 읍내리 47여명 인민재판 학살(전원 죽창 곤봉구타 살해)
8월~11월
전남 곡성군 곡성읍 학정리 40여명 학살(전원 구타 살해)
전남 영광군 염산면 두우리 송남리 60여명 학살(전원 돌을 매달아 수장 살해)
9월 15일
순천시 순천경찰서 운동장 200여명 총살
9월 16일
경기 인천시 상인천경찰서 400여명 총살
9월 17일
충남 논산군 향촌면 80여명 학살 (전원 머리 가격 살해)
9월 18일
전남 여수시 여수 경찰서 70여명 총살
9월 18~20일
전북 부안군 백산면 평고리 망산 50여명 학살(전원 생매장 살해)
경기 파주군 파평면 두포리 130명 총살
강원 춘성군 남면 방하리 47명 학살 (전원 칼 몽둥이 죽창으로 살해)
9월 20일
전남 장흥군 장편면 우산리 15명 총살
9월 21일
경기 용인군 내사면 대대리 150여명 총살
9월 22일
경기 가평군 북면 이록리 830여명 총살
9월 24일
경기 가평군 설악면 사룡리 40여명 총살
9월 26일
강원 춘천시 옥천동 150여명 학살 (전원 칼 몽둥이 돌로 살해)
전북 전주시 형무소 500여명 학살(총기,죽창,방화 살해)
전북 무주군 무주읍 용포리 59명 총살
전남 장성군 북하면 성암리 90여명 학살 (전원 죽창 살해)
9월 26~28일
전북 옥구군 미면 신관리 630여명 총살
9월 27일
전북 군산시 죽동 과수원 300여명 총살
전북 임실군 임실읍 이도리 군청 후문 방공호 295명 총살
9월 27~28일
경기 가평군 상면 봉수리 15명 총살
경기 강화군 양사면 인화리 70명 학살 (삽 곡갱이로 살해)
경기 파주군 문산면 마정리 200명 학살 (40명 총살, 나머지 구타 살해)
경기 남양주군 화도면 마치고개 11명 총살
충남 서산군 성연면 명천리 40여명 총살
충남 당진군 우강면 창리 37명 학살 (전원 삽 곡갱이로 목을 잘라 살해)
전북 전주시 경찰서 유치장 200여명 학살(방화 살해)
전남 광주시 동명동 광주형무소 500여명 학살(전원 죽창 곡갱이 삽 흉기 살해)
9월 28일
전남 화순군 화순읍 이십곡리 저수지 150여명 총살
전남 영암군 영암면 경찰서 50여명 총살
충남 대전시 대전형무소 5,500여명 학살 (1,577명은 우물에 생매장 살해)
9월 29일
전남 목포시 무안동 형무소 500여명 총살
9월
경기 고양군 송포면 덕이리 45명 학살 (전원 죽창 살해)
강원 원성군 흥업면 대안리 1구 19명 총살
강원 철원군 과전리 철원경찰서 지하실 수 백명 학살 (전원 고문 살해)
충북 청원군 가덕면 사양2구 백죽산 200여명 총살
충북 청주시 대성동 당산공원 150여명 총살
충남 논산군 성동면 삼산리 120여명 인민재판 총살
전북 정읍군 고부면 수석리 150여명 학살 (생매장 살해)
전남 장성군 삼서면 60여명 학살 (전원 몽둥이 죽창 살해)
전남 완도군 완도읍 30여명 총살
10월 6일
전남 영암군 학산면 온곡리 당매 13명 총살
10월 10일
전북 고창군 아산면 선운사 120여명 총살
10월 14일
전남 무안군 해제면 천정리 백동 142명 학살 (총기 칼 죽창 살해)
10월 18일
강원 강릉시 홍제동 200여명 학살 (전원 방화 구타 살해)
10월
전남 장성군 북하면 덕재마을 북이면 신원리 신광마을 66명 학살 (가족끼리 묶어서 총기 칼로 살해)
50년10월~52년 봄
전남 담양군 남면 용면리 가마골 수 백여명 학살(방화 구타 살해)
50년 10월~52년 6월
강원 철원군 철원읍 관전리 노동당 건물 500여명 총살
11월 20일
강원 철원군 군남면 사곡리 남고개 87명 총살
전남 나주군 문평면 학교리 구절봉, 함평군 나산면 송남리 50여명 총살
12월
전남 화순군 모후산 인근 200여명 총살
51년 1월 30일
전북 진안군 감정골 100여명 총살
2월 초
전북 진안군 우장산 105명 총살
3월
강원 철원군 철원읍 사요리 수도국에서 300여명 인민재판 총살
4월
경기 양평군 단원면 탄불리 하천 13명 학살 (돌로 살해)
5월 20일
강원 양구군 방산면 장평리 65명 총살
6월 21일
경기 연천군 신서면 내산리 식사중인 초가집 13명 총살
8월 1일
경북 함양군 안의면 사상양제 300여명 총살
8월
전북 순창 쌍치면 문정읍 1,200여명 학살 (전원 방화 죽창 살해)
9월
경기 양평군 양평읍 양근리 600여명 학살 (전원 구덩이 방화 살해)
한국군 피해상황
육군 135,858전사 443,634부상 19,321실종
해군 1,903전사 7,108부상 71실종
공군 114전사
경찰 3,131전사 6,760부상 7,074실종 403납치
청년단 628전사 672부상 222실종 134납치
5. 공산침략 격퇴 대반격, 인천상륙작전
낙동강 전선에서 공방전이 거듭되는 동안 새로운 반격 돌파구를 찾아 다른 지역으로 상륙작전을 통해 전쟁종심을 바꿔 상황을 역전시키려고 했다. 7월 첫째주에 맥아더는 참모장 알몬드에게 서울의 적 병참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 지점을 연구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합동전략기획과 작전단(JSPOG,준장 라이트)은 블루하트라는 암호명으로 개념을 정립하며 구체적으로 부대 이동과 배치 등 작성에 돌입했다. 북한군의 침공 속도가 너무 빨라 잠시 미뤄졌다가 재개됐다.
인천(100-B), 군산(100-C), 주문진(100-D) 세 곳이 후보지로 올려진 가운데 인천을 최종선택하게 된다. 지형조건과 논산과 대전에 있는 적 병참선과 가깝다는 장점을 가진 군산보다 못하다는 참모진의 우려가 이어졌다.
맥아더는 자연조건이 나쁜 인천으로 상륙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적의 헛점을 노릴 수 있는 점, 적의 병참선이 너무 길기에 서울에서 이를 신속히 차단할 수 있는 점, 북한 주력 모두가 낙동강 미제8군 정면에 몰려 있는 점, 인천에 상륙하면 (서울을 탈환하기까지) 10만명의 병사들 목숨을 덜 희생시켜도 된다는 점 등을 내세워 관철시켰다.
유엔사령부의 승인에 따라 8월 30일 인천상륙작전 명령을 하달하고 임무를 부여했다. 인천항만 확보와 해안교두보 점령, 신속한 진출로 김포비행장 확보, 한강도하 서울탈환, 미8군과 연계작전이 가능해질 때까지 서울 근교 진지점령이었다.
상륙작전 연합부대를 편성해 상륙부대로 10군단을 편성하여 미해병 1사단(1,5(부산),7연대, 고베), 미보병7사단(17,31,32연대,요코하마), 국군 1해병연대(부산), 국군17보병연대(부산), 2특수공병여단 등으로 구성했다.
(한국 1해병연대는 사령관 대령 신현준의 지휘 아래 제주도에서 훈련받던 3,000명의 신병과 김성은부대 예하 2개중대를 합쳐 1개연대로 편성했다. 부산에 상륙하여 미해병5연대와 약 7일간 합동훈련을 실시했다. 훈련기간이 짧았던 이유는 한국군에게 지급된 미군 최신 개인용 화기 사용법 숙달과 상륙작전 전술 이해도가 매우 빨랐기 때문이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극동함대는 제7합동기동부대(Joint Task Force Seven)를 편성했다. 제90공격기동함대는 상륙부대 수송과 근접항공지원, 함포사격 등을 담당하면서 해두보 확보시점까지 상륙부대의 작전지휘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상륙부대 10군단은 92기동부대가 되었다. 7합동기동부대 지휘함은 로체스터호, 90공격기동부대 지휘함은 마운트 맥킨리호로 삼았다.
(7개국 261척의 함대 구성은 한국 15척, 미국 226척, 영국 12척, 캐나다 3척, 호주 2척, 뉴질랜드 2척, 프랑스 1척이었다.)
월미도 북단(녹색해안), 인천북단 해안벽(적색해안), 인천남단 갯벌지역(청색해안)으로 상륙지점을 나누고, 작전지역을 상륙지점으로부터 반경 48Km로 했다. 상륙시간은 9월15일 오전 만조시간 06:30시를 L시로, 오후 만조시간 17:00을 H(해안접안시간)시로 정했다.
(상륙작전개시 2차 분산 개시는 각각 그 시각이 항공촬영 판독을 통해 만조와 간조 시에 상륙선거함이 가장 안전하게 이동할 수 있는 물깊이가 8.8m에 이르는 시간으로 분석했기 때문이다.)
녹색해안에는 미해병5연대 3대대가, 적색해안에는 한국해병1연대와 미해병5연대가 상륙하여 미해병1연대와 연결하여 동쪽 진격을 준비하며 한국해병1연대는 시가지 소탕작전을 전개하고 , 청색해안에는 미해병1연대가 상륙해 미해병5연대와 공조하기로 했다.
9월6일 최종적으로 작전전개일을 9월15일로 확정 하달했다. 9월 14일 인천 앞 (8월18일 한국 해병대가 탈환한) 덕적도 근해에 집결했다. 먼저 인천을 중심으로 반경 50Km 이내에 있는 목포물들에 대한 포격과 공중폭격이 진행됐다,
해안 방어선(226독립육전연대,918해안포연대, 845부대 5보대)과 교통로 등에는 주로 함포사격이 이뤄졌고, 인천 시내(9사단 87연대) 등 도로와 다리, 터널, 조차장 등에 폭격기들이 폭격을 가했다.
(미항모 Boxer(항공기 110대)호, Sicily(33해병비행전대 214대대), Badoeng Strait(33해병비행전대 323대대), Valley Forge, Phillippine Sea, 영국항모 Triumph에서 출격한 항공기 등 200여대가 목표물에 폭격을 가했다.)
02:30 맨스필드호를 비롯 함포지원단 서쪽 수로 진입 (동남쪽 집결후 북서로 진출 뒤 서쪽에서 공격)
06:00 상륙부대 분승완료 대기
06:15 공중폭격 완료, 상륙부대 돌진 개시
06:33 1파대 상륙완료
08:07 월미도 탈환완료
인천 상륙작전과 서울탈환작전에서 한국군과 유엔군은 적 사살 1만 4천명, 포로 7천명의 대전과를 올린 반면, 아군은 미 해병대 제 1사단 2,450명, 한국 해병대 4백여명, 미 육군 제7사단 32연대 350 여명이 전사상자를 냈다. 인천상륙작전에서는 전사자 20명에 구축함 3척(Collet, Gurke, Swenson)이 경미하게 파손됐다.
10월 1일 맥아더 원수 북한군 총사령관에게 항복요구 성명 발표
10월 2일 작전명령 제2호, 유엔군 북진 명령 하달
미8군 주공, 미10군 조공. 정주-군우리-영원-함흥-흥남(맥아더 라인) 이북은 한국군이 전담.
10월 9일 유엔 안보리 결의에 의해 두 번째 항복요구 성명 발표
10월 9일 38선 돌파 북진
<인천상륙작전 참가 항공모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