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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수복 후 미국과 유럽의 선택

대한인 2013. 12. 28. 08:08

<북한군에게 일시 점령당한 서울>

 

임시정부는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해서 대한민국을 건국하게 된다. 한국은 공산주의 북한에 대항하기 위해 1887년 최초의 주미공사 박정양 이후 60년만에 주미대사를 파견하여 처음으로 한 일은 경제원조와 무기지원을 요청하는 일이었다. 그만큼 한국의 무장력은 공산국가 북한에 비해 형편없었고, 경제기반마저 뒤떨어져 있었다.

한국은 2월 26일 안보리의 회원자격심의위원회에서 유엔 가입자격이 가결되었으나, 4월 10일 안보리에서 소련의 반대로 유엔가입이 부결되는 과정에서 미국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없을 것이라고 판단하고 동북아의 상황을 낙관적으로 이해하여 1949년 6월 29일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겨 놓고 주한미군을 철수시켰다.

(50년 3월 13일부터 6월 25일까지 접수된 CIA의 일일정보요약을 보아도 6월 16일의 북한이 38선에서 평화통일 선전공세를  했다는 언급만 있을 뿐이다. 미국은 6.25남침 발발하던 순간에도 북한의 남침 징후를 알지 못할 정도로 한반도 정세를 낙관했다.)

미국의 철군을 감지한 한국은 공산국가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항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미국의 대한방위보장 선언 또는 한미 방위조약체결 선언, 아시아대륙에서의 반공투쟁을 위한 태평양 동맹 결성(자유중국의 장개석이 적극적이었다), 진해의 미해군기지화, ECA를 통한 경제원조, 긴급무기원조 등을 요청하였다.

한국에서는 1950년 4월달에 2주동안 연인원 100만명이 미국을 향해 무기를 달라며 국민들의 집회가 계속되면서 미국에서 외교적 노력을 했지만 국무차관 제임스 웹은 "한국인 전체가 공산주의의 권력탈취에 대항하겠다는 결의가 없으면 어느 정도 해주는 군사원조도 한국의 생존을 보장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미국의 한반도 불간섭 원칙은 곧바로 50년 1월 12일 미국무장관 애치슨의 한국과 자유중국은 미국의 방위권에서 제외된다는 애치슨 라인이 발표되고 설상가상으로 미국최초로 해외원조가 부결되어 대한경제원조안이 통과되지 못하고 말았다.

 

한국은 미국무성 외교문제 특별고문 덜레스의 일본방문과정에서 한국 방문은 예정에 없었지만 끌다시피 해서 억지로 한국으로 초청해 국빈대접하면서 38선의 너무나 허술한 한국군의 무장력을 보여주며 미국의 지원이 절실함을 이야기 했다. 이에 덜레스는 한국 국회에서 한국이 침략당할 경우 미국이 참지 않을 것이며 한국을 미국의 극동방위계획에 포함할 것을 마지못해 시사만하고 한국을 떠나 6월 22일 일본으로 향했다.

6월 25일 북한은 소련과 동맹을 맺고 4만명의 소련군을 중국 국경지대인 북간도에 숨겨 놓은채 무기를 공급 받아 남침을 감행하였다.

 

오전 10시 유엔 안보리에서 호주, 중국, 엘살바도르, 프랑스, 인도, 필리핀, 터키의 7개국 대표로 구성된 유엔 한국위원단은 유엔 사무총장 트리크브 리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전면침공의 성격을 띤 중대사태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으며, 이는 세계평화와 안전을 위협할 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 문제를 안보리에 상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건의했다.

 

오후 2시 10개 이사국이 모인 회의에서 리 사무총장은 유엔은 침략에 직면한 한국의 평화와 안전을 회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면서 피해 당사자인 한국의 입장을 듣자고 했다. 유고가 강력하게 반대하며 북한도 참여해야 한다고 우겼으나 표결결과 6대 1로 유고안이 부결되었는데, 이집트, 인도, 노르웨이가 기권했다.

 

최종적으로 한국대표의 회의 참석이 9대1로 통과되어 한국이 북한의 침공에 대해 유엔에서 국제사회에 호소할 수 있게 되었다.

치밀하게 계획되고 소련의 지원까지 받은 공산주의 북한의 침공에 한국이 기댈 곳은 공산주의 국가들인 중공이나 소련도 아니고 한국을 침략했던 일본도 아니었다. 미국은 소련이 개입하지 않았다면 해군과 공군력만으로도 한국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미군의 작전은 38선 이북으로 확대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며 27일 오전 한국에 미군파병을 결정하고는 12시 30분에 미 해군과 공군의 한국파병을 전세계에 공표했다.

서울이 함락된 28일 유엔 안보리 제 2차 긴급회의에서 8시간의 회의 끝에 밤 11시 미국측이 제안한 ‘침략 격퇴와 평화 회복을 위해 필요한 원조 제공을 권고하는 결의안’을 소련, 이집트, 인도 대표 불참리에 7대 1로 채택했으며, 유고가 제안한 대안인 북한대표초청과 정전 재차 요구, 유엔의 분쟁 당사자 중재안을 7대 1로 부결시켰다.

 

소련의 불참은 의도적이었는데, 스탈린이 체코 지도자 같월드에게 보낸 비밀편지에서 그 의도가 파악되었다. 미국을 한반도의 전쟁에 끌어 들여 위협적으로 많은 수의 군대를 보유한 중공과 충돌시킴으로써 동서양 양쪽에서 위협이 되는 이 두 세력을 약화시켜 소련의 힘을 비축하여 확대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http://blog.naver.com/qnwkkr/120055286437)

(당시 트루먼은 회고록에 “이대통령의 지원 호소 메시지를 듣고 온 장면대사는 어찌나 풀이 죽었는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거의 울음을 터뜨릴 지경이었다. 나는 그를 위로했다. 전투를 시작한 지 48시간 밖에 되지 않았다. 역사를 보면 다른 나라 사람들은 더 절망적인 정세에서도 자유를 수호하고 승리를 얻은 경우가 있다. 기운을 내라고...”적고 있다.

한편으로 트루먼은 "내가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내린 모든 결정은 한가지 목표로 제3차 대전과 문명세계에 초래될 가공할 파괴를 방지하는 것을 염두해 두었다."고 밝히고 있다.)

주미대사로 한국지원을 관철시켜 가던 장면은 6월 26일부터 유엔 안보리 회의가 끝날 때마다 ‘미국의 방송(Voice of America)’을 통해 미군파병과 유엔 결의 내용을 설명하고, 곧 서울을 탈환할 것이니 공산당 치하에서 어려움을 참고 견디라며 날마다 호소했다. 특별히 북괴군에게 협조하거나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날뛰면 수복 후에 극형에 처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7월 유엔군 총사령부가 설치되고 맥아더가 총사령관이 되면서 본격적으로 북한이 일으킨 전쟁은 국제전으로 전개되게 된다. 또한 사무총장 트리크브 리와 미국 유엔수석대표 오스틴, 중화민국과 필리핀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한국을 대상으로 하는 비상구호계획안이 채택되었다.

북한군의 진군이 낙동강 이남만 남겨 놓은 상황에서 유엔연합군과 미군의 도움으로 북한군을 격퇴시킬 수 있게 되었다. 게다가 북한군은 압록강 건너에 있던 소련군의 군수지원을 제 때 받지 못함으로써 낙동강 전선에서 우위를 점할 수 없었던 상태에서 연합군은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하여 대반격의 전세를 갖출 수 있게 된다.

 

<해병대의 인천상륙작전후 서울 중앙청 탈환>

 

10월달 한국군과 연합군이 3.8선을 회복하게 되자 미국은 파병당시 전선을 3.8선 이북으로 확대하지 않는다는 입장에서 한국의 집요하고 끈질긴 주장으로 인해 통일 한국 실현이라는 정책으로 선회하게 된다. 그러나 유엔은 인도의 문제 제기에 따라 입장이 달라지게 된다. 북한 점령 후의 북한 통치 문제에서 대한민국의 통치권을 북한에 연장 적용하는 안, 다른 통치기구를 잠정적으로 설치하는 안, 남북한의 새로운 통일정부를 수립하는 안 등이 다뤄졌다.

 

<개성 탈환 직후의 시가지 모습>

 

미국은 개성수복후 한반도에 대한 세 가지 대안을 비교검토하였다.

 

첫번째 대안은 (38선회복) 휴전상태에서 한국을 군사동맹국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한국전에서 실제 의미로 패배한 중공과 소련의 입장에서는 휴전으로 인해 미군이 주둔하게 되어 위험이 따르기는 하지만 본래의 분단상태로 돌아가면 다시 북한을 영향력 아래 둘 수 있다는 점을 매력적으로 여길 것이라고 봤다. 또한 북한을 재정비시켜 한국을 다시 한 번 공산화 하겠다는 전략 때문에 중공과 소련이 가장 선호하는 안일 것이라고 분석하였다.

 

두번째 대안은 한국 중심으로 한반도 통일을 이루고 서방진영이 중립국으로 인정하는 방안이다. 

한국이 서방국가들로부터는 중립을 유지할 수 있지만 중공과 소련이 중립을 보장하지 않을 것이라는 한계가 있다고 보았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반도의 중립으로 인해 미군이 철수하게 되더라도 미국의 이익이 위태롭지 않을 것으로 판단했다. 다만 국지전과 한국내 내전은 일본에 주둔한 미군의 힘으로 한국의 방어를 도와줄 수 있지만 전면전에서는 한국의 방어가 취약한 점을 가장 큰 약점으로 보았다.

 

세번째 대안은 유럽의 주장대로 서방진영과 공산진영 모두로부터 중립이 보장되는 통일한반도 대한민국이었다.

한국이 공산화 될 위험성이 현저하게 낮아지기 때문이었다. 이 것은 유럽이 가장 바라는 것으로 한국에게 지원하던 미국의 군사자원을 유럽의 다른 동맹국을 돕는데 쓸 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국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연합국이 적극 찬성한 세번 째 대안을 선택하게 된다. 이후 영국이 제기한 어떻게 공산진영으로부터 확실하게 한국의 중립을 끌어내 보장해주느냐 하는 방법상의 논의가 진행되는 도중에 중공군의 침략을 당하게 된다.

북한의 남침에 맞서 과감하게 북한군을 섬멸하며 북진하여 압록강까지 진출해 통일을 바로 눈 앞에 둔 상태에서 중국공산인민군의 개입은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게 된다.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는 중공군의 전력상 유엔군이 한국에서 전쟁을 계속 수행하기 힘들 것으로 판단하고 중공에 대한 원자폭탄 투하를 요청하였다. 유엔군으로 참여한 국가들의 피해가 커지자 휴전론이 제기되기 시작하고 영국은 미국과 중공 간 군사적 충돌을 막기 위해 한반도의 완충지대 설치안을 제시하게 된다.

1951년 1월, 미 극동군사령부는 한반도에서의 전면 철수에 대비한 한국 정부 피난 계획을 수립한다. 한국 정부 관료 및 주요 인사, 한국군 등 100만명을 제주도로 소개하거나 주요 인사 2만명만 선정하여 해외 지역으로 소개시켜 망명정부를 구성하는 두 가지 방법이 검토되었다. 미국과 유엔이 완전하게 한국을 포기하지 않는 한 둘 중 하나는 시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천우신조로 결국 한반도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지을 수 밖에 없는 한국군은 처절한 죽음의 사투 끝에 중공침략군 90만명을 섬멸하는 대공세에 성공하면서 한국을 지켜내고야 만다.


휴전헙정이 진행되면서 53년 11월 미국무부 보고서에는 중공과 소련의 전략에 대한 미국의 판단이 요약되어 있다. 중공과 소련은 첫째, 북한을 이용해 중공의 동북부와 소련의 연해주를 방어하면서 중공과 소련의 통신망를 보호하고 둘째, 한국이 북한에서의 서방국가들의 군사작전지역으로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며 세째, 북한을 한국을 공격하고 일본을 공격하는 통로로 사용한다라고 분석하였다.

휴전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미국은 한국과의 관계설정을 기존의 애치슨 라인에서 벗어나 새로운 한미관계로 전환하게 된다. 미국은 한국이 자유진영과 공산진영 양쪽으로부터 중립이 보장된 한반도 통일 국가가 되는 것을 최종 정치적 목적으로 삼았다.


<압록강까지 진격한 6사단의 한 병사가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