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미군과 소련군 진격로. 되찾아야 할 아무르 강을 잊지 말자. 사진 클릭하면 더 큰 사진>
1. 태평양 전쟁의 시작
1차대전 책임에 대한 의무가 가혹하다고 느끼던 독일이 파시즘을 앞세워 유럽침략에 돌입하면서 미국의 루즈벨트는 그렇지 않아도 기존의 도적적 설득 외교에서 벗어나 설득과 힘의 외교로 전환한 상태에서 더욱 강경하게 힘을 내세워 세계 평화를 유지하는 것으로 외교정책을 전환하게 된다.
이에 따라 중일전쟁에 나선 일본에 대해서 기존의 자세에서 벗어나 중국을 지지하게 되고, 역시 가쯔라-테프트 비밀각서로 대변되는, 조선을 지배해서 남진하려는 러시아를 막기 위해 일본의 조선지배를 묵인했던 것도 철회하게 된다.
(그 이전에 조선의 멸망에 관해 세계는 러시아에 의해서냐 일본에 의해서냐 하면서 어느 쪽으로든지 간에 침략당해 지배당할 것이라고 기정사실화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권력층은 안동 김씨 패악에 이어 민비 세력이 새로운 부패권력으로 등장해 여전히 조선민중은 부패한 권력에게 부당한 착취를 당하고 있었고, 조선민중은 부패한 권력에 애써 일군 부를 모두 뜯기느니 차라리 노력하지 않고 가난해 지는 것을 선택하고 있었던 실정이었다. 조선의 미래를 애타하던 민족주의자 혹은 애국자들도 이러타할 대책을 내놓을 수 없어 갈 수록 현실과 동떨어진 원칙론에 점점 매달리게 되고 주류를 형성하게 된다.)
일본의 만주지배까지는 러시아 남진정책을 저지한다는 영국의 입장에 서서 상당한 인내심을 발휘하던 미국은 일본의 식민지 확대 기도와 군사력 팽창이 위험수위에 도달했다고 판단한데다가 독일의 유럽침략으로 인해 이들과 대립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1930년대에 미국(6억6천7백만 달러)보다 훨씬 적은 국방비(1억5천2백만 달러)를 쓰던 일본은 미국(57%), 영국, 네델란드로부터 무기체계 생산에 필요한 물자의 85%를 수입하고 있었다. 항공기와 항공모함 부품, 공작기계, 석유와 고옥탄가 연료, 고무, 주석, 동, 면에다 심지어 고철까지 수입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일본의 무기체계 개발은 상당한 성과를 내고 있었다. 미국이 직접적으로 위협을 느낄만큼 일본은 우수한 군사무기체계를 능숙하게 자체 생산에 성공을 계속하고 있었다.
일본의 항공기 생산만을 봐도 3개년 개발계획에 따라 1932년에 자주적 생산을 본격화 했는데, 나무가 섞인 기존의 복엽기에서 완전 금속 단엽기 개발에 성공하면서부터다. 미국과 영국은 이 일본의 단엽기(영식함상 전투기 -제로센)보다 더 늦은 시기에 올 쥬라루민 전투기를 생산해 냈지만 일본의 영식함상 전투기보다 성능이 너무나 떨어졌다.
1930년대 일본이 내세운 대동아공영이라는 공격적 식민지확대에 대한 우려를 갖고 있던 미국에게 일본을 견제해야 하는 현실적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었다.
일본이 (제국주의적 시각에서) 주인없는 땅이 된 중국을 1937년 7월 7일 침략해 전개된 중일전쟁 2년이 지나던 시점부터는 미국에게 일본에 대해 제재를 가해할 필요성이 실제 압력으로 작용한다. 바로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대서양권에서의 혈전이 예고되고 있었고,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대서양 전쟁과 태평양에서의 전쟁을 동시에 수행하기에는 벅차다는 판단을 내렸고, 선택 중 하나로 일본에게 위협적인 경고를 하게 된다.
일본이 계속해서 대동아공영을 내세운 제국주의 식민지 팽창을 지속할 경우 경제적 봉쇄를 가하겠다는 것이었다. 일본을 묶어 두어야만 파시즘에 맞서 유럽에서 전쟁에 몰두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시기 미국에서 국민여론은 일본과의 전쟁에 대해 절반정도 찬성했으며, 미 행정 군사 관료들은 전부 일본과의 전쟁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찬성했으나 전쟁 준비에 돌입하지는 않았다.)
미국은 1940년 1월부터 단호하게 미일통상항해조약을 폐기하는 것을 기점으로 일본에 대한 상품 수출을 제약하면서 1940년 7월에는 국방강화촉진법을 제정해 무제한으로 수출금지 품목을 선택할 수 있게 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압박을 강화했다.
이에 맞서 일본이 독일이 프랑스를 점령(1940년 6월 14일)한 틈을 타서 1940년 9월 27일에 독일, 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체결하고서는 프랑스 지배지역이었던 북부 베트남까지 진출하자 미국은 고철 수출까지 중단하면서 일본에 대한 경제봉쇄를 강화했다.
초기 일본은 독일군의 돌풍같은 승리에 들떠 있었다. 일본은 독일군의 러시아 진격 속도를 보면서 러시아의 패망을 기정사실로 보았다.(모스크바 주재 일본대사 다데카와의 전문) 어쩌면 초기 독일의 전승행진은 일본으로 하여금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할지도 모른다는 행운에 대한 기대를 갖게 하는 것과 동시에 석유와 고무 등 천연자원 확보의 절실함 때문에라도 어쩔 수 없이 미국과의 전쟁을 선택할 수 밖에 없는 환경을 조성했다.
일왕 마쓰다히라가 패전 직후인 1946년 3월 18일부터 4월 8일까지 내대신 마쓰다히라를 비롯한 각료들에게 고백한 바에 따르면 "참으로 석유의 수입금지는 일본을 구석으로 몰아 넣었다. 이렇게 된 이상 만일의 요행을 바라면서도 싸우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결정적으로 든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일왕 마쓰다히라의 딸 마리코 데라사키 미라의 출판물)라고 함으로써 일본이 왜 진주만을 기습할 수 밖에 없었는지를 알게 해 준다.
중국을 침략했지만 속전속결로 중국을 완전정복하지 못하고 중일전쟁이 장기화 될 조짐속에서 미국, 영국, 네델란드가 가하고 있는 경제적 봉쇄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본으로서는 석유와 고무, 각 종 금속자원을 얻을 수 있는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베트남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일본은 만약 석유와 각종 금속과 고무 등 천연자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게 되면 완전한 독자적 자립경제권을 유지할 수 있게 되어 어떠한 외부의 압박도 이겨 낼 수 있다고 전망했다. 이 것은 자연스럽게 대동아 공영이 성공적으로 완성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한편으로 중국에서의 일본군 철수는 일본의 입장에서는 한없는 후퇴와 양보의 시발점이 되어 결국에는 만주까지도 상실하게 될 것이라는 절박함이 있었다. 더군다나 일본의 미국을 상대로 한 외교적 시도가 미국 국무장관 헐의 '중국에서의 철수, 만주국 포기, 베트남에서의 철군, 3국 동맹탈퇴, 타국 접근 금지' 등을 내세운 완강한 거부로 무산되고 만 것이다.
일본에게는 일본에 대한 압박을 가장 강하게 가하던 미국과의 전쟁은 필수불가결한 선택이 된 것이다. 이로써 일본은 미국이 일본에 대한 석유수출금지를 실시한지 4개월만인 41년 12월 7일 기습적으로 진주만을 공격해서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된다.
<북쪽에서 바라 본 38선 표지판>
2. 태평양 전쟁 종식, 소련의 조선 침략
일본이 움켜진 식민지들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역공세에 나서 전선을 속속 태평양에서 확대해 나갔지만 미국과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막대한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패망할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진주만 기습공격 이후 일본과의 태평양 전쟁마저 수행해야 했던 미국으로서는 점차 아시아 지역에 대한 외교정책들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처음부터 미국에게 무관심 지역이었던 아시아에 대한 정책 준비는 초기에는 연속성이나 매끄러움을 가지기 힘들었다.
1941년 8월 루즈벨트가 플라센셔만(Placentia Bay)의 전함 오거스타호에서 처칠과 회동한 후 모든 식민지 국가들을 해방시켜 자치정부 수립을 돕겠다는 대서양 헌장(The Atlantic Charter, 1941.8.14)을 발표하면서 조선의 해방도 포함하게 된다. 루스벨트는 대일본 전쟁을 결심하면서부터 동북아 정세에 있어서 중국과 소련의 대일전쟁 참전 격려와 조선이 독립을 쟁취하고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따르는) 정부를 수립하도록 한국민을 지도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게 된다.
조선에 대한 미국의 선택은 1942년 2월 국무부 극동국 랭던(Willam R. Langdom)의 보고서를 바탕으로 점점 구체화 되기 시작한다. 당시 세계의 주류 국가들이 갖고 있던 조선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미국도 따르고 있었기에, 절대적 문맹과 절대적 빈곤에다 정치(직접비밀선거에 의한 정부수립)경험이 전혀 없는 조선은 보호와 교육, 원조가 필요함으로 일정기간 신탁통치(trusteeship)을 통해 독립국가로 탄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1943년 3월 24일 백악관에서 루즈벨트는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 계획을 영국의 외상 이든(Anthony Eden)에게 밝혔으나, 당시 영국은 완전히 식민지 경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긍정적 대답을 회피했다. 이러한 이든의 속내는 8월 퀘벡(Quebac) 회동에서 기존의 식민지배국에게 신탁통치를 맡기는게 낫다는 발언으로 드러났다.
(이러한 미국과 영국의 식민지 국가 해방에 대한 시각차는 그 이후에도 뚜렷하게 다른 모습을 보였다. 미국은 다른 나라들이 지배했던 식민지 국가들을 대신해서 맡아 3~10년 동안 대리 신탁통치를 통해 독립국가로 안정시켜 호응을 얻었으나 영국은 자국의 식민지 유지 정책을 장기간 유지하면서 갈등을 겪었다.)
1943년 12월 1일 카이로에서 루즈벨트, 처칠, 장개석이 회담을 열고 공동성명을 통해 '3국은 조선인의 노예상태에 있음을 유의하여 '과정을 밟아' 자유 독립국이 돼야 할 것임을 결정한다'라고 발표했다.
여기에서 한 가지 논란이 발생하게 된다.
(상해임시정부의 외교력이 미국에게 확실하게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친북좌파들이 많은 민족보수 독립운동가들을 암살하면서, 심지어는 상해임시정부를 훼방해 무장조선독립투쟁세력들이 실질적으로 사라져 버린 상황에서 조선은 독립을 스스로 쟁취하기에는 이미 기회를 상실해 버린 시기였다. 그나마 유지되던 무장투쟁 세력들 일부는 모택동의 팔로군이 되어 공산당 용병으로 활동 하고 있었고, 북한 김일성을 포함한 다른 부류는 소련군이 되어 앞잡이로 활동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그나마 상해임시정부의 광복군만이 영국주둔 프랑스 드골 부대처럼 순수한 정통 조선항일무장군의 맥을 잇는 형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나마 이승만이 독립을 위한 외교에 나서 가장 미국 정부에 근접했으나, 독립 외교 추진파는 끊없는 공산좌파 무장파들의 집요한 견제를 당하고 있었다.(심지어는 이승만이 독립자금을 횡령했다는 음해가 지금도 가해지고 있다. 정작 상해임시정부에서 독립자금을 횡령했던 세력은 노령파(소련파) 고려공산당 이동휘였다.))
카이로 회담 공동성명서의 미국측 1943년 11월 24일 초안은 조선의 독립에 대해 '가능한 빠른 시기(at the earliest possible moment)'였으나 루즈벨트는 '적당한 시기'를 생각하고 있었으며 이 것은 처칠의 수정에 의해 '과정을 거쳐(in the course)'라는 문장으로 바뀌게 된다. 루즈벨트가 조선 독립에 대해서 '빠른 시기'에서 '과정을 거쳐'라는 입장으로 돌아 선 것은 독일의 침략을 격퇴 시킨 이후의 소련이 다시 세계 공산화에 나서면서 조선도 공산화 시킬 것이라는 우려가 작용 했다.
당시 루즈벨트는 필리핀 방식을 생각하고 있었다. 수 백년간 스페인 식민지로 억압당했던 필리핀의 독립국가 수립과정을 염두해 두고 있었다. 1898년 미서전쟁을 통해 2천만 달러에 양도 받은 필리핀에 대해서 36년이 지난 1934년 미국 의회가 필리핀 독립법을 의결하고, 1935년에 케손이 필리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46년 완전독립국가를 목표로 필리핀 연방정부가 탄생했다. (필리핀은 이후 미국에게 매우 우호적인 국가가 되어 한국이 북한의 6.25침략을 당했을 때 유엔에서 가장 한국에게 우호적인 외교력을 쏟아 부으며 군대마저 한국에 파견해 북한의 남침 격퇴를 도왔다.)
루즈벨트는 이러한 필리핀 방식을 아시아에서 조선과 인도차이나(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에 적용하려는 의사를 가졌다. 소련을 대일전쟁에 참여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1945년 2월 8일 얄타회담 중에 루즈벨트는 미국이 필리핀을 40여년간에 걸쳐 지배하면서 끝내 독립국가로 탄생시킨 과정을 들어 조선도 역시 20~30년간은 미국의 후견(tutelage)을 받아야 제대로 스스로 독립을 유지할 수 있는 자립국가가 될 것이라고 스탈린에게 개인적으로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스탈린은 조선의 공산화가 목표였기에 신탁통치가 필요없다는 식으로 조선 스스로 정부를 세울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면서 신탁통치 기간이 짧으면 좋겠다는 대답을 하면서 공식의제에서 제외시켰다.
그럼에도 미국과 소련 사이에는 1945년 5월 루즈벨트의 특사 홉킨스(Harry Hopkins)가 소련과 비밀약속을 했다. 4대국(미국 영국 소련 중국)에 의한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는 5년간이며, 신탁통치 기간 동안 조선인에게 행정과 기술교육을 실시하고, 신탁통치기간 동안 4대국은 최소한의 병력만 남겨 놓고 대부분의 군대를 철수한다는 내용이었다.
소련은 이러한 약속을 하면서도 3만5천명의 조선인을 훈련시켜 붉은 군대(Red Army)로 양성해 놓았기에 조선내부의 공산당원들과 협력시키면 조선을 친소련 공산화 할 수 있다고 자신감에 차 있었다.(중국 외교부장 송자문宋子文이 미국 대사 해리먼에게 전달한 정보) 어쩌면 이 무렵부터 소련은 미국이 조선에 적용하고 싶어했던 필리핀 방식을 역으로 이용해서 조선을 공산화 해서 위성국가로 삼으려는 목표를 세우고 추진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1945년 4월 루즈벨트가 사망하고 트루먼이 미국의 대통령이 됐다. 트루먼은 루즈벨트의 대조선 외교정책을 그대로 수용하는 입장을 견지했다.(물론 그의 교육수준과 경험부족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거대한 미국의 지도자가 됐다는 것은 그의 능력이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소련으로 하여금 대일전쟁에 참여하도록 유도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한편으로 소련이 조선을 자주독립시키겠다고 결의한 카이로 회담을 준수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그 것을 위해 1945년 7월 22일 포츠담(Potsdam) 회담을 개최해 확인하려고 했다.
소련이 기도하고 있던 조선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방편으로 최소한 어느 한 국가가 조선에 대해 일방적인 (공산화 기도) 행동을 할 수 없도록 제재장치를 마련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소련이 인정하게끔 해야 했다. 결과는 아프리카에 존재하고 있던 이탈리아지배 식민지 처리 문제 등이 엮이면서 미뤄지고 만다.
미국이 우려한 것은 소련이 폴란드를 식민지 공산주의 국가로 만들어 유럽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을 위협하듯이 소련이 만주와 조선을 극동아시아에서 폴란드화나 루마니아화 하는 것이었다. (소련은 나중에 북한을 폴란드화 하고 몽골을 공산지배하여 심지어 일본의 조선 성씨 말상정책을 따라 하듯이 몽골에서는 성씨제도를 없애 민족적 기상을 유전적으로 약화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몽골에 성씨가 사라짐으로써 근친결혼이 성행하게 되어 유전적 부작용이 많이 나타났다. 90년대 말부터 몽골정부는 고유 성씨 회복운동을 펼쳤다.)
조선을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동상이몽은 인류최초의 원자폭탄 투하라는 세기적 사태로 인해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미국과 소련 모두 원자폭탄이 그 정도로 위력적이며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것이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에서 승기를 잡아 가면서 최후의 전쟁 종심으로 일본 열도 중 하나인 규수를 선택했다. 1945년 11월 1일을 전후로 규수에 대규모 상륙작전을 펼쳐 일본열도를 점령해 제국주의 일본을 섬멸하려는 작전을 세워두고 있었다.
미국은 첩보부재와 분석 및 정보화 판단 미숙으로 인해 만주에 관동군이 8십7만5천명이 주둔하고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미군이 일본 각 열도에 상륙했을 때 이들이 일본열도에 몰려와 최후방어선을 구축할 것으로 보고 미군의 사망자 수를 200만명으로 예측하고, 미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이 절실하다는 잘 못된 결정을 내리게 된다.
미국은 소련에게 만주와 요동반도 점령을 허락해 줬고, 한반도에서의 작전 범위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갈등이 표출됐지만 소련군의 공군 작전 범위를 만주 장춘에서 북한 함경남도 무수단 지역까지로만 한정하게 한다. 미국 입장에서는 인천항과 부산항, 조선의 수도였던 서울을 미군이 소련의 야욕에 대비해서 조선에서 활동하는데 가장 중요한 근거지로 판단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대로 진행했다.
친북적 시각의 부르스 커밍스가 제시하고 있는 자료에 의하면 미국은 미국과 소련군의 육군 경계선을 38선 혹은 38선 부근선을 획일적으로 획정해서 38선 이북을 무작정 소련에게 내준 것으로 되어 있다.
미군이 1945년 8월 6일과 9일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직후인 1945년 8월 10일 아니면 11일 어느 날 밤에 단 30분만에 일반참모에 불과했던 대령 러스크와 대령 본스틸이 형편없는 지도를 보면서 즉흥적으로 한반도를 절반으로 분할하겠다고 결정을 내렸다고 한다.(커밍스는 3부조정위원회SWNCC 회의에 대한 여러 주장들 가운데 이 하나만을 유난히 고집했기에 전체 흐름상 맞지 않다.)
분명하게 미국은 끝내 일반명령 제1호를 통해 38선을 소련과의 분쟁회피선으로 설정하고 만다. 일반명령 1호는 38선 이북의 일본군은 소련에게 항복하고, 38선 이남의 일본군은 미국에게 항복하라는 내용이었다.
일본군을 막강하게 여겨 곰처럼 웅크려 있기만 하던 소련군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6일에서 이틀이 지나 상황이 파악된 8일부터 158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세 방향에서 공격을 개시해 남진했다. 소련군 25군은 만주 중앙부를 향해 진격해 나갔다. 소련군 25군은 초창기에는 미국과 약속한 함경남도 무수단 지역까지로 한정된 폭격범위를 지켰지만 원자폭탄 투하 이후 발생한 혼란기를 틈타 공산화를 위해 조선을 침략한다.
소련군은 남진개시 4일만인 1945년 8월 12일부터 해군을 동원해 웅기, 나진, 청진을 차례로 상륙점령했다.(1945년 8월 9일부터 함포사격을 개시했었다.) 25군은 만주 중앙지역에서 일본군의 저항없이 남진을 계속하다가 8월17일부터 방향을 선회해 8월 21일에는 느닷없이 해군 수송선을 타고 북한 원산을 상륙점령했다. 다시 진격을 개시해 8월 24일에 평양을 점령해 8월 25일 북조선 주던 제25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8월 26일에는 25군 주력부대가 평양에 입성했다. 곧장 8월 말부터 38선에서 남북교류와 민간인 이동을 봉쇄했다.
소련은 북한주둔 소련군 사령관에 대장 치스챠코프, 참모장에 중장 펜코프스키, 정책지시 감독에 연해주 군관구 군사회의 위원 중장 슈티코프, 점령지 정치업무에 행정장교 소장 레베데프, 군사업무에 소장 샤닌, 민정업무에 조직장교 소장 로마넨코, 민간행정에 이그나체프를 임명했다.
로마넨코와 이그나체프는 북한지역 정치세력을 접촉해 공산주의자가 되도록 포섭하는 역할을 담당했으며, 이그나체프는 김일성 후견인으로 김일성이 북쪽 권력을 장악하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왜 미국은 갑자기 한반도가 분단될 수 있는 38선 분할론을 들고 나왔을까?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이 그 정도로 심각한 타격을 일본에게 줄 줄은 미국과 소련 모두 알지 못했다. 일본은 즉시 모든 저항을 포기할 정도로 무력화 됐고, 원자폭탄이 만들어 낼 새로운 국면을 예측하지 못했기에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못했던 미국과 소련 중에 누가 먼저 만주를 점령하고, 조선에 상륙하느냐 하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소련의 조선 공산화 식민지 시도음모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던 미국이었지만 원자폭탄 투하의 위력이 상상했던 것보다 커서 상황이 예측과 빗나가자 극동아시아에서 소련군에 대해 극도로 열세에 처하고 만다.
원자폭탄 투하 이전에 수립된 미국의 계획에 따라 일본, 중국의 천도와 대련 등 전략적 요충지를 차근차근 확보해 나가는 것이었는데, 일본 열도에서 치열하게 저항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본이 원자폭탄 두 발에 혼수상태에 빠지자 미군의 운용에는 커다란 혼란이 왔다.
미군이 기존에 작성했던 중국 진격로 뿐만 아니라 갑자기 공백상태가 되어 버린 조선에까지 미군을 파견하기에는 5천 마일이라는 거리뿐만 아니라 당장 파견할 병력이 부족했다. 조선에까지 투입할 수 있었던 미군 병력은 오끼나와 섬과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었던 병력이 가장 최선책이었지만 소련군 158만명의 남진에 비해서는 시간적 공간적 병력적 열세를 가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미국 입장에서는 만주와 요동반도까지 소련군의 진격을 양해한 상태였지만, 소련군이 북한 지역을 무령점령하자 조선을 완전히 공산화 되도록 내줄 수 없었기에 소련군에 비해 시공간적 병력적 열세인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서 완충역할로 38선 분할선을 내세우게 된다.
트루먼은 비록 조선이 일시적으로 분단될지라도 소련이 신탁통치에 찬성한 이상 일본을 항복시키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으며, 일본이 항복해 한반도에 대한 4개국의 신탁통치가 실시되면 언제든지 공동관리가 시행되어 조선이 하나가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트루먼 회고록) 4개국 공동신탁통치는 소련에게는 단순히 하나의 투표권만을 의미하기에 조선의 공산화를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주소 미대사 해리만 보고서)
미군의 기동성은 시간적 공간적 군사적 제약으로 인해 소련군이 조선을 침략해 북한지역을 장악했던 1945년 8월 21일보다 늦은 1945년 9월 8일에야 인천에 상륙하게 된다. 9월 5일에 미 제24군단 사령부와 지원부대, 7사단 장병 17,756명이 21척의 수송선단을 타고 오끼나와를 출발해 인천으로 향했다.
(여기에서 왜 미군의 인천 월미도 상륙 때 일본군이 미군 영접을 했느냐 하는 점에 대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1945년 9월 1일 조선주둔 일본군 제17방면군 사령관 중장 고오즈키(上月良夫)가 미 24군에 조선에는 평화와 질서를 파괴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이 준동하고 있으며 공산좌파 노동조합이 미군의 상륙을 방해할 가능성이 있다고 무전으로 보고했다.
미 제24군은 고오즈키에게 치안을 유지하고 기존 행정 기관을 존치시킬 것과 모든 미군 환영 행사를 금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일본군은 인천 시민들의 미군 상륙지역에 대한 출입을 통제했으나 일부 군중이 통제 경비선을 뚫고 들어오자 사격을 가해 2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미군은 9월 13일 개성, 16일 부산, 17일 청주, 20일 춘천, 28일 제주, 29일 전주, 10월 5일 광주, 10월 21일 대전에 각각 진주하였다. 이후 제주도까지 포함해 3개 사단, 7만여 병력이 한국에 주둔하게 된다. 북한에는 약 12만 5천의 소련군이 주둔했다)
또한 트루먼은 태평양전쟁을 속히 끝내는 것에 촛점을 맞췄기에 만주와 한반도 전역을 장악해야 한다는 해리만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도 미군의 기동성은 만주지역은 커녕 조선마저도 완전히 보장하기에는 턱없이 미약했다.
결국 조선의 분단은 일본이 근원적 이유이고, 일본의 패망 시기부터는 소련의 조선 공산화 시도 때문에 한반도가 분단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식민지배국들에게서 해방되었던 나라들을 살펴보면 이념에 상관없이 잘 먹고 잘 살면서 군대를 기르자라는 목표에 일치단결한 국가들은 일찌기 해방되었지만 사회주의 이념의 노예가 된 국가들은 내전과 갈등이 증폭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했던 나라들은 지금 대부분 성공했으나 사회주의를 표방했던 나라들은 모두 망했고 뒤늦게 뛰어든 국가들은 지금도 혼란과 내부 충돌을 겪고 있다.)
3. 한국에 대한 미국의 선택
애초부터 한국을 공산화 해서 지배하려던 소련의 계획은 순조롭지 못했다. 미국도 이 시기까지는 한국에 대한 동맹개념이 아니라 역시 소련이 조선을 공산화 식민지로 생각하듯이 그저 공산국가 소련의 조선 공산화 시도를 저지할 목적이 더 컸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미국 영국 소련은 미국의 안(한국의 통일행정 unified admistration for Korea)에 찬성해서 한국에 통일된 민주주의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미군사령부와 소군사령부 대표로 공동회의를 구성하며, 신탁통치기간은 5년으로 해서 미국 영국 소련 중국의 공동심의를 받아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신탁통치 표현에 있어서 미국은 Trusteeship으로, 소련은 Guardianship으로 따로 표기했다.
한국 내부에서는 이 신탁통치안에 대해 좌익과 우익이 찬성이냐 반대냐로 충돌하며 거대한 혼란이 발생하고 있었다. 미국과 소련 역시 이 회의 결정에 대해 서로 다른 뜻을 가지고 있었다.
1946년 1월 16일 미군정청에서 미소 공동회의(Joint Conference)가 개최되었으나 소련은 발목잡기에 나섰다. 미국은 우선적으로 남북이 경제적으로 통합되어야 하며, 식량문제를 해결해야 하고, 모든 문제를 다뤄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에, 소련은 소수의 구체적인 문제만 다뤄야 한다고 버텼다. 1946년 2월 15일에 열린 15차 회의에서는 소련(장군 슈티코프 Terentii F. Shtykov)이 토의자체가 필요없다고 반발함으로써 마지막 미소 공동회의가 되고 말았다.
미소 공동회의에서 보인 소련의 행동을 보면서 미국은 소련이 조선 북쪽지역 완전점령을 추구하고, 북쪽지역을 하나의 경제 정치적 단위로 지배하려고 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미군 중장 하지의 정치고문 베닝호프의 국무장관 보고서)
당시 미국은 조선의 실제상황을 확인하게 되자 상당히 신축적인 방향으로 선회해 다양한 가능성에 대해 열어 놓고 있었다. 즉 한국의 독립이전에 반드시 신탁통치를 해야 한다거나 한국의 특정지역에만 잠정적 특정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 통합된 정부가 수립되면 그 임시정부의 통치능력에 따라 한국의 독립을 어느 때라도 보장한다는 정책으로 입장을 바꿨다.
그럼에도 소련의 한국 공산화 시도를 확인할 수록 미국도 역시 점차 한반도에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대결적 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게 된다.
1946년 3월 20일에 덕수궁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Joint Commission) 1차회의에서 소련의 발언은 조선이 확실히 분단될 것임을 예고했다. 소련은 '소련의 목적은 한국에 친소련 정부가 구성돼 소련을 공격하는 기지가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고 밝히면서 한국정부 구성에 있어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모든 한국인을 배제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의미는 간결하게 공산주의를 거부하는 모든 민족보수주의 세력을 빼고 전부 공산주의자로만 한국 정부를 구성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은 타협안으로 4월 18일에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에 찬성하고, 미소 공동위원회 활동에 협력하는 한국인 대표로 (조선정부를 구성)하자고 했지만 소련은 '이들이 결국 반소련 노선을 걸을 것이기에 충성스러운(loyal) 친소련 조선정부만을 바란다'라면서 이 마저도 거부했다.
미소공동위원회는 미국과 소련 양쪽 모두에게 시간을 벌기 위한 장치로 활용됐다. 소련은 이 회의를 질질 끌며 한국 북쪽을 완전 공산화 장악하기 위한 시간을 버는데 활용했고, 미국은 현실론을 내세워 남쪽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고 있는 이승만을 최대한 견제하면서 미국이 구상하고 있는 조선 통합정부를 수립하려고 했다.
한국 북쪽을 소련이 성공적으로 공산화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도 미국은 한국통합정부를 구성하겠다는 정책을 실현시키야 한다는 목표 때문에 계속해서 소련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회의에서 미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에 동조하지 않는 한국인일지라도 미소 공동위원회 결정에 찬성한다면 수용하겠다라면서 소련의 의도를 어떻게 해서든지 저지하려고 했다.
소련의 의도는 정당과 사회단체 수에서 압도적으로 북쪽이 밀리고 있던 상황(남쪽 425 북쪽 38개)에다가 인구수마저 남쪽 절반 밖에 되지 않는 북쪽의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어떻게 해서든지 남쪽에서 절대다수를 형성하면서 신탁통치를 반대하고 있던 이승만의 독립촉성회를 정치세력 구성에서 배제시켜야 했던 것이다.
미국은 보다 구체적으로 1947년 8월에 남쪽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던 친북좌파 천 여명을 체포해 소련의 기도를 저지하면서 민주주의 원칙에서 벗어난 소련의 인위적 정치세력 구성 시도에 반박했다.
미국은 끝까지 소련이 한국 공산화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 미소공동위원회가 1947년 9월에 결렬되어 교착상태에 빠지자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을 포기하면서 한국 남쪽에 단독정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정책을 바꿨다. 미국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대신할 새로운 방안을 모색해서 미 국무장관 대리 로베트(Robert A. Lovett)가 제안한 유엔 감시하의 한국 총선거 실시 안을 선택하게 된다.
남쪽과 북쪽에 현존하는 입법기관이 채택한 선거법으로 인구비례에 따라 임시국회를 구성하고, 양쪽의 임시정부가 모스크바 협정 체결 국가들과 조선의 정치 경제적 독립에 필요한 원조를 논의하고, 정부구성에 외세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유엔 감시단을 초청하고, 미소 양국의 군대 철수 일정에 합의한다는 것이었다.
이 안에 대해서 영국과 중국은 찬성했지만 소련은 거부했고, 미국은 도저히 소련과 협상이 타결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유엔에 이 안을 상정하고 만다. 여기에는 한국의 문제를 국제화 함으로써 한국 공산화를 꾀하고 있던 소련에 대해 국제적 압력을 가하여 포기시키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1947년 9월 17일 미국은 제3차 유엔총회 의제로 한국의 독립문제를 상정했다. '제한없는 표현의 자유' 원칙을 소련이 반대하고, 소련이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하기에 세계평화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국제적 행동을 요청한다고 했다. 조지 마샬 미 국무장관은 UN 총회에서 "신탁 통치를 거치지 않고 한국을 독립시키는 방법이 강구되기를 바란다"고 발표했다.
이에 대해 소련은 한국의 독립문제가 유엔에 상정된 것은 한국 북쪽에서의 소련의 지위를 위협하는 것으로 여기고, 미군과 소련군이 동시에 철수하면 경제적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북쪽이 남쪽을 쉽게 공산화 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해 미소군 공동 동시 철수를 주장했다.
1947년 10월 28일부터 시작된 유엔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미국은 '선 통합정부 수립 후 미소군 동시 철수'를 주장했고, 소련은 '선 미소군 동시 철수 후 정부수립'으로 반대했다. 소련은 나아가 남북 대표를 동시에 유엔에 참석시키자는 반면에 미국은 남북 대표 선출을 위해 먼저 유엔 한국 임시위원단을 구성하자고 했다.
1947년 10월 30일 유엔 정치위원회는 소련의 안을 35대 6(기권10)으로 부결시키고, 미국의 안을 41대 0(기권7)로 가결시켰다. 미국의 안에 대한 수정작업을 거쳐 최종적으로 11월 14일에 43대 9(기권6)으로 통과시켰다.
유엔 정치위원회는 1.선거를 통해 선출한 한국대표들을 유엔의 한국독립 심의에 참석시키고, 2.공정한 선거를 감시하고 협의하기 위해 호주,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 9개국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ited Nations Temoporary Commission on Korea)구성 설치하고, 3.1948년3월31일 이전에 한국에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하에 인구비례에 따라 보통선거와 비밀투표 원칙에 따라 총선거를 실시해 빨리 국회구성과 정부수립을 하고, 4.정부는 남북의 미소군정으로부터 정부의 모든 기능을 이양받으며 군대를 조직한 이후에 가능하면 90일 이내에 미소군이 철수하도록 한다고 결의했다.
1948년 1월 8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서울에 입국해 활동을 개시하면서 북쪽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소련군 사령관 쿠르트코프(G. P. Korotkov)가 협조를 거부함으로써 단 한 발자국도 38선 이북으로는 들여 놓지 못했다. 1월 22일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이승만, 김구, 김규식, 김성수, 조만식, 김일성, 허헌, 박헌영, 김두봉 등과의 면담을 2월 3일에 마쳤다. 하지만 소련은 1월 23일 유엔사무총장에게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북한 방문을 거부한다고 서신을 보냈다.
이에 대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1948년 2월 6일 소련의 비협조를 내세워 유엔 임시위원회에 안을 상정했다. 2월 19일 회의에 들어가 31대 2(기권11)로 한국 남쪽에서라도 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고, 48년 5월 9일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잠정합의 했다. (한국의 기독교 단체들이 5월 9일은 주일이므로 연기해달라고 요청하자 5월 10일로 변경됐다.)
1948년 5월 10일에 실시된 제헌의회 총선거는 투표율 95%(총유권자 7,840,871명 중 7,487,649명이 투표)로 198명의 제헌의회 의원을 선출함으로써 대한민국 건국에 나섰다. (통합정부를 위해 북한지역에 인구 비례에 따라 100석을 할당해 공석으로 남겨 두었다.)
제헌의회 구성이 끝난 후 1주일이 지나자 미국은 미합참본부 명의로 주한미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미군철수계획(작전명 돌능금Crabapple)에 착수하도록 했다. 미군은 1949년 군사장비를 한국에게 넘긴 후 철수를 단행하게 된다.
4. 미군정기,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한반도 분단 만행
소련군이 북한지역 각 항구들을 점령하고, 소련군 25군이 원산을 거쳐 평양마저 점령해 38선에서 민간인 이동마저 강제로 금지하자 미군 24군도 서둘러 1948년 9월 8일 인천항에 상륙해 서울에 들어와 12일에 미군 소장 아널드를 군정장관에 임명하고 19일에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공식명칭으로 미군정기가 시작되어 약 3년간 조선의 행정을 담당하게 된다.
1945년 10월 10일에는 군정장관 명의로 여운형이 세운 인민공화국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1946년 1월 15일에는 해방 후 난립하던 수 십개의 사설군사단체를 해산시켜 국방경비대를 창설하고, 2월 23일에는 정당등록법을 실시하여 혼란스럽게 난무하던 각 종 정치 단체들이 정리되도록 합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유의 범위를 정했으며, 3월 29일에는 행정기구 재편을 단행하여 행정 지휘체계를 일원화 했다.
어느 정도 체제가 안정되자 1945년 10월 5일에는 군정에 고문관으로 한국인 11명(행정고문으로 김성수, 김용무, 김용순, 강병순 등, 경무부장에 조병옥, 수도청장에 장택상)을 참여시키고, 12월에는 한미국인 양 국장제를 실시하고, 1946년 2월 14일에는 자문기구로 한국 대표민주의원을 출범시키고, 2월 19일에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개원했다. 1947년 2월 10일에는 과도입법의원이었던 안재홍을 민정장관에 임명했다. 4월5일 행정부를 13부6처로 확대하면서 5월 17일에는 한국인을 각 부처의 의장으로 선출하고 미국인은 고문관으로 물러나게 하면서 '남조선 과도정부'로 개칭했다.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17일 여운형은 자신의 건국동맹(1944.8.10)을 기반으로 해서 민족주의자 안재홍의 국민당계 일부와 손잡고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킨다. 하지만 건준위는 박헌영과 공산주의 해체파의 방해공작으로 발족 20여일만인 8월 7일 해체되고 이를 장악한 공산좌파들로 인해 인민공화국이라는 단체로 탈바꿈되고 만다. 건준위 결성과정에서도 민족보수 진영은 공산주의 색채를 들어 참여를 거부했었다.
1945년 10월 12일에 개최된 국민당, 한국민주당, 건국동맹, 조선공산당 등이 통일전선 결성을 위한 모임에서는 형식적으로는 상호우호적 협조적 모습을 보였지만 점차 이념적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만다.
1945년 10월 16일 이승만이 귀국해 10월 23일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결성됨으로써 독립촉성회가 가장 막강한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공산좌파들은 이승만을 끌어 들이기 위해 인민공화국 주석직을 제의했지만 11월 7일 이승만은 완강하게 거부하면서 12월 17일에는 방송에 출연해 '공산당에 대한 나의 입장'이라는 성명서를 통해 공산당과는 협력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11월 7일 아침 8시 중앙방송을 통하여 이승만은 "인민공화국이 자신을 주석으로 선정한 것은 감사하나 자신은 임시정부의 한 사람으로 임시정부와의 타협 없이는 아무데도 관계할 수 없다"고 거부하면서 12월 17일 중앙방송에서는 "일제에 대항하던 공산주의자와 근로 대중에게 복리를 주는 공산주의자에 대하여는 어느 정도 찬성할 수 있으나 경제 정책의 이해를 염두에 두지 않고 공산 정부의 수립만을 위해 각 방면으로 선동, 소요를 일삼는 자는 한국의 독립에 방해를 가져오는 자이니 국민 각자가 자각하여 선동에 유혹되지 말기를 바란다"고 발언했다.)
이념적 갈등은 친일파 청산 문제에서도 서로 다른 시각을 견지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미 친일파 청산 논리를 선점하고 있던 공산좌파들의 친일파 청산 발언에 대해서 이승만은 '물론 친일파는 일소해야 한다. ~ 불순분자는 당장 외국인의 손으로 처벌하여 주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 강토를 먼저 찾은 후 (외세가 아닌) 우리의 손으로 재판해야 한다'면서 오히려 '친일파가 누구인지 먼저 밝혀 달라'는 역공세를 가했다.
친일파 청산 논리 다툼은 모든 정치세력들의 입장에서는 다분히 자신들의 정치세력 확대를 위한 허상적 구호에 불과했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직 합법적 정부가 구성되지 못했기 때문에 어느 정치세력도 친일파를 단죄할 수 있는 행정적 사법적 합법성을 가지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의미는 역으로 자신의 정치세력이 친일파 청산의 주체가 된다면 바로 사법적 행정적 합법성 즉 정치권력을 자연스럽게 획득할 수 있는 기회로 활용수 있다는 것이었다.
(누구의 손을 빌리던, 설령 외세를 이용할지라도 해방직후 친일파 소탕작전을 대대적으로 펼쳤어야 한다는게 심정적 찬성이다. 남북 모두 친일파 청산을 외쳤지만 현실에서는 남북 모두 친일파를 껴았다는 사실에서 인적자원의 부족현상은 남북 모두에게 심각한 문제로 작용했었다.
한국은 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는데, 바로 북한이 소련에 의해 공산화 되어 경제적 군사적 우위을 바탕으로 한국마저 공산화 하려한다는 점이었다. 남쪽에 비해 경제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던 북쪽을 장악했던 김일성마저도 친일파를 두루 등용했다는 사실에서 한국만의 철저한 친일파 청산은 곧 인적자원의 커다란 손실을 의미했고 나아가 한국의 멸망을 초래하게 될 것이라고 봤다.
겉과 속이 다르게 친일파 청산에 대한 상호 선명성 경쟁은 한국내 빨치산 공산 테러분자들을 철저하게 섬멸하는데 성공한 백선엽이 6.25 남침 시기에도 북한의 침략을 막아내는 작전을 펼치자 '백선엽이 일제시대 헌병으로 조선인을 학대하더니 이제는 미군이 되어 조선군을 미군의 포격에 죽게 한다'라는 공중 살포 만평 유인물을 제작해서 뿌렸던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북한의 친일파 청산 허구성과 친일파 등용은 http://blog.naver.com/qnwkkr/120055387601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국 내부에서의 친일파 청산에 대한 최초의 법적 토대는 1947년 9월 3일 미군정하 남조선과도입법의원법이 만들어 지고 제헌의회선거법이 마련되면서 친일파들의 피선거권 박탈에 관한 법안으로 구체화 된다.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았던자, 일본 제국의회의원이었던 자, 중추원 부의장 고문 참의원이었던 자, 부(府) 또는 도(道)의 자문이나 결의기관의 임원이었던 자, 고등관으로서 3등급 이상의 지위에 있었던 자, 판임관 이상의 경찰관급, 헌병 헌병보이거나 고등경찰의 직에 있었던 자, 밀정행위를 한 자 등의 선거권을 제한한다."라고 하면서 유권자 200명 이상의 출마지지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친일파 피선거권 박탈을 규정한 이 법안은 북한 김일성이 만든 친일파 피선거권 박탈 규정보다 더 엄격했다.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5년간의 신탁통치가 결정됐다는 소식이 다음 날인 28일에 조선에 알려지자 한반도의 정치상황은 혼란으로 치달았다. 36년간 일제의 치욕스러운 압제를 당했던 조선에게는 5년에 불과할지라도 신탁통치란 독립국가로 나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또다른 식민지배로 받아 들어져 민족적 치욕으로 생각했다.
임시정부계가 가장 강렬하게 신탁통치 반대여론을 형성해 나갔으며, 북쪽에서는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이 반탁여론을 주도했다.
조선독립 외교에 활발하게 활동했던 이승만은 국제정세를 읽고 예측하는 능력이 뛰어났기에 가장 현실에 입각해서 '우리는 이렇게 결과 될 줄 예측하고 이미 준비한 방책이 있어 그 방책대로 집행할 결심이니'라고 하면서 한반도가 분단되어 남북 양쪽에서의 단독정부가 수립될 것으로 예측하고 그 방향으로 준비하게 된다.
(이후 제헌의회의원 당선을 위한 선거 전략에서도 나타나듯이 이승만은 남북한 통합정부가 탄생하기 어렵다고 분석하고, 남쪽에서의 선거전은 민족보수우익과 공산좌파간의 대결로 보고 공산주의 침투를 막기 위한 후보선정과 선거자금 투입 전략을 장덕수를 통해 수립했다. 장덕수는 신탁통치 찬성론자로 몰려 극우적 보수주의 경찰관 2명에게 암살 당하고 만다.)
모스크바 3상회에서 미국의 '한국 통합행정'안에 기꺼이 찬성할만큼 소련은 나름대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조선 공산화에 이용하기 위해 평양에 지령을 내려 신탁통치에 찬성하도록 김일성을 조종했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소미영 3국외상 모스크바 회의 결정에 대한 각 정당 사회단체의 공동성명서'(1946.1.2)에서 "우리는 조선에 대한 모스크바회의의 결정이 조선이 독립국가로서 신속히 부흥됨과 민주주주의 원칙에서 조선의 자유로운 발전 따라서 ~ 민주주의적인 임시정부의 창설은 현재의 북남조선의 분리상태를 철폐할 것이며, 전 조선지역을 통일할 것이며, 따라서 산업 운수 농업 통신사업 등을 급속히 부흥 발전시키며 인민생활의 행복과 향상 또 조선인민의 수천년간의 빛나는 민족문화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제 필요조건을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발표하여 신탁통치에 찬성했다.
1946년 1월 3일에는 평양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어 신탁통치 찬성이라는 직접적 단어를 회피한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소련이 의결문에 단독으로 사용했던 '후견제(Guardionship)'라는 단어를 특정적으로 사용해 신탁통치에 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노당의 박헌영 역시 평양 방문 이후 신탁통치 반대에서 신탁통치찬성으로 급선회했다.
친탁찬성으로 돌아 선 친북좌파들은 1946년 1월 8일 서울에서 보수우익 정당들과 회의를 열어 '선 임시정부 구성후 신탁통치 반대'라는 안으로 자신들의 신탁통치찬성 입장을 지지하도록 유도하는데 성공한듯 보였다. 이미 조선이 분단될 것으로 예측하고 있었던 이승만이 친북좌파들의 신탁통치 찬성안을 거부하며 반탁을 주장했던 이유는 공산주의 세력의 발호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기 때문이었다. 한국민주당도 역시 친북좌파들의 제안을 거부했다.
북한 김일성은 이후 우선 북쪽에서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제거해 나갔다. 1946년 1월 조만식을 친일파로 몰아 연금함으로써 북쪽에서 신탁통치 반대의 중심이었던 조선민주당 장악과 무력화를 진행하게 된다.
1946년 2월 1일 민족보수 세력들은 비상국민회의(이승만, 김구, 김규식, 권동진, 오세창, 김창식, 조만식, 홍명희)를 열어 자주적 민주주의 과도정권 수립을 위한 최고 정무회의를 구성하기로 합의해, 2월 14일 '남조선 대한민국 대표 민주의원'을 출범시켰다. 이에 맞서 친북좌파들은 '인민공화국을 계승'하는 '민주주의 민족전선'을 결성했다.
미국은 소련의 조선 공산화 저지와 통합된 조선임시정부 수립이 목적이었기에 조선 공산화를 획책하던 친북좌파 공산세력과 남쪽 단독정부 수립을 추진하려는 이승만을 견제해야 할 필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은 소련이 한국을 소비에트화 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의지를 확고히 해야 하고, 지금 공산당이 온건한 애국자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음을 이용하여 그들이 남한에서의 위치를 공고히 하는 것을 도와주며 그들이 북쪽의 획책에 저항하도록 권고해야 한다"라고 했다.(1946년 5월 24일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의 국무부 보고서)
따라서 남쪽에서는 1946년 5월부터 47년 9월 2차 미소 공동위원회가 소련의 방해로 결렬되어 유엔으로 한국의 독립정부 수립안이 상정될 때까지 온건 보수와 온건 공산좌파간의 합작 운동이 전개된다. 이 때 미군정에 의해 선택된 인물들은 김규식과 여운형이었다. 미국은 이들을 활용해 소련을 설득하려고 했다.
김규식은 기본적으로 처음부터 모스크바 3상회의 신탁통치안을 지지하고 있었고, 민주의원 부의장으로 활동하면서도 김구와 이승만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으며, 좌우합작에 대해 실패할 것으로 보았기에 처음에는 거절했었다. 여운형은 친북공산좌파들에게 건준위를 빼앗기고 나서 반박헌영 노선을 걷기 시작해 (후에 남노당에 흡수되는) 신민당 백남운과 협력하고 있었다.
(여운형은 일제시대에 부산 온천에서 총독부 일본 고위관료들과 어울리며, 총독부로부터 자금을 받아 쓰면서 사회주의 합법화를 간청하다 조롱을 당할 정도였다. 미국에게 패망한 일본으로서는 조선에서의 안전한 철수가 시급했는데, 이 때도 역시 여운형을 적극 활용했다.
여운형은 전날 저녁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오(遠藤)의 연락을 받아 1945년 8월 15일 아침 8시에 총독부 관저에서 전국의 정치범과 경제범 즉시 석방, 3개월 분량의 식량 보장, 치안 유지와 건국을 위한 정치활동 불간섭, 청년과 학생을 조직 훈련화 불간섭, 노동자와 농민의 건국사업 조직동원 불간섭이라는 요구조건을 관철시켜 일본인의 안전귀국을 보장했다.
또한 여운형은 8월 14일 저녁 조선주둔 일본17방면군 참모부가 전해주어 8월 15일 일본 왕의 항복 선언문 발표 정보를 입수했고, 총독부 정무총감 엔도오로부터는 조선이 분단되어 각각 미국과 소련의 통제하에 놓일 것이라는 정보를 얻었다. 이런 덕에 여운형은 자신의 건국준비위원회를 재빠르게 출범시키게 된다.)
친일에서 친공, 반박헌영까지 팔색조의 삶을 살았던 여운형은 1947년 7월 19일 공산주의자에게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암살당하자 강경 반공 노선을 걷던 김두한에게서 권총을 받은 백의사 소속 한지근(19세)에게 암살 당했으며, 기독교인이면서 사회주의적 색채를 보였던 김규식은 김구와 호흡을 맞췄지만 김구의 저격 사망직후 정치를 그만두었다가 6.25 남침 때 납북되어 1950년 12월 10일에 사망한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 공동위원회 회의가 소련의 철저한 거부와 비협조로 난항을 겪으면서 점차 조선의 분단과 북쪽의 공산화가 현실화 되자 남쪽에서 공산화 활동이 극력하게 전개될 것으로 보고 미군정은 대대적으로 남쪽 공산세력 척결에 나서게 된다.
우선 1947년 9월에는 친북좌파 세력인 박헌영, 이주하, 이강국 체포령을 내리고, 1947년 8월 11일에서 14일까지 친북좌파 노동조합인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1946년 10.1폭동) 중앙위 사무소를 폐쇄하면서 민족주의민주주의 전선 중앙위와 인민공화당 중앙위 등을 해산시키고 친북좌파 1,000여 명을 검거했다.
소련은 이에 반발해 모스크바 결정과 공동위원회 업무를 지지해온 남한 좌익 요인에 대한 탄압은 공동위원회 사업을 방해하는 행동이라고 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좌익 검거는 공동위원회 업무와 상관없고, 민주주의민족전선은 북한 민주주의민족전선의 사주를 받아 비합법적인 방법으로 미군정에 도전했으며, 남쪽의 법과 질서를 파괴하려는 북조선 지도자들을 지원했다면서 북한에 감금되어 있는 민족보수 인사들의 석방을 주장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남쪽에서는 공산화 세력에게 큰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하면서 조선공산계와 남노당이 지하로 숨어 들었으며, 공산좌파 여운형의 인민당-근민당계가 사라졌으며, 가장 큰 세력이었던 이승만의 독립촉성회-독촉국회 세력과 김구의 한국독립당 세력과 김구와 연대하려던 김규식 세력으로 정치세력이 재편됐다.
북한에서는 1945년 10월 12일 '북조선 주둔 소련 제25군 사령부 성명서'를 통해 "소련 군대는 조선에 소비에트 질서를 설정하거나 또는 조선지역을 얻으려는 그런 목적을 갖고 있지 않다. ~ 북조선 인민의 공사 재산은 소련군 사령부 당국의 보호 아래 있다. ~ 반일 민주주의 단체의 결성을 허가한다"라고 했다.
1945년 8월 26일 조만식이 결성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지부 대표부가 평양역에서 소련군 환영회를 열고는 평안남도 임시인민위원회 15인의 선발명단을 제시하자 공산주의자 15명을 추가할 것을 강요했다. 후에 민족보수와 공산좌익에서 각각 여성 1명씩을 추가해 32인으로 확대했다.
조만식이 구축해 놓은 기반을 활용해 1945년 10월 8일 북조선 5도 임시인민정취원회 대표자 대회를 개최하고 10월 28일 북조선 5도 행정국으로 개편했다. 소련군은 이미 결성된 민족보수 세력 내부에 서서히 공산주의자들을 투입시켜 내부장악을 해나가도록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한편 복수정당제도가 존재하는 북쪽이라는 명분용으로 조만식으로 하여금 반일 민주주의 정당 성격으로 조선민주당을 창당케 하면서 요직은 김일성의 갑산파가 장악하도록 공작을 펼쳤다. 또한 소련군의 약탈과 민중에 대한 만행으로 잃어버린 민심을 수습할 필요가 있었다.
이 시기 가을부터 12월까지 소련은 또한 모택동 팔로군계였던 조선의용군(중국 공산당 간부인 조선인 무정이 결성)의 북쪽내부에서의 세력화를 방지하기 위해 김일성을 직접 파견해 압록강 도하 전에 2천여명의 병력을 완전 무장해제 시킨 후에야 북쪽으로 받아 들였다. 후에 김일성이 장악에 성공해 6.25남침 때 전위부대로 활용했다.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가 결정되자 소련은 조만식의 5도행정국을 압박하여 신탁통치에 찬성하도록 했으나 받아 들여 지지 않고, 5도행정국은 조만식 지지 민족주의 세력과 소련을 지지하는 공산주의 세력으로 분열되고 만다. 소련군 사령관 대장 슈티코프는 "조만식이 유일한 지도자가 아니며 반항적인 조선인들에게는 계급투쟁의 의미를 설명해 주어야 한다"고 비난했다.
곧바로 1946년 1월이 되자 김일성은 조만식을 친일파이자 반민족주의자라는 죄명으로 감금하고는, 자신의 세력인 갑산파 최용건을 조선민주당 대표로 내세우고 북조선민주당으로 당명을 바꿔버렸다. 다음 달인 1946년 2월 9일에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결성해 김일성이 위원장에 앉았다.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환영 평양집회 직후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북쪽 공산화 선전선동 삽화>
김일성을 괴뢰로 내세웠던 소련은 김일성을 부각시키기 위해 1945년 10월 14일 '김일성 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 개최를 필두로 모든 언론을 동원해 '민족적 영웅, 영명한 지도자'로 만드는 대대적인 선전선동에 나서서 노래, 춤, 연극, 시 등을 이용해 항일무장투쟁을 과도하게 부풀려 홍보를 강화했던 결실을 맺게 됐다.
1945년 10월 10~13일간 열린 조선 공산당 서부 5도 책임자 및 열성자 대회에서 선포한 후 1945년 10월 20일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공식 발표했다. 북한은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이 선포된 10월 10일을 '조선노동당 창건일'로 정해 지금까지 행사를 해오고 있다.
(이 때 박헌영이 월북 특파로 참석시킨 혁준혁은 9월 28일 로마넨코와 면담을 마치고 조만식이 실려 있던 트럭 앞좌석에 올랐으나 혁준혁 혼자만 암살 당했다. 그럼에도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을 내세웠기에 10월 26일 서울에서 북조선 분국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
1945년 12월 17에서 18일까지 양일간 열린 분국전원회의 제3차 확대회의에서 김일성은 분국 책임비서(총지도자)가 되어 북조선분국을 반대했던 세력들을 제거하면서 1946년 6월 22~23일 분국 확대 7차 회의에서 조선공산당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북조선공산당으로 권력기구의 명칭을 변경했다. 또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북조선 중앙 집권기관"이라고 공식 선표했다.
이런 일련의 정치권력 장악을 진행하면서 1946년 3월 5일부터 6개월간 북쪽을 공산화 하기 위한 토지개혁, 선거법령, 중요 산업 국유화법, 노동 현물세법 등을 만들어 기반을 강화했다.
나아가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군을 창설하고, 1946년 6월 공식 북한 국가를 제정하고, 1948년 7월 10일 헌법초안을 채택함으로써 행정 입법 군대를 조직하여 완전히 조선을 분단시키는 단독정부 구성을 마치게 된다. 철저하게 소련이 조선을 공산화 지배하기 위해 김일성을 괴뢰로 이용한 성공적 과정이었다. 소련은 이그나체프를 김일성의 후견인으로 내세웠고, 이그나체프는 김일성이 참석하는 모든 회의 뿐만 아니라 토론에까지 함께 자리해서 하나하나 방향을 정해주고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
북한을 장악한 김일성은 한국 내부의 공산 사회주의자들에게 한국의 총선거를 방해하라는 지령을 내렸다.
유엔에서 1947년 11월 14일에 유엔한국임시위원회 감시하에 직접 비밀투표에 의해 남북 총선거를 실시하는 유엔 결의를 하고 1948년 1월 8일 유엔한국임시위원회 선거 감시단이 한국에 입국해 활동을 개시하자 김일성의 지령을 받은 한국 내부의 친북좌파들은 2.7 폭동을 일으켜 훼방했다.
유엔에서 1948년 2월 6일부터 회의를 시작해 2월 19일에 소련의 공산화 야욕을 분쇄하기 위해 한국만의 단독정부 수립 결정을 내리자 이 번에는 5.10 총선거를 방해하기 위해 제주도에서 4.3 무장 폭동을 일으켰다.
이렇듯 광복군이 서울에 단독으로 가장 빨리 입성하지 못해 승전국이 되지 못한 상황을 초래한, 당시 최첨단 무기체계였던 원자폭탄 투하의 결과가 가져 온 예기치 못한 상황 전개는 조선의 통합정부 수립 추진을 순탄하지 못하게 했다.
외세의 힘으로 얻은 해방공간에서 당장 조선인들은 처음에는 전혀 현실감이 없는 이상적인 꿈만 가지고 미소가 배제된 조선인만이 존재하는 땅에서 통합정부구성 한 후에 민족보수와 공산좌파간의 권력투쟁을 벌일 것을 원했다.
현실은 이상과 다르기에 엄연히 북쪽에 소련이 존재하고 있고 물러 설 기미가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다음부터는 보다 신중한 입장에서 여전히 통합정부 구성을 추진하게 된다. 시간이 흐르면서 싫던 좋던 조국은 하나다, 민족은 하나다라는 입장에서 마지 못해 손을 잡아야 했던 공산 사회주의 세력의 실체가 뚜렷해 지면서 소련의 공산지배 위협뿐만 아니라 중국이 공산화 되는 과정을 보면서 친북좌파들의 붉은 손에서도 한국을 지켜야 한다는 냉정한 인식에 도달하게 된다.
일치된 민족주의적 자유민주주의적 자본주의적 이념으로 통일되지 못했던 조선 직후 시기는 조선 공산 사회주의자들로 인해 혼탁해졌으며, 결국 분단으로 연결되고 말았다. 그나마 미군정 이승만 박정희를 거치면서 지속적으로 친북좌파들을 척결해 왔기에 이만큼이라도 대한민국이 안정된 단결력을 바탕으로 이만한 경제 군사적으로 성공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