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통일은 다른 나라나 국제조류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자주적인 결단과 주체적인 노력으로 이룩해야 한다." |
평화통일, 자유통일은 귀에 익은데, 自主통일이란 말은 요사이 쓰지 않는다. 1972년에 나온 '自立에의 의지-朴正熙大統領語錄'(翰林출판사)을 읽었더니 '自主統一'이란 章이 있었다. 朴 대통령은 自助정신-自立경제-自主국방-自主통일이란 말을 일관성 있는 논리구조 아래서 썼다. 국민이 自助정신이 있어야 원조를 받지 않는 自立경제를 이룰 수 있다. 자립경제가 되어야 自主국방을 할 수 있다. 自主국방을 할 수 있는 나라라야 진정한 독립국가이며 자주통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논리구조는 18년 집권기간 그의 행동을 관통한 철학이고 전략이었다. <혹자는 국토의 兩斷이 他力에 의하여 강요된 사실을 들어, 조국의 통일이 他力의 혜택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이룩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주체성의 포기요, 依他心의 소산인 것이다. 통일은 우리의 주체적 노력이 그 관건이다>(1966년 8월15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의 통일은 다른 나라나 국제潮流가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며, 우리의 자주적인 결단과 주체적인 노력으로 이룩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민족의 주체성을 견지하며,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능동적이고도 신축성 있게 대처하면서 평화통일에의 길로 매진해나가야 하겠다>(1971년10월24일, 유엔의 날 치사에서> <통일은 결국 국내외적인 조건의 성숙과 더불어 이에 대비하는 우리의 주체적인 힘의 배양에 의해서만 이룩된다>(1968년 8월15일, 공화당 당원 동지에게 보내는 특별담화에서) <우리 자체의 內實을 키워야 되고, 객관적인 여건이 성숙되었을 때, 우리가 기민하게 기회를 포착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지 그 이전에는 통일이 안 된다. 1945년 8월15일이 통일의 기회였는데, 이걸 놓쳤다. 그런 기회는 다시 올 것이다. 거기에 대비하여 우리는 지금부터 꾸준히 노력 해나가야 할 것이다>(1972년 1월11일 기자회견에서) <통일역량의 성장은 북괴집단이 약체화되어 가는 것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리의 自主的인 경제발전과 민주力量의 배양을 통한 국력증강의 과정에서 추구해야 한다>(1967년 8월15일 광복절 경축사에서) <통일의 聖業은 결코 갑론을박의 논쟁으로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은 공산주의자들이 우리 자유대한을 보고 인간윤리에 반하는 그들의 狂信的 교조와 탄압정치가 정녕 허망하고 그릇된 것임을 스스로 깨달을 수 있을 만큼 '자유의 힘'에 의해 이룩된 우리의 경제번영과 민주역량이 확고한 것이 될 때, 비로소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거듭 강조해두는 바이다>(1966년 7월17일 제헌절 경축사에서) <우리는 전쟁을 통한 직접 분쇄나 失地회복보다 더욱 차원 높은 승리의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일보 일보 통일의 기반과 실력을 개척해 나가는 일이다. 그것은 敵으로 하여금 감히 우리의 경제력과 군사력 앞에 도전을 꿈꾸지 못하도록 침략의도를 포기하도록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경제적으로 군사적으로 實力의 절대우위를 확보하여, 민주주의 체제와 철학의 實證 앞에 굴복하고 승복하게 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평소 내가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그대로 조국통일 운동이요, 전쟁을 막는 길이요, 북한동포를 구출하여 우리 민족의 평화와 번영과 복지를 약속하는 길'이라고 되풀이하는 나의 소신이요, 철학이다>(1968년 10월1일 국군의 날 유시에서) 1976년 1월24일 국방부를 年頭순시한 자리에서,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식이 아니라 자신의 소감을 솔직하고 담담하게 밝힌 내용도 있다.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아낸 녹음 테이프에서 가감 없이 풀어본다. "특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논리를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로 제시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공산주의를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왜냐. 우리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용납해선 안 된다. 공산당은 우리의 긴 역사와 문화, 전통을 부정하고 달려드는 집단이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만이 우리 민족사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여 지켜가는 국가이다,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反共교육을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민족에게 저지른 반역적인 행위는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後世 역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온 것은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分斷 상태를 통일을 해야겠는데 武力을 쓰면 통일도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번 더 붙어서 피를 흘리고 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몇십 년 간 통일이 또 늦어진다. 그러니 통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참아온 겁니다. 우리의 이런 방침에 추호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그들이 武力으로 접어들 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나 불경책에서는 殺生을 싫어하지만 어떤 불법적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할 때는 그것을 쳐부수는 것을 正義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 내 볼을 때리면 이쪽 따귀를 내주고는 때려라고 하면서 敵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선량한 양떼를 잡아먹으러 들어가는 이리떼는 이것을 뚜드려 잡아죽이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우리 동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武力으로 쳐 올라갈 리야 없지만 그들이 또다시 6.25와 같은 반역적 침략을 해올 때에 대비하고 있다가 그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통일은 언젠가는 아마도 남북한이 실력을 가지고 결판이 날 겁니다. 對外的으로 내어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美, 蘇, 中, 日 4대 강국이 어떻고 하는데 밤낮 그런 소리 해보았자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객관적 여건이 조성되었을 때 남북한이 실력으로 결판을 낼 겁니다. 그러니 조금 빤해졌다 해서, 소강 상태라 해서 安心을 한다든지 慢心을 한다든지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朴正熙는 북한을 절대로 국가로 인정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그는 1966년 12월17일 기자회견에서 "두 개의 한국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또 아무리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식 통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남북한간의 대결은 누가 민족사의 정통성을 쟁취하는가의 싸움이며, 그 정통성을 확보한 대한민국만이 민족통일국가의 월계관을 쓸 자격이 있다는 역사관에 투철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1967년 4월23일 대구 유세(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렇게 강조했다. <통일을 안했으면 안했지, 우리는 공산식으로 통일은 못한다. 민주통일을 해야겠다. 통일이 된 연후에 북한 땅에다가 자유민주주의의 씨를 심을 수 있는 민주적인 통일을 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하자니까 시간이 걸리고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고, 우리의 실력의 배양이 필요한 것이다> <혹자는 대한민국을 가리켜 자유의 방파제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찌해서 우리가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그러한 존재란 말인가.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우리야말로 자유의 파도다. 이 자유의 파도는 멀지 않아 평양까지 휩쓸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1966년 2월15일 대만 방문시 장개석 총통 주최 만찬회 인사에서)> 朴 대통령은 自主통일을 위한 자주적 力量을 강조한다. 거기엔 군사력, 경제력뿐 아니라 우리의 자유民主역량도 포함된다. 종합적인 國力을 배양해가면서 북한정권으로 하여금 도전을 꿈꾸지 못하게 해놓고, 국제정세의 변화를 기다리다가, 통일의 찬스가 오면 주체적 정신과 國力을 총동원하여 이를 낚아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李明博 대통령에게 주는 충고처럼 들린다. 박정희는 북한공산체제의 反인간, 反민족성 안에 必亡의 요인이 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나는 우리 민족의 빛나는 얼과 역사의 正統性을 이어받아 이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는 민족의 主體세력은 바로 우리들이라는 것을 떳떳하고 영예롭게 自覺하고, 통일한국 실현의 역사적 사명이 우리 세대의 임무라는 것을 다시금 강조하는 바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는 물론이요, 정신적으로도 '한민족 국가의 정통성'은 바로 우리 대한민국에 있다는 自覺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비록 국제정세의 제약으로 4반세기 동안 국토가 兩斷되어 왔으나, 민족전통을 이질적인 공산주의 사상과 광신적인 개인숭배로써 파괴하고, 우리 북한동포들에게 심지어 자기 아버지마저 '동무'라고 부르도록 강요하는 해괴망측한 북괴에게서, 우리는 단 한쪽의 민족성도 찾아볼 수 없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민족主體사상을 확립하고 민족국가의 정통성을 自覺하여, 주변정세가 어떻게 변하든 간에 의연한 자세로서 이에 대처하면서, 북괴의 남침야욕을 저지해 나가기 위하여는, 국민 모두가 총화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 -1972년 3월24일 교육자 대회 치사에서. <그러니까 김일성이가 지금 全面전쟁을 도발해서도 망하는 길이요, 경제건설을 해봐도 되지 않는 길이요, 설령 경제건설을 해서 성공을 해도 역시 공산주의 내부에 큰 위기가 초래된다는 것이며, 결과적으로 김일성이가 이기는 길은 없다 하는 것이다> _1968년 11월30일 수출의 날 치사에서. 朴대통령은 오랜 사대주의에 젖어온 한국인들에게 自身과 자유를 지키기 위한 決死抗戰의 자세를 심어주려고 애썼다. 심지어 그는 "전국토를 초토화하는 한이 있더라도 침략자를 격퇴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어떻게 대결해야 하는가? 그들과 타협이 가능한 것이냐? 절대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양보를 하고 후퇴를 할 것이냐? 그것은 우리가 전부 죽으라는 말과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힘으로서 대결하는 길밖에는 딴 방법이 없으며, 이것만이 우리가 사는 길이다. 우리가 힘을 갖추고 끝까지 싸우겠다는 결의가 확고할 때만 적은 침략을 주저할 것이다> -1968년 3.13 절 경축사에서. <손자병법에 말하기를, 전쟁을 좋아하는 국민은 반드시 망했고, 동시에 전쟁을 잊어버린 국민도 위태로운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전쟁에 대비하다가) 만일 그렇게 해 가지고 전쟁이 안 나면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소리를 하더라고 한다. 만일 이렇게 해가지고 전쟁이 안 나면 만번 다행이다. 그것이 국방이다. 우리가 대비를 해야 전쟁이 안 날 것 아닌가. 平時에 땀을 많이 흘리면 戰時엔 피를 적게 흘린다. 무방비 상태의 자유는 압제를 자초하고, 힘이 없는 正義는 不義의 노예가 될 뿐이다. 자유는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며, 평화는 그것을 지킬 수 있는 자의 것이다. 우리는 결코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에 6.25와 같은 敵의 침략을 또 다시 받을 때에는 全국토를 초토화하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최후까지 싸워야 한다> -여러 語錄에서 발췌. <200년 동안 전쟁이 없어도 스위스 국민들은 국방태세를 늦추지 않고 있는데, 우리 대한민국은 불과 20년 전에 공산당의 南侵을 받았고, 무장공비가 해안으로, 휴전선으로 계속 침투하고 있는 이때 향토예비군을 없앤다는 것이 말이 되겟는가?> -1971년 4월24일 부산 선거유세에서. 그는 自主국방의 개념이 단독전쟁이 아니라 韓美동맹을 강화시키는 길임을 분명히 하였다.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울타리를 철저히 해놓고, 그 안에서 비로소 건설이나 생산도 있을 수 있다. 이 도둑을 누가 막느냐? 두말 할 것도 없이 그 집에 사는 사람이 1차적으로 막아야 한다. 도둑의 힘이 너무 강대할 때는 남의 힘을 빌어야 한다. 이것이 국방의 기본 개념이다>(1968년3월7일 전국 지방 장관, 시장, 군수, 구청창 대회 유시에서) <자주국방이란 것은 이렇게 비유해서 얘기를 하고싶다. 가령 자기 집에 불이 났다. 이랬을 때는 어떻게 하느냐. 우선 그 집 식구들이 일차적으로 전부 총동원해서 불을 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는 동안에 이웃 사람들이 쫓아와서 도와주고 물도 퍼다가 주고, 소방대가 쫓아와서 지원을 해준다. 그런데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그 집 식구들이 끌 생각은 안하고 이웃사람들이 도와주는 것을 기다리고 앉았다면, 소방대가 와서 기분이 나빠서 불을 안 꺼줄 것이다. 왜 자기 집에 불이 났는데 멍청해 가지고 앉아 있느냐? 자기 집에 난 불은 일차적으로 그 집 식구들이 총동원해 가지고 있는 힘을 다해서 꺼야 한다>(1972년1월11일 기자회견에서) <우리 모든 국민이 자신과 자신의 후손들의 안녕을 위한 국방 과제는 오직 자신들의 책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고, 스스로의 생존을 모름지기 남에게 의존해 온 타성으로부터 탈피하여야만 한다. 이러한 주체성의 확립만이 민족의 산 보람을 일깨워주는 것이다>(1968년2월27일 육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에서) <현 시점에서 자주 국방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생존과 자유를 지킨다는 뚜렷한 목표와, 이 목표달성은 1차적으로 우리의 힘으로 한다는 自主와 自助의 자세를 그 접근방법으로 한다는 것을 우리는 새삼 명심할 필요가 있다>(1971년3월31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유시에서) <또 다시 김일성이가 자신의 힘을 과신하거나 또는 어떠한 오산을 해서 전쟁을 도발하고자 할 때, 이를 만류하거나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지금 북한에는 하나도 없다>(1970년7월23일 국방대학원 졸업식 유시에서) 1971년 8월5일, 朴正熙는 을지연습 종합강평 때 이런 요지의 유시를 했다. <敵(적)으로부터 기습공격을 당했을 때를 한번 가상해 보자. 敵은 全(전)휴전선에 걸쳐서 일제히 공격할 것이며, 동시에 그 시간을 전후해서 동·서해안으로 敵이 기습 상륙할 것이다. 또한 敵은 공수부대를 우리의 후방 깊숙이 대량으로 공중투하할 것이다. 만약에 앞으로 공산당이 우리 대한민국에 지하조직을 가지게 된다면, 이러한 조직이 敵의 기습에 호응해서 일제히 도처에서 일어날 것이다. 동시에 敵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空軍 세력으로 공중공격을 해올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행동이 거의 같은 시간에 기습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에 어떠한 대응책을 강구할 수 있겠는가. 제일 먼저 움직이는 것은 역시 軍일 것이다. 다음에는 정부가 즉각 계엄령을 선포한다든지 동원령을 하달한다든지 戰時(전시) 국가지도회의를 소집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충무계획에 따라서 하나하나 대응조치를 취해 나갈 것이다. 우리 국민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국민들은 초기에 반드시 상당한 불안과 공포에 싸여 혼란을 가져올 것이라고 예측해야 할 것이다. 초기에 우리 軍이 신속 과감한 행동으로 敵의 침투를 효과적으로 저지할 수 있고, 또한 정부가 침착하고 자신 있는 행동으로 사전계획에 따라서 하나하나 잘 처리해 나가게 될 때, 처음에는 불안과 공포를 느끼던 국민들도 점차 냉정을 되찾게 될 것이고,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서 신뢰감을 가지게 될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과 공포감은 오히려 敵에 대한 적개심으로 변해서 정부가 하는 일에 대하여 자진해서 적극 협력을 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초기 대응책이 상당한 성공을 거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며, 이 전쟁은 우리가 충분히 버티고 나갈 수 있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군의 기습은 同時多發的으로 진행된다는 이야기이다. 휴전선상의 全面 공격, 東西해안 지역에 대한 上陸작전, 특수부대의 후방 공중투입, 空軍에 의한 폭격, 그리고 國內 종북세력의 반란. 核무장한 북한은 여기에다가 하나를 보탤 것이다. 서울을 포위한 뒤, "한국군이 반격하면 서울에 原爆을 투하하겠다. 같은 민족끼리 싸우지 말자. 현위치에서 휴전하자"고 제의할 것이다. 이런 제의에 맞추어 남한內 從北세력이 들고 일어나 "휴전제의를 받아들이라"고 정부를 압박하면 中道 정부의 경우, "평화를 위하여 휴전안을 수용한다"고 말할지 모른다. 2000만 수도권이 포위된 상태에서 休戰을 받아들이면 대한민국은 그 길로 소멸한다. 김정일의 손에 있는 두 개의 神器-核무기와 從北세력 중 적어도 하나를 빼앗지 않으면 한국은 다른 모든 면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전략적으로 밀린다. 30여 년 전의 박정희 시절에 비하여 경제는 발전되고 민주화도 많이 되었지만, 尙武정신과 自主국방 의지는 오히려 약화되었다. 박정희의 자주국방-자주통일 철학을 再해석하고 이를 현재적으로 활용해야 할 이유이다. <출처:조갑제닷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