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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남부군 인민유격대의 반민족 행위

대한인 2013. 12. 28. 09:10

흔히 빨치산은 초기 48년 14연대 반란 빨치산, 49년 인민유격대 1,2,3병단 빨치산, 50년대 남부군이라 불린 빨치산으로 시기별로 나뉜다.

 

2차 빨치산 준동이었던 인민유격대 1,2,3병단 빨치산은 남노당이 1947년 9월 평안남도 강동군에 설립된 강동정치학원 출신들을 중심으로 편성되어 1949년 9월 북한노동당 중앙위원회 직속 중앙당 14호실(대남공작부)은 예하에 한국내부에 테러조직을 결성하기로 함에 따라 인민유격대라고 정식으로 칭해졌다.

 

남부군은 50년 11월 중순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로 퇴주한 빨치산을 재정비 하면서 인민유격대 총사령관 이승엽과 이현상 그리고 여운철 등은 승리사단(이진범)을 중심으로 해서 혁명지대 인민여단과 각 지방부대를 예하에 둔 남도지도부로 개편했다. 여운철은 6개도당의 지도권을, 이현상은 6개도의 지대별 유격대 총지휘권을 맡았다. 이후 강력한 진압작전으로 위축되자 지리산을 중심으로 남부군 체제로 전환했다.

 

 

1. 14연대 반란세력 주축의 지리산 빨치산 토벌

 

14연대 반란사건 관련 다른 얘기와 위성지도는 http://blog.naver.com/qnwkkr/120057138280에서 찾을 수 있다.

 

1948년도: 14연대 반란군 지리산 빨치산 테러만행

 

10월 22일 여수주둔 14연대 반란세력 중추가 진압군에게 쫓겨 지리산으로 잠입해서 반야봉 동쪽 백암사 골짜기에 최종거점을 형성하고, 구례 화엄사를 주요 거점으로 활용했다.

 

25일 밤 10경에 14연대 반란군 중위 김지회가 이끄는 200여명의 테러분자들이 구례를 습격하면서 지리산 거점 빨치산 테러활동이 시작됐다. 테러분자들은 미리 작성한 명단을 통해 수 백명의 애국지사들을 색출해서 등급에 따라 1급은 즉정(卽定)이라 하여 총살하고, 2급은 재산몰수를 하면서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

 

구례 화엄사를 테러 거점으로 삼아 만행을 저지르는 가운데 구례 군민들이 조직한 대동청년단원 100여명을 중심으로 반군 색출과 정보수집 등 구례 반공방어에 나섰지만 무장력을 갖추지 못해 빨치산 테러분자들에 의해 가족들마저 무수히 학살당하고 만다. (특히 대동청년단 정보부장 구재회의 아내 윤순향은 임신 9개월인 상태에서 딸과 함께 테러분자가 휘두른 일본도에 의해 난살 당했다.)

 

구례 방어에 나선 진압부대가 수시로 바뀌면서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이에 10월 30일 국군은 진압체제를 전면개편해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를 남부지구 전투사령부(남원, 광주5여단 대령 김백일)와 북부지구 전투사령부(제2여단장 대령 원용덕)로 분리했다.

 

이중에 중령 백인기가 이끌던 12연대가 투입되어 토지면 오미리 방면, 토지면 비도리 방면, 마산면 천왕제 방면 세 축으로 진압해 들어 갔다. 테러분자들이 막사로 사용하고 있던 토지면 문수리 간이학교를 방화작전으로 기습하여 200여명을 사살 또는 생포하는 전과를 올리고, 읍내 산업조합이 강탈당한 트럭 2대분량의 식량을 되찾기도 했다.

 

하지만 11월 3일에는 반란군 김지회가 이끄는 테러분자 100여명이 읍내 동남쪽 간문리 지서를 본부로 삼아 숙영하고 있던 1대대 1중대를 습격하여 100여명이 지리산 빨치산들에게 포로가 되었다. (끌려가던 진압군 가운데 14명은 도중에 탈출하고 나머지는 7일 선전선동 공작작전의 일환으로 4백원씩을 받고는 풀려났다.)

 

11월 4일에는 남원 남부지구 전투사령부 지휘관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출발하던 12연대장 중령 백인기는 군기병(헌병) 7명과 함께 산동면 고개를 넘다 100여명의 테러분자에게 포위 공격당하자 백인기는 자결을 선택했다. (백인기의 시신은 우연히 공격현장에 있다가 무서워서 숨어 있던 김 모 노인이 집으로 옮겨 이불로 덮어서 안치해 놓았다가 다음 날 신고해서 수습할 수 있었다.)

 

11월 5일 새벽 4시 진압에 나선 12연대 1대대가 남원에서 화엄사로 이동하다가 산동 남방 5Km지점에서 빨치산 테러분자들의 매복작전에 걸려 50명 전사, 55명 부상, 대대장 대위 김희준는 부상 당하고, 80명이 포로가 됐다.

11월 8일 김지회가 새벽 4시경 300여명을 이끌고 읍내 봉성산을 점령하자 부연대장 백인엽은 박격포 공격을 가해 분쇄킴으로써 기세를 꺾어 놓은데 성공한다. (이 때 김지회의 아내 조경순의 신변물품이 든 상자가 발견되자 백인엽은 김지회 체포라는 성급한 기사작성을 유도해 오보사건이 일어났다.)

 

48년 11월 23일 광양 입구 백운산 정상에서 동남쪽 4Km지점에 위치한 반란군 지휘사령부를 발견하여 진압함으로써 14연대 반란군 소탕작전은 막바지로 치닫고 있었다.

 

49년도: 반란군 14연대 빨치산 토벌

 

월동기가 지나자 3월 1일 다시 국군은 14연대 반란군 빨치산 테러분자 소탕 작전을 개시했다. 북부 전투사령부를 호남지구 전투사령부(준장 원용덕- 20연대, 15연대 1개대대, 3연대 1개대대)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준장 정일권- 3연대 1개대대, 5연대 1개대대, 9연대 1개대대, 19연대 1개대대, 김용주 유격대대(산악전부대)로 재편해서 무장력을 강화했다.

 

49년도 1차토벌은 3월1일~10일, 2차토벌은 3월11일~15일, 3차토벌은 3월16일부터 진행됐다.

 

3월 24일 반란군 중위 홍순석이 덕유산 벌목트럭을 강탈해 국군복장으로 위장해 경남 거창 외곽 위천 지서를 공략한채 거창 중심부로 들어가려다 3연대 3대대(대위 한웅진)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며칠 후 지리산지구 전투사령부는 거창 안의면 북방에 반란군 주모자 중위 홍순석, 중위 김지회를 비롯해 김지회의 아내 조경순 등이 숨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서 3연대 3대대가 체포해 나섰지만 늦었다.

 

(김지회는 반란직후 여수경찰서에서 백마 한 필을 약탈하여 타고 다니자 테러분자들은 백마사령관이라고 불렀고, 김지회의 아내 조경순은 권총 두 자루를 들고 다닌다고 해서 쌍권총 여두목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1949년 4월 9일 3연대 3대대는 지리산 운봉을 지나 피바우 고개에 포진하고는 남원 산내면 반선리에 들어가 민사작전을 전개했다. 그 날 밤 반선리 대동청년단장이 30여명의 테러분자들이 진입해 왔다고 알려왔다. 3대대는 60명을 동원해 주막을 포위해 총격전 끝에 농구화에 토끼가죽 상의를 입고 있던 홍순석을 사살했다. (홍순석이 숨어 있던 곳을 신고했던 반선리 과부댁은 나중에 빨치산 테러분자들의 보복으로 돌로 살해됐다.)

 

1949년 4월 10일 오후 3연대 3대대(대위 한웅진)는 반란군 중위 김지회와 처 조경순이 반군 3명과 함께 남원 내산면 덕동리 달궁부락에 은신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해 포위하고, 상사 김갑순 등 4명의 특공조를 편성해 농부로 가장해 접근해 권총으로 사격을 개시했다. 다리에 총상을 입은 조경순(20세)은 현장에서 체포되고, 김지회는 총상을 당한채 도주하다 반선리 근처 연정리 야산에서 죽었다.

 

<뜨거운 애국심으로 자원해서 빨치산 공비 토벌에 나선 열혈 전라도 청년들>

 

<14연대 여순반란 진압직후 반란군을 도운 악성친북좌파들을 색출하기 위해 여수 주민들을 한 학교 운동장에 소집한 현장>

 


2. 이현상 지리산 빨치산 테러조직 가담, 1,2,3 병단

 

1,2,3 병단 빨치산 관련 다른 자료와 위성지도는  http://blog.naver.com/qnwkkr/120057277258에서 볼 수 있다.

 

1949년: 이현상이 주도한 지리산 빨치산의 만행

 

48년 11월 남노당 연락부장 이현상(가명 노 동무)이 박헌영의 친서를 소지하고 14연대 반란군이 빨치산 테러를 하고 있는 지리산에 잠입함으로써 길고 긴 또다른 지리산 빨치산 테러만행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들은 강원도 양양에 집결하여 38선을 돌파할 때는 인민군으로 하여금 국국에게 먼저 총격을 가해 전투를 벌여 국군이 접전지역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면 경계가 느슨한 지역으로 통과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지리산에 인민유격대 2병단을 설치한 이현상은 2병단 예하에 6연대(이현상, 지리산-산청,함양,남원,구례일부), 7연대(박종, 백운산-광양,하동,곡성,구례와여수 일부), 8연대(조계산-순천,곡성과 화순일부), 9연대(정금모, 덕유산-무주,거창,장수군 일대)를 두고서 테러만행을 이어갔다.

 

49년 7월부터는 북한의 조국전선에서 발표한 평화통일 선언서에 9월에 입법기관 선거를 실시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자 이를 실현하기 위해 9월 대공세라는 이름으로 테러만행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7월 빨치산 테러분자들은 백운산에 거점을 마련한 7연대(박종) 300여명을 동원해 광양읍 한 국민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15연대 1대대를 야간기습해 수백 명을 포로로 잡았고, 수백 정의 총기도 탈취해갔다. 목포에서는 형무소를 기습하여 죄수 350여명을 탈옥시켰다.

 

49년 9월 대공세 테러


7월  9일 : 경북 영천의 무장유격대가 청도군의 경찰지서와 면사무소 습격.
7월 22일 : 경주발 안동행 열차를 영천-군위 터널에서 탈취해서 탑승중인 군경을 사살, 신광면에서 경비용 전화선과 전주 20개 절단.
8월  9일 : 동래군 정광면 경찰지서와 면사무소 방화.
8월 16일 : 소백산 유격대가 죽령역을 일시 점거.
8월 23일 : 거창경찰서, 군청, 재판소를 습격해 좌익사범 탈옥.
8월 24일 : 영일군 죽장면에서 전주 20개 절단후 면사무소 습격, 강원도 삼척군 가목 경찰지서 폭파.
8월 25일 : 양산의 상북면, 양산면에서 군농회 회장, 민보단장 등 공무원 살해.
8월 말: 300여명이 의성경찰서와 무기고, 우편국, 금융조합 등에 방화.
9월  1일 : 지리산 유격대가 합천읍 경찰서, 읍사무소, 금융조합, 우편국, 군경지 정여관 등을 파괴.
9월  7일 : 달성군 화원면에서 군경 30여 명 살해. 영천군 자양경찰지서 습격.
9월  9일 : 협천군 용주 경찰지서 공격.
9월 15일 : 순천방면에서 여수행 군경열차 탈취 약탈.
9월 16일 : 문경군 동노 경찰지서 공격.
9월 23일 : 장흥읍 경찰서와 군지휘부 파괴.
9월 25일 : 무주군 부남 경찰지서 습격.
9월 27일 : 나주경찰서, 군농회, 금융조합 등 방화, 함평경찰서 습격, 광주소방서 방화.
10월  8일 : 150명의 테러분자들이 무주 경찰서 습격, 예하 지서, 면사무소, 금융조합 방화. 150명이 공격하여 곡성경찰서와 관공서 4 곳을 방화.
10월 중순 : 안동읍 옥동 국민학교에 주둔한 국군 3사단 22연대를 습격.
11월 초순: 1병단과 3병단이 통합해 만든 3개 대대가 일월산에서 경찰과 교전.
11월 25일: 화학산에서 국군 25연대와 교전, 일월산에서 경찰과 교전.

 

경북과 경남, 전북과 전남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9월 대공세 테러는 강력한 진압작전에 의해 점차 소멸되어 갔다.

49년 11월 9일 12시 10분께 20연대 2대대(대위 김영은)와 경찰진압대(경위 김호용)는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과 화학산 중간에 위치한 전남인민군 총사령부를 급습해 전남지역 총사령관 최현과 20여명을 사살하고 9명을 체포했다. 뒤이어 30일 새벽에는 후임총사령관 이중래와 최고지휘부 1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49년 7월부터 12월까지 6개월간 진행된 542회의 초기 진압작전으로 테러분자 세력은 막대한 타격을 받아 50년 3월 막바지 진압작전 때는 빨치산 테러분자들은 380여명으로 줄어 들었다. 이현상이 이끌던 지리산 2병단에는 겨우 100여명이 남아 있게 됐다.

 

50년도: 빨치산 테러조직 인민유격대 붕괴와 월북

 

거의 소탕되어 가던 지리산 빨치산들은 최후의 발악에 나서게 된다. 50년 1월 1일 지리산 빨치산들은 산청 화개면 주둔 국군을 습격하고, 1월 3일에는 지곡, 산청, 오곡까지 공격했다.

50년 1월 25일 호남지구 전투사령부는 정식해산하고, 2월 5일에는 호남지역에 내려진 비상계엄령도 해제됐다. 일부만 남아 이현상 체포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50년 1월 21일 : 1병단 1대대가 영덕군 영해지서, 제2대대가 창수지서를 동시에 기습하여 경관 28명이 순직, 면사무소, 금융조합, 양곡창고 등을 약탈 방화.
50년 1월 24일 : 경북 영양군 포도산서 국군 제3사단 소속부대를 기습.
50년 2월 1일 : 경북 영덕군 형제봉에서 국군 17연대를 습격하여 국군130명 살상.
50년 2월 중순 : 경북 청송군 뒷산에서 유격대 1병단 1.2.3 대대 전병력과 국군 제3사단 예하 부대와 교전.
50년 3월 1일 : 강원도 백암산에서 국군 제3사단 소속부대와 교전.

 

6.25 남침을 감행한 김일성은 6월 26일 밤 평양방송을 통해 "남반부 남녀 빨치산에게! 유격운동을 한층 맹렬히 더욱 용감히 전개하며, 해방구를 확대하며 또는 창설하며 적은 후방에서 적들의 공격, 소탕하고 적의 작전 계획을 파탄시키며 적의 참모부를 습격하고 철도, 도로, 교량과 전신 전화선 등을 절단 파괴하며 각종 수단을 다하여 적은 전선과 후방연락을 차단하고 도처에서 반역자들을 처단하며 인민위원회를 복구하고 인민군대에 적극 협조해야 한다"고 테러만행을 촉구했다.

 

이에 따라 서울시당(위원장 김응빈), 경기도당(박광희), 충북도당(이성경), 충남도당(박우헌), 전북도당(방준표), 전남도당(박영발), 경북도당(박종근), 경남도당(남경우)이 결성되었다.

 

인천상륙작전과 동시에 9월 15일 대격퇴 작전이 전개되자, '입산경험자와 입산활동이 가능한 자는 입산시키고 기타 간부들은 일시 남강원도까지 후퇴하게 할 것'이라는 북한 노동당 전시위원회 전선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이현상도 월북을 하게 된다.  낙동강 전투에 투입되었다가 연합군에게 궤멸된 4,6,7,9,10사단의 낙오병들 일부가 입산하여 인민유격대와 합류하여 1만여명으로 불어나자 제2전선을 형성하여 저항하면서 강원도 세포군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빨치산 공비 토벌에 나서 지리산 정상까지 소탕에 성공해서 태극기를 게양한 제3연대 위대한 병사들> 

 


3. 남부군 빨치산의 출현과 테러만행

 

50년, 51년: 인민유격대 각 지대 결성

 

50년 11월 중순 강원도 세포군 후평리로 퇴주한 인민유격대 총사령관 이승엽과 이현상 그리고 여운철 등은 승리사단을 중심으로 해서 혁명지대 인민여단과 각 지방부대를 예하에 두는 편성을 새로 했다. 여운철은 6개도당의 지도권을, 이현상은 6개도의 인민유격대 지휘권을 맡기로 했다.

 

50년 12월 태백산맥을 타고 침투해서 충북 단양지구 문경경찰서 습격을 시작으로 다시 테러만행에 돌입했고, 동 12월 인민군 최고사령부 김일성과 총참모장 남일의 명의로 내려진 유격지대 개편에 관한 명령에 따라 '제2전선' 구축을 위한 테러만행에 돌입했다.

 

북한군은 한국에 테러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빨치산으로 하여금 제2전선의 역할을 하도록 제1지대-강원도, 제2지대-충청도와 강원도 일부 제1거점:속리산, 제2거점:영동, 제3거점: 운장산, 제5지대- 경남 거점:운둔산, 지리산, 관용산, 제6지대-충남 일부와 전북일부 강원일부 등 6개 지대 편성 명령을 50년 12월, 51년 1월과 3월 등 지속적으로 내리지만 전달되지 못했다.

 

김일성은 최후의 지대개편 명령전달 수단으로 51년 4월 23일에 423부대를 침투시켜 10월이 되어서야 지리산에 도착할 수 있었을 정도였다.

 

실제로는 현지상황과 맞지 않아 2지대는 편성되지 못하고, 강원도에 독립1지대(김응빈- 서울경기출신 주축), 경북에 3지대, 지리산에 독립4지대, 전남에 5지대, 충청에 6지대(남충렬, 춘천 929부대 합세, 속리산에서 대패후 대둔산으로 이동), 전북에 7지대, 경남에 8지대가 설치되어 재편됐다.

 

1951년 5월 26일 청주를 습격하여 관공서를 방화하고, 청주형무소에 수감된 친북좌익죄수 142명을 탈옥시켰다. 6월 초에는 민주지산을 근거지로 삼아 인근 도시와 경부선 군용열차를 습격했다.

 

51년 5월 중순 제1차 6개도당회의(덕유산 송치골), 1951년 8월 제2차 6개 도당회의에서 병단을 통합한 지대별 인민유격대 체제로 전환하게 된다. 6개도당을 통합하여 남부지도부를 구성하여 여운철이 책임자가 됐다.

제1지구당-경기도당(황해도 봉산 용연면-개성, 52년 4월 해체), 제2지구당-강원도당(회양-삼척), 제3지구당-충청도당, 제4지구당-경상도당을 결성했다.

 

남부군은 남원군 산내면 논골로 이동해 승리사단(김흥복)을 81사단(김흥복)으로, 315부대와 102부대(북한 6사단 박격포중대 낙오병 중심)를 통합해 92사단으로 개편했다.

 

사령관 이현상, 부사령관 이영회를 선출해 지대별 편성을 사단편제로 바꾸어 직속부대로 81사단 92사단 602사단을 두고, 1전구(충남과 전북북부-김명곤)- 68사단(고창수 570명) 45사단(700명), 2전구(전북 남부)- 46사단 53사단, 3전구(경남북)- 57사단(불꽃사단을 모체로 함)으로 개편했다.

 

이 과정에서 기존의 전남도당(박영발)과 전북도당(방준표)은 도당이 무장투쟁을 지도해야 하며, 중앙당의 정식명령이 없이는 남부군에 소속될 수 없다는 원칙론을 내세워 이현상을 대리로 내세운 남노당의 권한장악 시도를 거부하고 독자적인 테러만행에 나섰다.

 

이현상은 전남북도당의 반발에 맞서 중앙당에 연락하기 위해 20명의 연락대를 월북시키려 했으나 충북 월악산에서 전원 사살되어 전남북도당을 장악하는데 실패한다.

 

전남북 도당이 빠진 남부군은 경남 산청군 삼장면 조개골에 거점을 두고 다시 테러만행에 나섰다. 진압군은 8월14일 가회전투를 통해 참모장 박종하를 사살했다.

 

51년 8월 31일, 북한 노동당은 중앙정치위원회를 열어 '미해방지구에 있어서의 우리 당사업과 조직에 대하여'라는 94호 결정서를 채택하였다. "전쟁시작후 1년이 지났으나, 빨치산의 투쟁은 결정적인 성과를 얻어내지 못했으며, 대중을 조직하여 폭동을 일으키지 못했고, 인민군의 공격이 있었음에도 국방군 내부에 의거운동과 와해를 일으키지 못했다. 이것은 당 정치노선과 정책은 옳았는데 남한 안의 단체들이 잘못해서 그러한 것이다"라고 비판했다.

 

"종래의 행정지역에 따른 조직체를 일단 보류하고 잠정적으로 5개지역을 설정하여 각각 지구조직 위원회를 조직하여 일체 당사업을 지도한다. 제1지구는 서울, 경기도 전지역, 제2지구는 남강원도, 제3지구는 충청남북도, 제4지구는 경상북도와 울진군 및 낙동강 이동의 경남 밀양, 창녕, 양산, 울산, 동래, 부산지역, 제5지구는 낙동강 이서의 경남도, 전남북도 전지역 및 제주도와 충남의 논산군 지구 등을 설정한다."라고 기존의 도당통합 명령을 정식 명령으로 했다.

 

51년 11월 25일에 기존의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를 흡수한 백야전투사령부(1군단장 백선엽)가 전주에 지휘소, 남원에 전방 지휘소를 설치하고 수도사단(전방 지휘소-순천에서 구례로, 지리산 입구), 8사단(전방지휘소-남원, 지리산 입구), 군경혼성부대(지리산 동남방향)을 두고 12월 2일 진압작전을 개시했다.

 

백야전투사령부 구성:


수도사단(준장 송요찬), 제8사단(준장 최형희), 서남지구 전투사령부(준장 김용배), 치안국 전방사령부(경무관 최치환), 태백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경무관 이성우), 지리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경무관 신상묵), 백아산 경찰대(경감 김동진), 전남전투경찰대(경감 주재선), 전남 행정경찰대(경감 민병찬), 제1102야전공병대(중령 박정제), 제225 수송대(소령 김홍), 제35야전통신중대(대위 한철동)

 

서남지구 전투사령부는 육군본부 직할부대로 107 110 117예비연대-1,2,9 경비대대를 중심으로 치안국전방사령부, 태백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200, 207경찰연대 주축)와 지리산지구 전투경찰사령부(203, 205 경찰연대 주축)를 지휘하며 51년 9월부터 빨치산 진압작전을 수행하고 있었다.

 

한국정부가 12월 1일자(~52년 4월 7일까지)로 영호남 지역 5개 도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함과 동시에 1차 작전(12월2일~14일)에 병력 5만여명을 투입하여 지리산 천왕봉 동북쪽 써리봉에 주둔한 남부군 직속부대인 81사단(승리사단)과 92사단, 경남도당 사령부 57사단, 뱀사골 반야봉에 있던 전북도당 사령부, 광양 백운산에 주둔한 전남도당 사령부 토벌에 나서 지리산 정상까지 1주일만에 돌격하여 섬멸해 나갔다. 국군 8사단은 뱀사골 진압작전에서 전북도당을 거의 소탕했다.

 

백야전투사령부 작전시기
1차 진압작전: 1951년 12월 2일 ~ 12월 14일
2차 진압작전: 51년 12월 16일 ~ 52년 1월 4일
3차 진압작전: 52년 1월 5일 ~ 1월 31일
4차 진압작전: 52년 2월 4일 ~ 3월 14일


52년:

51년 8월 31일에 결의된 지구(지구당)으로의 개편을 명령한 노동당의 94호 결정은 진압작전에 의한 연락망 붕괴로 인해 52년 10월까지 완수되지 못했다. 5지구 구성은 끝내 실패했는데, 전남.전북도당(박영발, 방준표)이 도당을 해체하고 소 지구당으로 개편하라는 이현상과 김삼룡의 주장에 대해 중앙당(노동당)의 정식문건이 없음으로 받아 들이 수 없으며 현지 실정을 모르는 결정이라며 거부했다. 이에따라 5지구당은 기존의 도당 해체없이 따로 5지구당(위원장 이현상, 부위원장 박영발)을 결성했다.

 

백야사는 2차 진압작전(51.12.16~52.1.4)에 나서 전주 순천간 축을 중심으로 서면은 9사단, 동면은 수도사단이 분담해 지리산 외곽 테러분자 거점 분쇄작전에 돌입했다.

 

52년 1월5일부터 31일까지 3차 진압작전을 펴 잔당들을 소탕해 나갔다. 1월 18일에는 이현상이 이끌던 지리산 독립4지대와 경남도당의 테러분자들을 경남 하동 대성리에서 공군의 폭탄투하공격과 함께 진압하여 300여명 사살, 251명의 포로로 잡는 성과를 올렸다. 이로 인해 남부군 직속부대인 81,92사단과 경남도당 57사단은 지휘부가 전원 사살되어 붕괴됐다.

 

또한 이현상이 이끌던 지리산 독립4지대도 완전히 궤멸됐다. 21,051명의 테러분자들을 사살 또는 생포함으로써 남부군 토벌은 성공적으로 마무리 단계로 접어 들었다.

 

이에 노동당 중앙당 연락부 산하의 금강정치학원에서 지속적으로 테러분자들을 내려 보내지만 분쇄되고 만다. 금강정치학원은 남노당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으나 52년 3월에 해체되어 중앙당학교(천마군 탑동리) 분교에 수용되어 사상검증이라는 이름으로 박헌형 이승엽 처형이후 숙청당하게 된다.

 

뒤이어 노동당 정치위원회는 52년 5월 15일 111호 결정을 통해 대부대로 진지전 결전을 벌이는 경향을 비판하면서 지구당들이 도시에 잠입해 시민들 속에 세력을 확보해 지지를 얻어내라는 지령을 내린다. 이 명령을 "인민과 떨어져 있는 투쟁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니까 인민 속으로 들어가서 합류해서 지하당을 조직해야 한다"라면서 전남도당 책임자 박영발이 구체적 투쟁으로 전개하려 했지만 6.25 남침만행을 경험한 대한민국 국민들의 투철한 반공정신으로 성공하지 못하고 산악지역에만 은신해야 했다.

 

한국 내부에 남은 빨치산 테러분자들은 2000여명으로 줄어 들었으며, 부상과 질병(동상 등)으로 인해 실제 활동이 가능한 테러분자들은 100여명에 불과했다. (미군 작전 본부 리지웨이(Matthew B. Ridgway)는 1952년 3월에 아직도 3천 정도의 빨치산들이 그 지역에 남아 있다고 추정했다.)

 

이에 백야사를 해체하고 1953년 5월 1일 법률 제 282호로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준장 김용배)로 대체하여 107예비연대 제1,2경비대대, 203,205,207경찰연대, 전남북.경남 경찰국 기동대(1시, 12군 경찰기동대)를 투입한 하계 진압작전을 실시했다. 7월에는 국군 1사단이 합류했다.

 

백야전투사령부 발표 전과:
사살: 5,009명
생포: 3,968명
귀순: 45명
은거지 파괴: 341개소

 

지리산 지구(5지구당 산하 김지희 부대, 이영희 부대), 회문산 지구(전북도당 산하 무장부대), 속리산 지구(3지구당 빨치산), 운장산 지구(전북도당 빨치산), 백운산 지구(전북도당 유격대), 덕유산 지구(경남도당 유격대), 신불산 지구(제4지구당 남도부 지대)라는 명칭으로 빨치산 잔당들이 산악지역에 숨어 있었다.

 

<대한민국 시민이 된 빨치산 귀순자가 반란군에게 조속히 자유대한 품에 항복할 것을 호소하는 모습>

 


4. 휴전 후 빨치산 테러잔당 소탕

 

백야사와 서남사의 진압작전으로 인해 와해되어 가던 빨치산 테러분자들은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휴전이 되면 국제법상 포로의 신분이 되어 북한으로 안전하게 송환되어 영웅이 될 것으로 보고 견디고 있었다.

 

산악지역에 은신해 있던 빨치산 1,388여명(신뢰하기 어럽지만 어느 통계의 53년 7월 27일 상황)은 휴전협정이 빨치산에 대한 언급없이 체결되고, 군복을 착용하지 않은 무장세력은 정규군으로 인정받지 못해 안전하게 북송될 수 없게되자 자체적 생존을 모색하면서 사상무장을 강화해 이탈을 막으면서 소규모 부대로 활동하는 방향으로 선회한다.

 

이미 51년 8월 빨치산을 만든 조선인민유격대 총사령관 이승엽이 반란죄로 처형되었고, 휴전협정체결 1주일만인 53년 8월 3일 박헌영마저 김일성에게 반역죄로 잡혀 들어가고 만 상태에서 빨치산들은 북한으로부터도 버림 받았다.

 

자연스럽게 남부군을 이끌던 이현상도 실각하여 전남도당 책임자 박영발에게 지위를 박탈당하고 무장해제되어 평조직원으로 강등당해 감금상태에서 탈출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53년 9월 3일 구례 토지면 섬진강에서 5지구당 기요과 부과장 이형련을 생포해 이현상의 소재를 대강 파악한 상태에서 9월 6일 이현상 호위병 김은석, 김진영을 생포해 박영발 등에 의해 지위가 박탈당하고 무장해제되어 감금되어 있다는 정보와 함께 이현상의 은신처를 확실하게 파악하게 된다. 1만 8천명을 투입해서 지리산 빗점골을 완전 포위해  9월 17일 밤 남부지구경비사령부 예하 56연대와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 소속 김용식 수색조가 마침내 한국내 테러분자들의 수괴 이현상을 사살하는 쾌거를 이룬다.

 

<2,3차 빨치산 이현상이 애민애국 민족국군에게 사살당한 지리산 빗점골 지도. 사진 누르면 더 큰 사진이.>

 

이로써 50년 9월 1만여명에 이르던 빨치산은 52년 2000여명, 53년 말에는 800여명으로 급속하게 줄어 들었다.

 

서남지구전투경찰대사령부를 중심으로 기존 남부경비사령부 외에 5사단이 새로 참여해 1953년 12월 1일부터 동계진압작전에 나서 1954년 5월까지 진압작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했다. 김일성과도 직접교신하기도 하면서 빨치산을 이끌던 박영발은 54년 3월 19일에, 김선우는 54년 4월 5일 88능선에서 사살됐으며, 빨치산 테러분자들은 140여명으로 줄어 들었다.

 

빨치산 잔존 소수 테러분자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지리산에 조국출판사를 두고서 유인물 제작 등을 하면서 덕유산, 회문산, 백운산, 모후산, 화학산, 운양산, 자작산 등 여러 산으로 쫓겨 다니며 활동했으나 지속적인 진압작전으로 점차 소멸되어 갔다. 남아 있던 전남북 경남북 도당과 예하 군당, 995 727부대, 중부지구 기동대, 소규모 개인 빨치산 무장세력들은 하나 둘씩 진압작전에 응징당해 사라져 갔다.

 

55년 전투경찰의 진압작전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이 섬멸된 상태에서 55년 7월 이후 잔존 소수 분자들이 통합결집하여 다시 조직을 정비했지만 56년 12월 31일에는 43명의 빨치산들만이 있었고 이미 한국과 북한의 어느 누구도 알아주지 않는 잊혀진 존재에 불과했다.

 

1955년 4월 1일에 지리산 입산통제가 해제되어 누구나 지리산 등반에 나설 수 있게 됐으며 정부는 1955년 5월 23일 빨치산 토벌이 종료됐음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마지막 빨치산 테러분자 정순덕은 민가에서 밥이나 훔쳐먹는 망실(亡失)공비 수준으로 지내다 1963년 11월 12일 오전 11경에 총격전 끝에 체포됐다. 이 때 함께 있던 이홍은 사살됐다.

 

(며칠 전 여순반란 14연대 사건 60주년을 기념하는 방송으로 KBS 1방송에서 새벽 시간에 순천지국에서 네트워크 방송을 했는데, 가히 기가 막혔다.

방송에 인용한 학살당한 사진들은 시민들이 국군에게 학살당한 것이 아니라 빨치산들에게 학살당한 양민들과 경찰들이고, 경찰관 남편을 잃은 아내가 갓난아이를 등에 업고 남편의 시체를 찾는 장면을 교묘하게 국군이 양민학살한 것처럼 사진을 이용했으며, 14연대 반란군을 총기무장한채 돕다 체포된 학생들과 그 밖에 가담학생들, 빨치산 자식들을 일단 여수 진남관에 격리 수용조치한 사진을 가지고 마치 국군이 죄없는 학생들을 학살하기 위해 가둬 놓은 것처럼 아무런 설명없이 버젓이 내보냈다. 초기 나레이션은 진부하게도 이미 조국분단과 남침은 북한과 러시아에 책임이 있음이 이미 수 많은 공개된 기밀자료로 인해 밝혀 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루하게 미국의 탓으로 돌리는 발언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여러 번 반복했다.

 

그 중 오해하게끔 올린 사진 중에 한 장은  http://blog.naver.com/qnwkkr/120057138280에 분명한 설명과 함께 어린 학생들이 왜 모여 있는지 실려 있으며, 사진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가마니에 덮혀 있는 시체들도 학살당한 경찰관들임을 밝힐 수 있는 자료를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국군이 무자비하게 양민을 학살한 것처럼 오해하도록 사진의 상황 근거도 밝히지 않고 반란사건이 미국과 대한민국의 잘 못 때문에 벌어지는냥 하는 아무런 증명도 없이 내뱉는 나레이션의 배경 사진으로 흘러가도록 함으로써 더욱 사진의 내용을 모르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국군이 무작정 양민을 학살한 것으로 보이도록 유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