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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친일청산의 긍정성에 감춰진 허구성

대한인 2013. 12. 28. 09:16

 

1945년 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제2차 확대집행위원회 소집(11월12~17일)에서 김일성이 친일파 제외를 발언한 이후 46년 2월 8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에서 채택한 11개조 긴급 당면과업에 대한 결정서 가운데 1, 2항에서 일제청산이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1. 친일분자 및 반민주적 반동분자를 철저히 숙청하며 유력한 간부를 각 부문지도사업에 등장하여 각 지방의 행정기구를 강화할 것.
2. 최단기간내에 일본 침략자 및 친일적 반동분자에게서 몰수한 토지와 산림을 국유화시키며 반분소작제를 철폐하여 무상으로 농민에게 분여하는 것으로서 토지개혁의 준비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할 것. 

 

46년 3월 23일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 직전에 소집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발표한 20개조 정강에서도 재차 확인 발표된다.

 

1. 조선의 정치 경제생활에서 과거 일본통치의 일체잔여를 철저히 숙청할 것.
7. 일본통치에 사용하며 그의 영향을 가진 일체법률과 재판기관을 폐지하며,
9. 일본인 국가 매국노 및 계속적으로 소작을 주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할 것.
이러한 정책기조하에서 구조바꿈을 통한 일제잔재 청산은 토지개혁에서부터 철저히 구현된다. 토지개혁법령 제2조는 몰수토지를 아래와 같이 규정한다.
"ㄱ. 일본국가, 일본인 및 일본인 단체의 소유지. ㄴ. 조선민중의 반역자, 조선민중의 이익에 손해를 주며 일본제국주의의 정권기관에 적극 협력한 자의 소유지와 또는 일본압박 밑에서 조선이 광복될 때에 자기 지방에서 도주한 자들의 소유지." 

 

46년 8월 10일에는  '산업 교통운수 체신 은행등의 국유화에 관한 법령' 에서 '일본국가와 일본인 개인 및 법인 등의 소유 또는 조선인민의 반역자로 되어있는 일체의 기업소 광산 발전소 철도 운수 체신 은행 상업 및 문화관계 등은 전부 무상으로 몰수하여 이를 조선인민의 소유 즉 국유화한다'라고 밝혔다.

 

1946년 11월 도 시 군 인민위원회인민위원 선거에 직전에 친일파의 선거권과 피선거권 박탈과정에서 보다 확실한 친일파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1.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고문 전부
2.도회의원 부회의원이었던 조선인 전부
3.일제시대 조선총독부 및 도의 책임자로서 근무한 조선인 전부
4.일제시대 경찰 검사국 재판소의 책임자로 근무한 조선인 전부
5.자발적으로 또는 일본을 방조할 목적으로 일본주권에 군수품 생산, 기타의 경제자원을 제공한 자
6.친일단체의 지도자로서 열성적으로 일제를 방조하거나 동조한 자

 

이렇게 보면 북한에서는 친일파가 완전히 숙청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친일파 청산의 목적에 대해서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할 수 있는 의문성이 제기된다.

 

45년 발표된 11개조 당면과업 중에 언급된 친일파 청산 관련 내용을 보면 문맥상 이중적 요소를 보게 된다. 친일파 청산 문구 뒤에는 항상 사회주의 실현을 위한 다른 목적이 언급되어 있기 때문이다.

 

1. 친일분자 및 반민주적 반동분자를 철저히 숙청하며 유력한 간부를 각 부문지도사업에 등장하여 각 지방의 행정기구를 강화할 것.

 

북한지역도 역시 한국과 마찬가지로 해방직후 평소에 악질적인 친일파라고 알려진 몇 몇을 빼고는 여전히 일제시대 조선인 하급 관리들은 행정기관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었다.

 

따라서 북한에서도 사회주의파와 조만식을 비롯한 보수주의에 선 민족주의 진영이 서로 맞선 가운데 누가 먼저 이 행정조직들을 장악하느냐였다. 친일파 청산에는 양진영이 이견이 없는 가운데 소련의 군사력 원조를 보장받으며 조직이 완비된 김일성이 친일파 청산 명분을 선점해서 재빠르게 각 지방의 행정조직 장악에 나섰다는 점이다.

 

2. 최단기간내에 일본 침략자 및 친일적 반동분자에게서 몰수한 토지와 산림을 국유화시키며 반분소작제를 철폐하여 무상으로 농민에게 분여하는 것으로서 토지개혁의 준비를 세우기 위하여 노력할 것. 

 

김일성이 언급한 친일파 청산은 곧바로 물질적 토대 장악을 위한 구체화된 수단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유재산권에서 한국이나 북한이나 친일파의 재산 몰수와 국가귀속이라는 같은 수단을 취하고 있지만 목적은 서로가 달랐다.  친북좌파의 위협에 겁먹어 세력확대를 필요로 하다보니 과감하지 못했던 한국은 실패한 반면 친일파 재산을 공동분배해줄 것처럼 떠들며 민심을 얻은 북한은 성공했다.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사회주의 목적인 '모든 개인 재산의 강제 몰수 강제 국유화'라는 목적을 시행하기에서 우선적으로 친일파의 재산을 몰수해 환심을 삼과 동시에 시범을 보여 향후 진행할 민중의 재산몰수를 실시할 때 저항을 줄이겠다는 의도가 충분히 보인다.

 

소작제 폐지와 함께 무상으로 농지를 농민에게 준다는 문구는 언듯 들으면 친일파 청산으로 친일파 논밭도 일단 국가가 소유한 후에 곧바로 소작농들에게 논밭을 나눠 준다는 것으로 오해하게 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46년 3월 23일 발표한 20개조 정강중 친일파 청산 관련 3개조 가운데 주민들과 관련된 '9. 일본인 국가 매국노 및 계속적으로 소작을 주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할 것'에서도 같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 소작을 주는 논 주인들을 마치 친일파처럼 인식시키며 이들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느낌을 갖도록 하고 있다. 이 것도 역시 사회주의 국유화 시행을 위한 포석으로 미리부터 사유재산 몰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눈가림임을 알게 해준다.

 

다만 1946년 11월 도 시 군 인민위원회인민위원 선거와 관련해서 미리 친일파의 세력화를 막기 위한 친일파의 피선거권과 선거권을 박탈하기 위한 친일파의 기준 제시는 아주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격했을 것이라고 믿었던 북한의 친일파 분류 기준이 매우 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현재 2000년도 넘어서 한국이 채택한 친일파 분류기준에 비해서도 처음부터 매우 완화된 기준임을 알 수 있다.

 

한국 내부에서의 친일파 청산에 대한 최초의 법적 토대는 1947년 9월 3일 미군정하 남조선과도입법의원법이 만들어 지고 제헌의회선거법이 마련되면서 친일파들의 선거권과 피선거권 박탈에 관한 법안으로 구체화 된다.

 

"일본 정부로부터 작위를 받았던자, 일본 제국의회의원이었던 자, 중추원 부의장 고문 참의원이었던 자, 부(府) 또는 도(道)의 자문이나 결의기관의 임원이었던 자, 고등관으로서 3등급 이상의 지위에 있었던 자, 판임관 이상의 경찰관급, 헌병 헌병보이거나 고등경찰의 직에 있었던 자, 밀정행위를 한 자 등의 선거권을 제한한다."라고 하면서 유권자 200명 이상의 출마지지서를 제출하도록 했다. 친일파 선거권과 피선거권 박탈을 규정한 이 법안은 북한 김일성이 만든 친일파 피선거권 박탈 규정보다 더 엄격했다.

 

예상과 다르게 왜 북한의 친일파 분류 기준이 이처럼 매우 약한 것이었을까?

 

문화, 예술, 언론, 학계, 기술쪽 친일파들은 아에 생략되어 있는 상황에서 촛점은 주로 정치행정경제 권력쪽에 맞춰져 있다.

 

역시 북한도 인적자원 확보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북한에서 친일청산이 끝난지 한 참 후인 1961년 6월8일에 작성된 재북 헝가리 대사관 보고서를 우선 보도록 하자. 

 

김일성은 "주민의 0.5%만 남한에 가족이나 친척이 없거나, 일본과 미국에 부역한 사람이 없거나 소외계급(class-alien)으로 출신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99.5%를 적으로 간주할 수는 없다.

30세 이상의 주민은 거의 모두 일제치하에서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했던 점을 고려해야 한다. 친일로 간주할 사람들은 시도의 고위직이나 공무원들, 기업 소유주들, 경찰 간부 등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종교인 가운데서도 미국에 부역한 목사들만 겨냥해야 한다. 내 할머니도 내가 빨치산 활동을 할 때 기도를 해줬다. 나의 외삼촌인 강양욱도 좋은 목사였다"고 말했다.

 

김일성의 친일 청산에 대한 인식은 북한이 출간한 조선전사 23편(현대편 민주건설사1)에서도 "김일성 동지께서는 지난날 공부나 좀 하고 일제기관에 복무하였다고 하여 오랜 인텔리들을 의심하거나 멀리하는 그릇된 경향을 비판 폭로하시면서,  (중략) 그들을 새 조국 건설의 보람찬 길에 세워 주시었다"라고 잘 밝혀져 있다.

 

이러한 김일성의 사정은 특히나 남노당이라는 친북좌파, 공산주의들에게 크게 위협당하고 있던, 북한보다 더욱 위태로운 상황에 놓여 있던 당시의 한국에도 매우 통용되는 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수천이 넘는 정부의 지위를 차지할 경험있고 훈련받은 애국적 조선인이 지극히 부족하다. 지위를 차지한 경험적 애국적 조선인 직원을 훈련하기 위해서는 적당한 시기가 필요하다. 중략. 조선인 전부가 자기 자신과 그 처자를 살리기 위하여 일상 생활에 있어서 일본인과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생존하고 있는 모든 조선인이 어느 정도까지 일본인과 협력한 이상 일본인과의 부일행위는 정도의 문제다."(조선 정부의 계획과 정책, 중앙신문 1945)

 

김일성은 일본인 기술자 우대 정책을 펴서 신변안전보장, 고급주택제공과 함께 김일성 자신의 월임금(4,000원)보다 더 많은 월임금을 보장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실제로 북한은 일본인 기술자 860명을 추방하지 않고 북한에 살게 하면서 월임금을 북한인보다 50%이상 더 많이 지급했다.(해방후 1950년대의 경제-이대근, 삼성경제연구소)

 

이 밖에도 북한의 친일파 등용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56년 4월 제3차 당대회에서 발생한 8월 종파사건(김일성 반대세력 연안파 숙청사건)에서 상업상(경제부 장관) 윤공흠이 김일성의 독재를 비판하자 최용건이 "야 ! 이 새끼야, 내가 항일투쟁 할 때 너는 임마, 천황폐하 만세 불렀어, 그거 알아"라고 공격했다. (관련 내용은 김일성 비서장 고봉기 유서에서도 언급)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의 친일행위 논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김영주의 친일행위에 대한 증거 중에 김영주가 일제 헌병 보조원(일본 관동군 통역담당)을 했다는 것이다.(이경식, 광복군 참모장 김홍일 장군비서)

 
1929년 일제의 신간회 해체공작에 동조하며,  1941년 총독부 소속 총력연맹 문화부장 矢鍋永三郞과 대담에서  일제의 신체제문화운동에 어떻게 협력해야 합당한지를 논의하던 임화(본명 임인식)도 있었다. 
 
그 외 간략하게 표현하면 아래와 같다.
 
장헌근 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서열 10위),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서열 11위), 일제 도의원
이승엽 남로당 서열2위, 일제 식량영단 이사
정국은 문화선전상 부부상, 아사히 서울지국 기자로 일제밀정
김정제 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 양주군수
조일영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일제 대화숙 출신으로 학도병 징병 지원유세단
홍명희 북한 부수상, 일제 임전대책협의회
이활 북한 인민군 초대 공군사령관,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허민국 북한 인민군 9사단장,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최승희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일제 예술인 총연맹 소속으로 일제국방헌금 거액기부, 다수의 일제옹호 인터뷰
박팔양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편집부장,  일제 만선일보 편집 및 문화 부장
정준택 행정10국 산업국장 국가계획위원장 정무원 부총리, 일본군 제대와 일제 광산지배인
한희진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제 함흥철도 국장
한낙규 김일성대 교수, 일제 만주국 검사장 검찰총장
 
이러한 사실들은 1946년 11월 도 시 군 인민위원회인민위원 선거에 직전에 발표한 친일파 분류와 처벌 기준과는 전혀 맞지 않는 전형적인 친일파 감싸기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김일성도 인적자원 확보차원에서 친일파들을 얼마든지 수용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러한 친일파 흡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족한 인적자원 확보에 나선 김일성은 한국인 강제납북이라는 수단마저도 동원한다.
 
1946년 7월31일, 김일성은 '남조선에서 인테리(지식인)들을 데려올 때 대하여'라는 담화문에서  "부족한 인테리 문제를 해결하자면 북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다 찾아내는 한편 남조선에 있는 인테리들을 데려와야 한다"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러한 김일성의 인적자원 확보 노력은 6.25 남침에서 아주 잘 드러나고 있다.

공보처 통계국 이름으로 발표된 '6.25 사변 피납자수 명부'(1952.3.21작성)에 따르면 6.25 남침 기간중에 납북된 수는 8만661명이다.  남자가 7만9145명, 여자가 1516명이다. 지역별로는 서울이 1만8330명으로 가장 많고, 경기도(1만5871명), 강원도(1만422명), 충청남도(9972명), 경상북도(7483명), 전라북도(7013명), 충청북도(6166명), 전라남도(3554명), 경상남도(1805명), 제주도(45명) 순으로 되어 있다.
 
또 다른 문제로 과연 친일파 청산을 내세운 김일성의 친일청산 노력이 북한 주민들의 행복으로 이어졌느냐 하는 문제다.
 
어차피 김일성의 친일청산 시도도 역시 정권 장악과 사회주의 강제 국유화를 목적으로 했기에 당장 북한 주민들 입장에서는 친일청산에 대해 근원적으로 찬성했지만 친일청산 속에 숨어 있는 사유재산 강제 몰수와 국유화에 대한 손익계산에서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된다.
 
한국에서 북한과 친북좌파의 위협과 동시에 친일파 출신들의 거센 저항으로 중단한 친일청산, 그럼에도 상당한 성과를 거뒀음에도 친일청산에 대해 비난이 쏟아지던 한국으로 친일청산에 성공했다고 알려진 북한으로부터 역으로 월남자가 속출하기 시작한다.
 
1945년에서 49년까지의 월남자 수를 분석해 보면 이북5도청 자료는 350만명, 적십자사 자료는 450만명, 15만명(김철), 74만명(권태환), 외무부 64만 9천명, 사회부 45만 6천명, 48만1천명(49년 인구조사) 등으로 큰 편차를 보이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월남자수가 아주 많았다는 점이다.
 
특히 1946년 무상토지개혁(토지강제몰수)에 반발하여 몇 달 동안 상당히 많은 수가 월남했다.(주한 미육군 외사처 자료- 친북좌파학자 부르스 커밍스가 인용)
 
월남 동기는 설문조사(북한출신 월남인의 정착 과정을 통해서 본 남북한 사회구조의 변화-조형, 박명선 [분단시대와 한국사회-까치1985)])에 따르면 정치사상적 이유 31.2%, 농지와 재산 강제 몰수 15%, 종교탄압 11.8% 등 이었다.
 
1950년 6.25 남침 격퇴시기의 월남자 수도 역시 많다. 61만8,721명(사회부), 44만9,929명(1955년 인구조사)로 나타나고 있다.
 
월남을 선택한 동기는 친북좌파로 널리 알려진 강정구가 1996년에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더라도 자진 월남의 이유는 전쟁 폭격 45.8%, 사회주의 정권거부 41.7%, 재산강제몰수 8.3%로 나타났는데, 지식인 계층일수록 사회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이유로 들었으며, 저소득층일 수록 폭격을 들었다.
 
월북자 수와 동기에 대한 연구는 없다. 6.25 남침 격퇴기에서조차도 자진 월북자 수가 너무나 미미할 뿐더러, 따라서 북한마저도 자진 월북자 통계를 발표하지 않기 때문이다. 극소수이기에 대부분 아직은 공식통계 없어 막연한 추측에 근거한다면 친북좌파사상이 전해 준 몽환적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이 클 것이라고 유추해 볼 수 있다.
 
결국 꿈처럼 부풀려 전해진 김일성의 완전한 친일청산 전설은 허구에 불과했던 것이다. 흔히 지도자 유형중에 성공확률이 높은 책략가형을 꼽듯이, 김일성도 격난기와 혼돈기의 모사꾼으로서 어쩔 수 없이 권력의 절대장악이 목적일 수 밖에 없었다. 간사한 자는 수단을 얻기 쉬워도 정직한 도덕가는 고지식함으로 인해 수단을 얻기는 힘든 법이다.
 
다만 누군가 말했듯이 정치는 구호다라는 말을 빌리자면 북한마저도 친일청산은 사회주의 사유재산 탈취와 국유화를 위한 도구로 쓰였고, 인적자원 확보라는 측면에서는  김일성이 친일파를 풀어 줄 수 밖에 없는 현실적 한계에 봉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활용론이 나올 수 있다. 특히나 현실적 지도자라면 능력을 중시하기에 그 능력자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최대한 자신이 원하는 방향에서 성과를 내도록 활용할 것이다.
 
친일청산의 문제에서 한국이나 북한이나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다만 순서의 문제였을 뿐이다라고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북한은 초반에 친일파 청산을 내세워 권력장악에 성공하며 또한 친일파를 수용했듯이, 한국은 당시 한반도를 휩쓸다시피 위협적이었던 공산주의에 맞서기 위해 또한 북한과 같은 이유로 인적자원 확보라는 측면에서 친일파 청산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음에도, 지금에 와서는 한국도 경제적 안정을 바탕으로 보다 다시 확실한 친일파 청산이라는 민족적 과제 해결에 도달하고 있다.
 
"김일성은 자신이 항일을 제대로 하지도 않았고, 철저히 중국인으로 속여가며 활동하던 사람인데, 그가 친일을 운운하는것 자체가 모순이다."라고 항변한  전 북한 직업총동맹위원장 서휘의 말이 다시금 떠오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친일청산 사회주의 북한의 남침으로 기름처럼 태워진 서울의 폐허에 남은 한국 여성들>
 

(신기하게도 북한 노동당의 친일파들의 사진은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한국의 자유주의는 인내심이 강한 자유민주의 국가임을 알 수 있다.)
 
<한국 친일파 인명 목록에 기록될 예정인 북한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 최승희의 남침시기 51년의  한적한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