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과 본인방 슈에이
갑신정변을 주도했던 구한말의 풍운아 김옥균이 정변에 실패하여 인천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떠난 것은 1884년 12월이고, 일본 정부에 의해 남쪽 절해고도(絶海孤島)인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로 유배된 것은 1886년 8월이다. 이 짧은 기간에 일면식도 없던 김옥균과 일본 최대 바둑가문인 본인방가의 수장 슈에이(秀榮·1852~1907)가 어떤 경로로 그처럼 속 깊은 ‘친구’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본인방 슈에이가 본토에서 1100㎞나 떨어진 오가사와라까지 찾아와 석 달이나 머문 것을 볼 때(돛단배를 타고 폭풍우 속을 20일이나 가야 하는 곳이다) 이들의 우정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슈에이는 김옥균이 홋카이도(北海道)로 옮겨질 때 그를 마중하러 배에 올랐다가 차마 내리지 못하고 홋카이도까지 가고 만 일도 있다.
김옥균의 친화력은 실로 놀랍다. 놀라운 매력을 지닌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는 상하이에서 홍종우에게 암살되던 1894년까지 불과 10년간 일본에서 살았을 뿐이지만 이 동안 거물 정객, 외교관 등 수많은 명사들과 사귀고 수많은 지인, 추종자들을 두었다. 아들딸도 여럿 낳았다. 김옥균이 죽은 후 그의 위패를 모시겠다고 나선 여인만도 7명이나 되었다고 한다(이종호, 『김옥균』).
본국에서 온 자객들을 피해야 하고, 고종에게 상소도 올리고 일본 정부와도 싸우고, 자신의 사상도 설파하고 유배도 다니면서 어떻게 그 많은 사람들을 사귀었는지, 더구나 외딴 영역인 일본 바둑계와는 어떻게 그리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는지 좀체 상상이 안 된다.
김옥균은 바둑을 잘 두었다. 슈에이와의 5점 접바둑 기보(碁譜)를 보면 지금 실력으로 아마 3단 정도 된다(이 기보는 한국인 기보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김옥균은 메이지 유신으로 단기간에 나라를 일으켜 세운 일본을 근대화의 모델로 생각했다. 반면 300년 전통의 본인방가는 메이지 유신으로 파탄에 직면했다. 봉록이 끊기면서 막부시대의 황금기는 종막을 고하고 4대 바둑가문 중 최고인 본인방가조차 가난과 파벌 싸움에 빠졌다. 유망 제자들이 떠났다. 훗날 본인방가의 대통을 이어받게 되는 다무라 호주도 이때 가문을 떠났다.
이런 난리 중에도 슈에이는 김옥균에 대해선 불원천리(不遠千里) 마다하지 않았다. 한쪽은 가문의 쇠락에 가슴 아파하는 본인방가의 수장이자 당대의 최고수. 다른 한쪽은 망해가는 나라를 되살리고자 혁명을 꿈꾸며 세상을 떠도는 가난한 망명객. 그들 사이엔 특별한 교감과 특별한 위안이 존재했다고 믿어진다.
김옥균은 후계자 문제 등 본인방가의 내부에도 깊숙이 개입한 흔적이 있다. 김옥균은 바둑을 포기하고 미국행을 도모하던 다무라를 설득해 본인방가로 돌려보냈고 그가 훗날 불패의 명인이자 최후의 본인방인 슈사이(秀哉)가 된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소설 『명인』에 나오는 바로 그 사람이다.
삼일절이 되면 이상하게 김옥균이란 이름이 떠오르곤 한다. 일본과 한국, 그 애증의 세월이 그와 더불어 엉켜 있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