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되자, 어둠이라는 방어벽을 이용해 장비와 병력이 해안으로 이동했으며, 일본군 토치카는 미군 탱크, 다이나마이트, 화염방사기에 의해 제거 되었다. 하지만 조그만 섬 하나를 점령하는데 3일이라는 시간이 들었고, 3,000명이라는 사상자가 발생하여 미국 본토 자체의 여론이 격화되었다. 일본 토치카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토치카 모형을 하와이 외각 지점에 설치하여 연구한 결과 로켓탄과 관통력이 뛰어난 폭탄을 사용한 정밀 투하만이 해결책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이러한 연구 결과는 마샬군도에 있는 일본군 해군 기지 파괴작전에 즉시 실행되었다. 3일 동안 이 섬은 36,000발의 함포 사격과 인근 섬에서 발사되는 포 공격을 받아서 적의 전력이 급격히 떨어졌는데 이것은 미군의 진격을 그 만큼 쉽게 이루어지게 하였다. 사상자도 350명 미만이었다. 미 해군은 파죽지세로 마샬 군도로 진격했으며, 미 항공기들은 중태평양 지역에서 일본군에 가장 중요한 기지인 트럭기지를 공격하였다. 이 공격에서 200여대의 일본군 항공기와 수 십대의 일본 상선이 파괴되었다. 트럭기지를 무력화 시키고 나서, 미해군은 1200마일 떨어진 마티안 섬으로 진격을 계획하였다. 이 작전이 성공하면 B-29폭격기에 의한 일본 본토 공격이 가능한 것이었다. 이시기에 몇몇 일본 지도자들은 연합군에 대한 평화안의 제의를 고려했으며, 계속 전쟁을 한다는 것은 무의미 한것이고, 일본 국민들은 전쟁 실상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일본 해군 사령관들은 여전히 반격 기회를 노리고 있었고, 미해병대의 사이판섬 상륙 후, 오자와 부제독은 미군 함대 전멸 작전에 나섰다. 그가 생각하기에 비록 항모의 숫자상으로는 2대 1의 열세에 있지만,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마리안즈 섬에 있는 수백대의 항공기와 항모에 있는 항공기를 이용하여 미 항모의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문제는 마리안즈 섬에 있는 여러 가지가 미군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다. 6월 19일 공격을 시작했는데, 일본군의 피해정도가 심각했다. 미군 레이다 상에는 150마일 전방에 있는 미확인 비행물체가 포착되었는데, 미군 대공포의 방어막을 뚫지 못한 채, 이들의 공습 시도는 미군기에 의해 격퇴되었다. 작전에 참가한 70대의 일본 항공기 중 24대만이 귀대했고, 미항모의 피해는 없었다. 반 시간 후 미군기들은 일본기와의 공중전 끝에 98대를 격추시키고, 이때까지도 오자와 부제독은 자신의 작전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이후에도 2번에 걸친 공습을 감행했지만,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일본군 조종사들은 미국 조종사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하루 사이에 350대의 일본기가 격추되었고, 2대의 일 항모가 미 잠수함에 의해 격추되었다. 다음날, 미 항모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에 의해 일본군 구축함 히요호와 65대의 항공기가 파괴되었다. 이틀만에 일본군 해군의 항공력은 그 기능이 마비되어 버렸다. 사이팜섬 점령 작전은 7월 중순까지 진행되었고, 16,000명의 미군 사상자와 29,000명의 일본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제 미군은 일본 본토를 하늘에서 공격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했고, 7월 18일 전쟁 내각을 이끌었던 도조 수상이 사임하고, 육군 장성 고이소가 수상이 되어 본토 수호 작전을 펼쳤다. 그리고, 이섬에 대형 폭격기에 적합한 대형 비행장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미해군은 또 필리핀 진격에 마지막 방해물인 팔라우섬으로 진격했다. 9월에 시해된 팔라우섬에 대한 공습은 별다른 저항을 받지 못했다. 이에 할시 제독은 이곳을 우회하여 곧바로 필리핀으로의 진격을 건의했다. 그러나 그의 상관인 니미츠 제독은 팔라우에 있는 일본군 주기지의 공략을 명령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독의 결정은 현명한 것이 못되었다. 섬자체가 석회암 절벽과 동굴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군은 이런 지형적인 잇점을 이용하여 잠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합군의 공중과 해상에서의 공격은 별 효과가 없었다. 해안에 상륙을 시도한 미군의 피해는 막대했으며, 해안선을 확보하는데만도 몇일이나 걸렸다. 더욱이 섬 전체를 평정하는 데는 몇달이 걸렸다. 이 작전에서 100,000명의 일본군과 2,000명의 미군 인명 피해가 있었다. 1년여 동안 맥아더 휘하의 병력은 적의 저항이 거센 지점을 우회하여 몇몇 일본군 기지를 점령하면서 뉴기니아 섬 북쪽까지 진격하였다. 미 제 5 항공대는 선봉장이 되어 일본 기지, 함정, 항공기들을 파괴시켰다. 1944년 9월 맥아더 휘하의 병력은 뉴기니아섬 북쪽으로 300마일 떨어진 모로타이섬을 점령하고, 이섬에서 필리핀 본토 공격을 감행하였다. 필리핀 본토공격은 육해군 합동 작전으로 실시되었으며, 미육군은 레이테, 민도로, 루잔 지역을 공략했다. 또 해군은 일본 항공기의 기능을 마비시켜 지상군의 상륙시 일본 항공기의 방해를 제거했다. 1944년 9월 중순 할시 제독이 이끄는 제 3함대는 필리핀에 산재해 있는 일본군 비행장에 대한 일련의 공습을 삼행했으며, 여기서 500대의 일본기가 파괴되었다. 10월 20일 맥아더 휘하의 병력에 의한 필리핀 본토에 대한 상륙작전이 감행되었다. 여명이 발기기 전에 미 전함과 구축함들은 필리핀 유격대의 정보에 의해 레이테 해안을 따라 산재해 있는 일본군 진지를 강타했다. 미 지상군 4개 사단이 해안선에 상륙했으며, 이른 오후에 맥아더 장군은 물을 건너 해안에 상륙했다. "필리핀 국민 여러분, 우리는 약속대로 돌아왔습니다." 라는 도착 성명을 발표했다. 이 상황에도 일본군 지도자들은 사태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일본 해군 사령관 도요다 제독은 만약 필리핀이 미군의 수중에 들어가면 일본 해상 보급선이 미 항공기에 의해 차단되므로 미군의 필리핀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모험을 감행하였다. 도요다 제독은 그의 부대를 3등분 하여, 다게다 부제독이 중앙 부분을 맡고, 부제독 휘하의 전함 무사시호와 야마토호는 동쪽으로 향진하여 중부 필리핀 지역을 거쳐 레이터만에 이르렀다. 제 2함대를 이끄는 니시무라 부제독은 수리가도 해협을 거쳐 북쪽으로 항진했다. 위의 두 함대들은 협공 작전으로 미군함대를 잡으려는 계획이었고, 오자와 제독이 이끄는 다른 함대는 미군 항모를 유인하는 임무를 맡았다. 오자와 제독 함대는 4대의 항모가 포진하고 있었으며, 항모 자체에 116대의 항공기 밖에는 없었기 때문에 적을 유인하는 미끼로 사용하였다. 3일간의 전투는 도요다 제독이 원하는 대로 수행되지 않았고, 10월 23일 여명이 밝자 다게와 부제독이 이끄는 함대의 이동이 미국 잠수함에 포착되어 2척의 구축함이 침몰되었다. 다음날 아침, 미항공기의 공격을 받았을 때 다게다 부제독의 위치는 필리핀 국도 중앙에 있는 시부얀해협이었다. 이때 그는 마닐라 일본군 사령부에 항공기 엄호를 요청을 무전으로 타전했으나, 대부분의 항공기들이 할시 제독의 항모 공격에 투입된 상태이고, 여분의 증원 항공기가 없는 상태여서 도움을 받지 못하고 무차별 공격을 받아 5대의 전함이 피해를 입고, 무사시 전함은 침몰하고 말았다. 전멸의 두려움을 느낀 나머지 다케오 제독은 선수를 돌렸고, 섬의 반대쪽에 위치한 필리핀 해에 있던 할시 제독은 일본군이 퇴각한다는 감을 잡았다. 몇시간후 미군 정찰기에 북방 300마일 거리에 오자와 제독의 항공모함을 발견하고 할시 제독은 공격을 명령했다. 제독은 일본군의 함정에 빠진 것이다. 할시 제독이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다케오 제독은 야음을 타서 선수를 돌려버렸다. 다음날 아침, 그의 함대는 레이테만으로 항진했고, 다른 함대 니시무라 부제독이 이끄는 함대는 수리가오 해협을 통과하여 남쪽으로부터 북상하고 있었다. 만약 미군이 이를 감지하지 못했다면, 일본군의 협공 작전은 성공했을 것이다. 정찰기와 해안 초소의 감시망에 이들의 움직임이 간파되었고, 제시 제독이 이끄는 미기동함대는 길목을 지키면서 니시무라 부제독의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1열 종대로 해협을 통과하던 일본 함대는 미국의 구축함의 공격을 받아 1척의 전함과 2대의 구축함을 잃었다. 또한 이들은 진주만에서 피해를 입어 재건조된 미 함정들의 함포사격을 받았다. 이전투에서 니시무라 부제독 휘하의 함정들 거의가 피해를 입든지 아니면 침몰되었다. 일본군의 마지막 희망이라 볼 수 있는 다게오 부제독이 이끄는 함대가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10월 25일 동이 트자, 레이터만에 있는 해병 수송 선단은 호휘하는 임무를 맡은 방어력이 약한 미 소형 항모를 공격했다. 일본 전함 야마토에 장착한 21m 포에서 발사되는 3,220 파운드의 포탄 사격을 받고 미군 함정들은 파괴되었다. 2시간후 여러척 미함정이 가라 앉았고, 다른 여러척의 함정은 피해를 입었다. 이처럼 다케오 제독의 함대에 의한 미군 수송선단의 운명은 끝난것 처럼 보였다. 그러나 일본 함정들은 공세에 박차를 가하지 않고 퇴각했으며, 사실 다케오 부제독은 미군 항모에 자신이 얼마나 급접했는지 알지 못했다. 할시 제독이 이끄는 항모가 100마일 거리에 있다는 보고를 받고 선수를 돌려 항모공격에 나섰다. 전투의 소강 상태는 오래 가지 않았으며, 2시간 후 미 소형 함대는 일본군의 가미가제식의 공격을 받았다. 폭탄을 날개에 단 5대의 지로기가 미 함정으로 돌진했으며, 4대의 지로기는 미군 전투기와 함포사격에 의해 격침되었다. 그리고 한대의 후송선 세인트호의 비행갑판에 떨어졌다. 불길은 격납고를 타고 번져갔고, 뒤이은 연쇄 폭발로 소형 항모는 침몰하고 말았다. 필리핀에 있는 일본군 비행대의 사령관은 100여대 밖에 되지 않는 항공기로는 미군의 진격을 막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기고, 유일한 해결책은 가미가제식 공격 밖에는 없다는 판단에서 평균 연령이 20세 정도인 자원병을 모집하여 자살 공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이러한 공격도 전세를 역전시키지 못했고, 가미가제 공격이 있은지 다음날 아침, 할시 제독은 일본군 함정들에 대한 공습을 감행하여 1대의 순양함과 2대의 구축함을 격침시켰다. 레이트만 전투가 끝날 무렵, 일본 해군력의 기능이 마비되었다. 1945년 1월 850척이 미함정들은 레이터만을 거쳐 6일만에 린가앤만에 이르러 6일간의 항해중에 일본기의 가미가제식 공격을 받았다. 1월 4일 일본군 폭격기 1대가 미 호위함 베이호에 뛰어 들어 97명의 사상자를 발생시키고, 막대한 피해를 입은 베이호는 침몰하고 말았다. 이틀후 함대가 린가앤만에 진입하자, 화염에 싸인 일본기가 미전함 뉴멕시코호에 떨어져 29명이 사망했고, 다른 일본기의 자살 공격으로 11대의 상선이 피해를 입고 수백명의 수병이 죽었다. 이것은 지난 2년간 미군이 입은 피해중에 가장 막대한 사건이었다. 적의 가미가제식 공격을 저지하기 위해 미 함정에는 추가로 대공포가 장착되었으며, 급강하 폭격기와 뇌격기는 더 많은 전투기를 항모에서 발진시키기 위해 격납고로 이동되었다. 항모 호위 전투기들은 항모에서 반경 60마일까지 초계비행을 했고, 항모에서 발진한 전투기들은 일본군 비행장을 공격하면서 정찰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방어적인 전략은 완벽한 방어 기능이 되지 못했고, 일본기의 자살 공격은 그들의 물적 자원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일본군의 이러한 저항에도 불구하고 미군의 루존섬에 대한 공격은 성공해으며, 맥아더의 지상병력은 항공기의 측면지원을 받으면서 마닐라로 진격을 계속했다. 1945년 2월에 드디어 마닐라의 개선문에 도착하게 되었다. 일본군의 마닐라시에서의 저항은 완강했으며, 미 제 6군의 야포 공격을 밤낮 구별없이 쏘면서 이에 대응했다. 미군의 야포 공격과 일본군의 학살로 인해 10만명의 필리핀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동양의 진주라고 불리우던 마닐라의 우아한 건축물들은 잿더미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2월 17일 일본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계속되고, 10만 명의 잔여 병력은 루존의 북쪽에 있는 산악 지역으로 집결해 저항을 계속했으며, 이들 잔여 병력은 전쟁이 끝난후 6개월까지 산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몇명은 몇년 전까지도 그곳에서 나오지 않고 은거하고 있었다. 맥아더의 지상병력이 잔여 세력의 소탕작업을 수행하고 있을 때, 니미츠 제독은 함대를 이끌고 일본 본토로 항진하고 있었다. 2월 19일 미해군은 마리안 제도와 토쿄사이에 있는 이오지마라는 섬에 상륙작전을 감행했으며, 이비행장에서 발진하는 B-29폭격기에 위협 세력이 되었으므로 목표물은 섬에 있는 비행장의 탈취에 있었다. 또 다른 목적은 작전 중 피격당한 폭격기의 비상착륙 지역으로의 사용에 있었다. 섬에 대한 항공 사진 분석 결과 면적이 8평방마일 정도 되는 이 섬에 200대 이상의 대포가 설치되었고, 미군들은 지하 참호나 터널이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6주 동안 폭격기들은 섬지역에 대한 주간 폭격을 가했고, 미군이 섬에 상륙하자 산위에 설치된 야포에서 발사되는 폭탄으로 첫날 2천명이 미군이 사망했다. 사선을 돌파하여, 산꼭대기에 성조기를 꽂을 때까지 5일간의 피비린내 나는 전투가 계속되었고, 3월 26일 전투가 종격되었을 때 미군측은 6천명의 사망자와 19,000명의 부상자가 나왔다. 참혹한 전투였지만 이제 남은 것은 일본 본토로 진군하는 일만이 남았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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