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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태평양 전투

대한인 2014. 2. 6. 04:54

미드웨이 대반격의 여세를 몰아
태평양에서 일본군 구축작전을 시작
 
 
구아던케널 전투
 
일본군이 중태평양으로 후퇴하자, 연합군은 남쪽에서 일본군을 격퇴할 시기라고 판단하고, 맥아더 장군이 남태평양에 있는 일본군의 주요 거점인 라바울에 대한 신속한 공격을 제안했다. 그런데 이 자전을 실행하면, 잔야 항모의 손실이 많을 것을 우려한 해군 관계자로부터 거부당했다. 해군관계자들은 자신들이 계획에 맞추어 점진적으로 일본에서 남동쪽에 위치한 구아던케널섬이라 불리우는 지점에서 공격을 시작하여, 라바울로 진격을 시도했다.

1942년 여름 일본군은 구아던케널에 비행장을 건설함으로써, 여기서 발진한 항공기는 연합군 보급선을 공격할 수도 있고, 연합군의 소유하에 있는 섬의 점령을 지원할 수도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이섬의 전략적 가치는 높아졌다. 만약 연합군의 소유하에 있는 섬이 일본군의 수중에 들어가면 미국에서 호주로 가는 주 보급선로는 일본군의 폭격을 받게 되므로 이섬의 점령은 연합군 측면에서 볼때 심각할 정도였다.

섬에 대한 공격은 1942년 8월 아침에 시행되었으며, 먼저 함선에서의 함포사격과 뒤이어 항공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상륙정에 옮겨 탄 미해병들은 파도를 가로지르며 섬에 상륙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공격을 받은 일본군은 먹다 남은 밥의 따뜻한 온기 정도로 보아 놀란 표정이 역력했지만, 얼마 있지 않아서 일본군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섬에서 이륙한 일본 항공기들의 섬에서 600마일 해상에 떠 있는 미 수송 선단에대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섬에대한 일본군의 1차공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성급하게 비행기를 발진 시킨 결과 폭격기에 무기를 재장착 하는 것을 간과해 버리고 말았다. 발진한 항공기에는 어뢰가 아닌 폭탄이 장착되어 있어 함선공격에는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 땅거미가 질 무렵 미해병 11,000명이 섬에 상륙했고, 라바울에서는 일본군 부제독인 미카와가 미군을 섬에서 몰아내기 위해 구축함과 순양함을 집결시켰다. 야음을 이용하여 이들 전함들은 솔로몬해협의 협소한 통로를 빠져 나갔으며, 미군들은 이들의 움직임을 발견했지만, 불행하게도 일본 전함들을 미군선단으로 오인했다.

8월 9일 여명이 트기 전에 미아자키는 자신의 함대가 사보라는 작은 섬 근처에서 연합군 함선의 가운데 있음을 발견했다. 하지만 연합군은 일본측에서 발사한 두대의 어뢰에 의해 호주의 순양함 캠브라호가 피격당할 때까지 일본군의 존재를 몰랐다. 일본군은 계속 공격을 가했으며, 해가 뜰 무렵 4대의 구축함과 천명이상의 인명피해가 있었다.

미군 항모에서 발지한 항공기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일본 함정들은 공격의 고삐를 풀고 후퇴하고 말았다. 일본의 이러한 기습 대담한 공격은 연합해군에 피해를 주었지만, 섬 자체는 여전히 미군의 수중에 있었다.

미군 공병에 의한 비행장 건설이 완료되었으며, 미드웨이 전투에서 전사한 해병 조종사인 핸더슨 소령의 이름을 따서 이곳을 해더슨 비행장이라고 명명하였다. 가까운 해역에 있던 항모에서 발진한 전투기와 급강하 폭격기들이 비행장에 착륙했으며, 암호명 캑더스 에어 포스(cactus air force)라는 작전이 시작되었다.

처음에 일본 지도자들은 섬에 주둔하고 있는 미해병대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하지 않은 채 이섬에 대한 탈환은 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6,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섬탈환 작전을 개시했다. 8월 18일 자정이 되기 전에 이기키 대령이 지휘하는 1차 공격조 915명은 섬에 상륙하여, 비행장으로부터 20마일 지점에 이르렀다. 여기서 대령은 후발대의 도착을 기다리라고 명령받았으나, 미군의 저항이 없자, 대령은 부대를 이끌고 비행장에 인접한 강까지 진격하였다. 8월 21일 야밤에 병력을 코코넛 숲속에 집결시키고 나서, 공격을 명령했다. 착검을 한 소총과 수류탄을 들고 돌격을 했지만 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치고, 몇차례에 걸친 일본군의 도하작전은 실패로 끝났다.

"마치 파리들이 거북이를 공격하는 양상이었다." 라고 한 일본군 장교는 이당시를 회상했다. 새벽녘에 이르자, 대령은 몇 백명밖에 안되는 잔존 병력을 데리고 숲속으로 퇴각해 버렸다. 오후경에 대령의 잔존 병력은 미군들에 의해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 이르렀으나 이들은 항복하지 않았다. 부상자들은 비명 소리를 지르고 이들을 도우려고 접근한 미군들은 일본군 저격병의 총탄에 희생되었다.

미해병 사령관 알렉산더 소장은 5대의 탱크를 사용하여 숲속으로 진격하여, 일본군을 한곳으로 몰아 넣었다. 저녁 무렵에 이끼키 대령은 모래사장에서 자결을 했고, 몇몇의 생존자들은 해안선을 따라 탈출했다. 그리고 남은 것은 80여구의 시체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을 뿐이었고, 이 전투에서 미군의 사망자들은 35명에 불과했다.

비행장 탈환 작전은 실패했지만, 일본군은 섬 자체를 포기하지 않았고, 야마모토 제독은 60척이 넘는 함대를 소집하였다. 여기에는 상륙 병력을 실은 수송선, 전함, 미 해군 함정의 유인작전에 사용할 항모 등이 포함되었다. 미 태평양 함대 유인작전에 투입된 일 항모는 류조호였으며, 야마모토 제독은 미군 항모가 섬의 보급품 재공급 작전에 투입된 수송선의 엄호에 참여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만약 미 함대들이 일 항모 류조호에 대한 공격을 가한다면 일 항모 쥬이카쿠, 슈카쿠호에서 발진한 항공기를 이용해 미태평양 함대를 섬멸시킨다는 작전 계획을 세웠다.

동 솔로몬 군도 전투는 8월 24일 오후에 일 항모 류조호에서 발진한 항공기에 의한 핸더슨 비행장 공격으로 시작되었으나, 일본군의 공격은 실패로 끝났다. 하지만 항모 사라토가, 엔터프라이즈호를 지휘하는 플래처 제독은 항공기를 이용하여, 일 항모 류조호에 대한 반격전을 실행하여, 일 항모의 기능을 마비시켰다. 이로 인해 지금까지의 상황은 야마모토 제독이 구상한 대로 진행이 된 셈이었다. 일본군 항공기들은 이제 미 항모의 위치를 알아내고, 미항모 엔터프라이즈호에 대한 공격을 감행할 차례였다. 그런데 엔터프라이즈호는 심한 피해를 당하여 수리를 받으러 본국 기지로 귀항하고 말았다.
쌍방의 대형 함정들이 퇴각하자, 일본군 부제독 다나카는 수송 선단을 이끌고, 섬으로 진격을 시도했으며, 핸더슨 기지에서 발진한 미군 항공기들에 의해 순양함과 수송선을 잃어 버렸다. 그리고 연합군 수중에 있는 뉴터버리드에서 발진한 B-17기는 생존자들의 구조 작업에 참여하고 있는 일본 구축함을 격침시켰다. 비록 전의를 잃은 일본군은 퇴각했지만, 엔터프라이즈호에 대한 공격에는 성공한 셈이었다. 동 솔로몬 전투에서 일본군은 승리하지 못했고, 일본군의 지상군 병력의 섬 상륙 작전도 실패했다. 일본군은 한척의 소형 항모, 70대의 항공기, 그리고 뛰어난 조종사들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일본군의 작전개념은 바뀌어 섬의 비행장을 탈환하기 위해 2조의 분견대를 구성했는데, 한조는 바지선을 타고 야음을 이용하여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는 작전이고, 다른 한조는 구축함에 승선하여 섬에 접근하는 작전계획이었다. 그런데 구축함은 도중에 기관고장을 일으키고, 일본군의 전략은 분견대가 비행장 양쪽으로 접근하여 함포사격의 지원을 받으면서 공격을 개시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작전은 생각했던 대로 실행되지 않았다. 바지선은 풍랑과 미군기의 공격으로 곤욕을 치루었으며, 섬에 이르렀을 때 1,100명의 병력 중 단 500여명이 사망했다. 생존자들도 작전시간보다 너무 늦게 섬에 도착하여 소용이 없었다. 다른 한조는 섬에 상륙하여 정글을 헤치고 9월 12일 핸더슨 비행장에 도착했으나, 능선이에 포진한 미군의 저항에 막혀서 비행장 탈환에 역시 실패하고 말았다. 날이 밝자 양측의 사상자는 일본군 600명, 미군 40명으로 밝혀졌다.

핸더슨 비행장은 여전히 미군의 수중에 있게 되었으며, 새로운 항공기의 보강으로 전투력 자체가 점점 강화되었다. 10월 중순 섬의 소유권 쟁탈전이 미군으로 기울어져 가는 것처럼 보였으며, 이에 야마모토 제독은 대형 전함 콩고호와 하루나호를 파견하여 섬의 공략에 나섰다.

핸더슨 비행장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들의 생활은 곤욕스러울 정도로 궁핍했으며, 조종사들은 코코넛 줄기로 엮은 축축한 텐트에서 생활을 했다. 식사는 스팸, 건조 감자, 노획한 쌀로써 해결했으며, 전염병이 만연으로 많은 사람이 고생했다. 비가 오면 폭우로 인해 비행장 활주로는 진흙탕으로 변했고, 날씨가 개이면, 내리쬐는 태양열로 인한 땅의 건조로 먼지가 질식할 정도로 휘날렸다. 여기에다 정오쯤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일본군의 공습도 일상생활의 일부였다.

9월 14일 90분 동안 계속된 일본군의 함포사격은 일찌기 미군 조종사들은 경험해 보지도 못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었다. 연료탱크는 화염에 쌓이고, 일본군의 함포사격이 끝나자, 핸더슨 비행장의 항공기 댓수는 손 꼽을 정도로 줄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일본군의 공격이 끝난 것은 아니었고, 또 다른 공격을 하기 위해 일본군 함정들이 섬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섬에서는 11대의 부서진 항공기 수리가 끝났고, 파괴된 B-17 폭격기의 연료통에서 뽑아낸 연료를 사용하여 수리된 항공기의 연료통을 채웠다. 섬으로 항진하고 있던 일본 함정들은 섬에서 발진한 수리된 미군항공기의 기습공격을 받아 일본군 보급품 선로는 차단이 되어 섬에 상륙한 일본군의 식량 조달이 문제가 되었다.

비행장에 대한 일본군의 해상과 공중에서의 공격은 계속되었으며, 미군에 의한 슬롯 해협의 봉쇄로 섬에 질주한 일본군에 대한 보급품과 증원군 조달은 점점 어렵게 되었다.

10월 23일 밤 일본군은 핸더슨 비행자에 대한 3방향에서의 지상군 공격을 해군의 함포 사격 지원하에 감행하였다. 하지만 이 작전은 또다시 실패로 돌아가고, 한 공격조가 제시간에 작전 구역에 도달하지 못해 다른 조가 공격을 감행했지만, 너무 이른 공격이었기 때문에 3,000명 이상의 인명 손실이 나고, 생존 병력은 정글을 뚫고 퇴각했다.

섬에 대한 지원 공격에 참여했던 쌍방간의 항모에 의한 최후의 일전이 행상에서 벌어졌고, 일본은 여기서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일본군의 공격은 파상적이었으며, 미 항모는 복구 불능 상태가 되었고, 수리를 마치고 돌아온 엔터프라이즈호도 2발의 폭탄을 맞아 연료통에서 기름이 누출되고 있었다.
몇시간만에 미해군의 전투력은 일시적으로 마비되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기회를 이용하지 못했고, 섬에 주둔하고 있던 15,000명의 일본군은 보급품을 받지 못했다. 일 항모는 너무나 많은 항공기를 상실했기 때문에 북쪽으로 퇴각해 버렸다.

미군은 이러한 소강상태를 이용하여 섬에 대한 전력을 강화시켰으며, 여기에는 비행장의 복구도 포함되었다. 일본군의 보급품 재공급 작전도 구아덜캐널 전투에서의 미군 승리로 실패로 돌아갔다.

섬에 대한 상륙 지원을 위해 11대의 수송선과 보급선 섬의 진입을 위해 필요한 핸더슨 비행장을 공습하기 위해 일본군은 순양함, 구축함 등 두척의 전함으로 구성된 함선을 섬으로 파견했다.

1942년 11월 12일 일본 함정들은 이들의 진입을 차단하기 위해 방어벽을 편 미군 함정과 교전을 했다. 이 때 미군 측 손실은 막대했으나, 일본 함정이 섬의 접근을 차단하여, 일본군의 비행장에 대한 함포 사격을 차단했다. 이 때 일본군 전함 히에이호는 심한 타격을 받아 저녁 무렵 침몰하고 말았다. 이는 태평양 전투에서 최초로 침몰된 일본군 전함으로 기록되었다. 다음날 일본군 전함 커리시마호도 히에이호와 비슷한 침몰을 했다.

일본군은 섬에 지상군 병력을 상륙시키기 위해 상륙정의 해안 상륙을 시도했지만, 핸더슨 비행장에서 발진한 미군기들의 공격으로 격퇴되었다.

섬의 탈환을 위해 너무나 많은 희생을 치루었지만, 성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섬에 상륙한 일본군들은 보급품을 공급받지 못해 나무뿌리, 흰개미등으로 생활을 이어갔고, 42년 말 결국에는 항복하고 만다.

6개월이 걸린 전투가 종결되고 섬은 이제 미군의 손에 완전히 넘어갔다. 여기서 발진한 미군기들은 솔로몬 해역에 있는 일본기 기지들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고, 미 해군은 라바울섬 탈환을 위해 항진을 시작했다. 동시에 지상군은 라바울의 동남쪽 지점으로 접근하고 있었으며, 맥아더 장군은 일본군의 배후를 쳐서 필리핀 탈환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런 맥아더 장군의 첫번째 장애물은 뉴기니아 섬이었으며, 1942년 중순까지도 일본군이 섬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남동쪽 지역만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모비항에 주둔하고 있는 미 해군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모비항을 점령하려는 일본군의 1차 공격은 실패로 끝났고, 산을 넘어서 행해진 2차 공격은 호주군의 저항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9월에 일본군은 모비항에서 30마일 거리까지 진격했지만, 미 5함대에서 발진한 항공기들의 공습으로 보급선이 차단되어 말라리아 전염병이 만연한 정글에 고립된 일본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호주군은 퇴각하는 일보군들을 버마까지 추격하였으며, 1943년 1월 버마 방어선을 편 일본군들은 연합군의 공격에 무너지고 만다.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었지만, 연합군의 피해도 엄청나서 이 때부터 맥아더는 전술을 바꾸어 적의 취약지점을 공격하고 저항이 거센 지점은 우회하여 고립시키는 전략을 세웠다.

맥아더는 레이와 살라마우아에 있는 일본군 기지를 공략 거점인 뉴기니아를 점령한 다음, 비아크, 모로타이, 혼란다아를 점령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이곳은 일본군의 저항도 거세었지만, 연합군의 공세에 결국은 무릅을 꿇었다. 1943년 3월 레이로 항진하던 일본군 보급선은 연합군 항공기에 의해 파괴되고, 뉴기니아섬에 대한 일본군의 보급 선망은 완전히 차단되었다.

1943년 봄, 일본군의 수중에 있던 솔로몬 제도와 뉴기니아섬이 연합군의 손에 들어갔고, 연합군은 때를 맞추어 라바울에 대한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맥아더는 공군력을 사용하여, 뉴기니아에 주둔한 일본군 세력의 제거에 나섰으며, 연합군 항공기들은 수면 위로 나제 비행하면서 바지선을 타고 섬으로 이동을 시도하던 일본군을 저지하였다.

1943년 8월 17일 북쪽 해안에 위치한 위액 공군기지에 계류 중이던 200대의 일본기에 대한 미 제 5함대에서 발진한 항공기에 의한 대규모 공습이 감행되었다. 2주일후 1,700명의 공수부대원들이 레이지역으로부터 15마일 상류의 나자브에 있는 일본군 비행장에 투하되었다. 9월말에는 연합군들이 뉴기니아 동쪽에 있는 파푸안 반도를 점령함으로써 필리핀 본토 진군의 터를 마련했다.

라바울 남서쪽으로부터 고립시키려는 작전과 해상에서의 서쪽으로부터 수륙양용 작전을 펼쳐 솔로몬으로 진격하는 해상작전이 병행되었다. 6월에 처음으로 펼쳐진 뉴기니아 섬에 대한 상륙작전은 생각보다 많은 사상자를 냈고, 이곳에 있는 일본군들은 산속에 참호를 파고 그위에 통나무나 흙으로 위장하여 진지를 구축했다. 백병전이 수주간 계속되고, 일본군 9,000명 규모의 일본군 병력을 진압하기 위해 50,000명의 미군병력이 투입되었다. 일본군이 완전히 진압된 8월 1일에는 136명의 미군 사상자가 발생했다.
대규모 인원 손실이 발생하자, 미해군은 전략을 바꾸어 적의 저항이 강한 지점을 우회 통과하여 고립시키는 전략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요소가 공군력이었는데, 솔로몬 제도에 있는 일본군 주요거점에 대한 미군 항공기의 출격횟수는 수천회 정도로 많았다.

1943년 가을 미 해병대는 솔로몬 제도를 거쳐 부게일빌과 라바울 지점 사이까지 진격했으며, 라바울은 폭격할 수 있는 비행장의 필요성에 의해 11월 1일 미해병대는 부게일빌 섬에 상륙했다.

아군의 피해를 줄이려고 적의 방어력이 약한 지점으로 상룩하여 여러곳에 비행장을 건설했다. 기습공격에 놀란 일본군은 라바울에 있는 해군력을 이용하여 미군 해병대를 제거하려고 했으나, 이러한 일본군의 움직임을 알아차린 미군은 항모 사라토가와, 인디펜더스호를 파견하여 대응했다.

두대의 미 항모에서 발진한 96기의 미 항공기에 의한 라바울 섬에 대한 공습이 11월 5일 아침에 실시되었다. 하늘은 온통 일본군 대공포에서 쏘아 올린 화약 연기로 뒤덮였고, 10대의 일본 전함과 수십대의 비행기가 파괴되었다. 6일후, 새로운 3대의 미항모가 남태평양에 도착한 후, 라바울에 대한 미군의 2차공격이 감행되었다. 지로기는 소이탄을 투하하면서 미군기에 대해 공격을 가했으나 별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일본 함정에 대한 미군기들의 공격으로 ㅂ대의 구축함이 침몰되었고, 여러대의 순양함이 피해를 입었다. 일본군의 대응 공격이 있었으나 미군기에 의해 격퇴되었다.

1월 내내 라바울에 대한 공습이 감행되어 일본군 수비대의 전력이 점차로 약화되었고, 일본군 항공기 수백대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일본군 함정들은 북쪽에 있어 트랙이라는 지점으로 퇴각하였다.

이제 섬의 지배권은 연합군 측이 잡게 되었고, 공군력의 지원으로 미군측은 지상군의 인명 손실을 줄일 수 있었다.

남태평양에서 일본군의 전투력은 약화되었으며, 이제 야마모토 제독이 예언했던 사실이 입증되기 시작했다.
1943년 새로운 항공기가 미해군에 배치되었는데 이항공기들은 7,000대가 넘는 적기를 격추시킴으로써 제공권은 이제 미군측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미육군에도 P-38이라는 새로운 항공기가 도입되었으며, 이항공기 자체도 태평양 전투에서 미군의 승리에 기여했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보급품 조달 공급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고, 항공기, 함정, 보급선의 손실율이 기아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반면, 일본에 식민지에서 생산되는 자원의 일부분만이 본토에 운송되었다. 일본상선은 대형이 아니었으며, 끊임없이 미 잠수함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공장이나 조선소에서 일본 노동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을 했지만, 미군의 생산력을 따라가지 못했다.
이 당시 보급선의 장애로 식민지 자원 수송이 문제가 됐지만, 우리나라에대한 일제의 수탈은 더욱 심해졌다. 싸울수 있는 남자라면, 징병으로 끌려갔고, 여자는 정신대로, 밥숟갈등의 모든 쇠붙이는 무기제조용으로 수탈당했다. 일본군의 이차대전 패전의 드라마를 들을 때마다 고소한 이 느낌은 왜일까?
   

 
 
 
 
 남태평양 어느 섬에 위치한 비행장 활주로에 대기중인 F4U Corsair기의 모습... 이 정도 태양열이면 진짜 날개에다 계란 후라이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야자수숲 사이로 도열해있는 미국의 전투기들...
 
 
Corsair 조종사가 힘든 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귀환해서 자신의 애기 수평 꼬리 날개에 걸터 앉아 웃고 있는 모습... 그의 날개는 적의 기총에 구멍이 나 있네요... 생환한 것이 천만다행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