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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공격

대한인 2014. 2. 6. 04:56

 
 
 
 
 
 
 
 
 
 
 
 
 
 
전 정보들은 많았으나, 그 아무도 이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1941년 1월 주일대사 조셉 그류는 일본군의 진주만 공격 계획 정보를 입수했다.
공격개시 수시간 전에 진주만 외곽에서 한 대의 잠수함이 발견되고 다른 한 대는 원인 불명인 채 침몰되었으며, 오아우 북쪽 해안 레이다 기지에서는 거대한 비행물체가 포착되었다. 많은 관리들은 일본군의 공격임박설을 알고 있었으나, 그 대상이 일본으로부터 5,000 마일 떨어진 진주만이 아닌 필리핀이라고 생각했다.
 
1941년 진주만의 일요일 아침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하루의 일과가 진행되었지만, 진주만 북쪽 200마일에서는 차가운 물살을 가르며 항진하는 항모 위에서 항공기들이 발진하고 있었다. 일본군 항공기의 라디오에는 하와이 방송국에서 흘러 나오는 달콤한 음악이 들려 오고, 하늘에는 구름 한점 없어서 공격 목표물을 훤히 볼 수가 있었다고 그 당시 공격에 참가했던 일본군 해군 소령 미쯔오 후지다시는 회고했다.
 
미군 비행기들과 함정들은 태풍경보에 따라 비행장과 항구에 집결되어 있었고, 7시 30분 암호명 "도라도라"의 1차 공경은 시작되었다.
 
일본군의 공격형태는 두 방향으로 섬에 진입하여 여기서 다시 소그룹으로 나뉘어 진행되어 고공폭격기의 지상 비행장과 격납고에 폭격과 뇌격기의 함정 어뢰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격 개시 수 분 내에 조용한 진주만 아침의 정적은 일대 아수라장으로 변했으며, 캘리포니아호는 2발의 폭탄을 맞고서 선체의 구멍이 생겨 기름이 누출되기 시작했다. 또 웨스트 버지니아호는 폭발로 휘청거리기 시작하더니, 바닷속으로 침몰했으며, 3발의 폭탄을 맞은 오클라호마호는 선체가 뒤집혀 25피트 진흙 바닥으로 가라 앉기 시작했다. 폭발로 피해 물로 뛰어들어 선체에 올라가 있던 미 수병들도 예외 없이 일본군의 기총사격 희생물이 되었다. 네바다호에서는 국기 게양식 의식이 진행되어 군악대의 주악 속에 국가가 연주되고 있을 쯤, 요란한 굉음을 내고 돌진 하면서 기총사격을 가해오는 일본군의 공격 때문에 의식은 급속도로 진행이 되고 나서 각자 자기 위치로 달려 가는 일대 혼란이 발생했었다.
 
갑자기 울려오는 사이렌 소리에 일요일의 단잠에서 깨어난 미군들은 재빨리 배치 지역으로 달려가 대공사격을 가하기 시작했으며, 미군의 대응 정도는 일본군이 생각한 것보다 빨랐다고 당시 공격에 참가했던 일본군 조종사는 말했다.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고 진주만의 하늘은 먹이 사냥에 나선 일본군 비행기의 굉음으로 뒤덮였고, 수리선 베스탈호는 2발의 폭탄을 맞았다. 그리고 아리조나호는 연료저장실에 폭탄을 맞아 불덩어리 파편들은 다른 선박으로 튕겨져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천지를 진동하는 폭발음은 순식간에 불꽃을 잠재워 버렸고, 이것은 마치 생일 잔치의 촛불 끄기 장면과 같았다.
 
폭탄을 맞아 화염에 타고 있는 로오 전함 주위의 바다는 누출된 기름으로 인하여 불타고 있고, 여기에서 나온 질식 연기로 천지는 밤이 되어 버렸다. 일본군의 기습공격 진행속도가 워낙 빨라서 여기에 대항하는 미군기의 대응은 미비하고, 기지에서 발진한 미군기의 숫자는 극소수였다. 함정이나 지상기지에 있는 미군들은 손에 잡히는 무기, 소총, 권총, 기관총 등으로 대항하여 일본기 29대를 격추했는데, 이 때 25여만발의 탄약이 소비되었다. 10시경에 일본기의 공습이 끝나고 전원 항모로 귀대한 다음, 뒤늦게 수색 작업에 나선 미군의 대응은 허위로 끝났다.

미군들의 피해는 엄청났으며(전함 18척, 항공기 177대, 인명 2,403명), 인명 피해 2,403명중 1,100명이 아리조나호에서 발생했다. 그러나 사실상 미군의 피해는 일본군이 생각했던 것보다 미비했으며, 파괴된 전함 5척(아리조나, 오클라호마, 유타, 카씬, 다우니스)만이 복구 불능 상태였다.

기타 공격 대상이었던 연료 저장소, 잠수함 수리소, 함선 수리소 그리고 이 당시 진주만에 없었던 태평양함대 등에 대한 공격은 실패했다. 후지다 소령은 실패한 목표물에 대한 2차 공격을 상부에 요청했으나 나구모 제독은 1차 공격이 미군 함대의 기능을 충분히 마비시켰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소령의 요청을 기각했다. 그러나 제독의 이러한 상황 판단은 큰 과실이었으며, 미군의 전투력 회복은 생각보다 빠르고, 더 강해졌다.

진주만 기습은 예견되었나?

1941년 초 일본군 통합 함대 사령관인 야마모토 제독은 진주만 공격의 타당성 조사를 비밀리에 지시했다. 미국에서 하버드대학을 다닌 그로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미국의 산업능력, 자원의 풍부성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장기전에서는 승리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또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미군의 함대의 기능을 상실 시키고 나서, 그 공백기에 동남아로 진출하여 강력한 방어막을 구축했다. 그 다음에 두 대양에서 1, 2년의 소모전을 벌인 후에 미국, 영국 정부와 협상을 통한 영토 분할에서 우위를 점령하려는 작전계획을 구상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보면 진주만 공격은 방어적인 개념이 강한 기습공격이라 볼 수 있다.

그는 비밀리에 일을 추진하면서 한편으로는 문제해결을 위한 외교적인 협상을 계속하였다. 1942년 루즈벨트 대통령은 또 다른 평화안을 제안했다. 즉 미국은 일본이 만약 점령지로부터 군대를 철수하고 중국 정부와 평화회담을 재개한다면 일본과의 정상적인 통상관계를 재개할 수 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미국의 제안이 일본 정부에 전달되기도 전에 일본군의 전함과 수송선이 동남아시아의 이동 소식으로 들려왔다.
11월 6일 6대의 일본 항모들은 본토 항구를 빠져 나와 진주만으로 향하는 항해를 시작했는데, 미국 상선에 의한 포착을 피하기 위해 항로를 안개가 짙게 깔리는 얼류선 열도와 미드웨이 사이로 잡았다.

12월 2일 본국 정부로부터 최종 작전명인 "climb Mt. Nitaka"가 하달되었고, 동시에 다른 함대는 동남아 방향으로 향진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밀군사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일본 정부는 겉치레에 불과한 협상을 계속했는데, 12월 7일 워싱턴 시간으로 정각 1시에 미국 정부에 전달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나 해독상의 문제로 인해 통지사항은 정해진 시간에 전달되지 못했다.

미군 정보부에서는 이러한 교신 내용을 사전에 도청하여 해독했으며, 이것이 의미하는 것을 무엇인지 파악했지만 정확한 시간을 알지는 못했다. 단지 예방책으로 샌프란시스코, 파나마운하, 하와이 그리고 필리핀에 있는 미군기지에 경계 명령만을 하달했다. 하지만 그 시간에 이미 일본기들은 1,264일의 시간이 소모된 태평양 전쟁의 서곡을 위해 진주만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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