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를 화염속으로 격추시킨 것은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전쟁이란 어차피 그런 것이고, 사람들은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고난을 겪을 것이다." - 처음으로 독일군 조종사를 격추시키고 나서 레이노 조지 호커 중위가 한말 -
제1차 세계대전의 조종사들중에서 단지 4%만이 에이스(수훈 조종사들을 말함)라 불리워질수 있었고, 전쟁 중 격추된 비행기 수의 40% 정도는 이 에이스들이 기록한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에스가 될 사람은 따로 정해져 있었다. 1500여명 이상의 조종사들이 각기5대 이상의 비행기나 기구들을 격추시켰으나, 그들 모두가 에이스는 아니었다. 독일군들은 열대 이상을 격추시켜야 이러한 칭호를 얻을 수 있었다. 프랑스는 초기부터 이 말을 공식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5대 이상을 격추시킨 조종사에게는 실제로 이런 칭호를 사용했다. 프랑스 언론들은 처음에는 단지 뛰어난 조종사를 묘사하기 위해서 이 말을 사용했다. 그 후, 이 말은5대 이상의 적기를 격추시킨 조종사에게만 사용되었다. 프랑스의 에이스들은 때때로 금시계와 상금을 받았다. 그들은 국가적인 영웅으로 존경을 받게 되었다. 독일군과 영국군의 경우도 비슷했다. 전쟁중에는 많은 승리를 올리지 못하더라도 에이스들은 언제나 관심의 대상이었다. 참호속의 병사들은 소설처럼 과장된 에이스들의 영웅적인 무공담을 읽었므며 또, 후방의 시민들도 그들의 전기를 읽었다. 그들은 단지 군인이 아니라 참호의 진흙속에서가 아닌 공중에서 깨끗한 싸움을 벌인 기사와도 같은 모험가들이었다 1915년의 서부 전선에서의 지상전은 거의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공중에서 기술과 전략의 대결이 벌어졌다. 지상의 참호속에서 지휘관들은 죽음의 확실한 전쟁지대로 끊임없이 병사들을 내보냈다. 공중에서는 연합군이 계속 그들의 우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독일 공군이 독자적으로 프로펠러 사이로 사격을 할 수 있는 장치를 개발하고 있는 동안, 연합군의 전향장치를 장착한 모렌 솔니에르(Morane Saulniers)는 제1세대2인승 비행기들과 다른, 독일의 형편없는 비행기들의 성능면에서 단연 앞서고 있었다. 연합군 비행기들은 정규적으로 독일군의 후방을 비행했지만, 독일군의 후방을 비행했지만, 독일군의 산발적인 대공포 사격외는 두려울 것이 없었다. 전선에 거의 변화가 없자, 전략가들은 정적을 깨드릴 새로운 무기와 전술을 찾게 되었다. 1915년4월22일 전선의 북쪽 끝에 있는 이프르(Ypres) 평원에서의2차 전투에서 독일군은 최초로 독가스를 사용하였다. 그들은4마일 정도의 전선이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7만명의 연합군 사상자를 냈다. 그러나 독일군은 이 가공할 신무기의 가치를 과소평가하여 더 이상 이용하지 않았다. 다기 전쟁은 지지부진해졌다. 전쟁중인 어느 날, 영국군은B. E. 2 쿽스(Quirks)기4대로 구성된 편대에게 기지인 메르빌(Merville)에서 라 리(La Lys)강쯤으로 40마일 지점에 있는 커트레이(Courtrai)의 철도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 중 단 한대인, 로데스 무르하우스(Rhodes Moorhouse) 중위가 조종하는 비행기만이 목표에 도달하였다. 로데스 중위는 100 파운드짜리 폭탄을 정찰병이 앉는 자리에 실어 놓았었다. 그는 폭탄을 철로 신호기 위에 떨어뜨렸고, 잠시 동안이었지만 독일군 보병의 수송을 지연시켰다. 그 후, 연료를 아끼기 위해 저공 비행을 하며 주위를 관찰하던 그는 독일군이 이프르(Ypres) 평원을 기습하기 위해 집합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었다. 독일군들은 로데스 무스하우스 중위에게 계속해서 총격을 가했고, 마침내 그의 왼쪽 손에 총알이 명중했다. 또 교회 종탑 위에서 쏘아대는 기관총 사격수의 총알에 넓적 다리와 배를 맞아, 어쩔 수 없이 기수를 기지쪽으로 돌려야만 했다. 가까운 아군 기지에 착륙해서 응급치료를 받은 그는 간신히 메르빌에 있는 기지까지 돌아가서 보고를 마친 후, 쓰러졌다. 그 다음 날, 그는 사망했고, 빅토리아 십자(Victoria Cross) 훈장을 받은 최초의 영국군 조종사가 되었다. 또 다른 빅토리아 십자 훈장을 받은 사람은 "공중전에서 승리한" 최초의 조종사인 레이노 호커(Lanoe Hawker) 중위였다. 독일군을 격추기키기에 노력했던 호커는 처음 그에게 배정되었던 2인승 비행기에 타기를 무척 싫어하였다. 때때로 호커는 그의 뒷자리에 탄 기관총 사격수의 머리 위로 직접 적기를 향해 권총을 쏘아대 그를 불안하게 하기도 했다. 1915년6월, 호커는 브리스톨(Bristol)기를 배정받게 되었다. 전쟁전에는 경주용으로 쓰이던 이 1인승 복엽기는 수평 비행시 최대 시속 100 마일까지 낼수 있었고, 하강시에는 날개의 손상없이 시속 120마일까지 낼수 있었다. 그 당시 영국 공군은 전향 기어(Deflector Gear, 사격시 프로펠러의 손상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호커는 그의 총보다 나은 무언가를 찾아야 했다. 호커와 정비공들은 총알이 프로펠러를 비껴 나갈수 있게, 언젠 왼쪽 옆에 루이스(Lewis) 기관총이 아래를 향하도록 장착했다. 이것은 호커가 적기의 오른쪽과 위에서만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7월25일 호커는 약1만 피트 상공에서 이프르(Ypres) 평원을 정찰하고 있었다. 땅거미가 질 즈음, 그는2인승 독일군기 한대를 발견하고 명중시켜 추락하게 만들었다. 아무도 그들의 운명에 대해 확신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그들은 운좋게도 땅위를 살짝 스치고 지나 안전하게 사라졌다. 약20분 정도가 지난 후 호커는 또 다른 비행기를 명중시켰다. 어둠이 깔리면서, 호커는 석양을 등지고 독일군 비행기를 향해 연속적인 사격을 했다. 곧 적기는 추락해 버렸다. 연합군의 공중에서 위위는 1915년3월에서8월까지 계속되었다. 여름의 막바지에 이르러, 독일군은 평범하지만 무서운 비밀무기를 가지고 있는 포커 아인데커(Fokker Eindecker)기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해서 "포커의 징벌(Fokker Scourge)"이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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