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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벨기에 항공전

대한인 2014. 2. 6. 05:10

들어가기에 앞서....

 
[지도] 초록색 지점이 아르덴느 삼림지대...  아르덴느 옆에 스당과 디낭도 보이는데 나중에 프랑스 항공전에서 다시 자세히 나옵니당. Holland가 어디지 하시는 분은 없으시겠죠? ^.^ 네덜란드입니당...
 
 
프랑스, 저지대 국가 항공전에 앞서  양측의 작전 계획을 간단히 알아보자(자세한 내용은 바로 다음 "프랑스 항공전"에 설명했고 여기서는 간략하게 맛만 보도록 합시당). 지도를 보면  알 수 있듯이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 대부분은 마지노선(Maginot line)에 의해 막혀 있고, 그 바로 위는 아르덴느 삼림지대(초록색 칠해진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땅으로 빽빽한 숲지대라 바퀴달린 물체가 지나다닐 수 없는 곳이라 여겨지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 지휘부에게....)라는 천혜의 장애물이 가로 놓여 있어, 이들 방어벽으로 둘러싸인 프랑스는 아늑함 마저 느꼈을지 모른다 . 프랑스군 수뇌부는 독일이 침공해 온다면, 틀림 없이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경유해 크게 반원을 그리며 북프랑스로 공격해 올 것이라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위 지도 1 번 화살표). 1차대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를 막기 위해 프랑스는 북부에 주력을 대거 배치하게 된다. 독일이 화살표 1로 공격해 올 것이니 프랑스는 화살표 2로 정면에서 막아내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독일은 파격적인 구상을 하고 있었다. 먼저 프랑스의 예상대로 화살표 1번 방향 즉 네덜란드와 벨기에를 기습 공격해, 프랑스로 하여금 자신의 예상이 적중했다고 오판하게 만들면서, 아무도 예상 못한 방향인 아르덴느 삼림지대를 뚫고, 주력 기갑부대를 집중시켜 프랑스를 단시간내 반으로 잘라 버린다는 구상...... (화살표 3)
 
이 말도 안될 것 같던 구상은 계획으로 옮겨졌고, 계획은 실행되고야 말았다.
 
 
 
 
개전의 전야

 
1930 년대 중반 히틀러가 집권하고 재무장을 선언했을때, 네덜란드는 정신이 버쩍 들기 시작했고, 낙후된 항공전력을 쇄신하려 애쓰기 시작했다. 외국의 뛰어난 항공기를 들여올 수도 있었으나, 자국의 포커 항공사에게 이 중책을 맡기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결과적으로 결코 현명한 판단은 아니었다. 즉 포커 항공사가 1차대전 당시 항공기 설계의 천재 안쏘니 포커의 활약으로 뛰어난 독일 전투기들을 생산해낸 바 있었으나, 이후 재정적 지원이 미흡해, 다른 항공강국의 제작사에 필적할 만한 기술적 진보가 이루어 지지 않았고, 특히 군용 항공기 기술에서는 그 날카롭던 면모를 잃어 버린지 오래였다.
 
여하튼 1938 년, 주력 전투기였던 포커 D-7을 이선으로 물러나게 하고 대신 포커 D-21과 포커 G-1 같은 저익 단엽 전투기를 최일선에 배치하는 등 자구책을 마련했지만, 이들 역시 독일의 Bf 109 에 비교하자면, 성능면에서 너무도 초라했다. 한마디로 이들 항공기는 포커사의 주력 생산품목이었던 복엽기를 단엽기화한 것에 불과한 기종들이었다. 주력 폭격기로는 포커 T-5, T-9 폭격기가 제 1선용으로 쓰였고, 이외에도 정찰기로 포커 C-5, C-10 이 주로 배치되었으며, 일부 더글라스 DB 8 A 기, 쿨호벤(Koolhoven) FK-51 기와 FK-52 기 등이 배치되었다.
 
비록 폭격기와 정찰기를 따로 구분하기는 했지만, 당시 네덜란드 폭격기들 중 제대로 된 폭탄창을 가지고 있던 것은 불과 몇 대에 지나지 않았다. 또 폭격의 정확도가 많이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나마 느린 항공기에 무거운 폭탄을 적재하면서 기동성은 아예 포기해야 했고, 결국 독일 요격기의 손쉬운 먹이감으로 전락할 운명이었다.  이런 질적인 열세 뿐 아니라 양적으로도 독일과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1940년 5월 개전 당시, 네덜란드가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군용기의 댓수는 고작 130 여대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에 비해 독일이 프랑스와 베네룩스 3 국 침공을 위해 배치한 루프트바페의 규모는 사상최대였다. 얼마전 폴란드 항공전이나, 노르웨이에 투입된 항공전력과는 비교도 안되는 대규모였다. 즉 히틀러는 동부와 북부 유럽 침공을 단행하면서도, 중유럽 거인 프랑스와의 일전을 위해 독일 공군의 주력은 조용한 포니워 기간부터 일찌감치 서부전선에 배치시키고 있었다. 당시 루프트바페는 크게 두개의 항공전대(Luftflotte)로 나뉘어, 제 3 항공전대는 주공인 A 집단군의 아르덴느 돌파를 공중엄호하기 위해 프랑스와 벨기에 접경에 자리를 잡았고, 제 2 항공전대는 B 집단군의 네덜란드, 벨기에 진격을 지원하기 위해 독일 북동부에 날개를 펼친 것이다(한 개의 항공전대당 항공기수는 1000 기를 훨씬 넘었다.).
 
 
 
개전 당시 네덜란드 항공전력

기종

댓수

Fokker G-1
Fokker D-21  
Douglas DB 8A-3N
Koolhoven Fk-51  
Fokker T-5
Fokker F-7b 3m
Fokker C-10
Fokker C-5
23 기
28 기
11기
16기
  9기  
  3기
12기
29기

 
 
 
 
[그림] 네덜란드 포커 항공사의 제일 기종 포커 D-21 전투기.... 일차대전 당시만해도 세계 최고의 독일 복엽 전투기를 만들어 내던 항공사지만 이후 여타 항공 강국의 전투기에 비해 그 날카로움이 무뎌져 버린 뒤였다.
 
 
 
 
[지도] 독일 B 집단군( 이중 제 9 기갑사단 9th panzer div)의 진격루트와 개전 초기 독일 공군의 작전을 잘 보여주는 지도. 독일 공수부대의 선점 목표는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었다. 파란원은 헤이그와 로테르담 근교의 비행장들 4곳, 붉은 원은 로테르담 남쪽의 마스강의 주요 교량 3군데....  밑에 보이는 초록색 원은 벨기에의 알베르트 운하(Albert canal) 근처의 에반 에말 요새(Eban emael)다. 이곳 역시 소수의 독일 공수대원들 속에 떨어지고 만다. 
 
 
 베네룩스 삼국 중, 벨기에와 룩셈부르크의 경우는 프랑스와 접경을 맞대고 있지만, 네덜란드는 독일과 가장 긴 국경선을 접하고 있을 뿐 아니라, 프랑스와는 벨기에를 사이에 두고 있어, 자연히 독일의 맹공에 첫번째로 노출되는 형국이었다. 즉 프랑스의 구원의 손길 보다는 독일의 주먹에 더 가까운 위태로운 약소국이었다. 그러나 이런 네덜란드도 믿는 구석이 있었다. 저지대 국가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듯, 네덜란드는 해수면보다 낮은 지역이 많은 곳으로 도심을 가르는 무수한 강과 운하가 거미줄 처럼 연결된 물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닌 곳이다. 이런 지리적 특성은 전쟁에서 여차하면, 뚝을 터뜨리고 교량을 파괴해, 적의 진격을 사전에 막아 낼 수 있고, 시간을 벌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실제로 역사적으로도 이런 수공을 이용해 적을 방어해낸 경험을 갖고 있었다.
 
 
[사진] 네덜란드에 낙하한 독일 공수대원의 모습... 이들은 적진 속에서 마스강의 교량 3곳을 끝까지 지켜낸다.
 
 
공격자의 입장인 독일 역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독일은 저지대 국가들의 신속한 점령을 위해 B집단군의 주력 제 9 기갑사단을 네덜란드의 주요 거점 도시 로테르담과 헤이그의 남쪽 정면에 신속히 진격시켜야만 했다. 이 두 도시는 뮤즈강(마스강)과 라인강이 대서양으로 접어드는 하구 삼각주 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3 개의 교량이 도시 정면에 차례차례 놓여져 있었다. 자칫 독일이 기습의 장점을 잃어 버리게 된다면, 네덜란드군이 미리 다리를 파괴해 버릴 것이고, 독일 기갑 전력의 신속한 진격은 생각할 수도 없게 되며 전투는 장기화 될 공산이 컸다.
 
즉 무엇보다 중요한 이슈로 떠오른 것이 바로 이 마스강의 주요 교량들의 확보였다. 그리고 이 임무는 스튜덴트 장군 휘하의 독일 공군 소속 공수부대원들에게 떨어졌다. 스튜덴트 장군은 루프트바페 지휘부와 치밀한 작전 계획에 들어가, 공수부대의 공격 목표를 크게 두가지로 정했다. (1) 첫번째, 개전과 동시에 제공권을 장악하기 위해, 네덜란드의 4군데 주요 비행 기지인 발하벤(Waalhaven), 이펜부르그(Ypenburg), 발켄부르그(Valkenburg) 오켄부르그(Ockenburg) 비행장에 공수부대원을 낙하시켜 신속히 점령하고 가능하다면 네덜란드 정부기관까지 장악한다. (2) 두번째, 독일 기갑전력이 로테르담을 향해 쾌속 진격할 수 있도록, 마스강 상공에서 공수부대를 낙하시켜 로테르담 남쪽 3개 교량을 확보한다.
 
 
 
 
플란더스 평원의 루프트바페

 
1940년 5월 10일 새벽..... 독일의 개전 첫 공격은 폭격기들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독일 제 4 폭격 항공단(KG4) 소속 He 111기 20 여대가 네덜란드의 국경을 우회해 해안선을 따라 북쪽으로 비행한 후, 헤이그와 로테르담 인근 이펜부르그 비행장과 발하벤 비행장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나 기습에 속수무책일 것이라던 독일의 예상과는 달리 네덜란드군의 대공포 사격은 매우 강력했고, 소수이지만 용감한 네덜란드 전투기들이 반격을 시도해 독일 폭격기들은 적잖은 피해를 보아야 했다.
 
첫 공습이 끝나자, Ju 52 수송기들이 대거 비행장 상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들은 초저공 초저속으로 스치듯 날아 다녔고, 공수대원들은 일시에 수송기 문을 박차고 창공으로 점프하기 시작했다. 하늘은 온통 눈이라도 오는 듯 하얀 낙하산으로 뒤덮혔다. 로테르담 남서쪽의 발하벤 비행장을 지키던 네덜란드 군들은 기관총 응사로 맹렬히 저항했으나, 곧바로 공수부대원에게 비행장을 점령당하고 말았다. 이후 증원병을 가득 실은 독일 수송기들이 발하벤 비행장에 안착하기 시작했다. 발하벤(Waalhaven) 비행장이 공수부대에 점령당한 직 후,  뒤늦게 네덜란드는 포커 전투기와 폭격기 뿐 아니라, 퇴물이 되어버린 복엽 정찰기까지 긁어 모아, 몇 시간 전만 해도 아군 기지였던 발하벤 비행장에 공습을 시도하는 웃지 못할 작전을 벌이기도 했다.
 
 
[사진] 독일 공수대원들이 급접 지원을 위해 저공 비행 중인 든든한 수투카기를 맞으며 환호하고 있다. 
 
 
한편 거의 같은 시각, 헤이그 인근의 비행장에서는 독일의 작전이 차질을 빚고 있었다 . 네덜란드군의 대공포 사격은 정확하고 매서워, 저속으로 날던 Ju 52 수십 대가 직격탄을 맞고 격추되어 버렸고, 또 비행장의 활주로가 항공기 잔해로 엉망이 되면서, 증원부대의 착륙이 불가능해 버린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수송기들은 비행장이 아닌 해안에 불시착해야만 했다.
 
당초 예상 낙하 지점과는 동떨어진 곳에, 그것도 여기 저기 흩어져 버린 공수부대들은 기습은 꿈도 못꾸고, 자신의 목숨 하나 살리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다. 헤이그 인근 2 개 비행장 점령은 이미 물 건너 가 버린 것이다. 하는 수 없이 독일 지휘부는 헤이그 인근에 낙하한 공수대원들에게 초기 목표를 포기하고, 모두 로테르담을 향해 남쪽으로 이동하도록 지시했다. 비록 목표로 한 4곳의 비행장을 다 점령하지는 못했으나, 발하벤 비행장 한 곳이라도 손에 넣음으로써 추가 병력의 공중 증파가 이미 가능해진 상태이고, 또 네덜란드의 항공세력은 공중에서 괴멸시킬 수 있으니 나머지 비행장의 의미는 이미 가치를 잃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이런 판단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역시 작전 성패에 가장 중요한 것은 로테르담 남단의 교량이었으니, 온힘을 로테르담 공략에 쏟아 넣기로 한 것이었다.
 
( 개전 당시 네덜란드는 20 mm 에서 75 mm 에 달하는 대공포 350 문 가량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들은 3 일 밤낮을 루프트바페의 공세를 저지키 위해 분전했다. 중요 도시와 항구에 집결해 있었는데, 속도가 느린 Ju 52 수송기의 편대를 주요 타켓으로 이틀만에 40 여대를 잡아내게 된다. )
 
비행장 점령이 시도되는 것과 거의 같은 시각, 도르드렉트(Dordrecht), 뫼르딕(Moerdijk) 교량 상공에 Ju 52 수송기들이 저공비행으로 그 모습을 드러냈고, 이내 공수부대원들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또 로테르담(Rotterdam) 교량에는 12기의 He 59기 수상기들 저속 비행으로 마스강에 직접 착륙하는 대담한 시도를 성공시켜, 공수대원들을 일시에 뿌려 놓았다. 수투카에 의한 공중 엄호를 받으며 이들 독일 공수대원들은 순식간에 3곳의 교향을 점령해 버렸다. 뒤늦게 나마 네덜란드가 만만찮은 반격을 시작해, 3개의 교량중 중간에 위치한 도르드렉트 교량의 경우, 네덜란드가 일시적으로 다시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독일 공수부대원들은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3 일 낮밤을 목숨을 걸고 공격과 방어를 지속하면서 끝내 3곳 모두에서 교량 파괴를 막아냈다. 5월 13일 드디어 독일 제 9 기갑 사단의 전차들이 독일 공수 대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이 3곳의 교량을 무사 통과해 드디어 로테르담 남쪽에 다다를 수 있었다. 혹자들은 네덜란드의 운명은 이 교량의 상실과 함께 끝났다고 볼 정도였고, 이런 놀라운 성과를 이루어낸 공수 부대는 독일의 자랑거리였다.
 
 
[지도] 루프트바페의 네덜란드 로테르담 폭격.... 그림에서 보듯 A 방향과 B 방향에서 각기 제 54 폭격 비행단의 폭격기 그룹이 로테르담 상공에 도달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남쪽의 B 폭격은 취소 명령을 받고 물러났으나, A 방향 폭격은 강행되어 로테르담을 쑥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만약 B 폭격 마저 행해졌다면....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비록 네덜란드 조종사들의 투혼이 조국의 상공에서 빛을 발했지만, 구시대 유물과도 같은 항공기를 가지고는 어떤 반격을 실마리도 이끌어 낼 수 없었다. 항공기의 절대적 성능차와 숫적인 열세를 극복하는 것은 예초부터 무리였으며, 네덜란드의 항공전력은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렇듯 초기에 괴멸되고만 네덜란드 항공전력의 부재는 또다른 비극을 만들어내고 만다. 독일 수뇌부는 프랑스에 비하면 작전 목표 축에도 들지 않는 대네덜란드전을 조기 종식하기 위해, 독일 지상군 주력을 적의 사정거리 밖 근교에서 대기시킨 가운데, 루프트바페에게 로테르담 공습을 부탁한 것이다.
 
그리고 끝까지 죽음을 각오하고 민관군이 혼연일체되어 총을 들었던 로테르담의 저항은 다시 한번 게르니카나 바르샤바의 뒤를 따르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5월 14일, 루프트바페 제 54 폭격 비행단 소속 He 111기 84 대에 의한 대규모 폭격이 로테르담시에 자행되었고, 1000 명의 사망자와 7000 명의 부상자가 속출하면서 비운의 도시 로테르담은 일순간에 죽음의 도시가 되어 버린 것이다. 하늘이 노출된 로테르담의 저항은 이젠 무의미했으며, 시민과 군인들은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었다. 5월 15일 네덜란드는 완전히 제3제국에게 무릅을 꿇고 만 것이다.
 
이날의 폭격에 대해  네덜란드 전투 조종사 밥 스토크는 이렇게 증언했다.
 
"우리 비행대의 동료 조종사 중 한명은 로테르담 출신이라, 힘겨운 분전에도 불구하고, 상부의 허가를 받고, 가족들을 보기 위해 로테르담으로 떠났었다. 몇시간 후 실의에 빠져 눈물 범벅이 된 그는 비행대로 다시 돌아왔다. 그곳에는 독일의 맹폭으로 허물어진 담벼락과 벽돌 몇장만이 그를 맞아 주었으며,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해 8 명의 어린 형제 자매가 독일의 무자비한 폭격에 목숨을 잃었다고 흐느꼈다. 단 4일에 불과했지만 우리 비행대원들이 모두 함께 울음을 떠뜨린 것은 이 순간이 처음이었으며, 이 모든 것은 우리비행대 전체에겐 슬픔을 넘어선 분노였다."  
 
 
(그런데 로테르담의 폭격에는 숨은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즉 5월 13일 네덜란드는 독일에 항복 협상단을 이미 보냈었다. 그런데 협상단이 오고 가는 데 시간이 소요되었고, 협상의 결과에 의해 5월 14일의 폭격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리고 협상이 거의 끝나가던 시점.... 이미 독일의 폭격기들은 이륙했고, 이중 폭격 취소 명령을 받은 B 폭격대는 물러났지만, A 폭격대에게는 명령이 뒤늦게 전달되는 바람에, 항복 의사를 밝힌 로테르담시에 어처구니 없이도 무수한 폭탄이 투하되고 만 것이다.)
 
단 4일간 벌어졌던 처절한 항공전에서 네덜란드 항공기 130 대중 94기가 파괴 격추되었고, 70 여명의 조종사와 지상요원이 전사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독일의 피해도 상당했다는 것이다. 즉 네덜란드 대공포와 소수 포커 D-21기 조종사들의 반격으로 개전 첫날 55 대의 Ju 52 수송기 대편대 중 37기를 격추시킨 것을 비롯해, 독일은 총 300 여대의 항공기를 잃었다. 비록 이중 대부분인 200 여대가 Ju 52 수송기였지만, 루프트바페는 뜻밖의 한방을 맞은 것이며, 이런 믿기 힘든 전과를 달성해낸 네덜란드의 조종사들과 지상요원들은 뛰어난 전사이자 용사로서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다. 그리고 적어도 2주간은 버텨줄 것으로 예상했던 프랑스와 영국 지휘부는 단 4일만에 나가 떨어진 네덜란드의 패망에 망연자실할 수 밖에 없었으나, 이것은 다음 단원에 소개될 아르덴느 돌파의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네덜란드 항공전에서의 루프트바페의 피해

aircraft

Loss

Ju-52
Ju-88
He-111
Ju-87 stuka
Me-110  
Bf-109
Hs-126
Hs-123
He-115
He-59  
Do-17  
220  
18
11
6
8
29  
6  
2
1
4
7

 
 
 
 
 

자유에 대한 열망,  대탈주.....

 
Fear holds you a prisoner.....
Hope sets you free..... 
 
[사진] 영화 대탈주의 포스터.... 스티브 맥퀸이 다시 잡혀와 독방에서 야구공으로 벽에 던져 받기 놀이를 하며 끝나던 마지막 장면이 아직도 생생한 명작.... 이 대탈주 영화는 독일 수용소 대규모 탈출을 시도했던 연합군 조종사들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그 주인공이 바로 네덜란드의 조종사 브람 반 데어 스토크였다.
 
  
이차대전 영화 중에 연합군 포로들을 주인공으로 다룬 것이 몇편있다. 그 중 가장 백미라면 역시 "대탈주"가 아닌가 싶다. 때마다 TV에서 자주 방영하는 영화이니 밀리터리 팬들이라면, 한번씩은 보았을 만도 하다. 그럼 그 대탈주의 소재가 되었던 이야기를 한번 해보자. 그 주인공은 네덜란드 조종사로서 1940년 루프트바페 침공에 맞서, 개전 첫날 격추를 달성한 브람 반 데어 스토크(바로 아래 그림의 주인공)다. 1915년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스토크는 스위스에서 의대에 입학해 의학도의 길을 걷던중, 1936년 네덜란드 공군에 자원입대해 전투 조종사 생활을 시작했었다
 
독일의 네덜란드 침공 첫날인 5월 10일, 네덜란드 포커 D-21 전투기 비행대의 브람 스토크(Bram van der Stok)는 12기의 포커기를 몰고 비행장 고공을 초계비행 중이었다.
 
그때 느닷없이 나타난 약 16기 가량의 Bf 109들이 자신의 비행장을 맹공하는 것을 목격했다. 독일기들은 스토크의 편대를 발견하지 못했고, 닥치는대로, 지상 목표물을 향해 저공 기총 사격을 시도 중이었다. 브람 스토크는 침착했고, 편대원들에게 일단 자신의 주위에 모여 때를 기다리라고 지시했다. 얼마후, Bf 109들의 장탄이 바닥을 드러낼 때 즈음, 스토크는 유유히 공격 명령을 하달했다. Bf 109들은 남은 탄환이 얼마 없는데다, 돌아갈 분량 정도의 연료 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불리한 전투에 빠지게 된 것이다. 비록 숫적으로는 16대 12였지만, 네덜란드의 포커기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새라 급강하 공격에 들어간 것이다.
 
편대장 스토크는 한대의 Bf 109의 꽁무니를 쫓아, 선회에 들어갔고, 왼쪽으로 급격한 선회전이 벌어졌다. 독일기가 아직 편차를 얻을 만큼 조준경에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이대로 몇초만 가면, 독일기를 잡아낼 수 있다. 이때 쫓기던 Bf 109 조종사는 치명적인 실수를 하고 만다. 선회에 불리함을 느끼고 모면키 위해 반대 방향으로 급격한 선회를 시도한 것이었다. 선회 방향을 바꾸느라 속도마저 쳐진데다, Bf 109의 장기 급강하 회피를 발휘할 만한 고도도 아니었다. 불운한 Bf 109의 동체가 스토크의 조중경을 일시에 가득 채웠고, 연이어 발사된 포커기의 사격에 검은 연기를 꼬리에 끌며, 엔진에서 기름이 유출되기 시작했다. 거리가 너무도 가까와 그 기름이 튀며, 스토크의 캐노피를 검게 물들일 정도였다. Bf 109는 곧바로 스핀에 빠져 격추되고 말았다. 얼마후 스토크는 비행장에 안착했고, 잠시후 내려 앉은 동료기가 자신의 애기 옆에 붙었다. 칵크핏의 윙맨이 자신의 엄지 손가락을 높이 쳐들었다. 둘 모두 적기 격추를 달성한 것이었다. 곧바로 애기에서 뛰어 내린 스토크는 임무 보고를 위해 비행장 지휘부로 들어섰는데, 그때 뒤늦게나마 라디오를 통해 다급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독일군이 전국경선을 넘어, 우리의 조국 네덜란드를 침략해왔다. 네덜란드는 오늘 새벽을 기해 독일과의 전면전 상태로 돌입했음을 전국민에게 알리는 바이다"
 
 
 
[사진] 네덜란드의 포커 D-21 전투기가 독일기를 격추하는 장면..
 
 
루프트바페와의 첫번째 교전직후, 불시착한 독일의 Bf 109 장교 조종사 한명이 스토크 일행 앞에 붙들려 왔다. 그 독일 조종사는 거만한 말투로 네덜란드가 루프트바페에 대항하는 것은 가치없는 일임을 역설했다. 그는 곧바로 포로 수용소로 후송되었지만, 독일 공군은 이미 개전과 동시에 작전에 승리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거드름을 피우는 독일 조종사를 포로 수용소로 보내버린 스토크도 훗날 독일의 포로가 될 운명이었으니, 우연의 일치라고나 할까?
 
 

 
조국 네덜란드가 단 5일만에 함락되고 말자, 스토크는 영국으로 건너가 스피트화이어 조종사로서 루프트바페와 계속 싸워나갔다. 제 91 전투 비행대, 제 41 전투 비행대에서 탁월한 조종사로서 기량을 펼쳤고, 총 6기의 독일 항공기 격추를 달성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중 프랑스 해안에서 독일 전투기와 접전 중 피격당해 독일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독일 공군 장교 앞에 끌려간 스토크는 "자네의 격추 전과는 얼마나 되나?"하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 스토크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나는 지금까지 독일기 6기를 격추시켰읍니다"라고 당당히 말했다. 그러자 독일 공군 장교의 웃음 섞어 던진 말은 뜻밖이었다. "6기? 신참이군 그래..." 아시다시피 연합군 조종사 중 6기 격추 정도면, 어디든지 명함을 내고도 남을 기록이다. 그것도 대전 초반이 당시라면 더더욱.... 그런데 이런 기록은 독일에서 에이스를 뜻하는 Expert축에도 끼지 못하는 기록이었으니...(참고로 독일에서 에이스, 즉 이스퍼트란 10기 이상의 격추자에게 쓰이던 말이다)
 
 
[사진] 독일 Stalag Luft III 수용소의 스케치.... 연합군 조종사 포로들은 3개의 땅굴을 이용해 저 철조망 아래를 통과해 자유의 포복을 시작했었다. 
 
 
독일의 포로 수용소 (스토크가 포로생활을 하던 곳은 Stalag Luft III 수용소로, 베를린 남부 100 마일 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Stalag란 독일 수용소를, Luft란 공군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이것은 "연합군 공군 포로 독일 수용소"를 말한다. Stalag Luft는 제 1호(I)부터 제 6호(IV)까지 있었는데, 이중 스토크가 수용된 제 3호(III) 수용소가 가장 유명했다. 물론 끈질긴 탈출시도로....) 에 갇힌 스토크는 끊임없이 탈출을 시도했다.
 
두번에 걸친 시도는 번번히 실패로 돌아갔고, 마지막으로 1944년 초, 대규모 탈출을 감행케 된다. 약 220 명의 동료 연합군 포로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땅굴을 파, 이날을 준비했는데, 각기 톰(Tom), 딕(Dick), 해리(Harry)라는 은어로 3개의 긴 땅굴이 준비되었다. 준비 기간 중 땅굴 톰은 독일군 간수들에게 발각되었고, 땅굴 딕은 장애물을 만나 굴착을 포기해야 했고, 마지막 남은 것은 단 하나 땅굴 해리(이 땅굴은 지하 깊이 8m 지점에서 시작해 그 길이만도 약 100m에 달했다고 한다)....
 
드디어 1944년 3월 24일 밤을 기해, 이들 220 명의 포로들은 조용히 땅굴을 기어 자유를 위한 첫 포복을 시작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날 베를린에대한 대대적인 연합공군의 폭격으로 도중에 땅굴이 무너져 버렸고, 단 75명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스토크는 필사의 탈출로 또 중간에 독일 민간인들의 도움으로 프랑스를 거쳐, 10000 프랑의 거금을 들여 안내자를 구해 스페인으로 빠져 나올 수 있었다. 도중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도움을 받았으며, 안내자가 독일군에게 사살되는 위기도 있었지만, 다시 영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날 스토크를 포함한 단 3명만이 연합군의 진영으로 살아 돌아왔고, 나머지 72명 중 대부분인 50여명은 히틀러의 엄명에 의해, 체포 도중 사살되고 말았고, 나머지10 여명은 수용소에 재수용되었다. 스토크는 영국에서 네덜란드인으로 구성된 제 322 전투 비행대장을 역임했고, 전후에는 다시 공부를 시작해 만학도로서 의사 면허를 따냈다. 1946년 네덜란드 공군의 재건을 위해 힘썼고, 이후 미국으로 이민해 1992년 하와이에서 77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이 연합군 공군 포로 수용소 탈출 사건은 항공전사 종반에 따로 소개되어 있다.

 
 
 
 
 
또 다른 독수리들의 강습   -에반 에말 (Eben-Emael) 요새-

 
전술한 바와 같이 네덜란드전 승패의 갈림은 첫날 독일 공수부대원들의 주요 거점 확보로 이미 뚜렷해졌다. 그런데 동시에 벌어진 벨기에전에서도 역시 이들의 수훈이 독일의 쾌속 진격을 가능케하는 첫 단추가 된다. 그럼 벨기에의 작은 마지노선이라는 에반 에말 요새를 삽시간에 점령한 독일 공수부대원들의 또다른 활약상을 알아보자.
 
 
 
 
 Ju 87 수투카기에 케이블로 연결되어 비행하고 있는 DFS 230 글라이더들.... 실제로 벨기에 에반에말 요새 점령을 위해 이 글라이더들이 Ju 52 수송기에 연결되어 이런 위험천만한 비행을 했다....
 
 
네덜란드의 공격과 같은 시기에 벨기에에대한 대대적인 공격이 이루어졌다. 벨기에 역시 중유럽의 양대국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위치해 있어, 이 두 국가 사이에 분쟁이 생길 때면 언제나 강력한 대군이 휩쓸고 지나가는 첫번째 진입로가 되어 왔다. 앞 단원에서 약간 이야기가 나왔지만, 19세기 중엽, 프러시아가 프랑스를 함락할 때도 어김없이 벨기에는 독일의 군화발에 짓밟혔고, 이 전쟁이 끝나자 벨기에는 참다 못해 독일과의 접경 평원에 요새를 건설하기로 결심하게 된다. 10 여개의 요새를 하나의 고리로 묶어 놓은 대규모 방어선이 건설되었는데, 이중 작은 마을 에반 에말에 위치한 요새가 지리적으로 가장 요소에 배치된 핵이었다.
 
그러나 1910 년대 초, 일차대전을 격으면서 독일의 42 cm 대구경 포화 앞에 파괴되는 신세가 되고 만다. 얼마후 일차대전이 독일의 패망으로 끝나자, 벨기에는 이번에는 당시의 기술을 한데 모아 더욱 강력한 초현대식 요새를 짓기 시작했다. 이때가 1932 년..... 1200 명 수용이 가능한 이 대규모 요새는 그 길이만도 800 - 900 m에 달했고 무수한 지하통로와 120 mm 대전차포 2 문, 75 mm 포 18 문을 장비했으며, 그외에도 17 문에 달하는 대구경포와 무수한 기관총좌, 60 mm 대공포, 써치라이트를 보유한 일명 "작은 마지노선"으로 1935년 새롭게 태어난 것이다. 에반에말은 위치상 뮤즈강과 알베르트 운하를 방어해내는 최전선에 우뚝 선 것이다.
 
  
[사진] 에반 에말 요새의 주요 장벽.... 몇 개의 주요새가 이런 장벽에 의해 연결되고 그 위가 거대한 지붕으로 덮힌 구조를 하고 있었다. 멀리서 다가오는 적의 기갑전력에 강한 면을 보이는 이런 요새는 바로 하늘에서 떨어지는 공수대원들의 근접 교전에는 취약함을 드러냈다.
 
 
독일의 입장에서 보면, 이곳을 함락한 연후에야 북프랑스로 쇄도해 나갈 수 있어, 진격의 첫번째 걸림돌이 되었고, 벨기에 입장에서 보자면, 이곳을 방어해 시간을 끌게 되면, 그 사이에 프랑스와 영국의 대군이 달려와 독일군을 물리쳐 줄 것이니, 이 요새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으며,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히틀러를 비롯한 군수뇌부는 에반 에말 요새의 전략적 중요성을 미리 알고 있어, 요새함락을 위해 고심했고, 드디어 당시로서는 매우 획기적인 공략법을 생각해냈다. 즉 노르웨이의 기지를 조기 점령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바 있는 "공수부대"를 기습적으로 투하하는 방안..... 이에 따라 공수부대원들은 치밀한 작전 계획과 훈련에 들어갔다. 재밌는 사실은 당시 벨기에가 자신들의 요새를 자랑이라도 하듯, 발행한 "에반 에말 요새" 기념 우표가 독일의 계획에 일조를 하게 된다. 이 우표는 요새의 측면, 정면, 상면 등 멋진 각도에서 잡은 여러장에 달하는 기념 셋트였고, 독일은 이것을 근거로 요새의 스케일 모델을 만들고, 또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의 구형 요새를 이용해, 실전 훈련을 쌓아가게 된다.
 
 
 

우데트의 또다른 안목   -  글라이더 DFS 230 -

 
베르사이유 조약의 사슬에 묶여 있던 당시, 독일은 돌파구 마련을 위해 주로 엔진을 장착하지 않은 글라이더에 많은 관심을 보였었다. 합법적인 틀안에서 항공기 디자인 연구를 지속하고자 했던 일편으로.... 1930 년대초 몇몇 독일 항공기 제작사에서 고고도 기상관측용 글라이더들이 제작되었는데, 1933 년 부터 "독일 글라이더 연구소"(DFS)가 이들을 통합 수용함으로써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기 시작했다. 일차대전 전투기 조종사 출신의 에른스트 우데트는 당시 루프트바페에 아직 영입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민간인 신분으로서 훗날 루프트바페의 날개가 될 항공기 물색작업을  개인적으로 해나가고 있었다. 그는 이 시기 알게된 미국산 헬다이버기를 모체로 수투카 개발에 전력을 쏟은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다.
 
 
 
 
비슷한 과정으로 이들 글라이더 역시 우데트의 눈을 번쩍 뜨게 만들었다. 우데트는 글라이더의 수송능력과 군사적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았으며, 자신의 일차대전 전우였으며 루프트바페의 일원이었던 리터 폰 그라임(Ritter von Greim)에게 글라이더의 효용성을 피력했고, 얼마후 DFS 230 글라이더의 원형기가 설계에 들어 가기에 이른다. 이차대전 초기 공격형 글라이더의 명성은 이미 이시기에 시작된 것이다. 드디어 1937 년, 완전무장한 공수대원 10 명이 탑승가능한 DFS 230 글라이더가 본격적인 생산체제로 돌입하게 되며, 훗날 이차대전 발발과 함께 시작될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의 항공전에서 혁혁한 전과를 이루어 내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에반 에말 기습은 극비였다. 훈련을 받고 있는 부대원들조차도 그들의 목표가 어디인지 몰랐고, 훈련에서의 땀 한방울이 실전에서의 피 한방울이다 신념으로 묵묵히 훈련에 임했다. 일예로 대원 중 두명이 부주의하게 극비 사항을 누출했다는 죄목으로 사형이 선고되기도 했으니 독일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알 수 있다.(이들은 구금되었다가, 에반 에말이 점령된 후, 풀려났다고 한다. 아마도, 독일 지휘부가 이 작전의 중요성을 전대원들에게 일깨우기 위한 한 책략이 아니었나 싶다)
 
 
[지도] 에반에말 요새 주위 지도... 노란 원이 에반 에말 요새를 나타내고, 요새의 동쪽으로는 남북으로 알베르트 운하가 놓여 있고, 요새 서쪽에는 마스강이 흐르고 있는 천혜의 요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독일 공수대원들의 우선 목표는 이 강에 놓인 3개의 다리와 또 하나.... 바로 에반에말이었다.....
 
 
작전 시작일은 1940 년 5월 10일, 프랑스 침공 계획과 동시에, 엄밀히 말해 그보다 몇시간 앞서 단행되기로 일정이 잡혔다. 이에 따라 하루전인 5월 9일 오후, 거의 외부와 차단되어 생활하던 공수대원들이 독일의 비행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총 60 기의 Ju 52 수송기와 42 기의 글라이더가 동원되었는데, 대원들을 실은 글라이더는 케이블 선에의해 수송기 후미에 매달려 비행하다가 벨기에 국경선 상공에서 수송기에서 분리되어 활공하며, 에반 에발 요새와 지상군 진격의 교두보가 될 뮤즈강과 알베르트 운하위의 교량 부근에 착륙하기로 되었다.
 
낙하산 부대는 총 4개의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알베르트 운하를 가로지르는 3개의 교량 즉, (1) 앤트워프시로 나아가는 교두보, 펠트베젤트 교량(Veldvezelt bridge) , (2) 부루셀로의 연결점 프로엔호벤 교량(Vroenhoven bridge), (3) 리에주(Liege)로 나아가는 시작점 칸나 교량(Kannes bridge)의 선점을 위해 총 300 명의 대원이, (4) 또 가장 중요한 에반 에말 요새를 탈취하기 위해 2 명의 장교를 비롯해 85 명에 달하는 공수대원이 참가했다.(글라이더 42기중 에반 에말을 목표로 한것은 11기였다)  
 
 
[사진] 에반 에말 요새 점령을 위해 85 명의 공수대원을 이끌고 끝내 임무를 성공시킨 루돌프 비트찌히 (Rudolf Witzig) 중위의 모습.....
 
 
드디어 5월 10일 새벽 4시 30분.... DFS 230 글라이더 42 기는 Ju 52 수송기에 매달려 일제히 비행장에서 이륙했고, JG 27 소속의 Bf 109기들이 이들을 호위하며 뒤따랐다. 그런데 얼마후 2대의 글라이더에 문제가 발생했다. 한대는 연결 케이블이 끊어지면서, 독일땅에 불시착했고, 다른 한대는 케이블 분리 시간을 잘못 맞추어, 예정보다 훨씬 먼저 글라이더를 분리시켜 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 두번째 글라이더는 작전상 중요도가 높아, 대원들은 불시착한 주위의 초목을 빠른 시간에 제거하고, 임시 활주로를 만들어 Ju 52기를 착륙시키고 케이블을 연결해 다시 이륙하는 진풍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어쨋든, 글라이더들은 벨기에 접경 2000 m 상공에서 연결 케이블을 풀고, 자유 활강하며, 고요히 에반 에말을 향해 날아갔다. 드디어 새벽 5시 24분... 9 기의 글라이더가  요새의 상면에 안착했고, 일시에 공격대형을 갖추고 쏟아진 공수부대원들은 단 10분만에 요새의 주요 포탑  9 문을 점령했고, 내부와 통하는 환기구를 통해 폭약을 투척하며, 화염 방사기로 벨기에 수비군을 무력화에 나섰다. 게다가 곧이어 날아온 수투카 급강하 폭격기들이 벨기에 수비대의 정신을 빼놓는 사이 요새의 통로가 열렸고, 공수부대원들은 내부로 쇄도해 들어갔다. 원래 원거리의 적에게 일격을 가하기 위해 설계된 이 거대한 요새는 근접 백병전에 무력하게 쓰러지고 만것이다. 사투는 다음날까지 계속되었는데, 하루가 지체된 것은 서로의 총격전이나, 벨기에 군의 저항때문이 아니라, 강력한 내부로의 진입로를 뚫는 시간에 불과했고, 드디어 요새 수비대는 5월 11일 정오를 기해 전원 항복하고 만다.
 
이날 요새에 침투한 독일 공수부대원 중 전사자는 단  6 명, 부상자 20 명이었고, 벨기에 수비대의 전사자는 23 명, 부상자는 60 명이었으며, 나머지 1000 명의 수비대는 아주 건강하고 느름한 모습으로 두손들고 항복한 것이다. 그리고 이미 작전의 시작과 함께, 진격의 교두보 2개의 교량이 독일 공수부대의 수중에 떨어진 상태였다. 단 하나 칸나의 다리만이 벨기에군의 저항으로 미리 파괴된 상태였으니, 이날 이틀에 걸친 독일 공수부대의 활약은 또 하나의 대대적인 개가였다. 벨기에의 저항은 에반 에말의 함락과 함께 끝을 본 것이나 진배 없었다. 그리고 독일 공군의 공식 주간지 독수리 (Der Adler) 5월호에는 이들 공수부대원들의 위용찬 모습이 전면을 장식할 정도로 제 3 제국 최일의 엘리트 부대로 각광을 받기에 이른다.
 
 
 
 

오스테어캄프의 돌격 비행단 JG 51

 
[사진] 오스테어캄프.... 1 차대전 독일의 32 격추 에이스.. 2차 대전에도 참전해 직접 전투기를 몰았다.... 대단한 노익장이다. 
 
 
어떤 집단이든, 그 우두머리가 어떤 성향을 보이느냐에 따라, 최말단 대원들의 행동마저도 180도 다른 모습을 보일 수 있다. 이것은 전투 비행대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프랑스 침공 당시 JG 51 비행단의 단장은 테오 오스테어캄프(Theo Osterkamp)였는데 1차대전 당시 32기의 격추를 달성한 블루맥스의 에이스였다.
 
48 세라는 나이는 조종사 특히 전투기 조종사로서는 최고령에 들었지만, 그의 노익장은 식을 줄 몰랐고, 나이에 걸맞지 않는 불굴의 투지로 뭉친 전사였다. 적 전투기와의 공중전을 즐기는 (?) 그의 성향은 한마디로 "무조건 돌격 앞으로" 스타일의 지휘관이기도 해, 부하 조종사들도 그의 뜻을 따라, 못말리는 전사들이 되어갔다.
 
일예로 포니워 기간 중 오스테어캄프의 신참 풋내기 조종사들이 프랑스의 쌍발 엔진 정찰기를 격추했다며 의기양양하게 기지로 돌아왔는데, 알고보니 그들이 격추한 것은 독일의 Fw 58 기였고, 게다가 그곳엔 루프트바페 고위 간부가 전선 시찰을 위해 탑승 중이었다. 어어 없게도 이들은 피아식별도 제대로 안한 채 달려드는 아군의 불의의 기습을 받고 전사하고 만것이다. 이 외에도 오스테어캄프의 부하들이 저지른 사고는 많았다. 예를 들어 대원 하나가 시키지도 않은 초저공비행 중에 학교 인근에 추락해 몇명의 어린 학생들이 사망하는 참사도 일어 났다.
 
이런 몇번의 사고 후, 루프트바페 내에는
 
"오스테어캄프는 야망으로 똘똘 뭉친 위인이다. 그는 비행단 격추 스코어를 올리기 위해, 자기 머리 위에 떠다니는 것이면 무엇이든 격추한다"
 
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그러나 이 고령의 지휘관이자 조종사는 개의치 않았고, 프랑스 침공이 시작되자, 직접 Bf 109를 몰고 최일선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개전 이틀째인 5월 11일, 드디어 자신의 이차대전 첫격추이며, 일차대전까지 합치면 33 번째 격추를 달성한다. 격추 제물은 네덜란드의 쌍발 전투기 포커 G-1이었다. 오스테어캄프는 나중에 이렇게 회상했다.
 
 
[사진] 오스테어캄프가 일차대전 당시 자신의 복엽 전투기 앞에서 포즈를 취한 장면....  
 
 
"적기는 지상 바로 위로 초저공 비행 중이었다. 나는 급강하한 속력을 이용해 적기의 6시를 조용히 따라 갔다. 그는 회피기동을 하지 않았는데, 아마도 나를 발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거리 200 m .... 그러나 나는 사격을 서두르지 않았다. 이대로 속력이면 적기는 점점 가까와 올 것이니...
 
이제 적기의 실루엣이 색깔을 입기 시작했고, 쌍발 전투기의 모습과 네덜란드 마크가 뚜렷히 눈에 들어왔다. 조준경을 가득채운 적기 후면을 향해 기관포와 기관총 모두를 발사했다. 단 몇초? 갑자기 적기는 후미가 확 들리더니만, 그대로 지상에 충돌하며 격추되었다. 그것은 마치 혜성이 떨어지는 모습이었다.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적기의 잔해 위로 한바퀴 선회한 후 기지로 돌아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1차대전 당시 내 복엽 전투기는 68발의 기관총을 얻어 맞고도 기지로 무사히 돌아온 적이있다. 그리고 주익에 숭숭 뚫린 탄흔 구멍을 캔버스천으로 떼워 넣던 기억도.... 그런데 오늘 적기는 너무도 어이없이 격추되었다. 그렇다. 우리가 사용하는 이 기관포는 정말 살인 무기임에 틀림없다."
 
이일로 오스테어캄프는 화려한 블루맥스 위에 어찌보면 초라한 제 2급 철십자 훈장을 얹게 된 것이다. 또 그는 몇일 후 덩커크 철수 저지 작전에도 참가해 허리케인 3기, 스피트화이어 1기를 포함해 5기의 격추를 더 추가하게 되니, 그 노익장 정말 알아줘야 겠다. 오스테어캄프는 대전말 장군의 반열에까지 올랐고 1944년 12월 퇴역했다. 그리고 1975년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는데, 그의 전사로서의 모습은 아직도 독일 공군 조종사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