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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II 노르웨이 항공전

대한인 2014. 2. 6. 05:12
" 독일에도 해군이 있다 !!"
 
노르웨이 공격을 앞두고, 독일 해군은 이렇게 외치며, 영국을 깜짝 놀라게 해주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아니 진정 이렇게 되기만을 바랬을 것이다. 그러나 피요르드의 나라 노르웨이가 독일의 손아귀에 떨어졌을 때, 독일해군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부족함 위해 만신창이 된 자신의 몸을 더하게 되었다.  아.. 잘나가는 육군과 공군의 그늘에 싸여 늘 넘버 쓰리에 머물러야했던 불쌍한(?) 독일 해군이여..... - 홈지기 -
 
그러나 그들은 용감했다.
 
 
 
피요르드 (Fjord) 의 나라

 
[사진] 노르웨이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서쪽 해안을 따라 길게 남북으로 쭉 펼쳐진, 그 생김새가 마치 남미의 칠레를 연상시키는 설산과 피요르드의 나라다.
 
피요르드란 지리시간에 배웠듯, 빙하기를 몇번 거치면서, 얼어붙은 산더미 만한 얼음덩이들이 간빙기가 되면서, 일부 녹아내려 바다로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면서, 주위 땅덩이를 깊이 패어 놓은 독특한 지형을 이르는 말이다. 후에 이곳에 바닷물이 들어와 바다지만, 마치 호수와 같은 고요한 모습을 하고 있었고, 이곳 계곡들은 구불구불 내륙으로 꽤 깊숙히 연결되어 있다.
 
이런 피요드르 중 수심이 깊은 곳은 1000 m에 달하고, 양측의 계곡 중 높은 것은 2000 m에 달한다고 하니, 빙산이 패어 놓은 깊이는 3000 m에 육박하는 것으로, 실로 장대한 자연의 모습이라 아니 할 수 없다.
 
 
히틀러가 단 4주만에 폴란드를 점령해버린 것이 1939년 9월.... 이후 노르웨이 침공이 대대적으로 단행되는 1940년 4월초까지 약 6개월의 기간은 이렇다할 양측간의 대규모 접전은 없었다. 즉 영국과 프랑스가 공히 독일에 전쟁을 포고했지만, 서부전선의 지상은 너무도 조용했다. 이시기를 흔히 가짜 전쟁(Phony war 포니워)이라 부르는 시기로 어떤 이들은 여기서 독일의 공세가 그쳐버리고, 전쟁이 종결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성급한 예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야욕은 폴란드에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는 질 좋은 철광석의 보고로 향후 전쟁 수행에 있어 더없이 귀중한 자원의 창고이며, 노르웨이 북단의 나르빅 항은 이런 철광석을 운송할 수 있는 최적의 요충이었다.(겨울에는 보스니아만이 얼어붙기 때문에 발트해로 운송이 어려워, 대부분 나르빅항을 통해 운반되었다) 또 무엇보다도 입지가 약한 독일 해군의 숨통을 열어 줄 천혜의 요충이기도 했다.
 
즉 덴마크가 자리잡고 있는 유틸란트 반도는 독일 본토의 정수리에 해당하는 북쪽에 툭 튀어나온 땅덩어리로 (지도 참조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세요), 독일 입장에서 보자면 영국을 견제하고, 또 취약한 독일 해군에게는 유틸란트 반도와 스칸디나비아 사이에 안전한 호수와도 같은 거대한 보금자리를 마련케 되고 또 대서양으로 나갈 수 있는 관문역할을 할 수 있다. 만약 이 두 국가를 차지한다면, 이곳에 강력한 루프트바페의 대공방어망을 구축해 해공 합동 작전으로 영국 해군과의 한판대결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언젠가는 결전을 불사할 수 밖에 없는 영국의 브리튼섬에 대한 공중 측면 공격이 가능해진다. 드디어 1940년 2월말, 히틀러는 덴마크, 노르웨이를 집어 삼키기 위한 계획에 들어갔다.
 
 
 

바이킹의 나라 노르웨이

 
노르웨이를 비롯해 스칸디나비아 전역에는 게르만족의 원류의 땅이었고, 고대의 바이킹들의 전함들이 피요르드 절벽 사이의 호수와 같은 바다를 가로질러, 유럽대륙에 진출했던 근원지이기도 했다.
 
이들 바이킹은 북방게르만족에 속한 사람들로, 9 세기에서 11 세기에 걸쳐 농경지가 부족해, 농사일은 여자들에게 맡기고, 80 - 90 명씩 떼거지로 그 유명한 뱃머리가 길며 높은 용머리 장식의 바이킹선에 몸을 싣고 유럽의 해안지대를 침입해, 약탈을 자행하고 다녔다. 프랑스와 영국은 골머리를 썩혀야했고, 하는 수 없이 땅 일부를 떼주어 바이킹들은 노르만 공군을 세우고 후에는 기독교로 개종하기에 이른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은 체격이 매우 크며, 도끼, 칼, 단도등으로 무장하고 그 잔인함과 공격성이 대단했다고 한다. 어쨌든 게르만 우월주의를 표방하던 당시 독일의 입장에서 보자면, 노르웨이는 자신들의 혈통적 고향에 해당하는 곳이기도 했으며, 독일인들이 전형적인 게르만족의 모습으로 상징하던 훤출한 키의 노랗다 못해 백색에 가까운 생머리에 깊이 패인 눈과 반듯한 앞이마의 거인.... 이것은 전형적인 스칸디나비인들의 모습이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독일과 노르웨이는 동일한 게르만족 신화를 가지고 있었고, 지그프리트로 대표되는 영웅들의 모습도 서로 나누는 동일 정서였다.  일설에 의하면 독일 제 3제국은 독일 본토인과 스칸디나비아인의 결혼을 극히 장려했다고 하니 황당함을 금할 수 없다.

 
 
 
 
노르웨이 대해전의 시작     

 
[사진] Ju 52 수송기에서 낙하산을 펼치며 하늘을 수놓은 독일 팔쉬름예거(Fallschrimjager)의 모습... 노르웨이를 시작으로 1940년 중반 서유럽 석권의 결정적 공헌을 하게된다. 노르웨이의 솔라, 포르네부 비행장, 훗날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에반 에말에서 벌어지는 그들의 무용담들.....
 
 
독일에 의한 노르웨이와 덴마크의 침공은 1940년 4월 9일 시작되었다. 작전명 베저 연습(Weserubung).....    그런데 당시 영국도 노르웨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어, 강력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우선적으로 노르웨이 해안에 기뢰를 설치하고, 이후 스칸디나비아 반도 서쪽 해안도시들을 강제로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우게 된다. 영국의 작전 개시일은 독일의 그것과 거의 비슷한 시기로 잡히는 우연의 일치를 보였으나 양측 모두 상대방이 자신과 똑같은 작전을 세웠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당시 해군장관이었던 윈스턴 처칠은 노르웨이가 계속 중립국으로 남아 있게 되면, 독일에 경제적 협력을 지속할 우려가 있고, 지리적으로도 독일에 가까와 독일의 군사적 완충지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판단하에 이런 엄청난 계획을 수립한 것이다. 당시 열강이라는 그리고 연합국이라는 나라들 조차 전세계에 식민지를 건설해 수탈을 자행하였고, 또 이제는 같은 유럽권의 국가에게 조차 이런 식의 태도를 보인 것이다. 일,이차대전의 발발 자체의 배경에는 이런 식민지 쟁탈전이 깔려 있었고, 추축 연합국 중 강대국이라 할만한 국가들 중 그 예외는 없었던 것이니, 한마디로 그놈이 그놈인 셈이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지켜보자면, 역시 한 국가가 존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국의 힘이 전제되어야함을 다시금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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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 onclick="namosw_goto('backward')" value="읽던 곳으로 돌아가기" type=button> (덴마크 지도) </FORM>
그런데 동시에 독일의 침공을 받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입장은 180도 달랐다.  그도 그럴 것이 1940년 당시 덴마크의 전력은 독일에 비교하자면 새발에 피라 할 정도로 보잘 것 없었다. 지상군 약 만명, 전차 전무, 2척의 해안 방어 선박, 17척의 어뢰정, 12척의 소형 잠수함이 육해군의 전부였으며, 공군 역시 약 50기에서 100기 규모의 하늘에 뜰지 의심이 가는 구식 항공기 뿐이었다.
 
작전 개시일인 4월 9일 오전 5시, 독일 낙하산 부대원들은 몇몇 덴마크의 요새와 알보그 (Aalborg 옆지도 참조) 비행장에 뿌려졌고, 별다른 저항 없이 점령해 버렸다. 한시간 후인 오전 6시에는 독일 수송선이 덴마크 코펜하겐항에 진입하여 보병 사단을 상륙시켰다. 코펜하겐의 왕궁 경비병들과의 접전이 있었지만, 역시 미미했고, 작전 시작 5 시간만이 4월 9일 오전 9시 20분, 덴마크 정부는 독일공군의 코펜하겐 폭격 위협에 겁을 집어 먹고는 항복하고 만다. 그들이 보유한 미미한 군대로 제3제국의 강군을 막는다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라 할 수 있으니, 한편으론 예상된 결과였다고 볼 수 있다.
 
항복한 덴마크 땅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로 곧장 날아갈 수 있는 루프트바페의 최전방 기지가 되었음은 자명했다. 덴마크 침공과 동시에 이루어진 노르웨이 침공에 참여한 루프트바페는 제 10 항공군단(X Fliegerkorps)으로 500 여기의 Ju 52 3발 엔진 수송기가 병력과 군수품을 실어 날랐고, 주로 He 111이 주축을 이룬 280 기에 달하는 폭격기와 40 여기의 Ju 87 수투카 급강하 폭격기, 마지막으로 70기의 Bf 110 C 쌍발 전투기와 30 기의 Bf 109E 전투기로 구성되어 있었다. 수치로 보면 알 수 있듯  Bf 109가 극히 소수만이 참여했는데, 이것은 Bf 109의 항속거리가 이번 작전에 대거 참여하기엔 너무도 짧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훗날 영국의 항공전 참패의 주요 요인이 되는데, 이것 역시 항공전사가 진행되면서 자세히 설명키로 하겠다. 그외 가장 주목 받는 루프트바페의 중책을 맡은 것이 일명 강하엽병(Fallschirmjager)이라 알려진 낙하산 부대였다. 이들은 노르웨이 중요 비행장에 흩뿌려져 수송기 착륙을 위해 활주로를 확보하는 중책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 노르웨이 침공에서 루프트바페의 초반 역할은 주로 기습 낙하에 의한 요충 점령과 수송임무였다. 루프트바페는 몇년전 스페인 내전 참전 당시 수만에 달하는 스페인 반군의 병력을 지브로올터 해협을 건너 수송해낸 경험이 있었고, 이런 귀중한 실전 경험은 노르웨이 침공에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림] 글라디에이터 Mk 1 (Gladiator Mk 1) 복엽 전투기... 노르웨이 공군의 최첨단(?) 항공기...
 
 
이에 비해 노르웨이의 항공전력이란 것은 한마디로 전무하다고 해야 옳겠다. (그나마 나중에 영국이 글라디에이터와 허리케인 비행대를 급파하지만, 그 수 역시 미미함 그자체였다.)  노르웨이는 1937년과 1939년까지 총 12기의 글라디에이터(Gladiator) 복엽기를 구입했는데, 1939년 겨울, 동계 훈련을 한답시고, 랜딩기어에 엉성한 스키를 장착해 띄웠다가, 두대의 글라디에이터의 스키가 비행도중 탈락하면서, 한명의 조종사는 동체착륙을 시도해 기체가 반파되었고, 다른 한명의 경우는 더 심각해, 떨어져 나간 커다란 스키가 자신의 꼬리날개를 강타해 아예 기체를 잃어버리는 황당한 사고를 당하고 만다. 이런 몇번의 자체 사고로 노르웨이 개전 당시 운용가능한 글라디에이터기는 단 9 대였다. 90 대가 아니라 정확히 9 대다. 또  이것이 노르웨이 최고의 신형기였으니, 나머지 박물관에서나 볼법한 낡은 항공기들이야 더 이상 말해야 무엇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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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PUT onclick="namosw_goto('backward')" value="읽던 곳으로 돌아가기" type=button> </FORM>
 
[노르웨이 지도] 붉은 사각형이 칠해진곳(오슬로, 스타방가, 베르겐, 트론트하임, 나르빅.... 붉게 칠해진 선은 독일 해군의 진격 항로)이 독일 해군의 군함들이 밀고 들어가 점령키로 계획된 노르웨이의 5개의 항구다... 또 초록색 원 두 개는 스타방가 아래 솔라(Sola) 비행장과 오슬러 근방 포르네부(Fornebu) 비행장으로 독일 공수부대의 낙하가 이루어지기로 계획된 곳이다. 청색 사각형이 칠해진곳 두곳(안달스네스와 남소스)은 4월 중순 영국의 대노르웨이 상륙작전이 벌어진 곳이다.
 
 
여하튼 작전개시일인 4월 9일까지 노르웨이 해안에 도달하기 위해,  며칠 앞서 출항한 대규모 독일 함대는 노르웨이를 향해 곧장 항진하고 있었다. 이들은 삼삼오오 나뉘어 노르웨이의 다섯 군데의 해안 요충도시 즉 오슬로(Oslo), 트론하임(Trondheim), 베르겐(Bergen), 스타방가(Starvanger), 나르빅(Narvik)을 선점하고 지상군을 상륙시켜, 군사 거점을 점령한 연후 내륙으로 진격한다는 계획을 하달받은 상태였다.
 
그런데 당시 독일도 또 영국도 서로의 정황을 모르는 상태에서, 똑같은 목표인 노르웨이를 향해 대함대를 출동시킨 상태였다. 그런데 영국의 우선 목표는 노르웨이 해안에 상륙하기에 앞서, 노르웨이 근해에 기뢰를 설치하는 것이었고, 이에 반해 독일은 노르웨이 해안도시를 먼저 치기로 계획하고 있었으니, 결국 독일의 행보가 간발의 차로 앞선 것이다.
 
이런 와중 본격적인 작전 개시일 바로 하루 전인 4월 8일, 기뢰 설치를 위해 노르웨이 근해로 항진하던 대규모 영국 함대에서 구축함 글로우웜(Glowworm)호가 우연히 이탈되어 홀로 트롬하임 서쪽 바다를 정처 없이 헤메고 있었다. 바로 그때 글로우웜호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다름 아니라 노르웨이를 향해 북상해 오던 독일의 중순양함 아드미럴 히퍼(Admiral Hipper)호와 우연히도 딱 마주치게 된 것이다. 빗발치는 히퍼의 함포사격에 명중탄을 얻어 맞은 글로우웜호는 완력과 덩치로 상대가 안되는 강적을 만난 처지라, 곧바로 연막을 피우고 회피하는 듯 트릭을 시도했다. 이때를 놓칠새라 히퍼호는 독안에 든 영국 구축함에게 마지막 한방을 먹이겠다며 연막을 향해 나아갔는데, 연막 속에서 날아나는 줄만 알았던 글로우웜호가 선체를 히퍼호쪽으로 들이대고 곧장 돌진해 오는 것이 아닌가?
 
 
[사진] 글로우웜호의 최후.... 앞머리가 보이는 배는 독일의 아드미럴 히퍼호인 듯 하다. 격침 당했지만, 끝까지 자살 공격을 시도해 적에게 타격을 입힌 글로우웜호의 함장에게는 전사후 빅토리아 훈장이 추서되었다.
 
 
글루우웜은 이판사판으로 과감한 들이받기식 육탄 공격을 감행한 것이다. 마치 임진왜란 당시 단단한 내구성을 바탕으로 조선의 판옥선 전함들이 내구성 약하기로 소문난 일본 전함들을 들이받는 일명 당파 공격이나 훗날 소련 전투기들이 독일 폭격기에 들이 받는 타이탄 공격에 비견될 만한 일격필살 전법이었다.
 
허나 덩치로 상대가 안되던 영국 글로우웜호는 충돌 직후 그대로 차가운 심해로 격침되고 말지만, 아드미럴 히퍼 역시 뜻밖의 자살공격에 상당한 피해를 입는 수모를 당했다(글로우웜호의 함장 로프(Roope)는 죽음을 무릅쓴 자살공격으로 전사후 빅토리아 훈장이 추서되었다고 전해진다).
 
글로우웜호 침몰 직전 독일 해군의 출현을 보고 받은 영국 해군 수뇌부는 지금이야 말로 집결한 독일 해군을 완전히 몰살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잡고, 전함 로드니(Rodney)를 비롯해 4척의 순양함, 14척의 구축함을 총출동시켜 북해 앞바다를 이잡듯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노르웨이 서부해안 베르겐(Bergen) 근해를 정찰하던 독일 정찰기에 의해 도리어 발각되어 버렸다. 곧바로 독일 공군에 비상령이 내려졌고, 제 26 폭격 항공단(KG 26) 41기의 He 111 폭격기, 제 30 폭격 항공단(KG30) 소속 47기의 Ju 88 폭격기들이 일제히 발진했다. 3시간 넘게 영국 함대에 대한 맹폭은 계속되었고, 이 와중 전함 로드니(Rodney)가 500 kg 투하용 폭탄을 얻어 맞아 손상을 입었고, 순양함 드본셔(Devonshire), 싸우스햄턴(Southampton), 글래스고우(Glasgow)가 폭격을 당했고, 구축함 거카(Gurkha)호가 격침되고 말았다. 영국 함대는 닭 쫓던 개가 지붕 쳐다보다가, 위에서 떨어지는 닭똥을 직격으로 맞은 기분이었다. 아직도 영국은 독일의 의도를 정확히 파악치 못했던 것 같다. 독일 해군을 찾아 할 일 없이 북해를 뒤지고 있었다. 그런 사이 이미 독일 함대들은 제각기 명령받은 노르웨이 해안 항구를 향해 피요르드 사이를 스스르 잠입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피요르드의 하늘이 열리다     

 
[사진] 독일 공수대원의 점프 모습....  재밌는 것은 초기에 공수대원들은 소총 없이 낙하했다고 한다. 무기를 넣은 박스는 따로 낙하산에 매달아 떨구어, 공수대원들은 지상에 도착하자마자, 무기부터 챙겨야 했다.
 
위에 잠시 언급했지만 노르웨이 공략에서 독일 해군과 함께, 가장 중요한 역을 맡은 것은 루프트바페의 강하엽병으로 알려진 낙하산 부대였다. 이들이 선점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목표는 크게 두곳으로 노르웨이 수도 오슬로를 점령하기 위해 오슬로 근방의 포르네부(Fornebu) 비행장이 한곳이고, 또 영국의 반격을 저지하기 위해 필수적인 노르웨이 서부 해안의 스타방가(Stavanger) 근처 솔라(Sola) 비행장이 다른 한곳이었다(노르웨이 지도 참조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세요).
 
루프트바페의 계획은 이 두 비행장에 낙하산부대를 떨구고 이들이 비행장에서 노르웨이군과 교전하고 우세를 점하게 될때, 보병을 가득 실은 Ju 52 삼발 수송기들이 비행장에 착륙하여 비행장을 순식간에 손아귀에 넣는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낙하산부대의 낙하와 수송기들이 도착하는 시간차는 단 20 분정도로 매우 기민한 행동과 상호 협조가 무엇보다 중요했다.
 
(1) 스타방가 근처 솔라 비행장에 도달한 낙하산부대원들은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안개 속을 날아 비행하다가 비행장 근처에서 고도 120m 지점에서 일제히 비행기를 박차고 허공으로 점프하기 시작했다. 이들을 실은 수송기는 낙하병들이 한곳에 모여 전력을 쏟을 수 있도록 속도를 최저로 낮추어 비행해야 했다. 낙하산 부대원 약 100 명은 비행장 근처에서 쏟아지는 노르웨이군의 기관총좌의 열렬한 사격을 받으며, 고전했지만, 이어 날아온 Me 110 쌍발 전투기들의 기총소사의 지원을 받고 이리저리 날뛰며 교전을 계속할 수 있었다. 약 30 분간의 전투가 치뤄진 후 노르웨이의 기관총좌는 사격을 멈췄고, 비행장은 독일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후 날아온 Ju 52 기들이 안착하면서 지상군을 쏟아냈다.
 
 
 
 
 
 
(상) 항속거리 문제 때문에 노르웨이 항공전의 초기에는 Me 110기가 주요 요격기 역을 맡았다.
(하) Ju 52 수송기에서 낙하하는 공수대원들의 모습
 
 
(2)  그러나 계획대로 진행된 솔라 비행장과는 달리 오슬로 근처 포르네부 비행장에서는 뜻밖의 사건이 일어나고 만다. 당시 노르웨이 조종사 쉬에(Schye)가 글라디에이터 전투기로 포르네부 비행장 근처 상공을 정찰 비행하던 중, 내룩을 향해 날아오는 대규모 루프트바페 항공기들을 만나게 된다. 이들은 덴마크의 비행 기지에서 발진한 He 111 폭격기와 호위 쌍발 전투기 Bf 110기들(한센(Hansen) 중위가 이끄는 Me 110 쌍발 전투기 6 대..... 이들은 독일 제 76 쌍발 전투 항공단 (ZG 76) 소속으로 훗날 대에이스의 반열에 오르는 헬무트 렌트(Helmut Lent) 소위도 이 중 포함되어 있었다)이었다. 폭격기는 제쳐두고 전투기 숫자만 봐도  6 대 1 이라는 말도 안되는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쉬에는 용감히 적의 밀집대형에 급강하해 Bf 110 1기를 격추시켰고, 연이어 3 기의 He 111기를 화염덩이로 만들어 버렸다.  아무리 기습공격이었다지만, 구식 복엽기를 몰고 이런 전과를 이루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다.
 
그러나 곧바로 두대의 Bf 110기의 추격이 시작되었고, 쉬에에게는 불행하게도 이중 한대에는 대에이스 헬무트 렌트(Helmut Lent)가 탑승해있었다. 헬무트 렌트의 사격에 글라디에이터의 후미가 연타를 당했고, 쉬에는 비행장을 향해 달아났다. 그런데 플랩이 고장을 일으킨데다 왼팔에 파편으로 부상까지 당했고, 또 계속 따라오는 적의 추격에 당황한 나머지 착륙 순간을 놓치고, 활주로를 건너 뛰어 버렸다. 그리고는 이내 앞에 높다랗게 서있던 고압 전기 철탑을 들이 받고 만다. 쉬에는 가까스로 구조되었지만, 의식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가는 신세가 되다.
 
이런 접전이 끝나 갈 무렵, 낙하산부대원을 실은 수송기들이 낙하를 위해 포르네부 비행장 근처 상공을 선회하고 있었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안개 때문에 낙하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연이어 날아온 보병을 실은 Ju 52기들 다수가 노르웨이군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는 포르네부 비행장으로 말도 안되는 착륙을 시도하기 시작했다. Ju 52 수송기 몇대는 착륙과 동시에 노르웨이 기관총에 벌집이 되어 버렸다. 내리는 족족 전멸 당하고 만 것이다.
 
[사진] 독일에 점령당한 포르네부 비행장에 내려 앉은 독일 Ju 52 수송기들... 포르네부는 낙하산부대가 아닌, Me 110 조종사들에 의해 점령되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바로 그때 불행중 다행이라고나 할까? 조금전 포르네부 비행장 상공에서 노르웨이의 글라디에이터 복엽기를 일소하고 선회 중이던 한센 중위의 Me 110 편대가 이 광경을 목격했다.  이날 적기와 교중전  6 대 중 3대 이상의 Me 110 이 손상을 받은 상태라 한센 중위는 윙맨들에게 어려운 명령을 내려야만 했다. 이대로 날아 기지로 돌아갈 수도 없고 언제까지 공중에 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한센 중위는 문전기에 대고 소리쳤다. "전원 포르네부 비행장에 착륙한다...헬무트 렌트 소위 앞장을 서라!  우리가 지원 사격을 하겠다."    뛰어들라고 하면 불구덩이라도 뛰어 들어야하는 것이 군대의 명령이다. 렌트는 적 지상군 기관총좌의 열렬한 환영(?)이 뻔히 예상되는 또 이미 격추된 글라디에이터기와 Ju 52기 잔해의 연기가 가득해 시계가 엉망인 비행장을 향해, 너무도 무리한, 그러나 참으로 대담한 착륙을 시도하게 된다. 이어 나머지 Me 110 들도 지원 사격을 계속하며 총탄이 빗발치는 비행장에 가까스로 내려 앉을 수 있었다. 그와 거의 동시에 Ju 52기 한대가 착륙을 시도했다. 바로 그 순간 노르웨이 기관총좌는 침묵해 버렸다. 갑작스런 적기의 놀라운 착륙에 노르웨이군들은 달아나기 바빴던 것이다. 용감무쌍한 Me 110 조종사들의 대담함으로 적 비행장 한곳이 손바닥 뒤집듯 쉽게 수중에 들어온 것이다.
 
개전 첫날 노르웨이 상공에서 미약하게 저항하던 글라디에이터들은 He 111기를 비롯해 몇대의 독일기를 떨구어내기는 했지만, 숫적인 열세는 심각했다. 즉 노르웨이 조종사들이 총 5기의 독일기를 격추했지만 실전배치된 총 9기의 글라디에이터 중 6기가 파괴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계산은 마치 거대한 공룡의 발톱에 피도 안나는 작은 흠집을 낸 정도라고나 할까? 독일의 계획은 거의 잘 맞아 떨어지고 있었다.
 
 
 
 
바다에 흘린 피로 피요르드를 얻다

 
 
 
 
(상) 노르웨이 피요르드를 지키는 해안포의 모습.... 포의 종류도 다양했다고 하는데 위 사진은 120 mm 포...
(하) 거의 골동품 가게에 내다 팔기 직전의 노르웨이 해안포의 펀치에 배바닥을 보이며 어이없이 격침당한 독일의 순양함 블뤼허호
 
 
해군이 점령키로 되어있던 5곳의 항구 중, 트론하임, 스타방가 그리고 최북단 나르빅항에서는 노르웨이군의 저항은 극히 미미했고, 항구로 밀고 들어간 독일해군 함정에서 곧바로 지상군들이 쏟아져 나와 상륙하면서, 3곳의 항구를 일시에 점령해 버렸다. 또 낙하산부대가 비행장을 접수한 후, 지상군과 보급품을 가득실은 Ju 52 수송기들이 차례차례 착륙하면서, 공격측의 규모는 점점 늘어가는 추세였다.
 
그런데 독일 해군의 상륙작전 중 몇 군데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1) 오슬로항  ;   먼저 오슬로를 향해 피요르드를 들어서던 독일 해군이 만만치 않은 노르웨이군의 저항에 직면한 것이다. 골동품 가게에서나 구경해 볼 만한 40 년이란 장구한 세월 동안 묵묵히 피요르드를 바라만 보고 있던 고색창연한 노르웨이 해안포를 우습게 보고 피요르드로 접어들던 독일의 순양함 블뤼허(Blucher)호가 그 낡은 해안포 사격과 연이은 어뢰 공격 연타를 얻어맞고 선체 바닥을 보이며, 뒤집힌 채 침몰하고 만 것이다. 얼마후 뒤늦게 달려온 독일군들이 해안포를 접수함으로써 남은 독일 함대가 오슬로로 항진 할 수 있었지만, 그나마 없는 독일의 군함이 고물 이 되어 가는 구식 해안포의 일격에 허무하게 날아가 버린 것이니 독일 해군에게는 정말 아까운 빅빌이 아닐 수 없었다.
 
(2)  베르겐항 ;  또 한 군데의 문제는 베르겐 항에서 일어났다. 4월 8일 자매함인 쾰른(Koln)호와 함께 베르겐항으로 접근해 들어가던 독일의 경순양함 쾨니히스베르그(Konigsberg)호가, 항구 방어 포좌의 직격탄을 얻어 맞은 것이다. 곧바로 상륙한 독일 지상군에 의해, 베르겐항은 독일 수중에 떨어졌지만, 쾨니스베르그는 엔진과 37 mm 대공포등이 다수 파괴되는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설상가상으로 얼마후 영국 정찰기가 베르겐에 정박한 두 순양함을 발견했고, 뒤늦게나마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속셈을 알아챈 영국 해군은 대대적인 공격에 나설 작정을 하게된다.
 
바로 다음날인 4월 9일 오후 6시, 두대의 영국 폭격기(Hampden, Wellington 폭격기)가 코니히스베르그호에 폭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250 kg 투하용 폭탄 약 30발이 떨어졌지만, 명중탄이나 이렇다할 성과는 없었다. 그날밤 쾰른호는 베르겐항을 빠져 나갔지만, 쾨니히스베르그는 엔진손상으로 항진속도가 많이 떨어진 상태라 항구에 계속 남아 있기로 했다. 쾨니히스베르그의 함장은 항구의 입구로 영국의 전함이 진격해 올 경우, 선제 공격을 하기 위해, 5.9 인치 주포 대부분이 탑재된 후미를 항구의 입구쪽을 향해 돌려 놓게 하고는, 정비병들에게 빠른 수리를 독려했다.
 
 
[사진] 영국 수쿠아기들의 기습 공습에 명중탄을 얻어 맞고, 침몰 직전의 쾨니히스베르그호의 모습.....  역시 영국 공군 조종사들도 한 폭격들 했다.
 
 
영국은 이번엔 아예 쾨니히스베르그호의 숨통을 끊겠다는 각오로 재공격을 시도했다. 즉 4월 10일 이른 시각, 영국 본토 동북쪽의 오크니(Orkney)섬에서는 제 800, 803 폭격 비행단 소속 스쿠아(Skua) 급강하 폭격기들이 출격에 나섰고, 오전 7시경 여명이 막 밝아오는 베르겐항 상공에 도달한 것이다. 이들은 총 15기로 구성된  대규모의 공습대였는데, 4000 m 상공에서 베르겐항 주위를 선회하며, 고도를 낮추기 시작했다.
 
곧바로 정박중인 독일 순양함 코니히스베르그호에 대한 편대장의 공격명령이 떨어졌고, 스쿠아기들은 차례로 시간차 급강하 공격에 돌입했다. 250 kg 투하용 폭탄들은 대부분 500 - 900 m 상공에서 투하되었는데, 용감한 영국 조종사 중 한명은 60 m의 초저공까지 하강해 폭탄을 투하하는 과감함까지 보였다. 원래 스쿠아 공격기는 급강하 폭격기 겸 전투기로 설계된 기종이고, 이들 영국 조종사들은 급강하 폭격 훈련보다는 공중 전투 기동 쪽에 편중된 훈련을 받아온 이들이라, 폭격임무는 매우 생소했지만, 이날 영국 조종사들의 기량은 대단했다.
 
쾨니스베르그호는 선체 정중앙에 두발을 비롯해 선수에 한발 등, 집중 명중탄을 얻어 맞았다. 해안 방공포가 불을 뿜으면서, 스쿠아기 두대가 주익에 손상을 받았으나, 치명타는 아니었다. 폭탄을 다 쏟아 부은 스쿠아기들은 각기 흩어졌다가 다시 편대를 이루고 기지를 향해 날아갔다. 비록 귀환 도중 편대장이 스핀에 걸려 추락해 전사하지만, 이날 거둔 성과는 빛을 발했다. 폭격기들이 물러간 뒤 2시간 45분후 순양함  쾨니히스베르그는 베르겐 항 앞바다에 선수쪽부터 수장 격침되었다. 그런데 이날 격침의 주원인은 물론 폭격기들의 타격이었지만, 침수 정도가 그리 큰 편은 아니었고, 평상시 같으면 격침은 충분히 모면했을 것이다. 그러나 쾨니히스베르크에게는 불행히도 첫날 해안포에게 얻어맞으면서, 배수펌프와 그것을 작동시키는 전기 씨스템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며, 쏟아져 들어오는 바닷물을 넋 놓고 쳐다볼 수 밖에 없었고, 분통을 터뜨리며, 자함의 격침을 지켜보아야만 했다.
 
 
 
 
 
(상) 영국 블랙번(Blackburn)사의 수쿠아(Skua)기. 항모 탑재용 2인승 전투기 겸 급강하 폭격기로 영국해군 최초의 단엽 함재기다. 속도가 220 mph 정도로 느리고 기동이 달려 사실 전투기라고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 수쿠아기의 급강하 폭격으로 피격당한 독일의 경순양함 쾨니히스베르그호. 엑스 표시는 투하용 폭탄이 떨어진 지점을 표시했다. 베르겐 항에 격침됨으로써 그렇잖아도 빈약한 독일 해군에겐 뼈아픈 손실이 된다.
 
 
 
(3) 나르빅항 ;  그런데 독일 해군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더욱 심각하고 크나큰 재앙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4월 9일 나르빅 항 근처까지 10 척의 구축함들을 호위해 북상했던 독일의 전투 순양함 샤른호스트와 그나이제나운호가 의기양양하게 귀환하다가 , 영국의 전함 리나운(Renown)과 정면에서 마주쳤다. 곧 쌍방의 함포사격이 시작되었고, 얼마후 몇발의 명중탄을 얻어맞은 그나이제나운호와 샤른호스트호는 걸음아 날 살려라며 패주하고 만다. 한편 바로 몇시간 전 샤른호스트와 그나인제나우의 호위로 독일의 구축함 10 척은 나르빅항을 거의 무혈 점령함으로써 승기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역시 비운의 최후를 맞을 운명이었다.
 
다음 날인 4월 10일 새벽,  나르빅항 정박 중에 영국 구축함 8 척의 기습공격으로 2척의 독일 구축함과 5 척의 수송선이 어이없이 격침되고,  여기서 그나마 용케 살아남은 독일 구축함 8척 중 5척은 상당한 손상을 입은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연료도 불충분한데다, 피요르드에 갇혀 도망갈 퇴로도 없는 형세라 오도 가도 못하고 도리없이 나르빅항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이들의 모습은 덫에 걸려 포식자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상처입은 짐승 신세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3일뒤인 4월 13일 아침, 이번엔 확실히 끝을 맺자고 생각했는지, 영국해군은 전함 워스파이트(Waspite)호에다가 9 대의 구축함까지 호위를 붙여 나르빅항을 공격케 했다. 독일 구축함 8 척은 마지막 1인 마지막 1탄까지라는 식으로, 용감히 응전했으나 역부족이었다. 나르빅의 독일 구축함 8척 전척 격침...... 이틀전 2척까지 합쳐 도합 10척의 독일 구축함이 나르빅항에 수장된 것이다. 독일 해군의 비운은 계속되어 다음날인 4월 14일, 베르겐 근해에 출격한 영국 스쿠아기들이 독일의 대형 보급선 바렌펠스(Barenfels)호를 격침함으로써 초반 영국의 반격은 꽤 매서운 편이었다.
 
이런 초반 성과에 고무된 영국 공군은 계속 폭격기 편대를 출격시켜, 노르웨이 항구에 정박한 독일 함정에 대한 폭격을 시도하였는데, 4월 중순이 넘어서면서 번번히 독일 전투기들의 요격에 나가 떨어지게 된다. 이것은 개전초 며칠간은 루프트바페가 새로운 점령지와 환경에서 아직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수 없는 상태였기 때문으로, 그 공백기 동안 영국 공군이 위세를 떨친 것에 불과했고, 얼마후 루프트바페의 본격적인 요격 활동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역전되고 제공권은 독일에게 완벽하게 넘어가고 만다. 특히 4월 중순, 독일 JG 77의 제 2 그루페가 주력기 Bf 109 를 몰고, 노르웨이 남부 크리스티얀센(Kristiansnad)의 비행장에 착륙하고 기지로 삼게 되면서, 이들은 영국 폭격기들의 두려움의 존재로 떠올랐다. 일예로 4월 15일 12기의 영국 폭격기들이 크리스티얀센 항구 상공을 향해 비행하다가, Bf 109기의 공격으로 그 절반인 6기가 격추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비록 독일 해군이 막심한 피해를 당했지만 노르웨이 상륙은 날짜에 맞춰 계획대로 진행된 것이다. 이제 노르웨이의 바다는 영국이, 노르웨이의 해안과 하늘은 독일이 점령한 셈이었다.
 
 
 
 
 
영국의 피요르드 상륙작전

 
영국이 해전에서는 우세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는 2000 km에 달하는 노르웨이의 전 해안선이 독일 상륙군들의 손아귀에 들어가 버렸고, 이에 따라 영국은 독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대반격을 위한 지상군 파병을 결정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륙지점을 놓고 벌어진 치열한 논쟁으로 영국군은 양분 되어버렸다. 즉 트론하임과 나르빅을 각각 주장하는 설전으로 작전의 혼선이 초래되었고, 결국에는 트론하임을 기점으로 나르빅항을 향한 북쪽에 위치한 (1) 남소스와 트론하임과 베르겐항과의 중간지점인 (2) 안달스네스가 상륙지점으로 결정되는 어정쩡한 작전이 수립되었다 (지도참조 하시려면 이곳을 누르세요). 상륙지원과 내륙으로의 반격의 공중지원을 위해, 4월초까지만 해도 지중해에서 작전중이던 항모 글로리어스호와 아크로열호가 특명을 받고 노르웨이 근해로 달려왔으며, 스쿠아 급강하 폭격 비행대들(제 800, 801, 803 비행대)이 각기 항모에 안착해 모함으로 삼았고, 항모에 실려 날아온 영국 글라디에이터 비행대도 노르웨이 작전에 참가하기에 이른다. 이제 다시 양쪽 공군의 치열한 접전이 가시화되는 시점이었다.
 
 
[사진] 영국 수쿠아 급강하 폭격기들이 노르웨이로 진출하는 독일의 수솔선을 공격하는 모습. 노르웨이 작전에서 영국의 수쿠아는 독일의 수투카에 필적하는 공을 세우게 된다.
 
4월 중순, 드디어 트론하임의 북쪽 남소스와 남쪽 안달스네스에 영국의 상륙작전이 벌어졌고, 이를 공중 엄호하기 위해, 스쿠아기들이 전투기 임무를 띄고 출격에 나섰다. 그런데 노르웨이의 주요 비행장들이 이미 독일 공수원들의 수고로움으로 독일의 수중에 떨어진지 이미 오래여서, 영국군은 매우 독특한 발상을 해내게 된다. 즉 일부 글라디에이터기들을 노르웨이의 두껍게 얼어 붙은 넓다란 호수에 착륙시키고, 그곳을 비행기지로 삼는 계획..... 이에 따라 18 기의 글라디에이터 비행대가 안달스네스 근방 레샤스코그(Lesjaskog) 호수로 날아가 안착했고 얼음판 위에 길이 750 m 폭 70 m 에 달하는 임시 비행장을 만들었다. 영국 지휘부는 획기적인 발상이 잘 맞아 떨어졌음에 자신들의 임기웅변의 능통함을 자찬하기에 마지 않았다.
 
그러나 항속거리가 충분치도 않은 글라디에이터들이 내륙까지 날아오는 것을 의심한 루프트바페의 추적으로 이 임시 호수 비행장이 발각되었고, 4월 25일 독일 폭격기들의 맹폭에 호수의 얼음이 깨지면서, 영국 글라디에이터기 5 기가 피할 사이도 없이 일시에 파괴 수장되었다.(나중에 이 호수에 잠겨 버린 글라디에이터의 잔해 일부가 고철수집가에게 건져졌고, 호수 주위에 살던 사람이 구입했다가, 1970년 노르웨이 공군에 증정되어 박물관에 전시되었다는 뒷 이야기가 있다) 그나마 극적으로 이륙하여 구사일생한 글라디에이터기들도 갈곳없이 헤메이다, 연료가 바닥나 추락 내지는 동체착륙을 시도해야만 했다.
 
이렇게 글라디에이터가 맥없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자, 주요 요격 임무는 스쿠아기의 몫으로 넘어가게 된다. 비록 느리고 둔한 항공기였으나, 영국 조종사들의 분전으로 스쿠아기들은 독일 폭격기를 상대로 상당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 4월 25일 트론하임의 독일 비행장을 급습해 12 기의 독일기를 지상파괴시켰고, 4월 26일에는 2 기의 폭격기를, 4월 27일에는 9 기에 달하는 폭격기, 또 4월 28일에는 He 111 3 기 Ju 88 1 기 등 총 4 기를 공중 격추시키는 기염을 토했다. 역시 영국 공군의 조종사들 역시 대단한 기량을 가지고 있는 당대 최고 레벨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독일의 Bf 110과 Bf 109 들이 레이더 시설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잦은 초계비행을 실행하면서, 스쿠아기들의 활약도 커다란 타격을 받기 시작했고, 용감했지만, 독일 요격기에 비해 딸리는성능의 기종에 탑승한 많은 영국 조종사들이 격추되어 갔다. 이제 노르웨이 상공의 제공권이 다시 독일에게 들어간 것이다.
 
이렇게 노르웨이의 항공전에서 독일이 우세를 점하게 되면서 영국 조종사들이 참담한 패배를 당하고 있었으나, 사실 노르웨이에 상륙한 영국 지상군의 처지는 이보다 더욱 딱했다. 즉 보급 부족에 제공권마저 완벽히 독일에게 넘어가 있어, 상륙후 진격은 고사하고 전투마다 패해 도주해야만 했고, 이후 프랑스군도 일부 파병되었지만, 그리 큰 도움은 못되었다. 영국 지상군을 노린 독일 수투카 편대의 지상공격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연일 계속되어, 영국 상륙군은 그나마 뭘 해보려하면, 하늘에서 홀연히 나타난 독일 폭격기들의 저지를 받았다. 게다가 해안지대를 빼면 거의 준령의 나라인 노르웨이의 산악 지형은 독일 산악병들에게 유리한 지형이었고 이들의 분전은 영국 파병군의 처지를 더욱 곤경에 처넣었다. 게다가 1940년 5월초 프랑스에 대한 대대적인 독일의 기습 공세가 시작되자, 변방이라 할 수 있는 노르웨이의 중요도는 더욱 빛이 퇴색해버렸고 연합군은 하는 수 없이 노르웨이에서의 철수를 준비해야 했다.
 
 
 
 
 
(상) 독일의 전투 순양함 샤른호스트의 모습
(하) 노르웨이 철수 작전 도중 샤른호스트와 그 자매함 그나인제나우의 협공에 비운의 격침을 당하는 영국 항모 글로리어스호의 모습
 
 
철수가 이미 결정되었지만, 영국 해군의 입장에서 보면, 노르웨이의 천혜의 해안은 독일 해군 전함들에게 더 없이 좋은 은신처가 될 것이 자명했고, 마침 그곳에 정박해 있는 독일의 거함 샤른호스트는 구미가 당기는 먹이로 보였으니 철수에 앞서 앙갚음으로 이놈을 아예 격침시키자는 생각이 동했다. 비록 해군력에서는 독일을 압도하지만, 이 신형전함이 독일 근해가 아닌 곳에 나와 있을 기회는 앞으로 그리 많지 않을 것이고, 이때야 말로 격침의 절호의 기회로 본 것이다.
 
드디어 승리의 분위기에 들떠 있는 노르웨이 독일군들을 기겁시키겠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1940년 6월 11일 총 12기의 영국 폭격기들이 샤른호스트호가 정박한 트론하임 상공에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은 곧바로 출격한 Bf 109의 요격을 받고 2 대가 격추당하자 황급히 달아나 버렸다. 그러나 한번 시작한 일, 끝을 보리라 마음먹은 영국은 이틀후인 6월 13일에는 항모 아크로열호에서 재차 15 기의 스쿠아 급강하 폭격기를 출격시켜 샤른호스트르 향해 날려 보냈다. 그러나 이날 역시 독일 Bf 109와 Bf 110기들의 요격으로 단 3분만에 8 기가 격추당하고 만다. 또 단 한대의 급강하 폭격기가 어렵사리 폭탄투하에 성공해 샤른호스트호의 갑판을 명중시켰지만, 폭탄은 갑판에서 떼구르르 구를 뿐 폭발을 일으키지 않는 불발탄의 불운까지 겹쳐, 상황은 최악이었다. 이로써 영국은 훗날 루프트바페가 영국의 항공전에서 제공권이 받쳐주지 않는 한 급강하 폭격기들이 적의 요격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깨닫게 되는 것보다 몇달 먼저 이런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정도로 자족해야만 했다.
 
 
[사진] 노르웨이 근해에서 영국의 잠수함을 발견하고 공격 중인 독일의 수상기 아라도 196 (arado 196)의 저공 비행 장면..... 
 
 
노르웨이의 마지막 순간을 독일 거함 샤른호스트 격침으로 화끈하게 마무리 지으려던 영국의 희망은 이렇게 물거품이 되고 만 것인데, 영국해군의 불운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즉 자신들이 애지중지하던 왕실 거함이 노르웨이 작전의 종료 직전에 독일에게 격침되고 말 운명에 처한 것이다. 당시 노르웨이의 영국 지상군과 항공전력 철수를 위해 영국 항모 아크로열과 글로리어스가 노르웨이 근해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아크로열이 먼저 철수병력을 싣고 본국으로 돌아갔고, 글로리어스와 호위 구축함 아카스타와 아르덴트만이 남아 마지막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
 
6월 초 마지막까지 노르웨이에 남아있던 글라디에이터, 소드피쉬, 스쿠아기들이 전부 항모 글로리어스에 날아들었고, 차례 차례 착함하기 시작했다.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제 46 비행대의 허리케인 10기.... 그런데 문제는 이 허리케인기들은 항모 착함용 고리(hook)를 장착하지 않은 상태라, 멀리서 착함 접근을 위해 기우뚱 거리며 날아오는 이들의 모습은 여간 불안하지 않았다. 그러나 영국 조종사들의 놀라운 기량은 여기서도 다시 발휘된다. 허리케인기들은 한대 한대 글로리어스의 갑판에 내려앉기 시작했고, 이때마다 글로리어스 승무원과 먼저 착함한 조종사들은 팔을 치켜 들며 환호성을 올려댔다.... 그리고 마지막 한 대 남은 허리케인까지 무사히 안착하자, 비록 전투에는 패했지만, 모든 승무원들은 승리라도 한듯 괴성을 지르며 축제분위기에 휩싸였다.
 
그러나 얼마후, 이들의 눈 앞에 영국의 폭격 세례에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이때다며 출항한 독일 전투 순양함 샤른호스트와 그나인제나우가 거대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항모 글로리어스의 갑판은 찬물을 끼얹은듯, 짧은 정적이 흘렀다. 곧바로 정신을 차리고, 독일 전함을 잡기 위해, 뇌격기 출격을 서두르기 시작했으나, 거리 25000 m 에서 독일의 거포가 이미 불을 뿜기 시작했다. 영국의 호위 구축함 두대는 항모를 살리기 위해, 대응사격을 해댔지만, 함포 직경이 비교가 안되었고, 이 정도 거리에서는 독일 해군의 신형전함이 훨씬 유리했다. 연막을 피우고 필사의 탈출을 시도한 보람도 없이, 항모 글로리어스는 갑판 정중앙에 연속 명중탄을 얻어 맞았다. 출격 준비로 북새통을 이루던 갑판은 갑자기 불지옥으로 변했고, 뇌격기에 장착된 어뢰들이 연달아 폭발하면서, 거대한 항모의 선체가 가라앉기 시작한 것이다. 또 구축함 아카스타와 아르덴트 역시 자신의 호위함 항모의 운명을 따라 분전 중에 수장되어 버리고 만다. 이로써 근 두달에 걸친 노르웨이의 전투는 독일의 승리로 끝을 보게 된다.
 
 
 
 
(상) 영국 항모 아크 로열호 갑판의 수쿠아기들.... 노르웨이 철수작전에 영국 항모 두 척이 동원된다.
(하) 그 중 나머지 한 대인 글러리어스 항모의 격침 직전 모습
 
 
 

항모 글로리어스 격침이 뒤바꿔 놓은 운명
위에 언급했듯 영국이 노르웨이에서 철수하면서 항모 글로리어스호에 제 46 허리케인 비행대가 마지막 착함하면서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줄 알았다. 그러나 독일 샤른호스트와 그나인제나우의 공격에 항모는 격침당하고 만다. 당시 항모에는 허리케인 뿐 아니라 수쿠아, 글라디에이터 등 다수의 항공기와 59 명의 조종사들이 선승하고 있었는데, 항모가 수장된 후 조종사 중 생존자는 단 2명이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둘 모두 제 46 허리케인 비행대 소속으로 비행대장 빙 크로스(Bing Cross)와 패트 제임슨(Pat Jameson).... 정말 천신만고 끝에 구사일생 한 셈이었다.
 
그런데 이들 보다 아슬아슬하게 죽음을 모면한 조종사들이 있었다. 즉 노르웨이 전선으로 투입당시 제 46 비행대의 허리케인 숫자는 17기였는데, 7기가 격추되고 나머지 10기만 남아 있었고, 조종사수는 13명이 생존해 있었다. 하는 수 없이 3명은 허리케인을 이용하지 못하고 독일 공군에 노출되어 좀더 위험부담이 큰 수송선으로 노르웨이를 빠져 나와야 했다. 물론 항모에 착함해 고국으로 돌아갈 동료들을 부러워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뜻밖의 항모 격침으로 죽을 운명이 바뀌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는 우연의 일치처럼 훗날 5기 이상을 격추하는 에이스가 된다.

 
 
노르웨이의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독일 육군과 공군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지만, 독일 해군의 피해는 실로 막심했다. 중순양함 블뤼허(Blucher), 경순양함 칼스뤼헤(Karlsruhe), 코니히스베르그가 격침되었고, 구축함 10척과 다수의 수송선이 수장되었다. 그외에도 전투 순양함 그나이제나우(Gneisenau)와 그 자매함 샤른호스트(Sharnhorst)호가 손상을 입었고, 중순양함 히퍼호(Hipper), 포켓 전함 뤼초브(Lutzow)호가 격침은 모면했지만 대파당했다. 그러나 영국 해군 역시 이에 거의 상응하는 피해(항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7척)를 입어, 독일 해군이 질적으로는 영국에 뒤지지 않음을 과시했지만, 문제는 얄팍한 독일 함정의 절대숫적 부족이었고, 노르웨이 근해에서 입은 피해는 해군의 입지를 더욱 좁게 만들어 운신의 폭은 줄어 들대로 줄고 만다. 이것은 장차 벌어질 영국 상륙 작전인 싸라이언 작전의 실시에도 영향을 미칠 정도로 큰 충격이었다.
 
이에 비해 루프트바페는 병력이든 군수품이든 수송임무라면 맡겨주기만 한다면, 우리는 해낸다는 자신감에 충만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나중에 독소전에서 성공하기 힘든 여건에도 불구하고 스탈린그라드 수송임무로 독일 6군을 살릴 수 있다고 괴링이 허풍을 떨게되는 무모한 자신감을 불러 일으키는 촉매가 되기도 한다. 또 처음 실전 투입된 독일 공수부대의 초반 활약이 노르웨이에서 돋보였는데, 이것은 얼마후 전개될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 침공에서 역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어 히틀러의 든든한 오른팔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이런 일련의 성공 역시 그에 대한 지나친 과대평가를 유발했고, 후에 크레타섬에서의 무모한 작전을 시도케 하는 첫발이 되기도 했으니 새옹지마라고나 할까?  한편 영국에서는 유화정책으로 일관하던 체임벌린 수상이 노르웨이를 잃은 책임을 지고 사임했으며, 대독 강경론을 지속적으로 외쳐온 윈스턴 처칠이 후임 수상으로 추대되어, 독일과의 일전을 진두 지휘케 된다. 그러나 전쟁의 불길은 설원의 피요르드를 넘어, 거대한 아르덴느를 이미 넘어 버린 뒤였다. 그럼 다음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 항공전 편도 기대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