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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격전의 서막

대한인 2014. 2. 6. 05:14

바르샤바를 향한 악마들의 야합

 
1939년 8월, 히틀러와 스탈린은 상호 불가침 조약에 서명하게 된다(바로 옆사진....에서 웃고 있는 스탈린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이 소련이란 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히틀러가 멸종되어야할 인종으로 낙점한 족속들 중 유태인 다음으로 제 2 순위에 올라 있는 슬라브족에서도 우두머리 맹주국이 아니던가? 그리고 히틀러가 숙원처럼 말하던 레벤스라움(Lebensraum)이 장차 위치하게 될 곳 역시 소련의 거대한 땅덩이가 아닌가?
 
히틀러는 게르만족의 혈통적 보존과 영원한 군림을 위해, 드넓은 농경지 우크라이나를 위시한 자원의 보고 소련의 끝없는 초원이 필요로 했다. 그러나 소련이 비록 증오스럽기 그지 없고, 마지막에는 일전을 벌일 상대였지만, 히틀러는 그 시기를 서유럽 석권 후로 미루었고, 그때까지는 달갑잖지만 시베리아의 흑곰과 손을 잡았던 것이다. 이 놈의 속 모를 흑곰이 언제 자신의 등에 비수를 꼽을 지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서로의 이익을 위해, 끝내 섞일 수 없는 하늘이 낸 두 천적은 어거지 웃음을 보이며 서로의 손을 맞잡은 것이다. 한마디로 악마들의 야합 그 자체였다.
 
바둑을 두어나가다 보면, 초반의 포석 중 가장 중요한 격언 중 하나가  "적이 강한 곳에서 시작하지 말라"는 것이다. 즉 상대의 돌이 강력히 포진한 곳에 처음부터 뛰어 들었다가는 양쪽의 협공을 받아, 자신이 세력 거점을 선점하기도 전에, 포위된 돌들을 살리느라 정신이 없게 되고, 적은 협공을 하면서, 자신의 요소에 세력을 확장해 나가게 되니 말이다. 이런 바둑의 포석 전략은 실제의 전쟁에서도 거의 똑같이 적용된다고 볼 수 있다. 독일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강력한 자신의 적은 프랑스, 영국, 소련이었다.
 
일단 소련과 불가침 조약으로써, 임시방편이나마 동지로 만들었지만, 처음부터 프랑스를 침공할 꿈은 꾸지 못했다. 즉 독일과 국경을 맞다은 나라 중 상대적으로 강력한 프랑스를 첫 공략 상대로 삼을 경우,  비록 승리할 수 있을 지 몰라도, 초반부터 적잖은 피해를 감수해야만 하고, 만일에 하나 그 기간이 길어지기라도 한다면, 약소국이기는 하지만 배후에 남아있는 국가들이 전부 적으로 돌변해 힘을 모아 자신의 배후를 공격해 올 수도 있다. 일차대전 소모전의 대명사인 참호전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는 구상 중인 기갑전력을 이용한 기동전을 시도해야 했는데, 이 역시 아직 실전에서 완벽히 검증되지도 않은 터라, 프랑스에 곧바로 적용하기에는 불안했다. 손자병법에도 나와있는 "약한 적을 먼저 공격한다"라는 전장의 법칙은 독일의 초기 전략의 핵이되었고, 드디어 첫 침공의 상대로 폴란드를 지목하게 된다.   
 
 
[지도] 단쯔히 회랑, 혹은 폴란드 회랑(Polish corridor)를 잘 보여주는 지도... 이 회랑에 의해 동프러시아(East Prussia)땅이 독일 본토와 단절되어 버린 형국이되었다.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한 것이었으나 어부지리로 단쯔히(발틱해에 접한 폴란드 회랑의 항구도시)를 비롯한 회랑을 차지한 폴란드는 독일에겐 눈의 가시였다.
 
 
폴란드는 중유럽에서 동유럽에 걸쳐있는 국가로, 중세에는 그 위세가 대단했던 강국이었으나, 18세기에 접어들어 주위 여러 나라들에 의해 국토가 분활되어 나라 잃은 섦움을 많이 격은 약소국으로 전락했었다. 서북쪽의 영토는 독일 통일의 근간이 되는 프러시아 제국의 손에, 남쪽은 오스트리아에게, 그리고 나머지 동쪽은 러시아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 이민족의 통치가 20세기 초까지 근 200년간 지속된 것이다. 우리가 잘 아는 퀴리부인의 어릴 적 일화를 보면 이 시절의 폴란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즉 러시아 장학관이 이 나라의 군주가 누구냐는 질문에 어린 퀴리 부인은 "러시아의 짜르(황제)"라고 대답함으로써 장학관은 흡족해 돌아갔고, 어린 소녀는 선생님의 품으로 달려가 "저는 폴란드 사람이에요"하고 말하며 흐느꼈다는 일화..... 어쨌든,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 통치하에 반세기를 보낸것에 비해, 폴란드인들은 200년이란 세월을 주변국의 통치를 받았으니, 그 섦움이 오죽했을까?
 
그러던 중 폴란드인들이 그렇게도 염원하던 독립은 우연한 기회에 달성되게 된다. 즉 일차대전이 끝난후, 독일에 대한 견제의 차원에서 독일 동부에 잊혀질 뻔 한 국가 폴란드의 재건이 연합국들의 담합으로 이루어진것이다. 특히 승전국들은 독일 제 2제국을 이끌어낸 프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갈갈히 찢어 놓기를 원했고, 항구도시 단쯔히(Danzig)를 폴란드에 예속시키면서, 결과적으로 동프러시아 땅 일부가 폴란드 단쯔히의 회랑에 의해 독일 본토에서 그 연결이 끊겨버리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독일의 입장에서 보자면, 폴란드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일 수 밖에 없었다. 자신들의 정신적인 고향인 프러시아의 일부를 그것도 어부지리로 차지한 국가가 바로 폴란드였으니 말이다.
 
 
 

비극으로 끝난 수투카의 마지막 리허설

 
1939년 8월 15일.... 폴란드 침공 15일전.....
 
코트부스(Cottbus) 비행기지... 수투카 전술 폭격기들이 차례차례 엔진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볼프람 폰 리흐토펜(Wolfram von Richtofen) 장군 휘하 편대장 발터 지겔(Walter Siegel) 대위의 지휘 아래 수투카들이 실전 훈련을 위해 출격 준비 중이었다. 이미 스페인 내전을 통해 수투카의 위용은 증명이 되었지만, 대폴란드전을 며칠 앞둔 오늘, 이 연습비행은 히틀러를 비롯한 전공군 아니 육군의 고위층까지 촉각을 곤두 세우고 결과에 주목하고 있었다. 앞으로 벌어질 폴란드의 전투에서 수투카의 역할의 중요도가 그만큼 큰 기대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후 기상 정찰기들의 보고가 들어왔다. "연습 폭격 지점 상공 1800 m 가지 짙은 구름이 내려 앉아 있지만, 지상의 시계는 좋음...."
 
 
 
 
곧바로 30 여대의 수투카들은 이륙하기 시작했고, 고도를 높였다. 드디어 폭격지점.... 정찰기의 보고대로 짙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실제 투하용 폭탄 대신 커다란 시멘트 포대를 하나씩을 동체 아래에 매단 수투카들은 지겔 대위의 뒤를 따라 한대씩 급강하를 시작했다. 구름속을 뚫고 하강.... 10초.. 15초... 짙은 구름이 이제 끝나고 지면이 눈앞에 펼쳐져야 하는데.... 지겔 대위는 이 급박한 순간에도 폭격 목표를 육안에 확인하고 명중탄을 날려야만 했다. 전군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다. 그리고 모든 편대원들이 자신의 꼬리를 따라 엄청난 속도로 하강하고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시간이 지날 수록 지겔 대위의 이마에는 식은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제 지상이 저 멀리 보여야 하는데...  바로 그때 새하얀 구름이 히미하게 겉히는가 싶더니 짙은 갈색의 배경이 갑자기 눈앞을 꽉 채워 버렸다. 앗!!  바로 지면이......  너무도 순식간이었다. 구름과 더불어 안개가 자욱한 날씨로 이미 지겔의 수투카는 지상 100m 상공까지 급하강해 내려온 후였다. "급상승...급상승!!" 지겔 대위는 무전기로 편대원들에게 정신없이 외치며, 있는 힘을 다해 조종간을 뒤로 잡아 당겼다. 이 낮은 고도에서...  하늘이 도왔을까? 지겔은 가까스로 지면 충돌을 모면하고 재상승에 성공했다. 그러나 편대원들 중 많은 수는 상승도 못해보고 지상에 자신들의 수투카를 그대로 꽂아 버리고 말았다. 연이은 폭발음과 함께 차례차례 13 기에 달하는 수투카들이 검은 연기를 뿜어대는 잔해로 변해 버렸다.
 
조종사와 후방사수 26명이 이 단 한 번의 연습에 희생되고 만 것이다. 얼마후 보고를 들은 히틀러는 창밖을 10 여분간 응시하며 말을 잃었다...... 비극으로 끝나버린 수투카의 개전 전 리허설...... 그러나 이런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폴란드를 위시한 서유럽 전격전의 선봉에는 수투카가 있었고, 그들의 성공 후 치솟는 명성은 이런 비극이 있었는지 조차 잊게 만들기 충분했다.........  

 
 
 
 
 
이차대전을 알리는 첫 함포 사격

 
[사진] 홀스타인호의 단쯔히 항구에 대한 함포 사격...이차대전 시작의 상징적 포성이었다.
 
 
1939년 8월 31일, 독일의 친위대 대원들은 폴란드 군복으로 갈아입고는, 폴란드 접경 글리비츠(Gliewitz)에 위치한 독일 라디오 방송국을 의도적으로 공격했다. 이것은 폴란드가 먼저 꼬투리를 제공했다는 대의명분을 위해 계획된 사건이었다.
 
드디어 개전 첫날 1939년 9월 1일, 폴란드의 북부 도시 단쯔히 항구.... 폴란드 단쯔히항을 친선차 방문해 정박해있던 한 척의 독일 군함이 있었다. 일차대전 전함이었고 독일의 해군 연습함으로 운용중이던 슐레스비히 홀스타인(Schleswig Holstein)호....  홀스타인호의 28 cm 직경 주포가 무언가를 조준하며 서서히 돌아가고 있었다. 그리곤 단쯔히 항만 시설을 향해 첫 포문을 열었다. 이 거포의 일제사격은 이차대전의 개전을 알리는 상징적인 첫 함포 사격이 된 것이다. 히틀러의 입장에서 보면, 첫 포격의 대상으로 프러시아 제국을 상징적으로 갈라놓은 단쯔히를 선택한 것은 어찌보면 너무도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대폴란드 작전의 첫 공습에 나선 것은 Ju 87 수투카 급강하 폭격기였다. 독일의 주도면밀함을 보여주듯 이들은 슐레스비히 홀스타인호의 함포 사격이 시작되기 20분전에 이미 기지에서 발진했고, 폴란드의 천혜의 자연 장애물인 비스툴라(Vistula)강을 가로지르는 디르쇼(Dirschau)의 철교를 향해 곧장 날아갔다. 3대의 수투카의 편대장 브루노 딜리(Bruno Dilley) 대위가 편대장기에 탑승해 각기 250 kg 투하용 폭탄 한발과 50 kg 폭탄 4발씩을 싣고, 폴란드에 첫 폭탄을 안겨주기 위해 전속력으로 날아갔다.
 
그런데 이들의 임무는 특이하게도 철교 폭파가 아니었다. 쇄도해올 독일 지상군의 쾌속 진격을 위해, 오히려 철교를 폭파하려는 폴란드 공병의 손에서 디르쇼 철교를 지켜내는 것이었다. 철교에는 이런 날을 예상하고, 폴란드가 미리 설치해둔 폭파장치가 장착되어 있었고, 여차하면 독일의 군용 수송 열차들의 진로를 막기 위해 폭파시키기로 되어있었다. 수투카 편대는 철교와 폴란드 공병기지 간에 매설된 폭파 케이블을 끊어버리고자 한것이다. 편대장 딜리 대위는 고도 10 m의 초저공비행으로 목표물에 접근해, 정확히 케이블과 공병 폭파시설을 파괴시켜 버렸다. 그러나 얼마후 도착한 독일의 군 수송열차는 디르쇼 철교 앞에서 멈춰서야 했다. 비록 기존의 교량 폭파 시설이 수투카에 파괴되어 버렸지만, 용감한 폴란드 공병들의 목숨을 건 분투로 독일 지상군이 당도하기전 디르쇼 철교는 파괴되고만 것이다. 그러나 이런 폴란드의 노력도 독일의 진격을 늦출 순 없었다. 독일 공병들은 신속히 교량복구에 들어갔고, 루프트바페의 엄호를 받으며, 폴란드 국경 안으로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갔으며, 전격전 시대의 서막이 오른것이다.
 
 
[사진] 1939년 9월 폴란드전 당시의 히틀러와 볼프람 폰 리흐토펜 장군...   
 
 
9월 1일 독일에의한 폴란드 기습 공격은 전세계를 놀라게 했다. 특히 유럽의 맹주를 자처하던 일차대전의 승전국 영국과 프랑스에게는 크나큰 충격이었다. 물론 독일의 입장도 그리 편치만은 않았다. 즉 히틀러에게도 폴란드 공격은 하나의 모험이었다. 배후에 프랑스나 영국이 독일의 행동에 어떤 식으로 반응해 올지가 미지수였기 때문에.....
 
이런 당시의 정황을 잘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즉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을 시작된 직후,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는 난데 없는 공습 싸이렌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베를린의 시민들은 적기의 출현에 경악을 금치 못했고, 방공호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얼마후, 프랑스에서 날아오는 적기라고 생각했던 미확인 항공기가 폴란드 공습을 마치고 귀환하는 He 111기들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시민들 뿐만 아니라 독일 지휘부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프랑스를 견제하던 독일이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비슷한 경우이기는 했으나, 영국의 경우는 좀 더 심각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1939년 9월 1일, 폴란드 침공과 동시에 영국은 독일에 9월 3일까지 폴란드의 국경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것이 관철되지 않자 9월 3일 곧바로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당시 영국은 해상활동을 통해 독일의 항구들을 봉쇄하는 등 독일군에게 압박을 가했지만, 정작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프랑스는 거의 아무런 군사적 행동을 취하지 않았으며, 실제로도 독일과의 전쟁 의사가 없음을 나타냈다. 그리고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 포고 후 3일 뒤인 9월 6일, 영국 해안선 근방 레이더 기지의 스크린에 미확인 항공기가 출현했다. 이들의 항로는 독일의 공습 예상 방향과 일치함이 확인되었고, 런던에는 일제히 공습 경보가 발령된 것이다. 런던 시민들은 1차대전 당시 독일 대형 비행선들의 공습을 경험한 터라, 그 공포감은 더욱 심했다.
 
곧바로 스피트화이어 편대가 이륙했고, 미확인 비행 편대에 접근했다. 몇분후 레이더 스크린에는 적기로 보이는 미확인 비행대의 숫자가 더 증가해 이젠 12기에 달했다. 오전 6시 55분... 영국 테임즈강 하구 상공은 전형적인 영국의 먹구름과 안개로 가득했고, 막 이륙한 제 74 전투 비행대의 스피트화이어기들은 적기의 위치를 찾아 헤메고 있었다. 얼마후 이들은 자신들 보다 저고도에서 비행중인 "적기 편대"를 발견했다. 짙은 안개와 구름으로 그 기종을 판별할 수 없었지만, 고도와 선제 공격권을 쥐고 있는 스피트화이어기들은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수 없었고, 곧바로 급강하 공격에 나섰다. 기습 공격에 일시에 두대의 "적기"가 화염에 휩싸인 채 런던 외각으로 격추되었다.
 
바로 그때 스피트화이어기들의 무전기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격 중지.... 사격 중지... 그들은 아군이다!" 이날 적기로 오인되고 격추까지 당한 전투기는 영국 제 56 전투 비행대 소속 허리케인 전투기들이었다. 후에 밝혀진 것이지만, 이날 영국 레이더 기지의 감시망이 고장을 일으켰고, 스크린에 항공기 진행 방향이 180도 바뀌어 나타났던 것이다. 이날 격추에 성공한 두 스피트화이어 조종사들은 다행히 무협의로 풀려났지만, 스피트화이어에 의한 첫격추는 적이 아니라 아군이라는 오명을 안게 되었고, 이후 56 비행대와 74 비행대는 거의 원수지간이 되고 만다. 아무튼 이일로 영국의 휴다우딩은 난감함을 금치 못했다. 훗날 영국을 구하게 되는 레이더도 처음 실용단계에서는 많은 시행착오를 격었던 것이다. 그럼 다시 폴란드 이야기를 해보자.
 
 
 

이차대전의 첫 공중전과 첫격추

 
9월 1일 개전 첫날, 이차대전의 첫 공중전이 벌어졌다. 폴란드 제 121 비행대 소속 PZL P.11기 3기가 폭격 임무를 마치고 귀환하는 독일의 Do-17 폭격기 편대를 발견했고, 출격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고도 300 m 지점에서 독일 이멜만 수투카 비행단(StG Stukageschwader Immelmann) 소속 프랑크 노이버트(Frank Neubert  좌측 사진)가 모는 수투카의 고공 기습 기총 사격에 폴란드 편대장의 PZL P.11 전투기가 공중 폭발을 일으키며 격추되어 버렸다. 이것이 이차대전 첫 공중전 격추로 기록되었다.
  
 
 
 
편대장기의 파편이 날리는 모습을 목격하면서도, 폴란드 조종사 브라덱 그니스(Wladek Gnys   우측 사진)는 계속 상승을 시도했고, 수투카기는 근접 공중전에 불리함을 깨닫고 회피에 들어갔다. 이때를 놓칠새라 그니스는 Do-17 폭격기를 쫒기 시작했다. 7.7 mm 기총을 거의 다 쏟아 부으며, 공격에 나서 두대의 Do-17기에 명중탄을 작열시켰지만, 고속으로 달아나는 폭격기들을 따라 잡을 수 없어, 기지로 귀환해야 했다.
 
그러나 상당한 데미지를 입은 Do-17기들은 그니스의 시야에서 사라진 직후, 약 100 m 간격을 두고 모두 격추되고 만다. 이들은 제 77 폭격 비행단(KG 77  Kampfgeschwader) 소속의 폭격기로 이차대전 루프트바페의 첫 피격추로 기록되었다.

 
 
 
 
공포와 충격 - 전격전

 
[사진] 폴란드 육군의 7 TP 전차... 성능면에서 당시 독일 전차보다 우위에 있었으나 숫적 열세와,  전술적 낙후로 제대로 힘도 못써보고 무너지고 만다. 
 
 
당시 폴란드의 전반적인 전력을 살펴보자. 병력 백만, 경전차 900 대, 야포 4300 문, 항공기 약 400 여대... 일견 꽤 대단한 군사력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폴란드전 당시 독일의 전력을 듣는다면, 생각이 조금 달라질 것이다. 독일 지상군 백85만명, 전차 3100 대, 야포 10000 문, 항공기 1500 여대....
 
대충 잡아봐도 숫적으로만 더블 스코어를 껑충 뛰어 넘는다. 그런데 이 보다 더 심각한 것은 성능의 문제였다. 물론 폴란드전 당시 독일 기갑사단의 주축인 1호전차나 2호전차가 후기형들에 비해 장갑이 빈약하고 화력이 떨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이런 전차들을 보고 있자면, 이동용 기관총 내지는 기관포 탑재 차량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가까울 것이다. 우리가 흔히 상상하는 대구경 포를 엊은 그런 후기형 전차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결전에서 비교하게 되는 우열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으로 결정이 되어 버린다. 즉 폴란드가 보유한 기갑 전력 역시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했다. 단 폴란드 기갑전력의 최정예에 해당하는 7 TP라는 경전차가 있었는데, 이것은 독일의 1호전차나 2호전차와는 비교가 되지않는 37mm 구경의 대전차무기를 탑재하고 있었다. 개전당시 단 137대만이 운용중이라 숫적으로 상대가 되지 못했을 뿐아니라, 전술적으로 역부족이었다.
 
물론 폴란드도 독일의 부활을 눈치 채지 못한 것은 아니었다. 폴란드는 1930년 경부터 이미 자체 방어 계획 일명 N-R 방어전을 구상하고 여러차례 워게임 등을 시행해 보기도 했다. N계획이란 Nazi의 서부전선으로의 침공을 예상한 방어계획이었고, R계획이란 Russia의 동부전선을 통한 침공 예상 방어전이었다. 또 나치와 러시아의 협공인 N-R 작전도 확률의 경우의 수로 넣어 두고 있었다. 그러나 시행해 본 워게임의 결과는 참담함 그 자체였고, 어쩔 수 없이라도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자연스럽게 N-R 계획의 주요 골자는 적의 침공 속도를 늦추는 데 촛점이 맞춰졌고, 시간을 버는 사이 프랑스와 영국이 독일의 배후를 공격함으로써 독일의 전력을 양분시키는 목적이었다. 실제로 프랑스는 조약을 통해 독일의 폴란드 침공시 개시일로 부터 15일 내에 독일의 서부 전선을 공격하기로 약속되어 있었다(그러나 1939년 9월 폴란드가 나치에 짓밟힐 때도, 또 1940년 5월까지도 프랑스는 전쟁선포가 무색하게도 어떠한 적극적인 행동을 취하지 않았고, 자신도 폴란드의 뒤를 따라 나치에게 어이 없이 손을 들어 버리고 만다).
 
당시 폴란드도 자체 방어를 위해 전력을 현대화해 나가는 과도기였다. 말이 과도기지 엄밀히 말해 군의 재구성해 나가는 첫발을 막 디딘 정도라고나 할까? 또 일부 부대가 장비체계를 시대에 맞춰 새롭게 태어났다고 해도, 폴란드군에게는 결정적인 아킬레스건이 있었다. 자동화된 수송 수단의 부재... 대규모 병력이 있어도 이들을 적시적소에 이동시킬 수단이 없었다. 예를 들어 폴란드 한개의 사단이 보유한 트럭의 댓수가 독일 일개 대대가 운용하는 트럭 숫자의 절반에도 못미쳤다.
 
물론 수송열차라는 것이 있었지만, 폴란드 선로의 상당 부분 건설했던 것이 독일이었고, 손바닥의 손금 보듯 그 구석구석까지 알고 있는 독일 공군의 눈앞에서 병력을 가득 실은 열차는 손쉬운 먹이감 정도 밖에 안된다. 폴란드는 전력을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보병들의 발바닥과 말에 고삐를 메고 수레를 끌어 이동해야만 했다. 만약 독일이 일시에 공격해 오더라도 그 공격 루트를 정확히 파악해 빠른 시간내에 병력을 집결시킬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것은 꿈같은 이야기였다. 어쩔 수 없이 폴란드는 수천 킬로미터나 되는 접경에 병력을 분산시켜 놓아야했다. 분산되며 엷어지고 엷어지면 약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 결정적으로 폴란드의 경계 경보의 전달 체계 역시 초기 관측병에 의한 발견과 조잡한 통신망을 통해 전달되는 낙후된 방식이어서, 초기의 독일의 기습에 적절히 대처한다는 것은 꿈조차 꾸지 못할 지경이었으며, 통신망의 중간이 파괴되면, 혼란이 가중되는 약점을 안고 있었다. 폴란드가 안고 있던 맹점을 알아보았고, 이제 독일의 전격전의 골격에 대해 잠시 알아보기로 하자.
 
 
 
[사진] 폴란드전의 독일 주력 전차 중 하나였던 제 1호 전차의 질주 모습.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탱크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장갑차에 더 가까웠다.
 
 
세계 어느 나라든 고급 장교를 꿈꾸는 사관학교 생도들이 배우게 되는 전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차대전 독일의 전격전일 것이다. 패기에 찬 젊은 생도들의 뇌리에 너무도 매력적으로 들어와 일순간 눈과 마음을 빼어버리고 마는 단어 "전격전".... 그들은 상상속에서는 구데리안이기도 롬멜이기도 했을 것이다. 단 한번이라도 말이다. 또 전사 매니아나 학문적인 경지로 끌어올려 전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들 중에서도 많은 수가 이차대전사에 첫 관심을 갖게 된 요인이 경이에 가깝던 전격전의 묘한 매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원래 전격전(Blitzkrieg)이란 말은 독일어로 번개를 뜻하는 Blitz와 전쟁 Krieg의 합성어로 그 파생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독일이 아니라, 1939년 폴란드, 1940년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에서 수행된 놀라운 독일의 승리가 주는 충격으로 서방 기자들이 만들어낸 신조어였다고 한다. 쉽게 말해 전격전이란 육공 합동 작전으로 제공권을 거머쥐채로 기갑전력을 앞세워 적의 방어진을 순식간에 뚫어 버리고, 적의 신경계통을 마비 시킴으로써, 물리적 충격 뿐 아니라 정신적인 공포를 유발해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전술이다.
 
실제로 폴란드에서 펼쳐진 독일의 전격전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힘의 분산에 대한 힘의 응집력이 보여준 응징"이라 할 수 있겠다. 일차대전 당시 평행하게 늘어선 기나긴 참호를 사이에 두고, 끝없는 소모전을 벌였고, 끝내 패망했던 독일은 이제는 기동성이 뛰어난 전차와 항공기를 바탕으로 새로운 개념의 육공 합동 작전 전격전을 시작한 것이다. 말 그대로 속도를 생명으로, 전력을 날카로운 송곳 끝에 집중시켜, 전진을 뚫어버리고, 후방으로 파고들었고, 뒤 따르는 후속 부대와의 협력으로 전방의 적을 고립시켜 나갔던 것이다.
 
 
 

전격전의 개념

 
전격전의 흐름을 보기좋게 정리한 내용이 있어 설명하려한다. 물론 이것 역시 전격전이 일어난 후 결과와 그 과정을 짜깁기해 내놓은 이론이지만 1939년과 1941년에 펼쳐진 유럽대륙의 전쟁 상황을 잘 묘사해 준다.  
 
 (1) 공군력으로 제공권을 차지하고, 최전방 전선과 더불어 후방 주요 거점(주도로, 비행장, 통신시설)을 기습 공습한다. 동시에 적과 대치한 모든 전선에서 일시에 적과 교전에 들어간다. 여기서 모든 전선을 대상으로 한 이유는 주공격 루트는 이미 계획단계에서 정해져 있지만, 적으로 하여금 어떤 곳으로 아군의 기갑전력이 돌파할 지 예측을 불가능케 해, 방어를 위한 준비 단계부터 혼란을 주기 위해서다.
 
(2) 기갑전력을 한곳에 집중시키고, 적의 최전방 방어선을 일시에 돌파하여 적후방 깊숙히 전진한다. 기갑전력의 뒤를 기계화 부대가 따라가며 적과 교전에 들어가, 적의 방어진 구축을 저지한다. 이후 보병부대가 지속적으로 적과 교전에 들어가 적의 혼란을 가중시켜 적의 퇴로를 차단한다.
 
(3) 적에 대한 공격을 마무리 하기 위해, 보병부대와 기타 지원부대가 적의 취약한 옆구리를 공격함으로써 인접한 다른 부대와 연계해 협공 한다. 결과적으로 적은 포위되며, 전략적 요충을 아군에게 내놓게 된다.
 
(4) 기계화 전력은 적 후방 더욱 깊숙히 밀고나가 적을 측면에서 포위하고 후방을 마비시킴으로써 적의 후퇴와 방어선 구축을 저지한다.
 
(5) 주 기갑전력은 다른 부대와 연계해 적을 양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