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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밤과 스페인이 남긴 것

대한인 2014. 2. 7. 04:29
슈밤의 탄생

 
[사진] 아돌프 갈란트의 스페인 내전 참전 사진.... Bf 109의 달인이었지만 스페인에서는 Bf 109 로 비행한 적은 없었고, He 51에 탑승해 지상공격 임무에 임해, 갈란트의 스페인 내전 격추 스코어는 단 한 대도 기록되지 못했다.
 
1938년 초까지만 해도 야그드그루페 88 예하 아돌프 갈란트 휘하의 제 1 비행중대 역시 He-51 복엽기를 주력기로 삼고 있었다. 그러던 1938년 4월, MG 17 기관총 4정으로 화력을 강화한 새로운 Bf 109 C형이 제 1중대에 보급되기 시작했고, 갈란트의 자리에 베르너 뮐더스가 새로운 비행중대장으로 임명되었다.
 
뮐더스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공중전의 핵을 간파했고, 전혀 새로운 편대전술을 개발해내기에 이른다. 당시 국민당과 공화당 공군 모두 공히 일차대전 때부터 내려오던 V형 대형을 기본 편대 대형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V형 대형이란 3대의 전투기가 서로 약 30 m 정도의 좁은 간격을 두고 3각형을 이루는 대형이었는데, 속도보다는 기동성이 돋보이는 복엽기에서는 유용한 대형일지 모르나 단엽기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즉 복엽기들이라면, 편대 비행중 적기의 공격을 받을 경우 V형의 각 꼭지점에서 전투기들이 일시에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적기와 각기 일대일 공중전에 들어가는데, 공중전 필드 자체가 협소할 수 밖에 없는 복엽기에게는 이 V형 대형이 안성 맞춤이었다.
 
그러나 단엽기의 경우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즉 단엽기들이 밀집대형으로 비행하기 위해서는 아군기끼리 서로 공중충돌의 위험을 줄이기 위해, 기본적으로 속력을 낮추어야 했으며, 고속 편대 비행시에는 옆에 바짝 붙어 움직이는 동료기와의 거리에 신경 쓰느라, 가장 중요한 사주경계가 소홀해질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었다. 게다가 V형 편대형은 수평적인 개념의 삼각형으로 상하라는 개념이 부족했다.
 
[사진] 베르너 뮐더스, 스페인내전에 자원한 1938년 7월부터 1938년 11월까지 Bf 109를 이용해 총 14기의 격추를 달성한다. (4기의 I-15 복엽기, 10기의 I-16 전투기) 그는 격추 기록 뿐 아니라, 슈밤대형을 완성해 실전에 사용하고 보급시킨 전술까이기도 했다.
 
 
뮐더스는 당시까지 편대구성의 기본 단위인 3대(Keten)라는 개념을 무너뜨리고, 두대의 전투기로 이루어진 로테(Rotte)를 기본틀로 2개의 로테로 이루어진 총 4기의 편대형인 슈밤(Schwarm)개념을 생각해냈다. 또 그는 이전까지 약 30 m에 불과하던 편대기 사이의 간격을 180 - 200 m 정도까지 대폭 늘였으며, 두 로테에는 고도차를 두어, 후방에 있는 로테가 좀 더 높은 고도로 비행하도록 고안했다. 한개의 슈밤이 400 -500 m 정도의 넓이를 커버할 수 있었으며, 각 편대원은 자신의 시계의 사각을 서로 보완해주는 효과를 보았다.
 
슈밤 대형은 공격 뿐 아니라 방어에 있어서도 강한 면모를 보였다. 가령 적기가 한개의 슈밤을 측면공격한다고 생각해 보자. 공격받은 로테는 일단 적기의 공격방향쪽으로 선회에 들어간다. 로테 중 적기에 가장 가까운 전투기 한대는 적의 추격을 받게되지만, 그와 로테를 이루는 전투기가 동시에 선회하면서, 적기 후방 200 m 거리에 위치하게된다. 즉 로테는 언제나 같이 움직이며, 한대를 미끼로 아군기의 공격찬스를 주어, 적기를 샌드위치 시키게 되는 것이다. 또 후방의 로테는 고고도에서 태양빛에 은신해 있다가, 적기가 미처 발견하기도 전에 적을 강타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더 주목할 것이 있다. 편대가 일직선으로 날아갈때는 별문제가 없지만, 만약 항로를 바꿀 때는 어떻게 할까? V형 대형은 편대기들이 밀집해 있어 편대 방향전환에 별 문제가 없었다. 즉 서로 충돌하는 것만 방지하면, 편대기 모두가 거의 비슷한 속도를 유지한 채 선회가 가능했다. 그러나 편대기 간격이 200 m에 달하는 슈밤대형의 경우라면, 선회하는 원의 바깥쪽 편대기는 전속력을 내야하는 반면, 선회원 안쪽의 편대기는 스톨이 걸릴 정도로 속도를 죽여야 했다. 그렇다면, 단엽 전투기의 장점과 에너지원을 희생해야만 될까? 뮐더스는 고심 끝에 정답을 찾아냈다.
 
즉 선회원에서 가장 바깥쪽의 전투기 부터 시작해 차례로 시간차를 두고 선회를 하는 것이다. 이것은 크로스 오버 턴(Cross over turn, 우측 그림) 편대 기동으로, 선회를 마치고 나면, 처음 선회전과 달리 후방 로테의 위치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반대로 넘어가게 될뿐, 짧은 시간안에 다시 슈밤 대형을 이룰수 있다. 베르너 뮐더스는 이 기동법을 자신의 영감에의해 독창적으로 고안하기는 했지만, 사실 엄밀히 말해 이 기동의 첫 시도는 1918년 영국 공군에서 이미 시도된 적이있었다. 그러나 앞에 설명했듯, V형대형의 간격이 워낙 좁아, 편대기간의 충돌의 위험성이 있어, 1922년에 접어들면서 크로스 오버 턴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그러나 뮐더스는 진흙에 묻혀 잊혀진 진주를 찾아낸 것이다. 그리고 스페인내전에서 실전 사용되면서 하나의 완벽한 편대형으로 자리잡게 된다.
 
 
 
 
 
 
에브로의 마지막 반격

 
[지도] 파란색으로 그려진 진영이 공화당 세력권. 에브로 강을 기준으로 국민당에 의해 남북으로 양단된 모습이다. 공화당은 1938년 중반 양단된 남북의 거점을 연결하기 위해 마지막 필사의 여력을 다해 에브로 강 도하를 시도하게 되는데.....
 
 
콘돌군단의 제공권을 등에 업은 국민군 지상군의 반격이 연승을 거두면서, 공화군은 당초 계획한 스페인 남북 양단으로 국민당 세력을 고립시킨다는 목표는 전면 백지화되었고, 상황은 아예 역전되어 공화군은 수세로 몰리기 시작해, 해가 바뀌어 1938년 초에 이르러서는 중부 스페인 마저 국민당의 손아귀에 떨어졌다. 공화군의 비행기지를 샅샅이 찾아내 맹폭을 성공시킴으로써 제공권을 거머쥔 콘돌군단의 다음 목표는 공화군의 교통과 보급의 요충들이었다.
 
대표적으로 공화군 세력의 중심지인 에브로(Ebro) 강의 암포스타(Amposta) 교량을 공격해 공화군의 보급과 병력 보충을 저지하면서, 1938년 3월에는 하루평균 36 km 라는 놀라운 진격 속도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탈리아와 스페인 국민군 기계화 부대를 공중 호위하며 단행된 일련의 직견은 몇년 후 2차대전 서유럽을 휩쓴 전격전의 시작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의 대성과였다. 2차대전 당시 아르덴느를 돌파해 파죽지세로 서북상해, 북프랑스 해안에 도달했던 구데리안의 기갑부대처럼, 1938년 4월 14일 국민국은 동부 스페인의 지중해 해안까지 돌파할 수 있었고, 이로써 공화군의 세력은 다시 남북으로 허리가 잘려 양단되어 버렸다.
 
  
[사진] 에브로 강 도하작전에 나선 스페인 공화군들의 모습... 크고 작은 배로 강기슭까지 타고온후 배는 다시 병력 수송을 위해 돌아가고 배에서 내린 병사들은 강변을 향해 걸어간다. 그러나 에브로의 공세는 결론적으로 공화군의 어쩔 수 없는 마지막 저항에 가까운 실패한 공세가 되어버린다.
  
 
1938년 7월말 공화군은 남북으로 양단된 자신의 거점 두곳을 연결하기 위해, 그 중심을 흐르는 에브로 강 도하작전을 계획하게 된다. 만약 도하가 성공하여 중앙거점을 확보한다면, 남북 양쪽의 진형이 동시에 고립에서 풀릴 뿐 아니라, 너무 깊숙히 진격해온 국민군 주력을 역으로 포위할 수 있게 된다. 이번 작전은 공화군에게는 최후의 대반격이 될 것이며, 이전투가 전쟁의 마지막 일전이 될 운명에 놓인 것이다. 드디어 1938년 7월 24일 저녁 공화군 10만여명의 대병력이 탱크와 야포의 호위를 받으며 에브로 강 도하 작전을 시작했다. 불의의 기습작전은 처음에는 매우 성공적이었다. 공화군은 무사히 강을 넘어 반대편 강뚝에 방어선 구축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작전 역시 콘돌군단의 공세로 실패로 돌아가고 말 운명이었으니, 공화군에게 있어, 콘돌군단의 항공기는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음에 틀림없다. 남부 스페인에 주둔하고 있던 콘돌군단의 항공기들이 7월말 에브로 강으로 일시에 날아오면서, 다시 전세는 역전되고 만 것이다. Bf 109는 7월말과 8월초 사이 29기의 공화군 항공기를 격추시킴으로써, Ju 87 스투카와 Hs 123 지상공격기들이 아무런 방해없이 지상 공격에 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도하를 성공시켰지만, 재보급을 위해 공화군은 다수의 뗏목과 소형보트로 계속적인 도하를 시도해야 했는데, 이들은 번번히 수투카들의 송곳같이 날카롭고 정확한 급강하 폭격에 시달려야만 했다.
 
수평 전술 폭격기들의 융단폭격 보다도 훨씬 정확도가 높은 수투카들의 일명 "핀 포인트 폭격(Pin Point bombing)"은 당하는 공화군 뿐 아니라, 작전을 시도한 콘돌군단 수뇌부 마저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했다. 수투카들은 하루 2 - 4회의 출격을 기록하며, 에브로 강 맹폭을 지속했고, 고공에서 급강하하며, 특유의 굉음을 내는 이들 폭격기들은 공화군 병사들에게는 악마의 화신 그대로였다. 독일 공군은 실전에 투입 전에 수투카가 적의 지상군 방어 화력에 취약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에브로 강 작전에 투입된 수투카의 손실은 극소수에 불과했던 것이다. 내전 말에 접어들면서, 소련이 20 mm 에서 45 mm 대공포를 공화군에 원조하기 시작했지만, 이들은 수투카를 상대로 변변한 반격도 펼치지 못했다. 이렇게 되자 수투카 개발에 반대했던 볼프람 리흐토펜 마저도 수투카의 눈부신 전과에 매료되어 버렸고,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우데트(일차대전 이차대전)에 이은 수투카 맹신자로 변할 정도였다.
 
 
 
 
 
 
  
 
(상)  공화군에게는 공포의 화신이었던 Ju87 수투카의 편대 비행....
에브로강의 전투에서 보여준 수투카의 정밀 폭격은 리흐트펜마저도 수투카 맹신자로 바꾸어 놓는다.
 
(하) 이륙 준비중인 콘돌군단의 수투카... Ju 87 A 기종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런 일련의 성공이 독일 공군에게 잘못된 해석을 유발케 하니, 새옹지마라 할까? 즉 수투카가 제 몫을 하기 위해서는 제공권이 우선 받쳐주어야 한다는 극명한 사실이 독일 수뇌부의 머리 속에서 점점 흐려져 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스페인에서의 성공 이후였다. 물론 폴란드와 프랑스 등 서유럽 석권에 수투카가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승리의 선봉에 섰지만, 이 역시 제공권의 장악이 전제 되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후 영국의 항공전에서 적 요격기가 득실대는 무대에서 급강하 폭격기들이 얼마나 무력할 수 밖에 없는지를 참담한 출혈을 격고서야 깨닫게 될 운명이었던 것이다.
 
 
[사진] 격추되는 스페인 공화군의 전투기.. 프랑스의 드와르탱 (Dewortine)... 조종사는 다행히 낙하산 탈출에 성공한 모양이다. 당시 스페인 상공의 정황을 한 장으로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도하작전 성공후 군수품과 증원군 보충을 위해 도하를 시도하던 공화군의 보트와 뗏목들이 수투카의 맹폭으로 파괴되었고, 그나마 도하에 성공한 강뚝 반대편의 국민당군도 수투카기들이 뿌려대는 폭탄의 세례를 받으며,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들은 도하작전 후, 국민당의 후방으로 진격한다는 당초의 계획은 꿈도 못꾸었고, 깊이 참호를 파고, 필사의 저항을 하는 도리 밖에 없었다.
 
8월초가 되면서, 국민당은 항공 전력을 이곳에 집결했고 100여대의 전투기와 200 여대의 폭격기를 앞세우고, 고작해야 70여기에 불과한 공화국의 항공전력을 무력화해 나갔다. 끝내 공화군은 에브로 강 반대편을 포기하고 철수에 들어갔고, 도하작전에 기력을 쇠진해버린 뒤라, 1938년 12월 국민당군의 마지막 대공세를 막아낼 수 없었고 패주하면서 새해를 맞이해야 했다.
 
그리고 이후 두달 뒤인 1939년 1월 26일, 프랑코 국민당 군이 바르셀로나로 진격에 성공해, 함락시키자, 공화국 정부는 프랑스로 망명에 들어가게 된다. 그후에도 스페인에 남아 있던 공화국의 군대가 마지막까지 항전했으나, 1939년 3월 28일, 마드리드 마저 점령되면서, 4만에 달하는 공화군이 항복해, 32개월에 걸친 스페인 내전은 마침내 종결을 맞게된다.
 
 
 
 
 
 
스페인 내전의 영향

 
[사진] 독일 본국에 금의환향한 콘돌군단... 좌측이 볼프람 폰 리흐토펜.... 우측이 괴링의 모습. 루프트바페에게 이차대전 직전에 스페인의 경험 만큼 값진 경험은 없었다. 
 
 
1939년 5월 26일, 5000 명의 콘돌 군단의 장병들은 베를린으로 개선했고, 히틀러와 괴링의 영접을 받았다. 이들은 386기의 적기를 격추시켰으며, 이중 공중전에서 격추는 313기에 이르렀으며, 투하한 폭탄만도 2만 천톤에 달했다. 또 대공포에 의한 격추도 59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콘돌군단의 피해는 단 72기였으며, Bf 109와 Ju 87 스투카의 화려한 데뷰전을 치룬 것이며, 유럽 최강의 항공기라 자부하게 되었다.
 
특히 수투카는 공화군의 함정 8척을 격침시키고, 마지막 일전인 에브로강의 전투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림으로써 일약 루프트바페의 차세대 기대주로 떠오른 것이다. 콘돌군단 파견자 중 총 298명이 사망했는데, 이중 전투중 사망은 단 131명이었고, 나머지 167명은 사고나 병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살아 남은 많은 조종사들 중 자신의 기량을 드러내며, 에이스의 반열에 이미 오르게 되는 이들이 등장했다. 뮐더스가 14기 격추로 스페인 내전 독일 최고의 에이스에 등극했고, 발터 외사우(Walter Oesau)가 8기, 빌헬름 발트하사(Wilhelm Balthasar)가 7기, 헤르만 그라브만(Hermann Grabmann)이 6기, 또 전설의 에이스 군터 뤼초브 (Gunther Lutzow)도 5기, 하네스 트라우로프트(Hannes Trautloft)가 4기 격추를 달성했다.
 
그럼 이런 표면적으로 드러난 콘돌군단의 전과를 떠나 루프트바페가 스페인 내전을 통해 깨닫게 된 것은 무엇이었나? 몇가지로 정리해 보며, 스페인 내전 항공전을 끝마치려 한다. 크게 외교적인 영향과 군사적 개념의 변화로 나누어 생각해 보자.
 
 
( 1 ) 스페인 내전 종결후 이탈리아와 독일에 미친 외교적 효과
           - 이탈리아와 독일 과연 누가 현명했나?-
 
[사진] 점령한 스페인 도심(아마도 바르셀로나)을 의기양양히 행진하는 이탈리아군들... 스페인 국민들의 눈에 비친 이탈리아군의 이런 모습은 한마디로 곱지 않았다. 그에 반해 콘돌군단은 사뭇 달랐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했나?
 
 
전술한 바와 같이 스페인 내전에서 이탈리아가 독일보다 더 적극적인 원조를 아끼지 않았었다. 독일이 주로 콘돌군단으로 대표되는 항공전력을 지원한 반면, 이탈리아는 700 여대의 항공기를 비롯해, 150 여대의 탱크, 1800 여문의 야포 등 지상군 지원까지 발벗고 나섰었다.
 
물론 처음 이탈리아가 전폭적인 지원을 해오자, 프랑코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탈리아군의 행동은 안하무인으로 변해갔다. 프랑코가 보급 수송과 항공전력만을 요구했지만, 뭇솔리니는 1936년 말 7만의 지상군을 파병했고, 이들은 스페인 군지휘부와는 별개로 독자적인 작전을 수행하기 일쑤였다.
 
이것은 빠른 시간내 승리로 이끌어, 전후 스페인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했던 뭇솔리니의 판단이었지만, 전공을 세우기에 급급한 이탈리아군 수뇌부는 스페인 지휘관들과 마찰이 심해져 갔다. 일예로 프랑코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항공기들은 듀헤트의 전략 폭격 개념을 실천에 옮겨, 민간인을 겨냥한 대도시 폭격을 자행했고, 1939년 1월 바르셀로나를 함락했을 때도 전공이 더 뛰어났던 콘돌군단의 지휘관들은 바르셀로나 개선 입성을 스페인 국민당에게 먼저 권유하고, 자신들은 뒤로 한발 물러서서 격려 박수를 쳐주었지만, 이탈리아군은 보무도 당당히 바르셀로나시 한복판에서 개선 행진 퍼레이드를 벌이기도 했다. 적으로 싸웠지만, 동족상잔의 비극이었고, 무수한 민단인이 죽어갔고, 그 선봉에는 "스페인 국민 죽이기" 에 주력한 외국인 부대의 행진은 스페인인들에게 거부감으로 다가왔음에 틀림없다.
 
반면 콘돌군단의 수뇌였던 휴고 슈페를과 볼프람 리흐토펜의 행동은 사뭇 달랐다. 처음 스페인에 파병했을 때부터 이들은 스페인 국민군 지휘부와 동등한 입장에 머물렀고, 결코 그들을 지배하려 하지 않았다. 또 슈페를과 리흐토펜은 현명하게도 스페인어를 직접 배우는 등 극히 우호적인 행동으로 융화하려 시도했다. 스페인은 원래 정열의 나라로 사람들의 심성 역시 다분히 이성적이라기 보다는 감성에 치우치는 경향이 많았고, 콘돌군단 수뇌의 이런 치밀감을 주는 행동은 서로간에 마음을 열게 했다. 휴고 슈페를과 볼프람 리흐토펜은 외교적인 수완을 갖추거나 정치적 역량이 뛰어난 인물들은 절대 아니었다. 둘은 전통적인 군인의 모습을 가진 어떤 면에서는 우직한 인물들이었고, 이런 면이 스페인 지휘부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던 장점일 수도 있었겠다.
 
콘돌 군단의 장교들은 스페인 장교들과 잦은 회동을 갖고 서로의 전술을 토의했으며, 정기적으로 서로의 일선 부대를 교환 방문해 나가면서 우호를 다졌다. 결국 스페인 내전 이후 이탈리아에 비해 소규모 지원을 했던 독일은 스페인 해안에 잠수함 기지를 세울 수 있었고, 또 독수전이 벌어지자 스페인은 4만 7천명의 스페인 지상군과 항공단을 독일에 파병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에 정작 대규모 군사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이탈리아는 내전 종결후 스페인 국토에 단 한 평의 땅덩어리도 군사적 목적으로 빌려 쓸 수 없었다고 하니, 이런 일련의 사실들은 우리에게도 깨닫게 하는 바가 크다 하겠다.
 
 
 
( 2 ) 스페인 내전이 독일 공군에게 끼친 항공전의 변화
 
[사진] 스페인 상공의 Bf 109 로테.... 이제 곧 시작될 이차세계대전의 초반 유럽상공에서 포식 그물의 최고의 자리에 오를 독일 전투기의 대표격인 기종이다.
 
 
스페인 내전은 항공전력이 승패를 좌우할 수 있다는 것을 만천하에 알린 첫 전쟁이었다. 물론 독일 콘돌군단이 상대한 적기의 성능이나 수준이 그렇게 뛰어났던 것은 아니지만, 스페인 내전 항공전을 통해 루프트바페 아니 전세계는, 이미 시작된 그리고 거의 완성단계에 접어든 공군력의 커다란 변화와 막상한 힘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럼 스페인 항공전을 통해 굳혀진 항공전사 상의 큰 변화를 몇가지로 요약해보자.
 
단엽 저익기 시대의 도래와 속도 제일주의의 확인
 
I-16기의 초기 분전, 또 Bf 109의 충격은 이미 복엽기 시대가 막을 고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어떤 일이나 마찬가지지만 다가올 미래의 변화를 미리 읽는 이가 그 세계를 지배하게 된다. 물론 스페인 내전이 발발하기 오래전부터 유럽의 강국과 미국 등지에서 이미 단엽저익기가 생산단계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대규모의 실전 사용은 스페인 내전이 첫 무대였다. 또 복엽기의 결정적인 한계인 속도라는 측면이 스페인을 통해 더욱 확연해지면서, 각국은 기동성으로 대표되는 복엽기를 포기하고, 속도로 함축되는 단엽기 시대의 서막이 이미 도래했음을 보게된 것이다.
 
 
구체화되는 에너지 파이팅 전술
 
내구성이 강한 단엽기의 특징과 속도와 상승력을 바탕으로 고공을 선점한 후, 붐앤줌으로 적기를 공격하는 에너지 파이팅의 기본 개념이 스페인내전을 통해 실전에 사용되면서, 그 유용성이 확인되었다. 초기 스페인 항공전에서는 소련이 I-16을 이용해 콘돌 군단과 이탈리아 항공기를 괴롭힌 것도 붐앤줌 에너지 파이팅이었고, 후에 I-16기들이 Bf 109에 나가 떨어진 것 역시 이 전술이었다. 속도와 고도라는 수직 기동의 잇점이 있다면 수평 기동의 약점은 안고 들어가도 쉽게 공중전에서 승리할 수 있다. 독일은 이미 스페인 내전 기간인 1930년대 중반부터 이개념을 깨닫게 되었고, 발전시켜 나가게 된다. 이 역시 실전이라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던 산 경험 때문이었다. 항공 강국이라는 유럽의 여러 국가, 미국, 또 아시아의 일본도 아직도 수평 기동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을 때였으니, 독일은 이미 한발 앞서 나가고 있었다.
 
 
전술 전략 폭격의 변화
 
이것은 2부에서 장황하게 설명했기 때문에 간단히 요약해 보겠다. 독일 공군의 날으는 포대로서 지상군 근접 지원이 구체화 되었다. 공군 장교의 최전방 지상군 부대 파견과 왕복 전술 폭격이라는 두가지에 의해 1930년대 초 발터 베버가 창안한 선견지명이 빛을 보고 현실화 된 것이다. 이것은 스페인 내전 후, 폴란드부터 시작되는 독일 전격전의 성공에 가장 중요한 열쇠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선두에는 스페인에서 핀 포인트 전술 폭격을 선보인 수투카가 있었다. 또 전략 폭격 면에서 보면, 쥴리오 듀헤트의 이론 보다는 발터 베버의 폭격 목표 선정이 옳았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