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과 희망을 주는 동기부여

인간의도리인오대덕목(五大德目)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지키자. 태극기, 애국가, 무궁화, 한글 사랑은 애국입니다

조경에 관한 다양한 자료들

카테고리 없음

공폭시대의 서막

대한인 2014. 2. 7. 04:30

리흐프펜의 폭격 전술

 
[지도] 공화당의 세력(파란색)은 크게 북부와 동부 지역으로 양분되고 만다. 마드리드 전투가지지부진해지면서 국민당은 빌바오를 중심으로한 북부 공화국 세력을 향해 전력을 쏟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게르니카 비극의 시작이기도 했다.
 
1936년 말 공화군이 마드리드를 지켜내기는 했지만, 최전방이 되어 버린 이곳을 수도로 삼고 눌러 앉아 있기에는 불안했고, 1936년 11월 마드리드를 사수하면서도, 수도를 후방 해안도시인 발렌시아로 옮기게 된다.
 
한편 개전직후 파죽지세의 여세를 몰아 마드리드를 조기에 함락하려던 국민당은 당초 계획과는 달리 마드리드 앞에서 진격이 멈추고 또 전투가 소강 상태로 빠져 버리자, 돌파구를 모색하고자 공격의 예봉을 스페인 북부 전선으로 선회하게 된다. 이를 위해 먼저 1936년 말, 스페인 북동부의 거점 샌세바스챤(San Sebastian)을 함락해 공화군의 세력을 북부와 동부로 양단시켜 버렸다. 이로써 스페인 북부 바스크 지역은 국민당의 세력에 완전히 포위된 형국이 되었고, 공화군의 본진인 스페인 동부와는 허리가 잘린 채 분리되어 고립에 빠지게 된 것이다.
 
 
[사진] 바로셀로나시로 피난온 마드리드 소년이 군중과 라디오 마이크 앞에서 적의 폭격후 마드리드시의 참상을 울며 증언하고 있다.
 
 
이렇듯 북부 스페인의 주도권이 국민당의 손에 장악되었지만,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즉 북부 스페인은 험준한 산악지형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비록 수세에 몰리기는 했으나 공화군은 준령에 의지해 깊숙히 참호를 파고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할 수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공격자는 지쳐 가고, 결국 방어자에게 유리한 전황으로 돌아갈 공산이 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산악 고지를 점령키 위해서는 배후에 든든한 포대의 엄호를 받아야 했지만, 북부 국민군이 보유한 야포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쩔수 없이라도 콘돌군단이 "날으는 포대" 역할을 도맡아야 했는데, 이것으로도 문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즉 공화군의 강력한 방어진을 뚫기에는 아직도 콘돌 군단의 항공전력과 국민당의 지상군 간의 손발이 잘 맞지 않았던 것이다. 전쟁이 햇수로 2년째 접어 들던 1937년 초만해도 국민당의 숙련도는 극히 저조한 상태였고, 콘돌군단이 북부 스페인에서 작전 개시 단 며칠만에 제공권을 거머 쥐고, 공화군 방어진에 대한 공중 폭격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었으나, 정작 그 뒤를 따라야할 지상군의 쇄도는 지지부진한 상태였던 것이다. 공화군은 콘돌군단의 폭격이 단행될 때는 참호 속에 깊숙히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폭격이 끝나자마자 진지 복구 작업에 들어갔고, 뒤늦게 국민당 지상군이 들이치면, 여유있게 막아내는 형국의 연속이었다. 자연히 폭격의 성과는 번번히 그 빛을 잃게 되었다.
 
콘돌군단의 수뇌부는 지상군과의 부조화에서 오는 난제를 극복하기 위해, 국민당 지상군 최고 지휘부와 잦은 회동을 잦고 몇가지 해결 방안을 제시하게 된다.
 
(1) 첫째, 폭격의 정확한 목표 선정과 효율성을 극대화하고, 또 항공전력과 지상군 간의 통신과 연락을 원활히 하기 위해 콘돌군단 소속 공군 장교를 지상군 최전방 부대에 배치한다.
 
[사진] 콘돌군단 지휘부는 비행장 근처 높은 언덕에 올라많은 시간을 보냈다. 이것은 전방부대에서 보내오는 여러 신호 (연기, 거울 반사 등등)를 잘 발견하기 위한 전근대적 방식이었으나 개념 자체는 현대적인 항공 근접 지원전술이었다. 중간에 뚱뚱한 장군이 휴고 슈페를이고 가장 왼쪽에서 무릅에 손올린 장군이 붉은 남작의 사촌동생이자 콘돌군단의 실질적인 지휘관이었던 볼프람 리흐토펜이다.
 
 
이것은 1930년대 중반 발터 베버 장군이 창안한 것으로 드디어 스페인 내전을 통해 실전에 도입된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적의 방어진의 형태에 따라 어떤 종류의 폭격기, 어떤 종류의 투하용 폭탄을 선택하는 것이 최상인지를 전문가인 공군 장교가 판단하게 되고, 또 중간 전달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콘돌군단에 지원을 요청할 수도 있어, 명령전달 시간을 최소화하고, 폭격의 능률을 극대화 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당시 휴대용 통신 수단의 발달이 미비했던 시대적인 사정으로 콘돌군단은 전통적이며, 고색창연하기까지한 방법을 사용해야만 했다. 마치 인디언들의 연락망과도 유사한 연기나 불꽃, 심지어 대형 거울로 빛을 반사하여 전방의 상황을 알렸고, 비행대 수뇌부는 비행장 인근의 높은 언덕에 올라, 이 신호의 의미를 파악해, 편대를 출격시켰다. 물론 방법적인 면에서는 전근대적이었으나, 개념 자체는 현대적이었고, 이후 항공전력과 지상전력 간의 손발이 잘 맞아 들어가기 시작했다.
 
(2) 두번째로 시도된 것은 "시간차 폭격" 개념의 도입이었다. 이것은 일명 "왕복 폭격(Shuttle bombing)"이라고도 불리는 혁신적인 공격 전술로, 훗날 영국의 항공전에서도 적용된다. (물론 영국의 항공전 초반에는 시행착오를 수차례 거치기는 했지만...)
 
[사진] 볼프람 폰 리흐트펜... 일차대전 격추 1위의 에이스 만프레드 폰 리흐토펜의 사촌동생이며, 형과 같이 일차대전 전투 조종사 출신의 장군... 그는 수투카에 반대한 인물이었으나, 후에는 수투카 맹신자가 된다. 훗날 폴란드전 당시 전투지역 시찰을 위해 직접 정찰기를 정찰하다가 폴란드 지상군의 공격에 격추되기도 했으나 다행히 무사할 수 있었다.
 
 
불프람 폰 리흐토펜(Wolfram von Richtofen)의 지휘하에 콘돌군단의 폭격기들은 크게 두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제1파 공격대가 공습을 마치고, 기지로 기수를 돌리는 시점에, 제 2파 공습대가 목표지점 상공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시간차 출격의 개념..... 이렇게 될 경우, 적 지상군은 몇 시간 동안 콘돌군단의 연속적인 맹폭에 노출되어 복구를 위한 시간적 여유를 아예 가질 수 없게 된다. 실제로 이 왕복폭격 만으로 단 몇분만에 60 여톤의 투하용 폭탄을 한 지점에 쏟아부어 200 여명의 공화군 지상군을 전사시키고, 400여명의 포로와 함께 공화군 방어진지 한곳을 손에 넣기도 했다. 이에 대해 작전을 지휘한 리흐트펜은 이렇게 기록했다. " 적 지상군은 완벽히 제압되었고, 폭격에 의해 목표는 깨끗히 파괴되었으며, 이어 쇄도해 들어간 아군 지상군에 의해 적 방어진지는 무너지고 말았다." 콘돌군단이 도입한 이런 현대적 근접 지원 전술의 탁월함으로 지상군과 콘돌군단 간의 협조체제는 점점 견고해지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바스크 지역의 전황도 국민당 쪽에 유리하게 전개되기 시작했다.
 
 
 
 
 
 
게르니카의 진실

 
 
스페인 출신의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의 불후의 명작이라는 게르니카...
독일 콘돌군단의 폭격과 민간인 희생을 고발한 작품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북부 스페인에서 콘돌군단의 예리한 공세는 얼마후 인류 역사상 초유의 대재앙을 몰고 올 운명이었으니, 이것은 훗날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전세계 도시에 자행될 공폭 시대의 서막이었던 것이다. 게르니카.... 파블로 피카소의 그림으로도 유명한 스페인 내전 참상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일대 사건.... 게르니카의 비극은 분명 인류 전통적인 통념을 깨어버리는 일대 사건이었음에 틀림없고, 그 무자비함은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게르니카 맹폭이라는 사건의 전후 사정을 알게 된다면, "1937년 4월 26일 한 도시에 대한 폭격" 이상의 숨겨진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고, 표면적인 사건 아래서 벌어진 물밑 선전 작업과 그 파장에 더 놀랄 지도 모른다. 그럼 차분히 그리고 냉정하게 게르니카의 진실에 대해 알아보기로 하자.
 
 
[사진] 스페인 상공에 나타난 독일 콘돌 군단의 He 111폭격기의 폭탄 투하 모습.....  
 
 
전술한 바와 같이 북부 스페인에서 콘돌 군단을 선봉으로 국민당의 진격이 계속되었고, 공화군은 필사의 항전을 다짐하게 된다. 이 무렵 북부 공화군의 거점은 빌바오(Bilbao)라는 도시로 이곳에는 일명 "철의 방어선(Iron Belt)"이라고 불리는 강력한 벙어선이 세워졌다. 마치 1차대전 당시 그물망과도 같은 긴 참호를 연상케하는 공병과 건축가들까지 가세해 구축한 실로 어마어마한 방어선.... 이 철의 방어선은 빌바오를 중심으로 남북으로 길게 펼쳐져 있었고, 그 최전방에 게르니카라는 작은 도시가 있었다. 당시 공화군은 방어선을 따라 주력을 배치하고, 예비병력은 게르니카와 같은 소도시에 분산 배치했었다. 1937년 4월 폭격이 단행되던 시기에도 2개 대대 병력의 공화군 지상군이 게르니카에 주둔하고 있었음이 후세에 밝혀졌다. 또한 게르니카는 최전방 병력이 후방으로 퇴각할 수 있는 작전 상 비중이 큰 교량이 위치한 군사적 교통의 요지였다.
 
즉 콘돌군단에게 있어 게르니카의 함락은 군사적 전술 목표였던 것이다. 서방측 언론에서는 게르니카의 비극을 "군사적 목표가 없는 하늘이 노출된 도시... 또 적성국 국민 불특정 다수에 대한 무자비한 폭격으로, 저항의식을 꺾으려한 독일의 만행"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 앞 단원에서 언급했듯 당시 독일 공군을 지배하는 폭격의 교리는 "적의 공업지대와 군사시설"이 최우선 목표이지, "적의 인구 밀집 지역"은 아니었다. 게르니카의 폭격을 지휘한 볼프람 리흐토펜 역시 저항의식을 무너뜨리는데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이 소도시에 주둔한 적의 예비 병력과 적의 퇴각로로서만 게르니카에 중요성을 두었었다.
  
 
[사진] 폭격이 끝난 후 폐허가 되어 버린 게르니카의 전경... 이후 2차대전 기간중 자행될 숱한 적성국 도시를 향한 폭격의 첫시발이라 할 수 있겠다.
 
 
1937년 4월 26일, 콘돌군단의 43기의 폭격기와 Bf 109를 위시한 호위 전투기들이 게르니카의 상공에 나타났고, 단 3 시간 만에 50 여톤의 폭탄을 투하했다. 고폭탄, 소이탄, 심지어 어뢰까지 포함된 투하용 폭탄은 스페인 바스크의 고도 게르니카를 일시에 불바다로 만들었고, 5000 여명의 시민 중 그 3분의 1에 해당하는 1600 여명이 사망했고, 900 여명이 부상했다.
 
1차대전까지만 해도 전쟁은 최전방의 이야기이고, 후방도시는 그나마 안전을 유지했었지만, 게르니카는 전쟁의 개념 자체를 뒤바꿔 놓게 된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게르니카에서 폭격으로 사망한 민간인은 1600 여명이 아니라, 300 여명이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서방의 언론들은 일제히 들고 일어나 독일의 만행을 규탄했다. 뉴욕 포스트지의 비형 만화에는 게르니카라 쓰여진 높은 고지를 점령한 히틀러가 피 묻은 칼을 들고 있는 만화가 실렸는데, 그 칼에는 "폭격"이라는 단어가 쓰여 있었다. 또 뉴욕 타임즈는 게르니카의 폭격을 테러(Terror)라 규정하기도 했다. 당시 도시에 대한 대규모 폭격은 오늘날 우리가 핵전쟁을 생각하는 정도의 공포였다고 하니, 전세계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럼 서방 언론의 매서운 필력의 의미는 무엇이었나? 1930년대 당시 전세계의 눈이 독재자 히틀러에 쏠려 있던 시기였고, 게르니카 폭격의 목적이 무었이었던 간에, 이들 나치의 만행을 고발하고, 베르사이유 조약의 사슬을 끊고 부활한 독일에게 세계적인 적대감을 유발시키는 것이 서방 세계의 정책의 일관된 흐름이었던 것이며, 그 중심에는 서방측 언론이 이었던 것이다.
 
 
[사진] 역시 피폭후 게르니카 시내의 모습. 앙상해진 가지와 뒤집힌 자동차, 망연자실한 생존자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것은 서방세계의 여론의 흐름은 그들이 바라던 바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고 만다. 즉 서유럽 국민들은 그들의 언론에서 외쳐대는 "게르니카의 참극"에 대해 분노했지만, 이런 분노보다 더 심한 두려움, 즉 한도시를 초토화시킨 독일 공군의 잠재력에 공포감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1937년만해도 독일 공군이 대도시를 한번에 날려 벌릴 정도의 수준은 절대 아니었다. 게르니카는 런던이나 파리, 프라하, 바르샤바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인구 단 5천명 수준의 작은 도시일 뿐이었다. 그런데 서방의 국민들이 아직은 보잘 것 없던 독일 공군의 역량에 벌벌 떨게 된 저변에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자신들의 언론의 대대적인 "반독 목수리"가 한 몫을 한 것이었다. 또 지금까지도 게르니카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바가 1930년대 서방 언론이 보도했던 내용과 하등의 차이도 없으니, 몇십년을 내려 흐르는 언론의 위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어쨌든 이런 서방측의 흐름은 독일에게는 예상도 못한 부수적인 효과를 안겨 주었다. 런던 시민들도, 파리 시민들도 독일과의 무력 충돌은 자신들의 도시를 제 2의 게르니카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불안에 떨게 되었고, 이것은 바로 1년 후인 1938년, 독일이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총 한발 쏘지 않고 점령하는데 일조하게 된다. 즉 영국과 프랑스는 알량한 대독 유화정책을 고집하게 되었고, 그 시발은 게르니카의 맹폭과 연이어 이를 부풀린 서방언론의 말발의 덕이었으니, 정말 아이러니컬하다고 밖에는 할 수 없겠다. 게르니카의 함락후 공화군의 철의 방어선은 일시에 무너지기 시작했고, 1937년 6월 19일 북부 스페인 공화군의 거점 빌바오가 국민군에게 떨어짐으로써, 공화군은 북부 스페인 전부를 잃고 만 것이다. 게르니카의 비극은 역사적으로 너무도 중요한 사건이어서, 전후 사정을 표로 정리해 보았다
 
 

 

독일측 주장

서방언론 주장

폭격의 목표
게르니카에 주둔한 2개 대대 병력의 공화군 지상군
게르니카에 위치한 공화군의 퇴각로인 렌타리아(Rentaria) 교량
군사적 목표 없이 민간인에게 자행된 폭격
저항 의식을 꺾기 위한 무자비한 맹폭
 
사상자
300 여명 수준
민간인 사상자가 많았던 것은 당시 수평 폭격기들의 조준기의 정밀도가 떨어졌기 때문 
1600 여명 사망
900 여명 부상
목표를 가리지 않고 저고도 융단 폭격을 자행했다 
결과
독일 공군에 대한 거품의 시작. 실제 역량 보다 과대평가된 독일공군의 위상은 서방측에게 이후 강경책을 버리고, 대독 유화정책으로 일관케 함. 오스트리아와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을 묵인케 됨  

 
 
 
 
 
 
양분되는 전략 폭격  - 듀헤트냐 베버냐 -

 
[그림] 스페인 상공의 왕좌는 이제 Bf 109에게 완벽히 넘어갔다. 전선상공 위를 초저공 비행하는 모습....   
 
 
1937년 6월.... 북부 스페인을 잃은 공화군은 마드리드를 기점으로 남북으로 크게 두곳의 공격선을 갖추고, 국민당의 세력을 양단시키기 위한 대대적인 공세를 준비하게 된다. 1937년 7월 공화군은 마드리드 북쪽으로 15개의 보병 연대와 130 문의 야포, 수십대의 탱크와 20 여대의 장갑차량을 앞세워 진격해 나갔고, 마드리드 남쪽으로는 2개의 보병사단, 40 여개의 탱크, 20 여문의 아포를 앞세우고 공격에 나섰다. 이에 따라 소련의 I-16기를 위시한 400 여기의 항공기가 공격의 선봉에 나서, 초반에는 기세를 완전히 제압해 쾌속의 진격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이 어렵사리 잡은 제공권은 며칠만에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림] 콘돌 군단의 88 mm 대공포의 모습.... 스페인 공화당군에 비해 콘돌군단의 하또 하나의 강점.... 훗날 대전차포로도 사용되기도 했다는데....
 
즉 북부 스페인에 배치되어있던 콘돌군단이 스페인 중부의 격전지로 옮겨 오면서, 월등한 성능의 Bf 109들이 소련기를 일소해 버린 것이다. 콘돌 군단의 Bf 109들은 뛰어난 상승력으로 고공을 선점해 배회하다가, 소련기들을 만나면, 태양을 등지고 급강하 공격을 시도해 다수의 소련기들을 격추시켜 버린 것이다. 중부 스페인 상공을 다시 장악한 콘돌군단은 공화군의 비행기지를 최우선 공격 목표로 잡고, 왕복 폭격을 시도했으며, Bf 109들이 폭격기 호위에 나서, 스페인 상공의 제 1 기종임을 다시 입증하게 된다. 이 짧은 기간 동안 콘돌군단은 160 기의 소련기를 격추했으며, 콘돌군단의 피해는 단 23기 수준으로 완벽에 가까운 승리였다. 이로써 공화군의 항공 전력은 이제 내리막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대도시와 인구 밀집지역을 점유하고 있어, 지상군의 규모는 국민당세력과 엇비슷한 수준이었지만(양진영 모두 약 650 여 보병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  국민당의 항공전력은 날로 팽창가도에 있었고, 공화당은 국민군 항공전력의 50%에 불과했다. 게다가 당시 88 mm 대공포로 무장한 콘돌군단과 대조적으로 공화군은 실제 대공포라 할 만한 장비가 없었다. 당시 국민당의 항공전력 중 전투기만 따져봐도 13개의 Fiat 비행대(한 비행대당 9기씩)와 2개의 Bf 109B 비행대(한 비행대당 12기로 구성) 총 141기의 전투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공화군 전투기는 약 70기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 양적인 열세뿐 아니라, 질적인 문제는 더 심각한 지경이었으며, 1937년 중반 이후 제공권은 국민당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비행중인 이탈리아의 Fiat Cr 32 전투기의 모습
아래 보이는 스페인의 산하가 매우 인상적이다.
 
 
 
 
[그림] 국민당의 전투기 브리지트 (Breguet Br 19)기 편대의 폭탄투하 모습... 이런 종류의 항공기들은 넓은 하늘을 누빈다라고 하기보다는 Bf 109를 피해 다녔다고 해야 옳을 듯하다.
 
  
스페인 내전 초기 게르니카 이후에도, 양진영은 경쟁적으로 적도시 맹폭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콘돌군단과 스페인 국민당 공군은 적 인구 밀집 지역 폭격이 예상보다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맹폭 받은 도시의 시민들은 한결같이 더욱 고취된 저항의식으로 똘똘 뭉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1937년 중반이후, 콘돌 군단은 적도시 폭격에서 빠질 것을 단언했고, 폭격의 촛점을 이미 고인이 된 발터 베버의 주장대로 적의 공업단지와 교통과 보급의 요충에 맞추어 나갔다. 국민당의 최고 지도자 프랑코 마저도 적도시라도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폭격은 금지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이탈리아 공군은 이런 콘돌군단과 프랑코의 의견을 일축하고 인구 밀집 지역 폭격을 계속하게 된다. 이것은 자국의 군사가인 쥴리오 듀헤트의 견해에 맹종하는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게르니카 사건 보다도 더욱 잔인한 적도시 맹폭을 시도해 나갔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콘돌군단의 게르니카 폭격은 군사적 목적을 위해서 였지만, 이후 이탈리아 공군의 공격은 다분히 적성국 국민의 사기를 꺾기 위한 민간인을 대상으로한 만행이었던 것이다.
 
콘돌 군단의 공군 장교는 이탈리아의 폭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정도였다. "그들의 도심 폭격은 비이성적인 행동이다. 군사적 목표가 아닌 민간인 폭격으로 승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특히 동족간의 내전에서는 역효과를 낼 것임에 틀림없다." 스페인 내전 이후 유독 게르니카만이 부각된 것은 서방언론의 대독정책의 일면이었던 것이고, 정작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 국민들에게 가장 공포스럽던 것은 바로 이탈리아 공군의 무자비한 대민간인 폭격이었던 것이다. 스페인에 독일보다 훨씬 많은 군사적 원조를 아끼지 않았던 이탈리아가 내전 종결후 스페인에 대한 영향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한데에는 내전기간 이탈리아 공군이 보여준 "스페인 국민 죽이기" 작전이 한몫을 한것임에 틀림없다. 이것에 대해서는 결론에 다시 언급할까 한다. 그럼 게르니카 사건 이후 지속된 이탈리아 공군의 도시 폭격에 대해 알아보자.
 
 
[사진] 마드리드시를 활보하는 총을 든 소녀.... 시민들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도시를 지켜내려했다. 1936년 7월의 모습
 
콘돌군단에 의해 달성된 우세한 제공권을 바탕으로 이탈리아 공군의 맹폭은 게르니카의 비극에서 그치지 않았다. 1937년 10월, 공화군은 수도를 발렌시아에서 다시 바르셀로나로 옮겨 항전을 계속했다. 이탈리아 공군은 공화군의 정부가 위치해 있던 발렌시아(Valencia), 바르셀로나(Barcelona)와 사바델(Sabadell), 테라싸 (Terrassa), 만레사 (Manresa) 등의 공업 단지에 대한 폭격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에 격분한 공화국 역시 보복조치로1938년 1월말 소련의 폭격기들을 앞세우고 국민당 세려권 하의 세빌, 발라도리드 등에 맹폭을 가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이번에는 이탈리아 공군이 바로 이틀후, 다시 바르셀로나에 대한 맹폭을 강행했다. 이 하루의 폭격으로 민간인 150명이 사망, 500 여명이 부상을 입게 된다.
 
그러나 이것 역시 작은 시작일 뿐이었다. 1938년 3월 국민당 전력이 카탈로니아와 레반테를 점령하면서, 바로세로나에 대한 폭격은 더 용이해진 것이다. 그리고 3월 16일부터 18일간의 이탈리아 공군이 주축을 이룬 국민당군의 폭격은 또 한번의 게르니카의 비극을 만들어 내게 된다. 요격기라고는 한대도 찾아볼 수 없고, 대공포도 갖추지 않은 바르셀로나시는 3일에 걸쳐 약 50시간 동안 맹폭을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군사 시설 뿐 아니라, 민관군을 구분하지 않고 보이는 목표물은 모두 공격대상이 된 무자비한 폭격이었다. 이들 폭격기들은 400 m 정도의 저공비행, 140 kph정도의 저속 비행으로 도심의 곳곳에 나타나, 정밀 폭격을 자행한것이고, 무방비의 바로셀로나의 주민 1300 여명이 사망했고, 2000 여명의 부상자가 속출했다.
 
 
[사진] 폭탄 투하를 시작하는 이탈리아 공군의 SM 81 폭격기와 호위에 나선 이탈리아의 복엽 전투기 피아트 CR 32기들..... 내전 당시 시페인 국민들에게 가장 두려움의 존재로 떠올랐던 이탈리아의 무자비한 도시 폭격.... 
 
 
공화군의 바르셀로나 방위 관계자는 즉각 소련 전투기 I-16기를 수도 인근에 배치해, 이탈리아 폭격기 요격을 강력히 요청했으나, 물밀듯 진격해오는 적을 막아내기도 급급했던 최전선의 지휘관들에 의해 묵살되었다. 3일에 걸친 이탈리아 공군의 폭격 목적이 군사시설 파괴가 아니라, 저항의식을 아예 꺽어버리는데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고, 그들의 의도는 예상대로 진행되어 가는 듯 보였다. 즉 바르셀로나의 민간인 수천여명이 죽음의 도시를 벗어나 피난길에 올랐고, 바르셀로나의 사기는 바닥에 떨어져 헤어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바르셀로나에 대한 대상을 가리지 않는 무자비한 이탈리아 공군의 폭격은 일시적으로 공화국의 시민들의 사기를 떨어뜨리는데 주효했지만, 결전의 의지를 완전히 꺾어 버린 것은 아니었다. 즉 바르셀로나 상공에 그렇게도 바라던 I-16기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시민들은 다시 용기를 얻고 총을 들었던 것이다. 이것은 대도시를 제 1 공습 목표로 언급한 이탈리아 군사가 듀헤트의 예상이 빗나갔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훗날 영국의 항공전에서 독일은 스페인 내전에서 이탈리아가 범한 똑같은 실수로 전세를 역전 당하고 말게 된다. 이 이야기는 영국의 항공전에서 다시 다루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