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한 화가 지망생
1907년.... 오스트리아 비인의 예술 대학 정문....
화려한 대학 건물을 뒤로 하고 고개를 숙인채 돌아서는 한 소년이 있었다. 절망에 빠진 눈동자는 대상을 알 수 없는 증오심 마저 느끼게 했다. 바로 1년전, 소년은 이날과 똑같은 낙방의 고배를 마셔야 했고, 이후 합격을 다짐하며, 힘겨운 재수 생활을 시작했었다. 그러나 "화가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는 또 한번의 불합격 선언은 소년의 상처입은 가슴을 도려냈다. 화려한 비인의 거리는 화가 지망생에게는 더없이 좋은 그림의 소재가 되지만, 화려함이 더 할수록, 이방인이며 가난한 소년이 감내해야하는 고통의 크기는 더욱 컸던 것이다. 2년전 고향을 떠나올때, 힘든 생계에도 불구하고 푼돈을 모아 유학비를 건내주던 어머니와 친척들의 얼굴이 스치듯 지나갔다...
며칠후 소년에게 반가운 편지가 한통 도착했다. 고향의 이웃집 아주머니가 비인의 저명한 화가와 연줄이 닿아있어, 그에게 소년을 소개하는 청탁편지를 보내온 것이다. 소년은 이 편지를 쥐고는, 뛸 듯이 기뻐하며, 편짓글을 다시 또 다시 읽어 나갔다. 20세기 거장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화가로서의 모습을 상상하며, 기대로 밤잠을 잘 수 없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이 소개 편지는 소년을 괴롭게 했다. 원래 수줍음을 잘 타고, 또 자존심 마저 유별나게 강한 소년에게는 소개장을 들고 그 화가를 찾아나설 용기도 주변머리가 없었고, 소년은 화가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비인의 뒷골목에서 우편엽서와 잡지 표지 그림을 그리며 연명하며 암울한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 이 18세 소년이 바로 20세기 중반 전세계를 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 넣게 될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나중에 그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 비인의 뒷골목 생활은 나에게는 가장 소중한 삶의 학교"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듯, 이 시절이 그에게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당시 비인은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이 강한 도시였고, 이후 히틀러의 나머지 생을 인종론에 집착케하며, 홀로코스트의 악마성과 레벤스라움이라는 광신적인 민족우월주의를 낳는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다. 아버지가 사생아였다는 것, 자신의 할머니가 아비없는 자식인 히틀러의 아버지를 낳아, 그 자식의 성으로 "히틀러"를 썼고, 이 아기와 어미가 같은 형제로 입적된 이상한 족보에서 오는 컴플렉스, 어릴 적 모든 것을 던지고, 화가가 되겠다는 그의 뜻에 반발하며, 정신감정을 의뢰하려던 아버지... 그리고 이겨내고 비인에 유학왔으나, 자신을 막아버린 모든 것들.... 이런 어린시절의 패배주의라는 열등감과 그 대상없던 증오심은 이제 확연히 보이는 실체로 서서히 옮겨지고 있었다.
그럼 이후 히틀러의 예술가로서의 꿈이 완전히 메말라 버렸던 것인가? 결론적인 대답은 "아니다"다. 전쟁중에도 히틀러는 여러편의 습작을 그렸고, 미술품들을 모았으며, 1945년 4월 자살 직전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여러 미술 작품을 모아 둔것은 내 사욕 때문이 아니라, 훗날 내 고향에 미술관 하나를 지어 보려했던 꿈 때문이다...."라고..... 그런데 히틀러의 생을 고찰하다 보면, 비인에서의 유학시절 이후 많은 변화를 보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극명한 변화와 그 기점이 되는 비인시절을 결부시켜, 여기서 잠시 홈지기의 상상력을 발휘해 보려한다. 2번의 낙방의 고배를 마신후, 소년 히틀러는 실의에 빠졌고, 악마에게 빠진 유혹의 대상자가 되고 만다. 마치 괴테의 소설 파우스트의 한 장면처럼.... 히틀러는 말했다 "내 그림들이 세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보고 싶어만한다면, 언제든 감상할 수 있게되고, 내 작품이 인류가 존재하는한 그 생명력이 끊이지 않도록만 된다면, 나의 영혼을 당신께 팔겠읍니다.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내 앞에 펼쳐진데도, 내 소망이 이루어질 수만있다면, 당신 보다 더한 악마가 되겠습니다" 물론 필자의 상상이지만, 히틀러의 소망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 가령 예를 들어 인터넷 상에서 "히틀러(Hitler)" "그림(paintngs)"이라는 단어를 입력하기만 하면, 세계 어떤 사람도 그의 그림을 볼 수 있으니 말이다. 만약 어떤 화가의 작품을 평가할 때, "그 작품이 후세에 얼마나 길이 남는가"하는 단순한 기준만으로 평가한다면, 히틀러의 작품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성공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그 필력에 비해, 더 유명세를 탄 그림들로 평가되기는 하지만......
히틀러의 그림들.... 한때 소년 히틀러는 예술의 도시 비인에 유학한 화가 지망생이었다.
패전국의 교수대 - 베르사이유 조약
1914년 유럽대륙은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된다. 제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세기에는 상상도 못하던 대량 살상 무기들이 등장했고, 프랑스의 남북으로 깊이 패인 참호와 요새로 양진영은 끝없는 소모전을 벌여나가게 되었다. 단 몇 백 미터 전진을 위해 수천명의 군인들이 죽어갔고, 노맨스 랜드(No man`s land)라고 불리는 참호사이의 땅은 말 그대로 죽음의 땅이 되어있었다. 히틀러는 독일 육군에 입대해, 연락병 역할을 수행해 나가게 된다. 적의 포탄과 사격의 빗속을 뚫고, 참호속에서 바짝 허리를 굽히고, 이곳에서 저곳 부대로 뛰어 다니며, 명령을 전달하고, 또 상황을 보고했다. 그는 마치 목숨이 몇개라도 되는 듯, 자신의 죽음이나 안위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듯 보였다. 동료들에 비친 히틀러는 용감한 군이이었지만,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뭔가에 홀린 모습이었다. 동료들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히틀러 하사는 휴가를 신청하는 일도, 고향에서 편지나 위문품이 오는 일도 없었다. 여자에도 무관심했고, 전선의 불결함, 흙탕물, 악취를 결코 불평하지도 않았다. 혼자 골몰히 무언가를 생각하며, 언제나 홀린 듯 보였다. 정상은 아니었다."
그리고 1918년.... 종전을 얼마 남겨두지 않은 어느날..... 연합군의 매몰찬 공격이 계속되었고, 영국군이 투하한 독가스 공격에 히틀러는 한쪽눈에 치명상을 입게 된다. 단 한모금의 독가스를 들마신것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거의 실명에 가까운 부상을 당해, 군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리고 히틀러는 병상에서 종전을 맞았다. 당시 일선 부대에서는 패전의 원인이 독일 후방의 배신 때문이었다는 소문이 나돌았고, 히틀러는 이것을 신념을 저버리는 반역 행위라 여기게 된다.
[그림] 베르사이유 조약에 묶인 독일을 풍자한 만화... 전쟁에 미친개라는 명찰을 목에 단 불독이 재갈을 입에 문채,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다.
1918년 종전 후 1919년 전승국 연합국들에 의해 조율된 "베르사이유 조약"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독일 너... 죽어"였다. 즉 프랑스와 독일 모두 폐허가 되었는데, 연합국의 전후 복구 비용 전부를 패전국 독일이 부담해야 했던 것이다. 독일의 목을 죄는데 연합국의 선두에서 프랑스가 가장 발벗고 나섰던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프랑스 국토는 몇년간 전장터가 되었었고, 어떤 의미에선 패전국 독일 보다도 더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가혹하기 그지 없는 조약에 미국은 실현가능성이 떨어지고, 또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문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왠지 석연치 않게 여겼지만, 프랑스의 자세는 확고부동했다. "독일은 괴롤힐대로 괴롭혀야만 한다!" 베르사이유 조약에 의해 독일은 330억 달러, 독일화로 1천 3백 29억 마르크를 전쟁 배상금으로 연합국에 지불할 의무를 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1913년 독일의 1년 예산총액이 35억 마르크 수준이었음을 고려해 볼 때 이것은 "너는 죽을 때까지 연합국을 먹여 살려야 된다. 그러기 전에는 죽지도 못할 것이다"라는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였다.
설상가상으로, 산업적 가치가 높은 노른자위 알자스 로렌 지방과 라인란트 등이 프랑스의 손아귀에 들어감으로써 독일의 재기 가능성을 뿌리채 흔들었을 뿐아니라, 이후 독일은 자치를 위한 10만 정도의 최소 규모 병력을 제외하고는 군을 가질 수도, 제대로된 무기를 생산할 수도 없도록 조치되어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심대한 상처를 입고 말았다. 독일 국민은 모두 실의에 빠졌고, 경제는 파탄하고 말았다. 무리하게 찍어낸 화폐로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졌고, 잡지 한권에 20억 마르크, 휴지를 한 통 사려면, 그 휴지 보다도 훨씬 많은 종이로 된 지폐 뭉치를 이고지고 사러가야하는 웃지 못할 지경까지 벌어졌다. 독일 군민들의 실의는 점점 분노로 변하고 있었고, 이런 지옥 같은 상황에서 그들을 구원해줄 구도자를 갈망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얼마후 그들의 앞에 나타난 구원자는 바로 히틀러였다.히틀러는 경제 파탄이라는 깊은 수렁에 빠진 독일국민의 손을 잡고 수렁에서 건져 올림으로써 독일 국민의 목숨을 구해준 것이다. 그러나 물에 빠져 경각에 달했던 목숨을 연명시킨 히틀러가 물과는 전혀 반대의 불구덩이 속으로 그들을 밀어 쳐넣으리라는 사실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미치광이들
[그림] 연설하는 히틀러.... 그는 연설 전에 어떤 제스츄어, 어떤 손놀림, 어디에 악센트를 주어야 할지도 미리 생각한 주도 면밀함을 보였고, 실제로 히틀러의 연설은 청중을 끌어들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종전 후에도 군에 남아 있던 하사관 히틀러에게 어느날 특명이 떨어졌다. 독일 정계의 군소정단 중 하나인 신생 독일 노동당의 집회에 참석해, 동정을 살피라는..... 그런데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이날의 임무가 히틀러의 남은 생을 완전히 바꿔 버리는 계기가 되어 버린다. 즉 독일 노동당은 훗날 나치당의 전신으로 처음엔 히틀러도 이들을 못말리는 불평꾼들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런데 이날 집회에서 그들이 주고 받는 한심한 토론을 듣다 못한 히틀러는 임무를 망각하고, 연석에 나가, 일장연설을 해버린 것이다. 삽시간에 청중은 히틀러의 웅변에 매료되었고, 얼마후 히틀러는 독일 노동당의 정식 당원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후 히틀러는 타고난 연설 솜씨로 당세를 확장해 나갔다.
히틀러는 원래 듣기에 따라 말이 어눌해 보이고, 발음마저 부정확했지만, 그의 연설은 청중들을 완벽히 사로잡는 묘한 힘이있었다. 히틀러는 자신의 저서에서도 밝혔듯, 군중 집회에서의 연설이란 대중들의 평균 지적 수준을 고려해, 가능한 간략화된 요점만을 집중적으로 전달해야하고, 또 그것이 청중의 이성 보다는 감성에 호소할수록 파급효과는 큰 것이라 했다. 또 히틀러는 연설 도중 극적인 제스추어를 많이 사용해, 계획된 시점에서 손을 어떻게 처리해야하고, 어떤 포즈를 취해야 하는지도 사전에 철저히 검토해 실행에 옮겼다. 또 이것을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연극 배우들을 만나 그들에게서 배우적인 기질, 행동과 무대에서의 손처리, 발음의 악센트 등을 배우기까지 했다. 얼마 되지않아, 나치당의 당수 자리에 까지 올랐고, 자신의 야욕을 감추고, 정권을 쟁취하기 위해 온힘을 쏟았다. 대외적으로는 합법적인 정당의 틀을 갖추고 있었지만, 히틀러 개인적인 무력 집단인 돌격대(SA)를 거느리고, 자신의 정적들을 처단해 갔고, 히틀러 소년 유격대를 통해 자라나는 신세대들의 뜨거운 감정에 호소한 지지를 받았다.
[사진] 헤르만 괴링.... 일차대전 블루맥스의 에이스, 1930년대 히틀러의 충견, 이차대전 독일 조종사들에겐 돼지로 불리운 파란만장한 생을 살았던 사나이... 1930년대 루프트바페를 일으켜 세운 얼굴마담이었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히틀러가 우연한 기회에 독일 노동당에 뛰어들기는 했지만, 초기에만 해도 나치당은 독일 정계에서 군소정당 중 하나일 뿐이었고, 구성원들 역시 정치적인 역량이 부족한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경쟁에서 소외된 소수의 당원들이 사회에대한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지하실 정당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건달이나 깡패 집단 같은 성격이 더 강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수도 있다. 이 즈음, 히틀러는 나치당의 기둥이 될 두 명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헤르만 괴링과 괴벨스..... 하사관 출신이라는 히틀러의 최종 계급과 중졸이라는 최종학력에서 오는 컴플렉스를 말끔히 해소할 수 있는 히틀러의 양팔.... 헤르만 괴링은 일차대전 중 22기의 적기를 격추해낸 에이스로서, 독일 공군의 대들보였던 붉은 남작 만프레드 폰 리흐토펜의 사후에 그의 JG1 비행단을 이끌었던 인물로, 아직도 일차대전의 전설 같은 공중전에 향수를 가진 독일인들에게는 믿음직한 퇴역 군인이었다.
[사진] 요세프 괴벨스... 절름발이로 외소한 체구에 언제나 냉대받던 어린시절을 보낸 삐뚤어진 천재의 표상... 그와 그의 라디오는 나치 선전책동의 진수였다.
또 괴벨스는 절름발이라는 신체적 약점 때문에 히틀러의 어린 시절 처럼, 수없이 고배를 마시며, 자신의 존재를 알아줄 인물을 찾던 타락한 천재였다. 1897년 라인란트에서 태어난후, 재치있고 타고난 천재적 두뇌를 소유했지만, 그리고 박사학위에 빛나는 학벌까지 갖추었지만, 어릴 때 앓은 골수염 수술로 왼쪽 다리가 짧아 절름발이 생활을 하는 외소한 그를 받아주는 곳은 거의 없었고, 좌절의 젊은 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중 1922년 히틀러의 연설을 들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고 그는 아무런 주저도 없이 나치스 당에 입당했다. 히틀러에의한 괴벨스의 기용은 이후 나치가 독일 국민을 하나로 묶어 버리는 정신적인 세뇌의 일등공신이 된다. 이들 3인의 만남은 마치 거대한 석상의 3개의 다리처럼, 이차대전을 일으키는 나치의 기반을 마련했다고 하겠다. 괴링은 언제나 이렇게 이야기했다. "총통이 결정한다면, 나는 한다." 괴벨스는 히틀러를 만난 날 자신의 일기장에 이렇게 썼다 "그는 37세다. 아돌프 히틀러.... 나는 그대를 사랑한다. 그대는 위대함과 동시에 단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재의 특성이다." 어떤 집단이 대외적으로 뻗어나가기 위해서는 우선적으로 내부의 역량부터 다져져야 한다. 괴벨스의 천재적이며 악마적인 선전술과 괴링의 무모하기까지 보이는 돌격 앞으로 정신은 결과적으로 나치 초기의 기반을 만들어내게 된 것이며, 히틀러의 충견 역할을 자진해 나갔다. 그러나 그들이 만난 히틀러는 강자로서의 독일의 부흥은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약자들의 멸종을 뜻하는 것이었고, 그들이 맞잡은 손은 자신들의 조국 독일 뿐 아니라, 유럽, 아니 전세계를 파국의 길로 치닫게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