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가 한경혜(30)씨. 그는 홍익대 미술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치고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2번의 특선과 5번의 입선을 움켜쥔 재능있는 화가다. 그의 그림에는 유독 물이 자주 등장한다. “물은 바람이 그치면 일렁임을 멈추고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마치 망상과 번뇌가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처럼요.” 번뇌. 기억이 흐릿한 어린 시절부터 번뇌는 한씨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그는 뇌성마비 4급 장애인이다. 첫돌이 지나자마자 뇌성마비 진단을 받았지만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탓에 별다른 치료조차 받을 수 없었다. 급기야 7살 때 큰 고비가 왔다. 몸이 화석처럼 굳어가고, 밥은 커녕 물조차 삼키기 어려웠다. 의사도 가망이 없다며 손을 놓았다. 아버지는 하루하루 술로 연명했고, 가족을 때리기까지 했다. 어쩔 수 없이 어머니는 한씨와 한씨의 동생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희망이 사라진 모녀는 마지막으로 성철 스님이 있던 해인사 백련암을 찾았다. 삼천배를 해야 만날 수 있다는 성철 스님을 뵙기 위해 아이와 엄마는 사흘에 걸쳐 삼천배를 올렸다. 어렵사리 절을 끝낸 뒤, 아이는 기다시피 성철 스님을 찾아가 다짜고짜 물었다.
“스님, 저 죽는대요. 언제 죽어요” 스님은 말했다. “오늘 저녁에 죽어라.” 아이는 다시 물었다. “어디서 죽을까요” 스님이 다시 대답했다. “느거 집에 가서 죽어야지!” 아이는 지지 않았다. “어차피 49재는 여기서 지낼 텐데, 저 여기서 죽을랍니다.” 손을 든 것은 스님쪽이었다. “야이 가시나야. 그라믄 니 오래 살아라. 대신에 하루에 천배씩 꼭 하그래이.” 아이의 나이 겨우 7살 때였다. 그 때부터 아이는 물을 넘기기 시작했다. 성철 스님이 준 바나나도 먹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기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그 때부터 아이는 23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천배를 올렸다.
“시험 기간에는 오백배만 깎아달라고 한 적도 있었어요. 절을 깎아주기는 커녕 스님은 성적도 올리라고 하셨어요. 절도 하고, 공부도 더 해야만 했지요.”
일곱살때 생사 갈랫길‥성철스님 찾아가 하루천배 시작
우연히 본 자기 모습 충격‥‘이뭐꼬’ 화두로 일만배 백일기도
그예 대학에 들어갔다. 여전히 장애의 벽은 힘겨웠다. 대학을 졸업하던 1996년에 한씨는 하루 만배씩 올리는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매일 4시간 정도만 자고 식사 시간 외에는 꼬박 절만 해야 가능하다는 고행. 그는 숙명에 맞서겠다는 생각에 “목숨을 걸었다”. 40여일이 지나자 마침내 참기 힘든 고비가 왔다. 몸이 더 이상 말을 듣지 않았다. ‘하늘의 운명에 도전 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벌을 받는구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한계를 깨닫자 자신에 대한 연민과 분노가 함께 몰려왔다. 그는 연민 대신 분노를 선택했다. 그래 죽자. 만배 백일기도에 실패하면 죽으리라 생각하고 열군데가 넘는 약국을 돌아다니며 모은 약을 미련없이 입에 털어 넣었다. 그의 신음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달려왔다. 약을 토하게 하고, 끝까지 그를 도와 마지막 절을 마치게 만들었다.
백일 기도를 끝낸 뒤엔 곧장 9박10일 동안 실크로드 여행을 떠났다. 마음 속 무언가가 자꾸만 그를 밖으로 떠밀었던 탓이다. 자금성, 만리장성, 우루무치, 둔황을 두루 돌아보고 나니 여행의 참맛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또 다시 경계가 왔다. 여행을 마칠 무렵 일행이 찍은 비디오를 보다가 그는 흠칫 놀랐다. 일그러지는 얼굴과 부정확한 발음을 하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적으로 대하는 것은 큰 고통이었다. “좋은 여행길에서 무거운 돌 하나를 매달고 돌아왔던” 그는 두 번 째 만배 백일기도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병을 고치겠다는 각오, 운명과 싸워 이기겠다는 결기도 없었다. 삶과 고통과 병을 모두 놓아버렸다. 하늘에 모든 것을 맡긴 채 ‘이 뭐꼬’ 화두만 잡았다. 타는 듯 무더운 8월, 만배 백일기도를 하며 그는 지난 백일기도보다 더 힘든 고통을 겪었다. 좌구 위엔 코피가 뚝뚝 떨어지기 일쑤였다.
“처음엔 몸이 안 좋아서 절을 하기 시작했지만 나중에는 이것이야말로 참회와 원력을 같이 세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고통 너머 ‘청명세상’ 깨달음
“진짜 장애는 몸아닌 마음에 있어”
80여일이 지나자 감정의 변화가 사라졌다. 어느날, 점심 시간에 무심코 창밖을 바라보다가 놀라운 경험을 했다. 자아와 사물의 경계가 사라지는가 싶더니, 눈앞에 보이는 관악산의 봉우리가 장엄하고 청아한 모습으로 다가왔다. 동그라미 속에 보이는 산봉우리는 마치 눈 앞의 티끌과 먼지를 벗은 듯 티없이 맑았다. 어떤 ‘깨달음’이 온 듯도 했다. 이 때 한씨는 ‘삶과 죽음도 (내가) 관여할 일이 아니니 한가히 시방법계를 지나가는 시간만 구경할 뿐’이라고 썼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성철 스님의 말씀이 이해가 됐어요. 육신의 눈이 아닌 마음의 눈이 각을 이루어 바라 보는 경지를 경험했습니다.” 그 뒤로 마음이 편해졌다. 2000년 연말에는 히말라야 트레킹도 다녀왔다. 해발 5500미터가 넘는 히말라야 칼라타파르 정상에서 그는 진짜 장애는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즘 그는 하루하루 별다른 욕심없이 일에만 매진하며 경남 진영과 서울을 오간다. 진영에는 어머니가 직접 3년에 걸쳐 지어준 작업실이 있다. ‘작가의 집’이라 불리는 이곳에서 그는 외국인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차마시기, 한국화 그리기, 도자기 굽기 등의 체험 프로그램을 연다. 주변에 사는 아이들을 모아 그림도 가르친다. 하루 천배도 거르지 않는다. 그 바쁜 속에서 최근 <오체투지>(반디미디어)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제 안의 숨은 그림을 계속 찾아왔어요. 불교는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개척하고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는 자신의 수행을 원래 주어진 것을 바로찾는다는 의미에서 ‘숨은 그림 찾기’라고 부른다. 그것은 다름 아닌 자기 안에 살아숨쉬는 부처의 본성을 발견하고, 다른 이들의 모습에서 자비로운 부처의 모습을 찾아내는 일이다.
‘선화(禪畵·마음 속의 수행의 경지를 글과 그림으로 표현한 것)’ 작품전을 여는 한국화가 한경혜(韓鏡惠·30) 씨는 “내 존재가 너무나 사랑스럽고 현재의 삶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는 갓 돌이 지났을 때부터 뇌성마비를 앓아온 4급 장애인.
한 씨는 자신의 삶에 2명의 은인이 있다고 말했다. 바로 그의 어머니와 성철 스님이다. 7세 되던 해 뇌성마비가 악화돼 시한부 삶을 선고 받은 딸에게 어머니는 “그래도 죽기 전에 참회라는 것을 해보자”며 성철 스님에게 데리고 갔다.
살고 싶다고 울부짖는 꼬마에게 스님은 “살고 싶으면 하루에 천 배씩 꼭 하라”고만 말했다. 그날 이래 그는 23년 동안 하루도 빼지 않고 천 배를 수행하고 있다. 그 끈질긴 절이 그의 인생을 바꿨다.
“신기하게도 절을 하고부터 몸이 조금씩 좋아졌어요. 딱딱하게 굳어있던 팔다리도 풀리고….”
몸만 나아진 것이 아니라 혈액순환이 활발해지면서 머리도 좋아졌다고 한다. 공부를 시작한 지 2개월 만에 고졸 검정시험에 합격했고 지난해에는 홍익대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2번의 특선과 6번의 입선을 했고, 2000년에는 히말라야 트레킹까지 다녀왔다.
스님 저 죽는대요
- 22년 동안 매일 1000배 수행하는 한경혜 씨
“스님 저 죽는대요.”
“그래 너 그럼 오늘 죽어라.”
“스님 저 어디 가서 죽을까요.”
“너희 집에서 죽어라.”
“우리 집은 돈도 없고 여기까지 왔으니 전 여기서 죽을 랍니다.”
“가시나야... 니 오래 살거다.”
7살 꼬마와 성철 스님의 대화 한 자락.
80년대 초경 성철 스님과 첫 대면에서 이렇게 대화를 나눴던
꼬마 한경혜 씨는 이제 29살이 됐다.
갓 돌 지났을 때 뇌성마비를 앓고 다시 6살에 병이 재발해 팔 다리가 마비되고 멋대로 돌아가며 물 한 모금 삼키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 경혜 씨의 어머니는 병원에서도 포기한 어린 딸 앞에서 울어야 했다.
꼭 3000배를 해야 친견할 수 있고, 잘못하면 죽도록 맞는다는, 동네 아주머니에게 들은 성철 스님 이야기를 떠올리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어머니는 스님을 친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님을 뵙기 위해 3000배를 해야하는 것은 몸조차 가누기 어려운 한경혜 씨도 예외가 아니었다. 한경혜 씨와 어머니는 4일에 걸쳐 죽을 힘을 다해 3000배를 해 냈고, 성철 스님을 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하고 토하던 꼬마 한경혜는 3000배를 한 뒤에 마비됐던 몸에 근육이 풀리면서 마침내 물을 삼킬 수 있었다.
성철 스님은 한경혜 씨에게 매일 1000배 씩 하라는 숙제를 주었고 한경혜 씨는 지금까지 그 약속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다. 그렇게 절을 시작한 때가 일곱 살이었고 지금은 한 씨의 나이가 스물 아홉 살이니 22년째 절을 하고 있는 셈이다. 강산이 변했어도 두 번도 더 변했을 그 세월동안 한경혜 씨는 스님과의 약속, 그리고 그 약속을 올곧게 지키겠다는 자기 자신과의 약속을 계속해 왔다.
처음에는 하루 종일 걸리던 1000배가 이제는 두 시간이면 다 할 수 있을 정도다. 덜렁거리며 따로 놀던 오체가 점점 경혜 씨의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게 됐다. 몸이 점차 자연스럽게 좋아진 것이다. 교장선생님과 어머니의 실랑이 끝에 입학한 초등학교도 무사히 마칠 수 있었고 다른 사람들처럼 몸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게 됐다. 사람들은 이를 기적이라고 말했지만 경혜 씨의 피 눈물나는 노력의 결과였다.
어린 시절엔 1000배 약속이 너무나 버겁고 힘들었던 탓에 어느 때는 다시 성철 스님을 찾아가 “시험때는 500배만 깎아달라” 고 했으나 오히려 ‘혹’을 붙여 “매일 1000배 하고 성적표도 가져오라”는숙제를 받기도 했다.
보통 사람들은 하루 108배 절하기도 쉽지 않거니와 그녀가 22년간 행해온 하루 1000배의 절 수행은 ‘어떻게 그 오랜 세월을 지속할 수 있을까’ 라는 호기심을 넘어서 ‘인간에게 가능한 일인지, 몸은 괜찮은지’를 의구심을 자아낼 정도다.
그렇게 절을 통해 몸이 나아졌는데, 더 이상 그렇게 힘든 절을 하지 않아도 될텐데 왜 아직도 절을 하고 있을까.
“몸이 낫기 위해서 절을 한 게 아니거든요. 물론 절을 해서 제 몸이 건강해지고 튼튼해진 건 맞는 말이에요. 누구나 귀찮고 하기 싫을 때가 있을 거예요. 그렇지만 기도니까 해요.“
‘기도니까 한다’ 라니. 뭘 기도하는 것일까. 절하면서 무슨 원을 세웠을까.
“절하면서 저는 제가 지은 죄를 참회해요. 꼭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못했다고 하는 게 아니라 전생부터 지금까지 사는 동안 지은 업을 참회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가끔씩은 좋은 작품을 그리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죠.“
경혜 씨에게 기도는 성철 스님과의 만남이었고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스리는 수행이었던 것이다.
“힘들 때가 왜 없겠어요.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몸이 괴롭다고 거기에 굴하지 말고 이겨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져야죠. 몸에 이끌려서 배고프다고 먹여주고, 춥다고 입혀주는 데에만 끌려 다니면 자신을 찾을 수가 없어요.“
한경혜 씨는 매일 새벽 4시경에 일어나 절을 한다. 시작하기 전 향을 피우고 능엄주를 한차례 외운다. 그리고 예불대참회문을 외우며 절을 한다.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고 하심(下心)하는 것, 그것이 경혜 씨가 절하는 방법이다.
간혹 절을 할 수 없는 때도 있다. 2000년에 히말라야 등반을 할 때처럼 멀리 여행을 해야 할 때는 미리 절을 해 둔다.
뇌성마비를 이겨낸 그녀는 절 수행을 통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성취하는 법을 배웠다. 보통 사람들도 어렵다는 히말라야 등반을 했고, 그림을 그리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지금은 홍익대 미술대학원에 다니며 동양화를 전공하고 있다. 이미 국전에서 특선2번, 입선을 5번이나 한, 실력이 입증된 화가다. 이렇게 차곡차곡 꿈을 이루는 것은 절 수행 덕이 아닐까.
“나중에 저는 무료 양로원을 짓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 꿈입니다. 내가 존경하는 성철 스님. 그리고 주위 분들한테 도움을 많이 받은 걸 회향하고 싶어요.“
한경혜 씨는 보살 같이 환하고 밝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23년째 하루 천배 용맹정진
뇌성마비장애 화가 한경혜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