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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암 권철연 선생 고택 ① – 전통적이며 유교적인 한옥

대한인 2014. 11. 11. 17:53

성암 권철연 선생 고택 ① – 전통적이며 유교적인 한옥

성암 권철연 선생 고택 ①

 

전통적이며 유교적인 한옥

 

경북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에 있는 성암 권철연(惺菴 權喆淵) 선생 고택은 ‘권진사댁’으로 유명한 조선시대 가옥으로 현재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90호이다.

 

 

 

사랑채 뒤편에 위치한 정면 7칸, 측면 8칸으로 구성된 ‘ㅁ’자 형 안채.

ⓒ 한국과학창의재단

 

“여기가 안채 건물이고요, 오른쪽 끝에 있는 방이 시어머니가 거처하는 안방이에요. 저 안방에 작은 방이 하나 더 있는데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열쇠꾸러미를 넘겨주고 가는 뒷방입니다. 안방마님의 권위를 며느리에게 넘겨준다는 거죠. 여기가 바로 어르신들이 말하는 ‘뒷방 늙은이 신세’라고 할 때 쓰는 그 뒷방이지요~. 저도 안방에 있던 작은 뒷방을 얼마 전에야 봤는데, 말로만 듣던 곳을 직접 보니 놀랍고 신기했습니다.”

 

권진사댁의 아늑한 안채 마당이다. 권진사댁이 자리한 곳은 유교문화의 중심지였던 선비의 고장, 경상북도 봉화군. 그 안에 ‘억지 춘양’이 ‘덩실 춘양’으로 바뀐다는 기름진 땅, 춘양면. 또 그 안의 의양리다. 그 곳에 춘양목으로 지은 66칸 ‘ㅁ’자 한옥 권진사댁이 있다. 그리고 사랑채 옆에 난 중문을 지나 현 종손 권탄웅 선생이 제일 처음 안내한 곳은 소박하고 단아한 안채 마당. 뒤뜰에 소나무숲이 있어 마당으로 솔 향이 퍼지는 듯 상쾌한 공기가 감돈다. 그렇게 함께 마당을 거닐다가 사랑채로 이동하며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안동 권씨 문중 이야기로 흘렀다.

 

 

 

사랑채와 안채를 구분하는 중문.

중문에 심은 단풍나무의 고운 단풍이 가을 고택과 잘 어울린다.

ⓒ 한국과학창의재단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에 위치한 권진사댁은 권철연 선생(權喆淵, 1874~1951)이 살던 집이다. 선생은 안동 권씨 충재공 계열 권벌의 자손으로 권중하의 장자다. 자는 성길(聖吉)이고, 호는 성암(省庵)이다. 1888년 소과에 응시해 생원이 되었다. 권진사댁을 지은 것은 고종 17년1880년이고 100년 정도가 흐른 1987년에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190호로 지정됐다. 그리고 지금은 35대 권탄웅 선생이 살고 있다.

 

100년 전통의 권진사댁. 이 권진사댁은 다른 고택과는 달리 사람을 압도하는 웅장한 멋은 덜하지만, 실용적인 미는 뛰어나다. 이는 권철연 선생의 성품과 철학이 한옥에도 깃들어 있는 것인데, 이런 그의 성품을 알 수 있는 일화가 있다.

 

바로 권씨 문중에서는 유명한 가양주 이야기. 하루는 밀양에서 시집온 권철연 선생의 부인이 가양주를 빚어 올렸다. 가양주는 집에서 빚은 술을 말하며 지역별로 맛과 향이 다르다. 다량의 곡물과 정성으로 빚어낸 가양주는 그 맛이 훌륭했고, 권철연 선생은 그 가양주를 맛있게 마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는 그 가양주를 더는 만들지 말라고 했다. 이 가양주에는 소중한 식량인 찹쌀, 밀가루 등 곡식이 많이 들어갔고, 근검절약을 삶의 신조로 실천해 온 선생과는 맞지 않는 음식이었기 때문이다. 선생의 이런 검소한 생활 습관은 그의 아들, 손자 같은 가족은 물론 바깥사람에게도 본보기가 되었다.

 

그리고 기억할만한 문중 이야기, 권철연 선생의 아들 이야기다. 모범적이자 실천적인 아버지 권철연 선생의 가르침을 받아 반듯하게 장성한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인 권상경(權相經), 1890~1955이다. 권상경은 독립자금을 지원했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공을 인정받아 2005년에 독립유공자로 추서되기에 이른다. 이렇게 권진사댁은 청렴한 선비 아버지와 독립유공자 아들을 배출한 고택이라는 점에서 권씨 가문 사람이 아니더라도 뜨거운 자부심을 느끼게 해준다.

 

이런 고고한 선비 정신의 전통은 충재 권벌 선생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권벌 선생은 기묘사화(己卯士禍)와 을사사화(乙巳士禍)를 겪으며 험난한 삶을 살았고, 그런 와중에도 선비로서의 강직함을 잃지 않았다고 한다. 유곡리 충재 고택에는 유명한 정자가 하나 있는데, 커다란 거북이 모양의 바위 위에 지은 ‘청암정(靑巖亭)’이란 정자가 그것이다. 정자 위에서 바라보면 경관이 매우 빼어나다. 그 험난했던 시간을 이곳의 수려한 자연과 벗 삼아 고고한 정신을 가다듬은 것은 아닐는지.

 

그러나 ‘오랜 역사’와 ‘가문의 자긍심’ 외에 권진사댁은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담은 건축으로도 가치가 큰 공간이다. 권진사댁이 지어질 당시인 조선 후기는 유교의 이념이 정치뿐 아니라 사회생활 전반에 강하게 스며들었던 때이다. 그래서 권진사댁 역시 유교 사상의 이해를 바탕으로 살펴본다면 가옥의 구조를 더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권진사댁 곳곳에 살아 숨쉬는 유교사상은 어떤 형태로 자리하고 있는 걸까?

 

 

 

권진사댁의 솟을대문.

솟을대문은 관직에 올라야만 세울 수 있었다.

ⓒ 한국과학창의재단

 

그 이해의 첫걸음은 ‘솟을대문’을 넘으면서부터다. 문을 넘어가면 너른 여백이 시원한 사랑마당이 가장 먼저 보인다. 그리고 정면에 7칸 측면 8칸의 ‘ㅁ’ 자 형 안채가 웅장하게 들어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권진사댁의 대문채는 정면 9칸, 측면 1칸 규모이다. 대문채는 성곽처럼 웅장하고 중앙의 1칸이 솟을대문이다. 대문을 비롯한 좌우의 행랑채 역시 보통 다른 한옥보다 높게 지어져 웅장함을 더한다. 행랑채의 양 끝은 바깥 담장으로 이어져 집을 감싼다.

 

대문채의 위엄 있는 솟을대문은 권진사댁이 중·상류 계층이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당시 사회적 계급 또는 지위를 알려준다. 권진사댁에서의 ‘진사’는 보통 조선시대 진사시에 합격한 사람을 말하는 것으로 대과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사람이지만, 반드시 진사가 벼슬을 해야 했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진사’라고 하면 관직에 나가지는 않았으나 학문을 연구하고 덕을 닦는 선비라 보면 되겠다. 비록 진사계층은 벼슬을 하지는 않았으나, 어려운 춘궁기에 동네 사람과 같은 음식을 먹었다는 권철연 선생의 일화에서 보듯 중·상류 계층의 위엄과 재력을 갖추고 향촌사회 리더로서 모범인 듯하다.

 

그 다음으로 눈 여겨 볼만한 유교적 건축물은 ‘사랑채’와 ‘안채’다. 권진사댁의 사랑채는 정면 7칸 규모로 오른편과 왼편 끝으로 각각 1칸 규모의 방이 있다. 전체적으로 사랑채는 사랑방, 침방, 누마루로 구성돼 있다. 이 곳은 집주인 즉 가부장의 일상 거처로서 장자를 위한 작은 사랑방과 가부장을 위한 큰 사랑방 옆에 있다. 장자는 수유기가 끝날 때까지는 안채에서 모친과 함께 지내지만 이 기간이 끝나면 바로 사랑채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면서 가부장이 전수하는 수업을 받게 된다. 이렇듯 사랑은 가문 계승을 위한 가부장과 장자 중심의 생활공간이면서 동시에 배움터였다.

 

그리고 안채. 사랑채에서 중문을 통과하면 안채가 나온다. 안채는 안방과 건너방, 안대청과 부엌, 곳간으로 구성돼 있다. 안방은 안방마님의 일상 거처고 종부, 큰 며느리, 작은 며느리를 위한 공간이다. 딸도 살림살이와 예절 수양을 위해 안채에서 함께 지냈다.

 

사랑채와 달리 안채는 여주인의 일상 거처이자 침실이었다. 이 안채에서 최고의 권한을 가진 사람은 안방을 차지한 시어머니다. 그 권한의 징표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열쇠꾸러미였다. 곳간 열쇠와 뒤주 열쇠를 묶은 이 열쇠꾸러미는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물려준다. 그 시점은 며느리가 살림에 능숙하고, 대를 이을 자녀를 낳고 기르는 등 가풍을 잘 익혔을 때이다. 그래서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시어머니는 며느리에게 안방을 내어 주고 뒷방으로 물러났다. 어르신들이 우스갯소리로 내뱉는 ‘뒷방 늙은이’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

 

사랑채와 안채는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과 내외법을 철저히 지키기 위해 채와 채를 나눠 남녀를 구분한 대표적인 유교 건축물이다.

 

 

 

안채 시렁 위의 소반.

조부와 부친, 그리고 아들은 사랑채의 방에서 각각 독상을 받아 식사를 한다.

ⓒ 한국과학창의재단

 

이렇게 사랑채, 안채 들여다보고 다시 사랑마당으로 돌아왔다. 솟을대문을 넘기 전에 다시 바라본 권진사댁 전경. 기둥, 보, 서까래 등 각 부위의 나무를 작게 잘라 날렵하게 만든 고택이라 그런지 처마 올림이 날렵하고, 현수곡선이 경쾌하다. 튼튼하지만 우람하지는 않은 그런 느낌이다. 이 단아함 속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기분 좋은 느낌, 위풍당당함. 그 위풍당당함은 아마도 지식인이지만 민초와 섞여 함께 어울리고자 했던 권 진사의 삶의 태도와 유교적 철학이 고택 곳곳에 배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한국과학창의재단 <고택 속 숨은 이야기와 전통과학>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