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요.
1945년 8월 해방 이후 미 군정을 실시 과정에서 미 당국은 국군의 전신인 '국경 경비대'를 창설하였다.
미 군정은 공산주의의 극악성에 무지함과 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신원 조회 등을 하지 않고 지원자는 다 받아들었다.
이 허점을 이용해 입대 과정에서 민노당 좌익 계열들이 광범위하게 침투하게 되었다.
미 당국은 또한 '국경'을 홀대, 일본이 버리고 간 볼트액션식 소총과 일본 군복 등 열악한 장비와 처우로 일관해 내부적으로 불만이 팽배하였고 반면 경찰은 최신식 장비 즉 칼빈 소총과 멋진 제복 등을지급 군과 경의 대립과 마찰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미 당국은 항상 3.8선에서 문제만 일으키는 해이한 군보다 일제 강점기부터 존속된 탄탄한 조직과 엄정한 기강인 경찰을 더 선호했던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정식으로 대한민국정부가 단독으로 수립된지 2개월 후에 지난 해 4월에 발생한 4.3제주반란사태가 진정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여수에 주둔 중인 제14연대를 파견하기로 결정한다.
마침내 10월 19일 저녁 10시 출발 명령이 떨어지자 남로당 군사책인 연대 인사계 상사 지창수는 출발1 시간 전에 선수를 쳐 장교들을 거의 사살하고 영내를 손쉽게 장악하는데 성공한다.
너무 쉽게 연대를 장악 성공한 주요 이유 중 하나가 광주의 제4연대 제1대대의 기반으로 창설된 제14연대 대부분이 중대장이하 이미 좌익 사상에 물든 불순한 부대였던 것이다.
연대를 손에 넣은 지창수는 여수 시내 남로당 당원들과 연계, 곧바로 3.000여 명의 반란군을 투입 5시간 만에 시를 점령 '여수인민공화국'을 선포한다.
시의 좌익과 학생들이 가담해 '인민위원회'를 조직하고 600여 명으로 '인민의용대'를 구성하여 시내의 우익 인사와 가족들 1.000여 명을 학살하였다.
특히 여수 여중학생들은 빨갱이 교감 영향으로 붉은 사상으로 세뇌화되어 무서운 괴물로 변해 여자 특유의 잔인성을 발휘 시내를 종횡무진 하였다고 한다.
전남 지역은 일본강점기 시절부터 지주들에 대한 반감 때문에 좌익 사상이 확산돼가고 있었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 20일 순천으로 진격한 반란군은 오후 3시쯤에 순천 마저 강점, 인공기를 관공서 마다 달 수 있었다.
이들은 3개 항의 성명을 발표했는데,
1.미군철수(현 미군철수)
2인민공화국만세(현 대한민국 정통성 부인)
3.제주출동반대(현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오늘날에도 참 낯익은 구호들이다!
순천은 단 3일 독립 기간 동안 무려 1.000여 명의 경찰 및 우익 인사와 그들의 가족을 학살하였는데 특히 순천 중학생이 주도한 인민 재판에서 양민들이 대부분 무참히 학살당했다고 한다.
이 중딩 빨갱이들은 가가호호 이잡듯이하여 피신한 우익들을 죽였는데 때려 죽이고, 불 태워 죽이고, 죽창으로 죽이고, 목불인견,
그 참혹함과 잔학성은 과연 같은 동포인가를 저주할 정도였다고 한다.
반란 폭도들은 여세를 몰아 인근 보성, 남원, 광양까지 점거하였다.
정부 당국은 10월 22일에 4개 연대를 동원 순천을 탈환하고 여수는 저항이 심해 27일에 가서야 태극기를 게양할 수 있었다.
애석하게 반란 제14연대 주력은 도주에 성공, 6.25 후까지 군과 민을 괴롭힌 지리산 빨치산의 모태가 되었다.
사상자 수는 혼선이 많아 정확하지 않지만 대략 4000여 명이 사망, 실종되었다 한다.
물론 대부분이 반란군에 희생된 우익 사람들이다. 반란 진압 성격상 무고한 주민이 희생된 것도 부인할 수 없지만
먼저 비난 받아야 할 사람들은 이런 민족상잔의 비극을 야기한 빨갱이들이지 군인이나 경찰이 아니다.
이 사건의 본질은 북한 지령을 받은 남로당이 치밀한 계획하의 자행된 국가 전복 사태인 것이다.
아무튼 이 사건은 대한민국의 진로에 관한 중대차한 사건인게 이 사태의 계기로 군 내부에 거미줄처럼 암약하는 빨갱이들을 색출하는 숙군 작업이 단행해 10.000여 명의 좌익 군인들을 적발,
5.000여 명은 유죄 판결로 불명제대와 징역형과 사형에 처해졌고 5.000여 명은 탈영하여 지하로 산으로 숨었고 전방에 있는 부대와 장병은 월북하였다.
그리고 '국가보안법'이 동년 12월에 제정되어 남로당 등이 불법화되고 반공국가의 확고한 기틀이 마련되었다.
끝으로 이사건은 하늘의 섭리와 필연적 예정론적 귀납이 적용되지 않았나 할 정도로 전화위복된 유가족들에게는 왜람된 말이지만 복된 사건이다.
왜냐하면 곧 2년 뒤에 6.25사변이 터졌기 때문이다.
만약 '여순반란사건'이 없었다면 숙군(박정희 대통령의 좌익 딱지도 그대로고. 천운이다!)도 없었을 것이고
그러면 적과 싸우기도 전에 우리 군 내부에서 자중지란이 일어나 자멸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래 고해상 사진들은 당시' 라이프'기자 칼 마이던스 일행이 촬영한 것으로 그 당시는 너무 참혹하여 공개하지 못해 근래에 공개한것으로
보관 상태가 좋아 생생한 상황을 체감할 수 있으나 찍은이 주석이 없어 정보의 한계가 필연적이라 체계적인 고증이 필요하다 하겠다.
"심야에 작업한 것이므로 오타 양해바란다 "
대한민국 군인을 환영인지 항복인지 어쩡쩡한 포즈와 표정으로 맞이하는 주민들.
검거된 반란폭도들. 반군도 군복을 입어서 구별하기 위해 헬멧과 팔에 표식인 흰색 밴드를 착용하고 있다.
빨갱이들에게 학살당한 우익계 주민들.
이들 시체의 특징은 대개 양손이 묶어 있고 얼굴에 집단 구타를 당해 피멍과 상처가 있다는 거다.
일부 좌파 사이트 등은 이사진이 '보도연맹'이나 국군의 학살로 왜곡 호도하고 있다.
보도연맹은 죄수이기 때문에 전원이 삭발하고 죄수복을 입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오른쪽 끝에는 검정색의 경찰모로 보인다.
한의원으로 보이는 가게의 일가족이 학살되었다.
우익인 걸로 추측될 뿐이다.
진압 후 학교운동장에 모인 후에 반란군으로 판결된 폭도들은 뒷편에서 바로 사살되었다.
웃통을 벗었고 얼굴이 비교적 깨끗한 게 처형된 반란군들의 사체의 특징이다.
좌익과 빨갱이 군인들(군 바지)이 섞어 있다.
체포된 지역 종북 좌파들.
특별조사국. 이사건의 계기로 미군은 최신 장비를 지급하였다고 하니 6.25 바로 직후인 우리 군이 얼마나 열악한 상태인지 알 수 있다.
몸수색을 하기 위해 팬츠 바람으로 서있는 반란 폭도들.
반란군에 학살된 양민들. 얼굴에 집단 구타한 자국이 선명하다.
대개 집단 고문을 가한 후 총 쏘아 죽였다고 한다.
학교 운동장에 모여있는 주민들.
여수,순천 학교 운동자에 40세 미만 남자들을 집합한 후, 군 경 우익 청년 등이 빨갱이를 색출하고 있다.
무슨 이유로 40세로 기준을 삼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당시 남자 평균 수명과 관계가 있는 것 같다.
왼쪽 끝 흰색 띠를 모자에 맨 우익 청년의 모자는 일본 군모이고 소총도 일본 소총이다.
...
학교 운동장에 모여있는 피난민들.
시내 곳곳 후미진 장소에 양민 사체더미가 있었다고 한다. 다리 밑에서 참살된 체 발견된 양민 시체들.
미군은 군수품 담당 군사고문단이 파견해 지원하였다.
압수한 인공기 등 낫과 망치 모양으로 보면 소련국기?
카빈 소총은 우리 체격 조건에 적합하고 반자동이라 군인들에게 대환영을 받았다 한다.
다리에 부상당한 중사 계급의 군인.
집합한 40세 미만의 남자들. 당시 피신에 성공한 현지 경찰과 주민들의 증언으로 빨갱이를 색출하였다.
처형된 반란군 폭도들. 군복 바지로 보아 제14연대 소속이다.
트럭을 탄 반란 군인들. 1주일 동안 머리가 많이 길어졌다. 당시 사병도 고수머리가 허용되었다.
반란군에 죽임을 당한 남편의 시신을 발견하고 오열하는 아내와 자녀들.
생존 경찰들의 분노와 증오가 대단하였다 한다.
반란군이 전광석화처럼 시를 장악 그들의 가족이 시외로 미처 피신 못해 대개 몰살들을 당했기 때문이다.
학살당한 경찰들. 순천 서장은 외안인데 선글라스를 항상 착용했기 때문에 피신 중 주민에게 발각되어 한쪽 눈마저 뽑히고 쇠사슬로 차량에 묶여 시내에 끌려 다닌 후에 총살하였다고 전해진다.
탈환 후 거리에 방치된 우익계 인사 사체 발견. 빨갱이 눈이 무서워 수습도 못했을 거다.
사태 종료 후 가재 도구를 정리하는 주민.
진압 사령관 송호성 준장이라 추측된다.
송호성 준장과 작전 협의하는 막료들.
파견된 군사고문단장. 대령 계급장을 달고 있다. 왼쪽은 송호성 장군(?) 송호성 진압 사령관 이놈은 나중에 월북하였다니 얼마나 좌익 사상이 군에 퍼져 있는지 알 수 있다.
조
칼 마이던스 기자 일행.
진압 사령관 송호성. 검정 제복은 경찰.
당시 48년에는 사병들도 고수머리가 허용되었던 모양이다. 미군은 그때나 지금도 장교 사병 구별 없이 고수머리를 할 수 있어 3년간 미 군정 영향으로
우리 군인도 창군 초기 과도기라서 머리 규정이 그대로 존속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