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간 전쟁역사를 회상해 본다
지금으로 부터 65년전인 1950년 10월 17일의 한국의 상황을 대략 다음과 같이 요약할수 있다
이중근(李重根) 편저 6.25전쟁 1129일(70페이지)에는
1950년 10월17일 [음 9. 7. 乙酉 ㅣ화요일ㅣ맑음ㅣ 115일차
전황 : - 중공군 지원군본대 압록강 도하재차유보./ 실제상황은 16일 도강명령, 17일 압록강을 도강)
- 국군수도사단.함흥 흥남탈환
- 북진 한계선, 선천 - 성진선으로 확대
국내 : - 정부.중국의 한국전쟁 개입 증거발표
_ 이승만대통령, 유엔 결의 원칙에 의한 북한통치선언,수복지구 행정장관 파견을 언명
그러면 그 당시의 전쟁상황과 중공군참전 상황을 통해 당시를 회상해 보는것도 의미있는 일이겠다
<당시의 상황 글>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 ★實錄[6.25 戰史]
2008.11.20. 18:40
http://blog.naver.com/shim10603016/10057196467
중공군 탄약수송부대의 이동
<중국의 韓國戰 참전>
중국군이 한국전에 참전한다는 것이 가능성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중국은, 한국군이 아닌 UN군이 38도선을 넘어설 경우 중국은 한국전에 참전하겠다고 경고했다. 하지만, UN군은 중국의 경고를 무시하고 10월 2일 38선을 넘었다.
중국의 모택동은 한국전에 참전하는 것에 대해 소련의 스타린과 긴밀히 협의하기 시작했다. 그당시 중국은 공군력이 없었기 때문에 중국이 지상군을 파견하는 대신, 소련은 공군과 전쟁물자를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참전이 결정되었다.
한편 맥아더 장군은 당시 중국이 한국전에 참전하지 않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중국의 참전을 걱정하는 트루만 대통령과 만나 중국은 절대로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를 확신시켰고, 설사 참전한다해도 그들에게는 희생만이 있을것이라며 크리스마스까지 미군을 일본으로 돌려 보내겠다고 했다.
1950년 10월 19일, 맥아더가 중국은 한국전에 참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을 한 지 사흘 후에 중국군은 압록강을 넘었지만, 이들은 북한에 들어오자마자 모두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었기 때문에 UN군은 중국군이 한반도에 들어오는 것을 전혀 눈치챌 수 없었다.
10월 25일 미군은 중국군으로 보이는 군대로 부터 기습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곧 바람처럼 사라졌다. 미군은 그들이 그져 '중국계 한국인이구나~'하고 생각했다.
11월 1일 서부전선에서 중국군은 본격적으로 공격을 시작하였고, 11월 2일 중국은 방송을 통해 한국전에 참전했음을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註: 중공군의 압록강 도강 명령은 1950년 10월 18일에 내려졌고, 19일부터 도강하기 시작했다. 최초 접전은 10월 25일 운산, 온정리 지역에서 이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UN군은 막대한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UN군이 느낀 상대는 지금까지 싸워온 북한군과 매우 달랐다. 아군의 보급로와 도주로를 차단하고 정면 공격을 하는가 하면은 후방에서 불쑥 나타나기도했다. 이들은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에만 공격을 하였고, 진군 할 때에는 나팔을 불거나 징을 치면서 공격을 했다. 이 때문에 비행기의 공습은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이런 그들의 공격방법은 UN군을 당황하게 만들었고, 하늘에서는 수련제 MIG기가 출연했다. 지금까지 UN군은 하늘에서 별다른 어려움없이 공격할 수 있었지만, MIG기 출연으로 인해 상황이 달라졌다.
11월 하순, 동부전선에서도 중공군의 공격이 시작되었고, 아군의 전선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특히 미 제1해병사단이 가장 위기에 빠졌다. 중공군의 공격뿐만 아니라 살인적인 추위로도 공격을 받은 셈이다. 중국은 미 해병대를 제거하기 위해 약 7개사단을 동원하여 그들을 겹겹히 애워쌌다. 중공군의 주 공격방법은 바로 인해 전술이었다.
※자료 : 육군본부 <韓國戰爭史>에서
[출처] 중공군의 한국전 참전|작성자 물방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