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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의 신 - 野球의 神

대한인 2012. 4. 5. 08:25

 

金林 星根 (

かねばやし せいこん - 가네바야시 세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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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2세로 1942년 일본 교토 부 태생이다. 일본명은 가네바야시 세이콘(일본어: 金林 星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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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 가쓰라 고등학교(京都府立 桂 高等學校)에 재학 중이던 1959년, 제4회 재일동포 학생 모국 방문 경기 때 고국 땅을 밟았고 고교 졸업 후 일본 사회인 야구 팀인 교토상호차량에서 뛰다가 1960년 재일동포 성인 구단 방문 경기를 하고 나서 동아대학교(東亞大學校)에 스카우트됐다. 동아대학교를 중퇴한 후 한국 실업 야구에 투신, 1961년 교통부에 입단한 그는 이듬해 대한민국에 완전히 정착하고 중소기업은행 창단 멤버가 되면서 1969년초까지 활동했다.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때 대표팀에 선발되어 한국을 준우승으로 이끌었다.

1963년 11월 13일 대통령배 가을 리그 인천시청과의 경기에서는 볼넷 1개만을 내주며 노히트 노런을 기록, 1964년 실업 연맹전에선 다승 공동 2위(20승 5패)에 오르는 등 놀라운 활약을 보였다. 좌완 투수로 빠른 직구를 주 무기로 삼아 1962년 제4회 . 그러나 지나친 혹사로 어깨를 다친 후 야수로 전업했고 1969년 이른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한다.

김성근 - 金星根

1942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남 진양이다. 일본 가쓰라 고등학교에서 투수로서 선수 생활을 시작하였고 재일 교포 학생야구단, 동아대, 교통부 선수를 거쳐 국가대표 선수로 발탁되었으며 이후 기업은행에 입단하여 발군의 활약을 펼치지만 부상으로 인해 1968년 선수 생활을 마감하였다.

1969년 마산상고 감독을 시작으로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고 1972년에 기업은행 감독으로 취임하였다. 1973년 국가대표 코치직을 일임하고 충암고와 신일고의 감독으로 선수들을 지도했다. 이후 1782년 OB 베어스 코치로 들어가면서 프로야구계에 발을 담그게 되면서 1984년부터 OB 베어스, 태평양 돌핀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LG 트윈스 감독직을 수행하였다.

2005년도에 일본 지바의 롯데 마린스 순회 코치로 잠시 생활하다가 2006년부터 현재까지 SK 와이번스 감독으로 활동 중이다.

주요 기록으로는 2002 한국시리즈 준우승(LG 트윈스), 2007, 2008 한국시리즈 2연패(SK 와이번스), 2008년 9월 프로야구 통산 두 번째 1천승 달성, 2009년 5월 프로야구 통산 두 번째 2천 경기 출장 등이 있으며 주요 수상 경력으로는 1975년 체육훈장 기린장, 2007 한국시리즈 최우수 감독상, 2007 스포츠토토 올해의 감독상, 2008 한국시리즈 최우수 감독상이 있다.

 


야구의 신 - 野球의 神

 

처음부터 그가 야신(野神)이라 불린 것은 아니다. 2002년, 김성근 감독이 이끈 LG 트윈스가 김응용 감독의 삼성 라이온즈와 한국시리즈에서 맞붙었다. 객관적으론 삼성의 압승이 점쳐졌지만 LG의 반격은 만만찮았고, 결국 6차전에서야 삼성이 4승2패로 첫 우승을 따냈다. 이미 해태에서 아홉 차례나 우승을 경험한 김응용 감독도 경기 후 “김성근 감독이 야구의 신이 아닌가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지는 줄 알았다” 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야구의 신’ 이란 표현은 “그런 상대를 이긴 나는 더 대단하지 않으냐” 는 김응용 감독의 노련한 비유로 간주됐다. 그러나 김성근 감독은 2007년 SK와이번스 감독을 맡은 이후 4년 연속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세 차례 우승해 진정한 야신의 면모를 과시했다. 그런 그가 재계약 문제로 구단과 갈등을 빚다가 18일 경질됐다. 야구 팬들에겐 큰 충격이다.

일본에도 ‘야구의 신’ 이 있었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가와카미 데쓰하루(川上哲治)다. 선수 시절 다섯 차례나 수위타자에 오르며 ‘타자의 신’ 이라 불렸던 가와카미는 감독을 맡아 1965년부터 73년까지 9회 연속 일본시리즈를 제패해 ‘야구의 신’ 으로 승격됐다.

그런 그도 원만한 성격은 아니었다. 처음엔 동료 선수들과, 다음엔 기자들과, 감독이 된 뒤에는 “지원이 부족하다” 며 구단과 갈등을 빚었다. 일부 팬들은 ‘승부에만 집착하는 재미없는 야구’ 라며 그를 비난했다. 그래도 요미우리는 선수단과 관련해선 그의 영역에 손을 대지 않았다. ‘야구는 감독, 지원은 프런트’ 라는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거인군(巨人軍)으로 불리는 명문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설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일각에선 김성근 감독 해임과 삼성의 소프트웨어 비상을 같은 원인에서 비롯된 결과로 본다. 개별 분야 전문가를 인정하지 않는 한국적 기업문화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단주의 입장에선 야구단도 계열사 중 하나겠지만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해선 인사고과나 재무관리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사기』의 ‘손자오기열전’ 에는 ‘장수가 군에 임하면 왕명이라도 따르지 않을 수 있다(將在軍, 君命有所不受)’ 라는 말이 전한다. 누군가에게 전권을 맡길 때, 혹은 책임을 맡을 때 가져야 할 마음의 자세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말이지만 실천은 역시 어렵다.

Barack Hussein Oba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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