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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의 발자취

대한인 2012. 4. 5. 08:49

Athletic History

BC 776년부터 AD 393년에는 육상의 시초 신전 앞에 행하는 의식형태 고대 올림픽 개최, AD 393년부터 17세기에 육상의 암흑기 로마제국 테오도시우스 1세의 금지령 올림피아 성역 붕괴 위정자에 대한 불만이나 저항의 표현 수단으로 암암리에 경기, 17세기부터 현제까지 육상의 발전기 근대육상, 영국에서 발전 시작 1830년 아마추어 경기 등장

이 기본적인 운동 양식은 인류가 직립 보행을 시작하고, 자연스레 손의 자유를 획득하게 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고대 그리스의 경기는 신전 앞에서 행하는 의식 형태로 이루어졌으며, 그 중 기원전 776년에 올림피아 지방에서 발전했던 올림피아스(Olympias) 라는 경기가 가장 잘 알려져 있는데, 이미 여기에는 직선 단거리 경주의 일종인「스타디엄주」, 장거리 경기인「도리코스주」,「고대 오종경기」및「원반던지기」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후 1000년간 융성한 발전을 이루었으나 기원 397년 그리스도 교도였던 로마 제국의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금지되었으며 이후 올림피아 성역이 붕괴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반 민중이나 농민들 사이에서 스포츠는 이미 일상생활 속에 뿌리깊게 자리잡았으며, 대부분의 민중들은 위정자에 대한 불만이나 저항의지의 표현 수단으로서 경기를 계속 이어갔습니다.

17세기에 이르러 육상경기는 대부분 상금을 걸고 진행되었으며, 상금을 타기 위한 수단으로 각지의 우수 선수들을 고용하려 애쓰는 귀족들에 의해 규모 면에서 커다란 발전을 보였습니다.

특히 이 시기에 이르러 대량 인쇄가 가능하게 된 신문은 각종 경기의 기록, 경기 예고 및 예상기사를 실어 대중에게 경기의 재미를 전달하는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18세기에 이르러 각종 레이스 경기는 별도의 시설 없이 공공도로를 사용한 장거리 레이스로 각지에서 행해졌으나, 이후 경기 전체 내용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정해진 경기장을 주회(走回)하는 형태로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또 장거리뿐 아니라 1마일, ¼마일, 100야드 등 비교적 짧은 거리의 레이스도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1830년에 들어서면서 주목해야 할 레이스가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영국 버밍검 대학생이 프로와 같은 경기용 가명(假名)을 내걸고 프로와 같은 외관을 갖추고 1마일 크로스컨트리 장애물 레이스를 달린 것입니다. 이것은 상금을 목적에 두지 않고 자신의 체력을 단련하기 위해 자신의 학교가 아닌 공공도로를 달렸다는 점에서 새로운 아마추어의 등장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1840년대에 육상경기 무대는 대학으로 옮겨집니다.
이 당시 더블린 대학에서는 아일랜드 고유의 민속경기를 경기에 포함시켜 진행했는데 이 경기는 오늘날 필드 종목의 원형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대학을 중심으로 한 레이스의 발달과 더불어 기숙사 대항 경기, 교내대회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발전되었으며, 경비나 장소의 지원 등 학교 차원의 전폭적인 후원이 있었던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신흥 브루조아 자녀의 대학 입학이 증가함에 따라 육상경기를 과외활동의 일환으로써 여기는 풍토가 자리잡은 점도 특기할 만 합니다.1864년 3월 졸업생들의 끈끈한 유대와 대기업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옥스포드와 캠브리지대학간의 제 1회「아마추어 육상경기클럽(aac:amateur athletic club)」을 결성, 12종목의 경기를 개최하여 큰 인기를 모으기도 했으나, 점점 승자가 정해져 있는 프로경기에 시들해진 사람들은 아마추어 경기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프로와 아마추어가 공존하는 「오픈 경기」가 생겨나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즈음에 가속화된 공업화·도시화는 지방 중소도시의 발전을 불러와, 런던뿐 아니라 맨체스터, 리버풀 등 지방도시에서도 육상경기가 늘어나기 시작했으며 이렇게 전국으로 고르게 퍼진 육상열기는 결국
「 전 영국선수권대회」개최라는 결실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회원의 대부분이 일류대학을 졸업한 엘리트로 구성된 aac와 시민계급으로 구성된「 런던 육상경기 클럽(lac:london athetic club)」 이라는 두 개 단체의 대결 구도를 거쳐「아마추어 육상경기협회(aaa:amateur athletic association)」가 결성되고, 까다로운 출전자격과 16개조의 경기규칙을 정하여 개최된 이 대회를 통해 영국은 육상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지만 이어 미국의 추격을 피할 수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운동회, 근대 육상 보급의 큰 역할
우리나라에 오늘날과 같은 근대 스포츠가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1894년을 전후한 시점입니다.
1895년 고종 황제는 체육 교육을 중시하는 내용의 교육초서를 내렸고, 이에 따라 각급 학교는 체육 과목을 마련하고 운동회를 열게 되었습니다. 이후 각 학교의 운동회가 연합 운동회로 발전하면서 육상경기는 일반에게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회는 1896년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근대 올림픽의 첫 대회가 열렸던 5월 2일, 서울 동소문 밖 삼선평(지금의 삼선교 근처)에서 열렸습니다. 운동회는 학생들 외에도 일반인들이 후원자나 관중으로 참여하면서 근대 육상을 보급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육상 발전의 틀 마련
1906년 6월, 우리나라 최초의 조직적 체육기관인 대한체육구락부의 운동회가 열렸으며, 1907년 10월에는 체육의 일반화와 질적 향상을 위해 대한구민체육회가 발족, 한국 육상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최초의 육상대회는 1920년 5월, 종로의 중앙YMCA 주최로 열린 서울 각 사립 중ㆍ고등학교 육상경기로서, 체육에의 열정이 싹트기 시작한 한국 사회에 큰 자극제가 되었습니다. 1920년 조선체육회(뒷날의 대한체육회)가 설립, 1924년 6월 조선체육회 주최 제1회 육상경기대회를 개최하면서 본격적으로 한국 육상이 발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국 육상의 꽃, 마라톤
육상 경기 가운데 한국 육상이 세계에 이름을 떨친 종목은 마라톤입니다.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에 참가해 금메달을 획득한 것도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이었고, 이후 수많은 선수들이 영광의 기록을 수립해 온 것도 마라톤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한국인에게 마라톤은 ‘민족 경기’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1936년 독일에서 개최된 제11회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의 세계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획득한 손기정
선수는, 비록 가슴에는 태극기가 아닌 일장기를 달고 있었지만, 마라톤을 통해 나라 잃은 민족의 설움과 울분을 달래고 우리 겨레를 감동시킨 선수로서, 한국인의 저력을 세계만방에 알렸습니다.

한국인 처음으로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1932년 LA 올림픽으로서, 김은배 선수와 권태하 선수가 각각 6위와 9위를 차지하였습니다.

그리고 1947년 제51회 보스턴 세계마라톤대회에서는 서윤복 선수가 대회 신기록을 세우며 우승하였고, 1950년 제54회 보스턴 세계마라톤대회에서는 함기용ㆍ송길윤ㆍ최윤칠 선수가 1ㆍ2ㆍ3위로 골인하면서 한국의 위상을 드높였습니다.

1958년 제3회 아시아 경기대회(일본) 마라톤에서는 이창훈 선수가, 1982년 제9회 아시아 경기대회(인도)에서는 김양곤 선수가 각각 우승하였으며, 1992년 제25회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는 황영조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하였습니다.

1996년 제26회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이봉주 선수는 1등과 단 3초 차이로 은메달을 따냈으며, 이후 수많은 선수들이 새로운 기록에 도전하며 오늘도 쉬지 않고 달리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 최고기록은 2000년 도쿄 마라톤에서 이봉주 선수가 세운 2시간 7분 20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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