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종위기의 북방계 난초, 털개불알꽃
한국의 멸종위기식물 (13)
세계적으로 생물종이 사라지는 가장 큰 원인은 서식지 파괴로 알려져 있지만, 우리나라 식물의 경우에는 무분별한 채취가 멸종의 가장 큰 원인으로 여겨진다. 관상용이나 약용으로 불법 채취되기 때문에 사라질 위기에 놓인 식물이 많다. 북방계 식물로 개체수 자체도 많지 않은 털개불알꽃은 채취 때문에 절멸 위기에 놓이게 된 대표적인 식물이다.
서로 다른 종이 함께 살면서 이익을 주는 것을 공생(共生)이라 한다. 서로 이익을 주면 상리(商利)공생, 한쪽만 이익을 얻고 다른 쪽은 이익이나 손해가 없으면 편리(片利)공생이라 한다. 생물들은 특수한 환경에 적응하여 살아가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서 공생을 선택한다.
식물과 박테리아의 공생관계는 아카시아, 대두, 자운영 같은 콩과(科) 식물에서 잘 알려져 있고, 오리나무 종류에서도 알려져 있다. 이들 식물의 뿌리에 뿌리혹박테리아가 붙어서 뿌리혹을 형성한다. 이로 인해 식물은 대기 중의 질소를 이용할 수 있게 되고, 박테리아는 영양분과 서식처를 제공 받아 공생관계를 유지한다.
균과 공생관계 유지해야만 생존 가능한 난초
질소고정을 통한 공생관계와 조금 다른 형태의 공생관계를 난초과 식물들에서 볼 수 있다. 난초과 식물은 씨에 배젖이 없기 때문에 자연 상태에서 스스로 싹을 틔울 수 없다. 이런 난초 씨에 특별한 균이 붙어서 공생을 하게 되면 균으로부터 양분을 공급받아 싹을 틔울 수가 있다.
싹이 틀 때 형성된 공생관계는 난초가 자란 후에도 유지되는 게 보통인데, 이때 서로 어떤 도움을 주고받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난초가 광합성을 통해 탄수화물을 만들어내면 이 가운데 일부를 균이 이용하지 않나 추측된다. 다 자란 난초뿌리는 균에 서식처를 제공하기도 한다. 난초뿌리와 균이 만들어낸 공생체를 난균근(orchid mycorrhiza)이라고 한다.
난균군 형성을 통한 난초와 균의 공생관계가 서로의 생명을 유지하는 데 절대적인 조건이 되는 경우도 있다. 온대지방에 분포하는 몇몇 종의 개불알꽃속(屬) 식물에서 볼 수 있는 현상으로, 난초와 균의 공생관계가 깨지면 두 생물종 모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남한에 살고 있는 개불알꽃, 털개불알꽃, 광릉요강꽃 등 3종의 개불알꽃속 식물들은 모두 이런 공생관계를 보여준다. 이들 난초는 특정 균과의 공생관계가 깨지면 더 이상 살지 못하게 되는데, 난초를 옮겨 심었을 때 그런 일이 벌어진다. 자생지에서 잘 살고 있는 난초를 캐서 화단에 옮겨 심으면 십중팔구 죽는다. 옮겨 심어서 바로 죽는 것은 아니고, 2~3년 동안 꽃을 피워 잘 자라다가 죽는다. 옮겨 심은 후에 균이 먼저 죽어 공생관계가 깨지기 때문으로 추정되고 있다.
식물의 보전은 자생지 내에서 일차적으로 해야 하지만, 자생지 여건이 나쁠 경우에는 식물원이나 수목원 같은 곳에서 이차적으로 종을 보전하기도 한다. 자연 상태로 생태계 내에서 보전하는 것을 자생지내 보전(in situ conservation), 식물원 등에 보전하는 것을 자생지외 보전(ex situ conservation)이라고 한다. 그런데, 옮겨 심으면 죽어버리는 털개불알꽃의 경우에는 자생지에서 채취하면, 자생지에서도 사라질 뿐만 아니라 다른 곳에서 자생지외 보전도 불가능한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함백산 자생지 발견되자마자 대부분 훼손
털개불알꽃(Cypripedium guttatum Sw., 난초과)은 겨우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는 대표적인 멸종위기식물이다. 오랫동안 남한에는 자생하지 않는 북방계 난초로 여겨져 오다 90년대 초에 강원도 정선 함백산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도로공사를 하던 중에 발견되어, 잡지에서 소개된 이후 채취꾼들에게 표적이 되고 말았다. 당시에는 남한에 분포하는 사실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기 때문에 보호종으로 지정이 안 된 상태였고, 그 결과 새로 발견된 자생지에서 수백 포기가 한순간에 채취되고 말았다.
현재까지 함백산에 남아 있는 2개의 개체군은 철책을 쳐서 보호하고 있지만 개체수가 수십 포기에 불과하다. 함백산에서 처음 알려진 이래 설악산에서도 발견된 바 있지만 현재는 한 포기도 확인되지 않는 실정이다. 환경부가 멸종위기야생생물 1급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경제적 여유를 얻게 된 요즘, 식물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어났다. 산과 들을 누비며 디지털카메라로 식물사진을 촬영하기도 하고, 화단이나 화분에 정성스레 키워 꽃을 즐기기도 한다. 관심이 너무 지나친 탓인지 간혹 자생지의 식물을 채취하여 훼손하는 일도 벌어진다.
그곳에 있는 그대로 두면 오랫동안 많은 이들이 보고 즐길 수 있는 것을 생각하면, 혼자 보기 위한 욕심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아름답고 귀한 것을 가까이 두고 보기 위해 함부로 산과 들에서 캐오는 이기심이 우리나라 난초들을 멸종위기로 몰고 가는 가장 큰 원인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씁쓸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다른 기사 보기
- 저작권자 2013.09.17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