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회암지대의 북방계 풀꽃, 넓은잎제비꽃
한국의 멸종위기식물 (18)
강원도 정선, 영월, 평창, 삼척, 충청북도 단양, 제천 등지에 발달한 석회암지대에는 특별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석회암 토양을 좋아하는 호석회식물(好石灰植物) 중에도 귀한 것이 많으며, 이들 외에도 석회암지대의 독특한 환경에 적응한 북방계 빙하기 잔존식물들이 함께 자라고 있다.
최근에는 남한 내 분포를 상상조차 못하던 여러 종의 북방계식물이 발견되는 등 석회암지대의 식물지리학적 중요성을 방증하는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있다. 석회암지대가 한반도 생물다양성 보전을 위한 중요한 식물 생육지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석회석 생산이라는 대의명분 아래 훼손 압력이 높은 지역이기 때문에, 이곳 식물들의 미래는 어둡기만 하다.
식물의 분포는 여러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요인은 기후다. 위도에 따라 난대림, 온대림, 한대림이 각기 다른 지역에 발달하는 것은 기후의 차이 때문이다. 같은 기후대에서도 식물의 분포는 여러 이유 때문에 국지적인 분포 특성을 보일 때가 많다. 국지분포의 가장 큰 원인은 토양의 성질이 아닐까 싶다. 산성 토양에 잘 자라는 식물이 있는가 하면, 중성이나 알칼리성 토양을 좋아하는 식물도 있다.
토양의 성질은 모암(母岩)에서 비롯된다. 모암이 화강암인지 편마암인지 현무암인지에 따라서 토양의 성질이 달라지고, 토양에 따라 그곳에 생육하는 식물의 종류도 달라진다. 한반도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식물의 국지분포에 영향을 미치는 토양은 석회암토양이다. 다른 모암의 토양들도 어느 정도까지는 식물의 생육과 분포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석회암토양처럼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는다.
석회암토양을 선호하는 호석회식물들
석회암 지역에 잘 자라는 식물을 호석회식물(好石灰植物)이라 한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호석회식물로는 갈기조팝나무, 개부처손, 굴참나무, 돌마타리, 솔체꽃, 자주쓴풀, 측백나무, 회양목 등을 꼽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호식회식물을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은 드물다. 생태학적 접근이 몇 번 있었을 뿐, 분류학적 연구나 식물지리학적 연구는 거의 없는 실정이다.
필자는 동강댐 건설에 대한 찬반양론이 뜨거웠던 시절, 동강댐 건설 예정지의 식물조사를 계기로 석회암지대 식물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정선, 영월, 평창 등 동강유역뿐만 아니라 제천, 단양, 삼척, 강릉 등의 석회암지대를 여러 차례 답사하며 호석회식물 목록을 작성하고 있는 중이다. 그러는 동안, 아직까지는 초기단계이기는 하지만 석회암지대 식물들이 보여주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독특한 생육 조건에서 새로운 종들이 만들어진다는 점이다. 동강할미꽃, 복사앵도, 사창분취, 자병취, 참골담초 등은 세계적으로 한반도에서만 생육하는 특산식물로서 우리나라 석회암지대의 독특한 환경을 고향 삼아 새로운 종으로 태어난 예에 해당한다. 강원도 동강 일대에서 특산종으로 분화한 동강할미꽃은 동강댐 건설을 포기하게 한 생물 중의 하나로서 이름이 높다.
석회암지대 식물상의 두 번째 특징은 석회암지대의 낮은 고도에서도 북방계 고산식물이 많이 자란다는 것이다. 북방계식물로서 남한의 높은 산에서도 자라지 않거나 아주 드물게 자라는 가는대나물, 당양지꽃, 백부자, 벌깨풀, 병아리풀, 솔체꽃, 시베리아살구나무, 바위솜나물, 황금 등이 석회암지대에서는 비교적 흔하게 발견된다. 석회암지대에서 남한 최초로 발견된 북방계식물들도 있다. 나도범의귀, 나도여로, 너도개미자리, 넓은잎제비꽃 등은 남한에서는 생육할 수 없는 북방계식물로 여겨져 왔지만 최근 석회암지대에서 발견돼 세상을 놀라게 했다.
나도범의귀, 나도여로, 너도개미자리는 남한에서 단 한 곳의 자생지만이 발견된 식물들로 개체수도 많지 않기 때문에 절체절명의 운명에 놓여 있다 하겠다. 현재 알려진 자생지가 훼손되지 않도록 보전하는 것만이 멸종을 막는 일이다.
환경부 멸종위기야생생물 2급 넓은잎제비꽃
넓은잎제비꽃(Viola mirabilis L., 제비꽃과)은 북한에서만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오다 2004년 영월에서 처음 발견된 이후 지금은 제천과 단양에서도 자생지가 확인되고 있다. 현재까지 10여 곳의 자생지가 발견되었지만, 멸종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식물로 꼽힌다. 알려진 자생지 모두가 산자락 또는 야트막한 산지여서 개발 압력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한 예로, 남한 최대의 군락으로 여겨지는 영월의 한 자생지는 밭 가장자리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에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 놓여 있다. 2012년부터 환경부가 멸종위기야생생물 2급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석회암지역은 희귀식물 생육지로서 중요한 곳이라는 증거들이 하나둘씩 드러나고 있다. 귀중한 식물들이 생육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석회석 생산이라는 대의명분 때문에 사전조사조차 없이 급속하게 훼손되고 있는 실정이다. 안타깝게도 그곳에 살고 있는 희귀식물들은 연구도 안 된 상태에서 자생지 자체의 훼손으로 말미암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남아 있는 석회암 산지라도 보전에 힘을 쏟아야 소중한 식물들을 살릴 수 있는 절박한 상황에 놓여 있다.
석회암지대처럼 귀한 식물이 많이 자라는 곳을 보전하는 일은 한반도의 생물다양성을 지키는 지름길이다. 국가멸종위기식물보전원 등 멸종위기식물의 연구와 보전을 위한 국가기관이 석회암지대에 자리 잡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다른 기사 보기megalamen@daum.net
- 저작권자 2013.11.26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