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이 만든 딸기가 맛있는 까닭
품질 향상 및 보존기간 길어져
‘설향(雪香)’은 눈 속에서 피어나는 향기라는 뜻이다. 얼핏 들으면 소설 제목 같기도 하고 녹차의 한 종류를 일컫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둘 다 정답이 아니다. 설향이란 논산딸기시험장에서 2005년경에 개발되어 현재 가장 많이 재배되고 있는 국산 딸기 품종이다.
논산은 딸기 농가가 약 2천 호에 달하며 전국 딸기 생산량의 약 13%를 차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딸기 생산지이다. 원래 딸기는 봄철에 본격적으로 출하되지만 요즘엔 12월부터 2월 사이의 겨울철에도 딸기를 흔히 볼 수 있다. 겨울철에 생산되는 딸기는 저온으로 인해 성숙 기간이 길어져 봄철에 수확되는 딸기보다 당분 축적량이 많아 더 맛있다. 이처럼 딸기철을 바꾼 일등공신이 바로 수확 시기가 빠른 설향 같은 품종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하나 생긴다. 겨울엔 수분(受粉)을 도와주는 곤충도 없는데 딸기는 어떻게 열매를 맺는 것일까. 바깥에 눈이 하얗게 덮여 있어도 논산 딸기 농가의 비닐하우스 속에는 벌통이 놓여 있으며 벌들도 날아다닌다. 양봉의 꿀벌을 사오거나 수정벌인 뒤영벌을 사와서 비닐하우스 안에 풀어놓기 때문이다.
특히 1994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뒤영벌의 경우 꿀을 따지 않는 1회용 벌이라 토마토나 딸기 등 꿀이 없는 식물에 효과적이다. 또 환경에 민감한 꿀벌과는 달리 기온이 낮고 습해 환경이 좋지 않은 하우스 같은 곳에서도 잘 적응하며 활동시간이 길다는 장점을 지닌다.
종 모양의 작은 꽃으로 입구가 좁을 뿐 아니라 암술이 꽃 밖으로 튀어나와 있지 않아 꽃가루가 바람에 날려 자연 수정이 되기 어려운 블루베리 같은 작물의 경우 꿀벌과 뒤영벌을 많이 활용한다. 또 사과나 배 등의 작물에도 벌을 이용해 친환경 농법을 하는 농가들이 증가하고 있다.
화분 매개 곤충을 이용할 경우 수확량이 증가돼 농가 소득을 높일 수 있다는 장점을 지닌다. 뒤영벌을 이용했을 경우 참외나 토마토의 경우 10에이커당 10%, 딸기의 경우 약 57%의 생산량 및 소득 증가 효율을 보인다는 통계가 발표된 적이 있다. 사과의 경우 자연수분 대비 수정률은 약 10% 이상, 착과율은 52.5% 이상, 수량은 50% 이상 각각 높일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에서는 아몬드를 비롯해 수박, 오이, 딸기, 사과, 복숭아, 호박 등의 수분에 벌을 활용하는데, 이처럼 벌에 의존하는 작물의 생산량이 150억 달러 규모를 넘어선다.
농약 치지 않아야 벌에 의한 수분 가능해
자가수분은 한 그루의 꽃 안에서 수술의 꽃가루가 암술머리에 묻는 것을 말하며, 타가수분은 같은 종류의 식물에서 한 그루의 꽃가루가 다른 그루의 암술머리에 묻는 현상을 말한다. 타가수분의 경우 바람이나 곤충 등이 꽃가루를 옮겨주는 역할을 한다.
벌은 농약을 싫어하므로 농약을 뿌릴 경우 벌을 이용한 수분을 하기 어렵다. 때문에 벌을 이용해 수분을 한 농작물은 무농약의 친환경 재배 농작물이라는 유용한 증거가 된다. 또한 자가수분이나 바람에 의한 타가수분에 비해 수확량이 증대되며 알이 더 굵고 품질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최근 독일 괴팅겐 대학교의 차른트케 교수팀의 연구에 의하면 실제로 벌에 의한 수분이 열매의 품질을 향상시키는 것은 물론 보존기간을 연장시켜 줌으로써 농민들에게 더 많은 수익을 안겨준다는 사실이 입증되었다고 한다.
딸기는 대개 곤충이나 바람의 힘을 빌려 수분을 하지만 자가수분을 하기도 한다. 그런데 다른 열매들과는 달리 딸기 열매는 수많은 미세 과일의 집합체이므로, 열매가 맺히려면 꽃 안에 있는 200개의 씨방에 각각 꽃가루가 전달되어야 한다. 따라서 딸기는 다른 식물들에 비해 바람이나 자가수정보다는 곤충의 역할이 특히 중요하다.
차른트케 교수팀은 8가지 품종의 딸기를 선별해 실험농장에 심고, 그 안에 야생벌과 사육된 꿀벌들을 풀어놓았다. 기존 연구에 의하면 야생벌은 꽃의 아랫부분을 선호하는 데 비해 사육된 꿀벌들은 꽃의 윗부분을 선호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이 같은 벌들의 분업으로 인해 딸기의 모든 씨방에 골고루 꽃가루가 전달될 수 있다.
한편 연구진은 일부 꽃에 망을 씌워 벌은 못 들어가지만 바람을 통한 수분은 이루어질 수 있도록 했으며, 다른 그룹의 꽃에는 비닐봉지를 씌워 자가수분만이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 이처럼 벌들에 의한 수분, 바람을 통한 타가수분, 그리고 자가수분을 한 세 그룹의 딸기를 수확한 후 색상 및 형태 등을 분석했다.
그 결과 벌에 의해 수분된 딸기들은 자가수분이나 바람으로 수분된 딸기들보다 색상이 더 붉고 밝은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열매의 형태가 더 완벽하고 단단하며, 보관기간도 약 12시간 길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딸기는 유통기간이 비교적 짧은 편이므로 12시간이라는 보관기간의 증대는 상당한 의미를 지닌다.
벌이 두 가지 식물 호르몬의 분비를 자극해
이 같은 연구결과를 적용해 벌에 의해 수분된 딸기의 가격을 산정한 결과 바람이나 자가수분에 비해 각각 39%, 54% 비싼 것으로 밝혀졌다. 이를 2009년 유럽연합의 딸기 생산량에 적용하면 약 29억 달러, 2011년 미국의 생산량에 적용할 경우 약 24억 달러에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럼 벌에 의한 수분이 어떤 메커니즘을 통해 딸기에 이 같은 영향을 미치는 걸까. 연구진에 의하면 벌은 두 가지 중요한 식물 호르몬의 분비를 자극한다고 한다. 첫 번째 호르몬은 옥신으로서, 세포분열과 성장을 촉진해 딸기의 무게와 굳기를 증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두 번째 호르몬은 지베렐린산으로서, 딸기의 연화를 지연시키고 멍과 곰팡이에 대한 저항력을 강화한다는 것.
선행 연구에서도 벌에 의한 수분이 멜론과 오이의 굳기를 향상시키며, 몇 가지 과일의 당도를 증가시킨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또한 커피 농장에 벌이 많을수록 원두의 기형이 감소한다는 연구결과가 차른트케 교수팀에 의해 발표된 바 있다.
식물은 자신을 뜯어먹는 초식동물을 제지하기 위해 카페인이라는 물질을 생산한다. 그런데 식물은 꽃에 있는 꿀에도 약간의 카페인을 첨가해 벌들을 유혹한다. 벌이 미량의 카페인을 섭취할 경우 그 꽃의 형질을 더 잘 기억하게 되어 그 꽃만 찾아오는 효과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식물들이 이처럼 카페인까지 꿀에 첨가하며 적극적으로 벌들을 끌어 모으는 것은 열매에 대한 이 같은 효과를 미리 알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다른 기사 보기2noel@paran.com
- 저작권자 2013.12.13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