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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산림녹화 성공국으로 우뚝 서다

대한인 2015. 12. 22. 09:00

유일한 산림녹화 성공국으로 우뚝 서다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1) / 현신규 박사 (상)

 
 

지난 2006년부터 식목일은 기념일로 변경되어 공휴일에서 제외되었다. 하지만 이미 1990년에 공휴일에서 제외하자는 견해가 있기도 했다. 전국의 관공서 및 직장, 학교, 군부대 등이 나서서 마을 단위로 나무를 심었던 식목일을 왜 그때부터 공휴일에서 제외하려 했던 걸까. 그건 우리나라가 불과 수십년 만에 산림 강국으로 거듭났기 때문이었다.

6․25전쟁 이후 우리나라는 민둥산 비율이 50%에 이를 만큼 벌거숭이 산들이 많았다. 오죽했으면 붉은색과 흰색의 나라라는 말이 나돌기까지 했다. 나무 한 그루 없는 붉은 땅에 흰옷을 입은 백성들이 사는 나라라는 뜻이었다.

비가 조금만 쏟아져도 산에서 흙이 씻겨 내려와 홍수가 발생했으며, 반대로 조금만 가물면 산과 계곡이 말라 흉년을 겪어야 했다. 산의 저수 능력이 현재의 1/10에 불과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늘 물 걱정을 하며 살았다. 과연 언제부터 한국의 산이 이리도 헐벗게 되었을까.

이에 대해 솔방울 하나까지도 징발해 가던 일제 치하 35년과 뒤이어 터진 6·25전쟁이 금수강산을 벌거숭이로 만들었다는 견해가 있다. 또 일부에서는 땔감 등의 사용으로 인해 외국 선교사들이 처음 도착한 구한말에 이미 우리나라의 산이 헐벗은 상태로 묘사되었다고도 한다.

▲ 리기테다 소나무 육종 연구를 하고 있는 고 현신규 박사의 모습.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 홈페이지

 

하지만 유엔조차 산림의 황폐가가 고질적이라 도저히 어쩔 수 없다고 평가를 내렸던 우리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개발도상국 중 유일하게 산림녹화에 성공한 나라로 우뚝 섰다. 1982년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산림 복구에 성공한 유일한 국가”라고 한 것. 또한 세계적인 석학이자 환경운동가로 유명한 레스터 브라운은 ‘플랜B 2.0’이라는 저서를 통해 “한국의 산림녹화는 세계적인 성공작”이라고 격찬했다.

바로 이 같은 산림녹화에 뚜렷한 공헌을 남긴 과학자가 현신규 박사다. 국내 최초의 임학박사인 그는 우리나라 산림녹화의 학문적 토대를 세운 최고 공로자로 꼽힌다. “산림의 성쇠가 국력의 성쇠와 비례한다”며 산림부국론을 주창한 현 박사는 우수한 종자의 개발과 보급에 힘쓰면서 스스로 나무를 심고 숲을 가꾸는 데도 앞장선 것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제1호 임학박사

현 박사는 1912년 1월 27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한학자 현도철과 기독교도였던 부인 이동일 사이의 4남2녀 가운데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3년 서울대 농대의 전신인 수원고등농림전문학교 임학과를 졸업한 그의 원래 꿈은 일본에 유학해 철학을 전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수원고등농림전문학교로 진학했던 것. 때문에 한때 방황하기도 했지만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인 우치무라 간조의 ‘어떻게 천직을 찾을 것인가’란 강연문을 잃고서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다. 그 강연문에는 “누구든지 자기 사명을 알려 하고 또 그 사명대로 살려고 하거든 지금 주어진 자리에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일이 곧 자기의 사명을 발견하는 길이요 또 그 사명대로 사는 길이다”란 대목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 후 고향의 이웃에 살던 규슈 가고시마농업학교 출신의 한 농업학교 교장의 권고와 절친했던 친구의 도움으로 그는 일본 규슈제국대학 임학과로 유학을 떠났으며, 대학을 졸업한 1936년부터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서 근무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수원고등농림학교 교사가 되었다가 1946년 수원농림학교가 서울대학교로 편입되자 서울대 농과대학 교수가 되어 1977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근무했다. 1949년 규슈제국대학에서 농학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유학의 기회를 얻어 1951년 1월부터 2년간 미국의 산림유전연구소 및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임목육종학을 연구했다.

1953년 귀국해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임목육종학이라는 분야를 개척하고 기본적인 틀을 세웠다. 오늘날 우리나라 임목육종학이 세계적인 수준에 도달하게 된 것은 그가 기반을 착실하게 마련했기 때문이다.

귀국 후 서울대 농과대학 내에 임목육종학연구소를 설립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 그는 1956년 우리나라 임목육종 연구의 중심체인 임목육종연구소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또한 세계 임목육종학계와의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한국 임목육종 성과를 소개하면서 선진 각국의 최신 성과 및 연구동향 파악에도 힘을 기울였다.

산림청 탄생의 산파 역할 하기도

현 박사의 연구 성과는 실험실에서 머물지 않고 실제 우리나라 산을 푸르게 가꾸는 데에도 쓰였다. 그는 산림녹화를 위해서 적극적인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직접 면담하여 산림녹화의 필요성을 설득하고 전폭적인 지지를 얻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박정희 전 대통령에게 농림부 소속의 산림부를 독립시킬 것을 건의해 산림청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역대 정부의 치산녹화 정책에 대해 꾸준히 조언하고 학문적인 지식을 제공했다.

현신규 박사의 일대기를 다룬 저서 <산에 미래를 심다>(서울대학교출판부 刊)에 의하면 그가 이처럼 산림녹화에 뜻을 두게 된 결정적 계기는 규슈제국대학 3학년 때 조선으로 떠난 실습여행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 그 저서에서는 이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흉물스러울 정도로 황폐한 산 앞에서 그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일본은 전국의 어느 곳을 가보아도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중략) 사할린의 원시림까지 견학한 그에게 조국의 산은 너무 헐벗고 메말라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슴이 아팠다.”

사실 우리나라에서 식목일의 역사는 아주 오래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의하면, 매년 4월 5일이 식목일로 제정된 것은 신라가 당나라의 세력을 한반도로부터 몰아내고 삼국통일의 성업을 완수한 677년 2월 25일에 해당하는 날이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또한 1343년 조선 성종이 세자 문무백관과 함께 동대문 밖의 선농단에 나아가 몸소 제를 지낸 뒤 밭을 일군 날이 바로 이 날이라는 것도 무관하지 않다.

두산백과사전에 의하면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식목 행사가 시작된 것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4월 3일을 식목일로 지정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이보다 앞서 신학기를 맞은 학교에서는 식목 방학이라 하여 1주일 정도 나무 심는 기간을 학생들에게 주기도 했다. 그러다 1946년 미 군정청이 4월 5일을 식목일로 제정했다고 한다. 이후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대통령도 매년 식목일 행사를 주도하며 조림사업을 수도 없이 실시했지만 결과는 미미했다. (하편에서 계속)

 

  • 이성규 객원편집위원2noel@paran.com
  • 저작권자 2014.04.02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