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 한계선에 자라는 북방계식물, 분홍바늘꽃
한국의 멸종위기식물 28
분포의 중심지인 고향에서는 개체수가 많고 생육도 활발하지만 분포 가장자리에서는 겨우 살아가는 식물들이 있다. 우리나라에는 아열대를 고향으로 하는 남방계식물이나 아한대가 고향인 북방계식물들이 함께 살고 있는데, 이들에게 한반도는 분포의 북방한계선이나 남방한계선이 된다. 가장자리 한계선에 살고 있는 종들은 작은 환경 변화에도 영향을 받아 멸종될 가능성이 높다. 분포의 남쪽 가장자리에 살고 있는 북방계식물 분홍바늘꽃도 그런 식물들 가운데 하나다.
생물은 자신이 살기에 알맞은 환경을 찾아내어 그곳에 정착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 튼튼한 다리나 날개를 가져서 쉽게 이동할 수 있는 동물은 그런 경향이 더욱 뚜렷하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환경이 알맞지 않게 되더라도 떠나지 못하는 수가 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섬처럼 고립된 환경에서는 제아무리 날쌘 동물이라 하더라도 이동에 제한을 받게 된다. 이럴 때 생물은 그 환경에 맞게 자신을 변화시키게 되고, 그게 생물진화의 한 출발점이 된다.
식물 분포의 가장자리
뿌리로 고정되어 움직일 수 없는 성질, 즉 고착성은 식물의 특징 가운데 하나다. 하지만 식물도 살기 좋은 환경을 찾아가는 방법을 알고 있다. ‘씨앗 퍼뜨리기’를 통해서인데, 그 방법은 식물에 따라서 각양각색이다. 맛있는 열매를 만들어서 동물이 먹게 하여 씨앗을 멀리 퍼뜨리는 것, 씨앗에 우산털이나 날개를 달아서 바람에 멀리 날아가도록 하는 것, 열매에 갈고리 같은 털이나 가시가 있어서 동물 몸에 붙어 먼 곳까지 이동하는 것 등이 있다. 새로 도착한 곳의 환경이 적당하면 새싹을 틔우고,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동물에 비해 어려운 과정을 거쳐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식물들이기에, 어떤 식물의 분포지역 중 가장자리에 해당하는 곳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곳까지 씨앗 퍼뜨리기를 통해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식물을 생태학자들은 개척자 식물이라고 한다. 또한 사는 지역이 축소되는 과정에서 그곳을 경계로 겨우 버티고 있는 경우라면 더욱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기 마련이다.
추운 지방을 고향으로 둔 북방계식물은 따뜻한 기후에서는 살 수 없다. 북방계식물이 살 수 있는 가장 남쪽 가장자리 즉, 남방 한계선은 이 식물이 버틸 수 있는 가장 따뜻한 기후를 가진 지역이라 할 수 있다.
북방계식물 가운데 하나인 분홍바늘꽃(Epilobium angustifolium L., 바늘꽃과)은 남한에서는 여간해서 자생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희귀하다. 남한의 자생지 가운데 가장 남쪽 지역은 강원도 동해시 두타산이다. 백두대간을 따라 이곳보다 북쪽에 있는 함백산, 대관령, 오대산, 설악산, 향로봉에도 자라고 있지만 숫자는 어디서나 많지 않다. 하지만 이 식물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북반구의 고위도 지방인 북유럽, 북미, 러시아, 중국, 몽골 등지에서는 매우 흔하게 자란다. 이곳들에서는 마을 근처의 공터에서도 잡초처럼 자라고 있는 이 식물의 군락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동해 두타산은 분홍바늘꽃 분포의 남방 한계선
분홍바늘꽃은 6월부터 8월까지 꽃을 피우는데 우리나라의 바늘꽃속(屬) 식물들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하다. 보통 붉은 보라색이지만 흰 꽃이 피는 개체가 재배되는 것도 가끔 볼 수 있다. 꽃이 지고 나서 달리는 길쭉한 열매가 바늘을 닮아서 ‘바늘꽃’이라 한다.
분홍바늘꽃이 속하는 바늘꽃속에는 우리나라에 바늘꽃, 호바늘꽃, 돌바늘꽃, 회령바늘꽃, 줄바늘꽃, 큰바늘꽃, 명천바늘꽃, 버들바늘꽃, 좀바늘꽃, 넓은잎바늘꽃 등 11종류가 자라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홍바늘꽃은 우리나라의 바늘꽃 종류들에 비해서 암술머리가 4갈래로 갈라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큰바늘꽃도 같은 특징을 가졌다. 두 식물은 우리나라 바늘꽃 종류들 가운데 꽃이 가장 예쁜 종류이며, 북방계식물로서 남한에서는 자생지가 제한되어 있다는 특징도 서로 비슷하다. 큰바늘꽃은 2012년부터 환경부가 멸종위기야생생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고향에서는 잡초처럼 많지만 분포의 경계선인 한반도에서는 희귀식물에 해당하므로 분홍바늘꽃의 보전가치가 우리나라에서 더욱 높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1998년까지는 환경부가 특정야생식물로 지정하여 보호한 적이 있지만, 현재는 법으로 보호받고 있지 못하다.
설악산과 방태산에도 분홍바늘꽃이 살고 있었지만 현재는 발견되지 않고 있다. 1996년 7월에 설악산 소청봉, 2004년 7월 방태산에서 개화한 분홍바늘꽃을 사진으로 담은 적이 있는데, 지금은 이 두 곳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말았다. 북방계식물인 분홍바늘꽃이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두타산, 함백산, 선자령의 분홍바늘꽃들도 머지않아 이들과 같은 운명에 놓이게 될까봐 걱정이다.
- 현진오 동북아식물연구소장다른 기사 보기
- 저작권자 2014.04.15 ⓒ Science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