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정보부장 김재규. 스위스에 금으로 된 최고급 파텍 회중시계를 특별 주문했다. 대통령을 가장 잘 알 법한 김재규의 행동으로 보아 분명 정상은 아니었다. 덮개에 봉황 무늬와 대통령 사진이 들어가 있고 ‘근축 탄신 1979’라고 새긴 시계였다. 1979년 11월14일 대통령 생일을 위해 ‘충성의 시계’를 준비해 두고, 그래 놓고 저지른 10.26사건이다. 최근 TV에 나와 ‘침뜸의 달인’으로 유명해진 침술사(김남수)는 김재규의 침술 주치의였다면서 10.26사건의 전날인 10월25일에도 김재규에게 침을 놓았다면서 닷새 후인 10월30일 침술과 관련해 대통령 면담 일정이 잡혀 있음을 상기시켜 주었다고 말했다. 침술사는 김재규의 주선으로 청와대 면담을 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놓고 저지른 10.26사건을 오래 전부터 계획한 ‘민주거사’라고 했다.
수의(壽衣)에는 주머니가 없다. 가져갈 것이 없다는 것이다. 김재규는 모든 것을 털고 가지 않았다. 번뇌를 끊지 않고 기만의 더께 속에 묻혀서 갔다. 죽음의 진정성과 인간의 근본가치를 능욕하는 연기, 연출이었고, 그건 상(傷)한 영혼의 비극이었다. 극과 극은 가깝다. 신임 속에 배신은 생겨나고, 충성과 배반은 동심원(同心圓)으로 함께 존재한다. 사랑과 미움, 충성과 배반의 감정은 수시로 갈마들고, 그래서 1인칭 앞의 2인칭은 항상 돌발사태의 가능성 앞에 노출되어 있게 마련이다. 박정희 시대는 돌발적으로 막을 내렸다.
“박정희씨는 우리가 못하는 일을 해놓았어. 혁명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도로, 항만, 도시계획을 해놓은 것을 보면 우리보다 나았어.” 그 말이 예사롭지 않음은 10.26 후 박정희 시대의 저항세력이 고개를 들어 유신정치, 장기집권에 대한 비판이 휘몰아치던 시대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박정희 시대에 충성하던 인물들이 변신 또는 침묵으로 돌아앉고, 또는 낭인처럼 정치무대의 변두리를 맥없이 배회하던 그 시절에 그 원로의 말은 용기있고 진솔한 고백이었다. 그가 바로 4.19후 장면 정부로 이어지기 전의 과도정부 수반을 지낸 허정이었다. 게다가 허정 그는 1960년대에 박정희 정권과 대립각을 세웠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그러했다. 윤보선과 함께 구 정치세력의 양대축을 형성하고 있던 그는 박정희에게 끈질기게 맞서며 그가 주도하는 정책들을 강하게 비판했었다. 그런 그가 박정희를 앞세우는 고백을 한 것이다.
5.16의 해 1961년, GNP 80달러 수준으로 세계 125개국중 101번째의 최빈국 한국이었다. 곡창지대라는 전라남도에 절량(絶糧)농가가 16만4천42호나 되고 총94만6천명이 대책없이 굶고 있었던 어느 해나 다름없이 그해의 춘궁기도 비참했다. 미국의 농산물 원조가 국가예산의 8할이나 되는 나라, 그렇게 미국에게 얻어먹지 않고는 대책이 없는 불쌍한 한국의 실정이었다.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본국 국무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남도지역이 엄청난 식량난에 시달려도 총리와 각료 중에 기근으로 고통을 겪고 있는 지역을 한번이라도 돌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썼다.
박정희는 말했다. “한국 사람들의 비극은 유럽 사람들의 비극과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유럽의 비극은 힘차고 억세게 운명적인 것과 대항하다가 장엄하게 쓰러지는 것이므로 부정을 다시 부정해서 이를 이겨내려는 힘과 긴장이 있는 데 반하여, 우리나라의 슬픔이나 애수는 사실 비극이 아니라 가엾음이요 체념하는 새김질인 것이다.” (박정희 지음 <우리 민족의 나아갈 길>)
5.16은 굶주림과 무기력, 절망과 허무주의가 만연한 시공(時空)을 뒤흔드는 굉음이었다. 5.16으로 역사에 등장한 박정희는 정치판을 갈아치웠다. 국민의 거칠고 부황증 걸린 손을 잡기를 거부해 오뉴월에도 야들야들하게 무두질한 가죽장갑을 끼고 다녔다는 어느 유명 정치인처럼 당시 처절한 극빈과 아무런 상관없는 특권의 정치를 단숨에 엎어버렸다. 그리고 시대적 과제와 목표 앞으로 국가 구성원들을 몰아 세웠다. 그렇게 1961년부터 1979년까지 18년의 세월을 숨가쁘게 달려가 환골탈태한 한국을 만들어 놓고, 그리고 그는 갔다.
박정희는 어떤 인물인가. 청와대를 거쳐간 대통령들을 모두 불러모아 이 나라 서민들 옆에 세워놓고 보자. 잘 어울리는 유일한 사람이 박정희다. 막걸리 따라 마시는 조선 막사발 같은 박정희만이 이 땅의 서민들과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박정희와 ‘박정희 아닌 것’의 또 다름이다. 그는 선거 때 표를 구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선거 때 도벌과 무허가 건물이 난립하는 것을 엄벌했다. 쓴소리만 하고 달콤한 말은 한마디도 없었다. 무섭게 눈을 부릅떠 엄포를 놓아 으시시했는데도 지금 사람들은 그의 앞으로 모여들고 있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 해도 구미 생가에 하루 1천명이 다녀가고, 험한 세상살이에 고달픈 인생길을 허위단심 헤매다가도 10월26일, 11월14일이면 사람들은 잊지 않고 모여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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