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동네 아이들이 서울대 진학률 높은 '진짜 이유'
['사교육 중독', 이젠 빨간불] '3불 정책' 비난했던 MB정부의 한계
기사입력 2012-05-01 오전 8:12:48
- '사교육 중독', 이젠 빨간불 <1> "엄마가 말하길 제 꿈은 하버드대 편입이래요" <2> 세계에서 가장 머리 나쁜 한국 학생들? <3> 가정 경제 파탄내는 사교육 : 아이들이 진학하면, 엄마는 '알바' 뛴다 <4> '강남 불패' 신화 휘청? <5>"나이 마흔에 잘려서 호프집 차리느니…" |
철학 석사 출신 논술 강사 "나도 대입 논술 부담스럽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즐거운 학문', 임화의 '고전의 세계-혹은 고전주의적인 심정', 사회학자 가브리엘 타르드의 '모방의 법칙', 매튜 살가닉-피터 도즈-던컨 와츠가 <사이언스>에 공동으로 낸 과학논문….
2012학년도 연세대 서울캠퍼스 사회계열 논술시험에서 사용된 지문이다. 대학생이 읽고 이해하기에도 만만치 않은 내용이다. 서울 강남 지역에서 논술 강사로 일하는 A씨 역시 솔직히 인정했다. 그는 대입 논술 문제에 대해 "철학 석사 학위가 있는 나조차도 준비하지 않은 상황에서 단시간내에 문제를 풀라고 한다면 부담이 될 정도"라고 말했다. 다른 대학의 논술 문제 역시 사정은 비슷하다. △사냥꾼 딜레마(한양대 2010학년도 수시2 인문) △늑대의 딜레마, 지속 가능한 성장(동국대 2011학년도 수시1) △사회적 자본, 사회적 신뢰(서강대 2011학년도 수시2차 인문계). 문제 지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대학 수준의 지식이 필요하다.
대학 신입생 뽑는데, 대학 졸업생 수준 지식 묻는 모순
대학에 들어올 학생을 뽑는데, 이미 대학을 마친 사람 수준의 지식을 묻는 모순. 대학들은 왜 이런 짓을 할까. 공식적인 해명은 이렇다. '지문 자체는 대학 수준이지만, 문제는 고교생 수준이다.' 요컨대 낯선 지문에 당황하지만 않으면, 고교생 수준의 지식을 응용해서 풀 수 있는 문제라는 이야기다. 대학 측이 요구하는 것은 지문 자체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사고력이라는 것. 과연 그럴까. 앞서 소개한 A씨의 설명을 들어보면, 오히려 반대다.
"논술이 처음 도입된 1990년대 중반만 해도 한국 대입 논술의 방향은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였다. 일상을 주제로 철학적 깊이를 따지는 문제였다. 2000년 모 대학의 눈술 문제는 '인간이 나이들어 감에 따라 욕망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논하라'는 게 주제였는데, 이런 유형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논술은 다르다. 짧은 지문 여러 개를 말 그대로 각 전공분야의 전문분야에서 발췌해 나열한 후, 여러가지로 쪼개진 짧은 질문을 던진다. '(가) 지문과 (나) 지문에서 나타난 인간의 욕망을 비교해 (다) 지문에 적용하라 / (다) 지문의 주장을 요약하고 이를 비판하라'는 식이다. 엄밀해 말해 과거보다 사고력 검증 수준은 오히려 낮아졌고, 문제가 요구하는 답안의 깊이도 얕아졌다."
"지문 낯설어지고, 사고력 검증 수준 낮아지고"…논술 빙자한 본고사
한마디로, 논술을 빙자한 본고사다. 공교육을 정상적으로 이수하고 풍부한 독서를 통해 사고력을 키운 학생이라면 쉽게 풀 수 있다는 대학 측의 설명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문제 유형에 적응하는 훈련 없이는 풀기 힘든 출제 방식이다. 그리고 최근 수년 사이 대입 논술 출제 경향에선 이런 현상이 뚜렷해졌다. 본고사가 금지된 상황에서 수능 시험 난이도가 낮아지자 대학들이 택한 방식이다. 실제로 고려대, 서강대, 성균관대, 연세대 등 대부분 대학이 수리논술에서 본고사 방식의 문제를 내고 있었고, 인문계 수시 논술전형(경희대, 이화여대, 중앙대, 한양대)에서도 수학 문제가 등장했다.
수리논술은 처음 도입될 당시 기존 수학 교육에 대한 대안으로 환영받았었다. 수학의 기초 개념을 깊이 이해해서 그걸 일상에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을 검증한다는 것. 제대로 정착한다면, 문제 풀이 요령을 암기하는 기형적인 고교 수학 공부 방식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수리논술은 본고사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대학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한다. 수많은 지원자 가운데 원하는 학생을 뽑으려면, '변별력' 있는 시험이 필요한데, 최근 2~3년 사이 수능 난이도가 워낙 낮아져서 '변별력'이 없다는 게다.
'사실상 본고사' 방치한 채 수능만 쉽게 내는 정부…'반쪽짜리' 사교육 대책
그럼, 정부는 왜 수능을 쉽게 낼까. 사교육비 경감 대책의 일종이다. 학교 수업만으로도 수능 만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취지는 좋다. 그러나 이런 취지가 수능에 한정돼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생긴다. 대학 입시의 전 과정이 학교 수업만으로 해결돼야만, '사교육비 경감'이라는 취지가 살아날 수 있다.
본고사나 다름 없는 논술을 준비하려면, 사교육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무리다. 게다가 논술 사교육은 비용도 높다. 정부의 반쪽짜리 사교육 대책이 오히려 가계의 사교육비 부담을 늘리는 셈이다. 강남 지역 논술 강사 A씨는 "돈 없는 애는 논술 준비를 제대로 하기 어렵다"라고 단언했다. 흔히 다니는 영어, 수학 학원에 논술학원을 추가하면, 학생 한 명 당 사교육비가 100만 원대로 뛴다. 어지간한 가계에선 감당하기 힘들다.
'부자 동네' 아이들이 서울대 진학률 높은 이유
이는 수치로도 확인된다. '하늘교육'이 2012학년도 서울대 합격생 3100여 명을 분석한 결과, 서울대에 합격한 서울 일반계 고등학교 졸업생 706명 중 68.3%(482명)가 강남·서초·송파·양천·노원구 등 이른바 '사교육 특구' 학생들이었다. 앞서 2010학년도 서울대 입시에서는 5개 구 일반계 고교생이 서울 전체 합격생 중 차지하는 비율이 53.75%였으며, 2011학년도 입시에서는 57%였다. 수능이 쉬워지면서 본고사나 다름 없는 논술이 대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진 것과 '사교육 특구' 학생들의 서울대 진학률 상승이 거의 비례한다.
이 같은 현상은 서울뿐 아니라 부산과 대구, 광주, 대전, 인천 등 전국 대도시에서 공통으로 나타났다. '대구의 8학군'으로 통하는 수성구 학생들의 대구 시내에서 차지하는 서울대 합격생 비율은 2010학년도 44%에서 2011학년도 52.1%, 2012학년도 66.7%로 뛰었다. 대전에서는 유성구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대는 2010학년도 정시모집에서 면접과 구술고사를 폐지한 뒤 그동안 수시모집에서는 면접 및 구술고사, 정시모집에서는 논술고사를 시행해 왔다. 이 때문에 수험생의 경우 면접과 구술고사, 논술고사까지 모두 준비해야 하는 부담이 컸다. 하지만 오는 2013학년도 입시부터는 자연계열·경영대학의 논술고사가 폐지된다. 이런 결정이 입학생 구성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관심사다.
'논술 사교육' 문턱, 해마다 높아져
그러나 큰 틀에선 논술 사교육이 대학입시에 미치는 영향은 계속 유지될 전망이다. 상당수 대학들은 수능의 영향력이 적은 수시 선발 인원을 꾸준히 늘리고 있다. 또 수시전형에서 논술을 치르는 경우도 흔하다. 한국대학교육협의회에 따르면 2010학년도 수시 선발 인원은 22만7092명, 2011학년도 23만5250명, 2012학년도 23만7681명으로 계속 늘어났다. 총 모집인원에서 수시 모집인원이 차지하는 비율도 59→61.6→62.1%로 해마다 증가했다.
수시모집에서 논술고사의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교육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서울의 주요 11개 대학 대입 수시전형을 분석한 결과, 서강대(47.9%), 성균관대(45.9%), 한양대(43.0%)는 전체 수시모집 정원의 절반에 가까운 인원을 논술전형으로 선발하고 있었다. 조사한 대부분 대학도 30%를 넘었다. 논술전형 경쟁률 역시 날로 높아지고 있다. 수시모집인원 803명의 31.4%(252명)를 논술전형으로 뽑는 서울시립대의 경쟁률은 123.7대 1(2012학년도)로 전년도 29.2 대 1에 비해 많이 증가했다.
833명(수시인원의 33.9%)을 뽑는 연세대의 2012학년도 경쟁률은 60.8대 1로 36.2대 1(2011학년도)보다 치열하다. 한양대 2012학년도 경쟁률도 86.9대 1로 전년도(59.7대 1)보다 높아졌다.
'3불 정책' 비난했던 현 정부의 한계…"'사실상 본고사'에 대한 규제 절실"
과거 대학별 본고사가 사라졌던 이유 역시 당시 정부의 사교육 근절 의지 때문이었다. 대학별 본고사를 학교 수업만으로 준비하기는 현실적으로 무리라는 여론이 높았던 까닭이다. 현 정부가 사교육비 부담을 줄이려는 의지가 있다면, '사실상 본고사'인 논술에 대해서도 규제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어차피 입시에서 수능이 차지하는 비중이 줄어드는 상황에선 수능을 쉽게 내는 것만으로는 효과를 낼 수 없기 때문.
그러나 이런 지적이 받아들여질지는 의문이다. 과거 정부의 '3불 정책'(본고사·고교등급제·기여입학제 금지)를 거세게 비난하며 집권한 현 정부의 한계 때문이다. '본고사 금지'를 비난했던 입장에서 '사실상 본고사'를 규제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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