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곧 좋은 것이라는 생각에 의식 · 무의식적으로 감염되어 있는
한국인들의 전형적인 한 모습은 ’변화’를 명제로 하는 이른바 ’진보’ 내지
’진보주의’에 대한 암묵적 평가에서 드러난다.
진보란, 넓은 의미에서 역사의 발전을 믿고 이를 위하여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는
역사적 낙관론의 실천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터인데,
문제는 이에 대한 일반적 평가가 ’진보 = 좋은 것’이라는 점에
의심 없이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변화 = 진보 = 좋은 것’이라는 도식이 설정될 정도이다.
그러나 과연 그런가.
이 도식은 등호(等號) 사이사이에 고려되어야 할 적잖은 사항들을 생략하고 있다.
변화는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라, 변화해야 할 것만 변화해야 하는 것이다.
변화라는 이름 아래, 지키고 있어야 할 것까지 모두 변화한다면 이보다 더 심각한 일은 없다.
그것은 참다운 진보 아닌, 단지 변화 중독증일 따름이다.
가령, 새로운 집을 지을 때에도 ’옛것을 놓아두고 그 옆에 새것을 지으면 안 될까’ 하는
의문과 불만을 나는 늘 갖고 있다.
허구한 날, 파괴와 신축의 변화를 거듭하다 보니 역사는 온데간데 없고
항상 ’현재’는 미래의 파괴 앞에 불안하게 놓여 있게 마련이다.
동일한 공간에서 백 년, 천 년 전의 모습을 현재와 더불어 동시에 바라볼 수는 없는 것일까.
이 세상에는 변화되는 것만큼 지켜져야 할 것도 많다.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 문화적 성취와 업적,
인간 상호 간의 예의와 같은 것들은 그 대표적인 품목들이다.
이들 중 어느 하나라도, 그 구체적 모습들이 붕괴되고 있음을 관련자들에게 지적을 할 경우
십중팔구 "보수적이시군요"하는 대답을 듣기 일쑤다.
이때 많은 사람들은 그 ’보수적’이라는 표현을 듣기 싫어한다.
그리하여 사회 모든 분야에서 너무 빨리 진행되는 라이프 사이클에 의연히 대응하지 못하고,
새로운 변화 좇기에만 급급하다.
결국 사회 각 분야에 표제어(標題語·entry)들은 끊임없이 난무하지만,
깊이 있는 축적으로 쌓이는 것은 드문, 총체적 경박이 반복된다.
진보, 곧 좋은 것, 보수, 곧 좋지 않은 것이라는 무사려한 도식적 사고가 가져오기 쉬운 함정이다.
무엇보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변화만을 추구하는 들뜬 생활습관부터
진중하게 다잡는 의젓한 삶의 자세가 그립다.
참다운 진보는 보수적 가치에 놓이고자 하는 욕망과 더불어 태동하며,
참된 보수 또한 새로운 진보를 통해 낡은 이끼를 청소하며 스스로 반성한다.
- 문학평론가 김주연이 쓴 <변해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