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안 앤더슨 이야기 마리안 앤더슨(Marian Anderson, 1897년 2월 27일-1993년 4월 8일)은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의 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머니 안나(Anna)는 버지니아 주의 교사였고, 아버지 존(John)은 역전 시장에서 얼음과 석탄을 팔았습니다. 그녀의 가정은 비록 경제적으로는 어려웠지만 단란하고 화목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들과 함께 피아노를 치며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아버지는 키가 무척 컸고, 어머니는 작았는데, 아버지는 늘 자신의 넥타이를 어머니에게 매도록 부탁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허리를 구부렸고, 어머니는 신문 뭉치에 올라가 서로 키 높이를 맞추었습니다. 부부간의 이러한 아름다운 모습이 자녀들에게 모범이 되었습니다.
앤더슨은 천부적으로 고운 목소리와 풍부한 성량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앤더슨은 6살 때부터 성가대원이 되었는데, 음악성을 인정받아 주변의 도움으로 음악공부를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는 앤더슨도 처음엔 선생님의 충고를 들어야 했습니다. “너는 입이 크다는 콤플렉스를 감추려 노력하는구나. 그런 정신으로는 좋은 노래를 부를 수 없단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성가대에서 솔로로 노래를 부를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습니다. 8살 때 이미 개인 콘서트를 가졌고, 지역 교회에 다니며 성가를 불렀습니다. 그 당시 유명한 배우의 추천을 받아 지역의 한 유명한 음악학교에 입학할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서류를 준비하여 학교에 갔는데, 담당 직원은 앤더슨에게 말할 기회조차 주지 않고, “우린 유색인종을 안 받습니다”하고 거절했습니다. 이 경험은 한동안 그녀에게 큰 충격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1925년 뉴욕 필하모니 주최 신인 콩쿠르 대회에서 1위를 하여 필라델피아 관현악단 독창자로 뽑혔지만 인종차별로 인해 활동에 제약을 받게 됩니다. 그 후 그녀는 런던으로 건너가 그녀의 실력을 인정받게 됩니다.
그녀는 “100년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한 아름다운 목소리”라는 극찬을 받습니다. 앤더슨은 말 그대로 세기에 한 사람 있을까 말까 한 최저음(Contralto) 성악가입니다. 그녀는 유럽의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오스트리아까지 포함하여 150차례 공연을 하였고, 1952년과 1959년 한국에서도 공연하였으며 1965년에 은퇴하였습니다. 그녀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무대에 올랐던 흑인 최초의 성악가입니다. 그녀 이전에는 그 어떤 흑인도 클래식 음악 무대에 서지 못했었습니다. 한 번은 그녀가 국회 강당에서 공연을 하려고 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거절당했습니다. 그래서 워싱턴의 링컨 공원으로 장소를 옮겼는데, 무려 7만 5천 명의 관중이 모여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린컨공원에서의 공연
음악회가 끝난 후 앤더슨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차별과 고통은 처음엔 좌절을 주지만 나중엔 나를 강하게 합니다.
” 토스카니니는 “그녀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것 자체가 축복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나오는 그녀의 노래는 인생의 애환과 사랑이 담겨있습니다. 천상의 목소리를 가진 그녀가 어느 날 백악관에서 루즈벨트 대통령 부처와 영국 여왕을 위한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성공리에 끝난 독창회 자리에서 그녀는 기자들에게 많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한 기자가 “당신이 가수로 성공하고 나서 가장 기뻤던 때는 언제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때 앤더슨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말을 했습니다. “내가 처음 무대에 서던 날, 출연료를 어머니에게 갖다 주면서 ‘엄마, 이제는 더 이상 남의 집 빨래를 하지 않아도 되요’라고 말하던 순간입니다.” 가난하고 비참했던 시절을 부끄럼 없이 드러내는 그녀의 겸손한 자세는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더욱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습니다. 성공한 후에도 여전히 겸손한 삶을 살았던 앤더슨처럼 겸손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는 것이 진정한 승자의 모습입니다 옮겨온 글 Marian Anderson - Nobody Knows The Trouble I've Se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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