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두산 기행
백두산의 문이 열린 이래 거기 다녀온 사람들이 많다. 웅장한 산세와 천지를 보고 사람들은 제마다 여러 가지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아래 글은 내가 여기 오르게 된 경위와 과정, 그리고 느낌을 적어둔 것이다.
기다림
백두산은 우리나라 국토의 조종(祖宗)이자 단군신화의 발원지이기도 하여 예로부터 겨레의 존숭을 받아오고 있다. 그곳을 한번 오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갖게 되기는 젊은 시절, 육당(六堂) 최남선 선생의 ‘백두산 근참기(白頭山 覲參記)’를 읽은 후가 아닌가 싶다. 내가 우리나라 산하를 형편 닿는 대로 여기저기 찾아다니는 것도 그가 보여준 강렬한 국토애에서 어떤 자극을 받았던 데에 연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한참 세월이 흘러 백두산을 보고 싶다는 바람이 마음 한 편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한 것은 백두산과 금강산을 주제로 한 어느 일본인 사진 전시회를 본 후였다. 나는 그 전시회에서 적지 않은 값으로 사진첩 한 권과 대형 천지 사진 한 장을 구입했었다. 그것을 액자에 담아 벽에 걸어두고 때때로 들여다보고 있다. 천지의 웅혼한 기상이 잘 살아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후, 백두산에 관한 기행문도 잡히는 대로 읽어보았다. 특히 1986년에 간행된 진태하 씨의『아, 백두산』이란 책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죽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던 시절, 온갖 고난을 이겨내고 혈혈단신 백두산을 근참한 그의 이야기는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는 우리나라 여권 소지자로는 처음 중국을 경유하여 백두산에 오른 것이다.
또 색 다른 것으로는 1763년에 박종(朴琮, 1735~1793)이란 분이 쓴 ‘백두산 기행’도 읽었다. 그는 함북의 명천 부근에서 출발, 무산 삼지연을 거쳐 병사봉에 이른 경과를 일기체로 써서 남겼던 것이다. 또 나의 벗 김성집 교수가 1991년에 다녀와서 쓴 글 ‘백두산 기행’도 읽었고, 그 밖에 신문 잡지 등에 나오는 기사들도 유념해 두었다.
눈을 감으면 백두산은 이미 내 마음 한 쪽에 자리 잡고 있건만, 눈을 뜨면 그는 손닿지 않는 아득한 곳에 있었다. 이렇게 몇 년이 지나갔다. 그러다가 금년 들어서 뜻밖의 곳에서 희소식이 찾아왔다. 나는 그 기회를 붙잡아 오래 묵은 소망을 이루었다. 백두산에 올라 천지를 뵈었던 것이다.
등정(登程)
강북구 수유동에는 ‘수유새싹회’라는 모임이 있다. 둘째 아이 유치원 다닐 적에 자연스럽게 알게 된, 아홉 집의 자모들이 모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이 몇 집은 강남으로, 일산으로 옮겨가기도 했지만 이 해수로 서로 내왕하며 옛 정분을 이어가고 있다. 한창 시절에는 부부동반으로 나라 안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그 사이 모은 기금이 있어 이왕이면 백두산을 함께 다녀오자고 의논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각 집의 부군(夫君)들이 합류하는 그런 모양으로 일이 꾸며진 것이다.
이리하여 더위가 한창인 8월 5일, 일행 열다섯 명은 김포에서 심양 행 비행기를 탔다. 백두산 등정이 유일한 목적이었기에 여정도 3박4일로 짧게 잡혔다. 심양에 닿자 두 시간 안에 연길 행 비행 편으로 갈아탔다. 며칠 전, 일백 년래의 홍수로 요녕성 일대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고 하는데, 오늘은 다행하게도 하늘이 맑다. 마침 창가 자리를 얻었기에 밖을 잘 내다 볼 수 있었다. 처음 대하는 만주 땅이다.
그것은 끝 간 데를 알 수 없는 평원이다. 어쩌다 보이는 산들도 부드러운 산마루의 육산이다. 그 위에 삼림이 짙다. 호수와 강의 지류들도 보인다. 모두 물을 가득 머금고 있어 매우 윤택해 보이는 자연이다.
이 대륙은 역사적으로 우리 민족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닌 땅이다. 부여, 고구려, 발해 등이 떠올랐다. 저 아래 어딘가에, 수당(隨唐)의 침공군을 물리쳤던 고구려 성채(城砦)들이 있을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비석은 어디쯤 있는지, 옛적에는 우리의 강역이었는데…하는 상념들이 꼬리를 잇는다.
기내를 둘러보았다. 승객의 태반이 우리나라 사람 같다. 대개 간편한 차림이다. 똑 같은 운동모를 쓰고 있는 단체가 있는가 하면, 같은 색의 윗도리를 입은 그룹도 있다. 청소년들과 장년층이 있는가 하면, 주름 깊은 노인네들도 더러 있다. 이 중 많은 이가 백두산을 바라고 나선 것으로 짐작되었다.
연길에서 백두산으로
심양을 이륙한지 한 시간 남짓 만에 연길에 닿았다. 이곳은 짙은 비구름 탓에 낮인데도 어스름하다. 나고 드는 이들로 북적대는 공항구역을 빠져나와 시내로 들어섰다. 연길은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중심 도시이다. 건물이며 길가의 풍경들이 눈에 설지 않다. 마치 ‘타임 머신’을 타고 우리의 과거 한 시절로 되돌아 온 것 같다. 간판과 표지들은 어김없이 한글이 앞서고 한자(漢字)가 뒤따르는 그런 순서를 지키고 있다. 알고는 있었지만, 눈으로 대하고 보니 깊은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이방(異邦)에서 대대로 뿌리 내려 사는 우리 동포의 강인한 생명력의 표상을 보는 것 같았다.
일행은 저녁 식사 후 산책 삼아 시장거리로 나와 보았다. 어둠이 깔린 후인데도 시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이, 나르는 이들로 붐비고 있다. 과일 야채나 소소한 일용품을 파는 가게들이 많다. 길가 노천에서 젊은이들이 어울려 당구를 치는 생소한 풍경도 있다. 담배나 인형 따위를 건 경품놀이판도 군데군데 끼어 있는데, 주인이 모두 젊은 여인네여서 이채로웠다. 밤 시간에 따로 ‘개체호’(個體戶, 자영 가게)가 되어 조금이라도 더 돈을 벌고자 애를 쓰는 듯이 보였다.
이튿날 아침 여섯 시쯤, 우리는 18인승 버스를 타고 백두산으로 출발했다. 지난번에 내린 큰비로 일부구간이 막혀 도는 길로 가야한다고 안내자가 말했다. 약 3백 킬로미터 거리인데 비포장이 240킬로미터나 된다고 한다. 서남방향으로 한 시간쯤 달려 구릉지대를 벗어나자 저 아래로 한 줄기 강이 눈에 들어온다. 해란강(海蘭江)이라고 안내가 알려주었다.
이어 용정시와 주위의 넓은 들판이 보인다. 대개 논이다. 언덕에는 과수원도 있는데, 그 과일 이름이 ‘사과배’라 한다. 일찍 두만강을 건너온 개척 동포들이 고난 속에서도 참 좋은 지역에 자리를 잡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용정은 오는 길에 다시 들리기로 하고 외곽으로 빠져나갔다. 해란강의 남쪽에는 큰 산줄기가 동서로 달리고 있고, 그 앞자락에 서울의 남산만 한 나지막한 산이 엎드려 있는데, 그 꼭대기에 일송정이 있다고 했다. 이 일대는 바로 일제(日帝)로부터 나라를 되찾고자 목숨 바쳐가며 싸운 동포들과 독립군의 활동무대가 아니든가. 누군가가 ‘선구자’를 부르기 시작했다. 모두 함께 따라 불렀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왔다.
이제 비포장 길로 들어선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늘이 흐리다. 자동차 여행하기에는 나은 점도 있다. 길은 평탄한데다 그 동안 내린 비로 촉촉하게 젖어있어 먼지도 일지 않는다. 돌과 자갈이 없는 맨 흙길인데도 노면 보수가 잘 되어 있어 차의 흔들림도 견딜 만 했다. 용정과 화룡(和龍) 간의 경계를 넘어섰다. 길 양쪽에 논이 들판을 이루고 있다. ‘평강벌’이라 하는데, 이 지방 쌀이 중국에서 맛이 최고라고 한다. 우리나라 들녘처럼 경지정리를 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들판이 끝나자 길 양쪽은 바로 낙엽송, 전나무 등 곧게 자란 나무들로 수해(樹海)를 이루고 있다. 곳곳에 산판(林場) 입구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보인다. 도로와 나란히 협궤철로가 달리는데, 이것은 주로 벌채한 원목을 운반하기 위한 것이라 한다. 마침 한 칸짜리 동차가 승객을 몇 명 태우고 달리는데 그 광경이 무척 한가로워 보인다. 더 넓은 평야와 울창한 삼림, 그 무진장한 생산 잠재력이 부럽기만 하다.
연길을 떠난 지 두 시간 반 만에 삼도(三道)를 지났다. 수림 속에 자작나무들이 희끗희끗 보이기 시작한다. 아홉 시 반경에 송강진(松江鎭)에 닿았다. 면사무소 소재지 정도의 그런 거리인데 큰 비 끝이라 비포장의 길이 진창이다. 우리는 이제 남만주 오지 깊숙이 들어와 있다.
여기까지 오면서 살펴보니, 땅이 넓고 잠재력이 커 보이기는 하지만, 지금 사람들이 사는 모양은 풍요와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버스가 서는 곳이면 어니서나 간에 아낙네들이 차창에 모여들어 찐 옥수수, 땅콩 등속을 팔려고 기를 쓴다. 돈이 아쉽기 때문이리라. 그 중에는 말씨로 보아 동포들도 섞여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안쓰럽다. 우리가 어렵게 살던 시절의 한 장면을 옮겨놓은 것 같다.
‘현립식당’이란 곳에서 점심을 들었다. 주인이 조선족이다. 이 시각에 점심이 이상하지만, 여기를 지나면 산에 이르기까지 식사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반찬은 콩나물, 된장찌개, 더덕무침, 배추김치, 깍두기, 상추와 오이, 두부, 돼지고기 수육, 고사리 무침 등으로 한 상 가득한데, 조선족 식당이면 거의 비슷한 식단이다. 인심이 좋아 술이건, 반찬이거 모자라는 것은 청하면 다 내어왔다. 우리보다 늦게 연길을 떠난 단체들이 이 식당으로 속속 몰려왔다.
여기서 이도진(二道鎭)으로 곧장 가는 길은 있으나 그 도로 일부가 막혔기에 영경-양강(永庚-兩江) 방향으로 우회한다고 한다. 얼마 전부터 하늘이 어둑해지더니 결국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여기서부터는 옥수수, 감자, 콩 등을 심은 밭의 연속인데, 오지여서 밭뙈기들도 작다. 강물은 황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누렇다. 영경을 지나자 길은 아예 위쪽만 뚫린 수림의 터널 같은 모양으로 변했다. 나무도 다른 수종은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거의 자작나무 일색이다. 작은 것은 일이십 년, 큰 것은 오륙십 년은 좋이 자랐음직한 나무들이 몸을 하얀 색으로 깔끔하게 단장한 채 우리를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자작나무를 두고 한 말이 떠오른다. “미인대회에서 각선미를 보는 것처럼, 눈이 부시고 깨끗하고 미끈하다”고.
막 이도진을 지났다. 길은 어렴풋이 오르막인 줄을 알겠다. 이제 자작나무는 자취를 감추고 대신 미인송(美人松)들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그 수림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이제 백두산 기슭에 닿은 듯도 싶은데 도무지 산이라고는 그림자도 볼 수가 없다. 도로 위로 하늘이 길게 틔어 있지만 거기에도 산은 잡히지 않는다. 그러다가 한 굽이를 돌아들자 저만큼 ‘장백산 자연보호관리국’이란 표지판이 불쑥 나타났다. 좀 더 들어가자 ‘長白山’(백두산의 중국 이름)이라 써 붙인 중국식 문루가 훤칠하게 솟아 있고, 그 앞의 넓은 광장 양쪽에 기념품 가게들이 처마를 이어 있다. 여기가 백두산 초입이라 한다. 시각은 열두 시 40분을 가리키고 있다.
천지(天池)가 열리다
연길을 떠난 지 거의 일곱 시간 만에 드디어 백두산 구역에 닿았다. 온 길을 생각하면 모두 어지간히 지쳤을 것이나 일행은 피곤하기는커녕 원기가 왕성해 보인다. 참 모를 일이다. 벌써 백두 성산(聖山)의 영기를 받아들이기라도 했단 말인가. 입산수속을 마치고 다시 이십 분쯤 들어가자 ‘天池’라는 현판을 달고 서 있는 일주문이 눈에 들어온다.
이곳은 천지로 오르기 위한 ‘베이스 켐프’ 같은 곳으로 길 양쪽에 띄엄띄엄 호텔이나 여관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수목들의 키 너머 아득히 높은 산마루가 보이고, 거기 한 골의 벼랑에 허옇게 천을 드리운 듯 장폭이 내려 쏟아지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야, 장백폭포다. 우리가 백두산에 오기는 왔구나!”하고 누군가가 탄성을 지르는 것이었다.
이곳은 이제 천지로 올라가려는 사람, 이미 다녀온 사람들로 꽤 붐비고 있다. 낮은 비구름이 하늘을 온통 가리고 있고, 흩뿌리는 빗방울들이 우리를 초조하게 만든다. 커피를 한 잔씩 마신 다음, 우리는 가랑비 오락가락하는 가운데 두 대의 승합차에 나누어 탔다. 한 걸음 한 걸음씩 걸어올라 천지를 뵈어야 마땅하건만 형편상 차로 오르게 되니 송구한 마음이 인다.
산을 오르는 차도는 보도 불럭으로 포장되어 있다. 수림지대를 벗어나자 희끗 희끗한 껍질을 더덕더덕 입은 사스레나무 무리가 군락을 이루고 있는데, 강풍에 시달린 탓인지 전부 동쪽으로 휘어 있고, 가지들은 일부러 구겨놓기라도 한 듯 뒤죽박죽으로 헝클어져 있다. 진기한 광경이다.
어느 틈엔가 비가 멎었다. 구름도 한층 더 높아진 듯하다. 차도는 마치 사행천(蛇行川)처럼 꾸불꾸불 비탈길을 올라가고 있다. 한 굽이를 돌자 순간 시야가 활짝 트였다. 삼림한계선을 벗어난 것이다. 광활한 산기슭이 펴놓은 부채 모양으로 펼쳐져 있다. 시야 가득히 들어오는 저 경사면은 아마도 백두산의 북동면에 해당하리라. 몸은 차의 요동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지만, 두 눈은 차창에 붙박여 있다.
부드러운 산자락이 겹겹이 이어져 있는데 그 위를 고산초(高山草)가 뒤덮고 있다. 그 풀밭에 동전만한 크기의 야생 꽃들이 뿌려놓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저기서 반짝이고 있다. 흰색, 노란색, 연보라색을 띈 이 꽃들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거기 무수히 빛나고 있었다.
하늘이 구름에 가려져 있어도 조망에 지장은 없다. 달려오기 이십여 분만에 차가 멎고 모두 내렸다. 여기는 풀 한 포기 없는 삭막한 맨 땅이다. 기상관측소와 대피소 건물이 바로 앞에 보인다. 머리를 돌리자 분화구의 외벽인 듯, 경사면이 정상으로 급하게 오르고 있는데, 거리가 삼백여 미터쯤 되어 보인다. 먼저 올라선 사람들이 산마루 곳곳에 보인다. 우리는 제각각 푸석푸석한 비탈에 달라붙어 숨 가쁘게 올라갔다.
그러자 한 순간 앞이 활짝 트이면서 천지 그 모습이 시야 가득히 들어오는 것이었다. 기이한 형상의 봉만(峰巒)들이 천지를 옹위하듯 원진을 이루고 있는 중에, 태고의 정적을 품은 천지가 고요히 감벽(紺碧)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숨이 막힐 듯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백두산을 향한 우리의 일념에 이 하늘이 아마도 감응을 하셨나 보다. 짙푸른 천지와 장중한 모습의 뭇 봉우리들이 우리에게 온전히 자태를 드러내준 것이다. 시원(始原)의 정적이 감도는 그 신비에 모두 할 말을 잊은 듯. 일행 중 어떤 이는 아예 합장하여 묵도를 하고 있다. 이 순간만은 아마도 모두가 한 마음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는 왜 이 자리에 서 있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은 왜 남녀노소 가림 없이 이토록 백두산을 오르려 하는가. 관광인가, 아니면 등산인가. 이 먼 길을 남의 땅 밟으며 이리로 오는 목적이 무엇인가. 그러나 천지를 뵙자 그 대답이 스르르 떠올랐다. 그것은 순례였다. 국토와 겨레의 시원(始原)을 향한 경배였다. 그것은 종교보다 더 진한, 겨레의 가슴 속에서 움튼 큰 소망의 이룸이었다.
그러나 들어보시라. 천지는 하나이건만 국경선이 그것을 둘로 쪼개었다고 한다. 멀쩡하게 우리 국토이던 천지가 그 반신을 남에게 앗겼다는 것이다. 믿을 수도, 믿지 않을 수도 없는 이 기막힌 현실에 통탄을 금할 수 없구나. 설상가상이란 이를 두고 이름인가. 천지의 남쪽에 우뚝 솟아 있는 병사봉은 나를 부르는 듯한데, 나는 지금 남의 나라 영토에 붙박여 그를 멀거니 쳐다볼 수밖에 없는 처지라니, 국토가 토막 나 있음을 뼈아프게 알려주는 이 현장에서 나는 다시 역사의 어긋남에 통분을 삼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저런 상념을 털어내고 몇 명씩 어울려 기념사진을 찍었다. 물가로 내려가거나 암봉을 올라갈 시간 여유는 없다. 방향을 바꾸며 천지의 여러 모습을 사진에 담는 것이 고작이다. 단체 사진을 찍느라 법석대고 있는데 갑자기 동쪽으로부터 안개가 밀물처럼 덮쳐왔다. 삽시간에 천지도 사람들도 모두 안개 속에 묻혀버렸다. 듣기는 했지만, 기상이 이렇듯 급변하다니, 놀라울 뿐이다. 우리가 정상에서 머문 시간은 고작 이십여 분. 이 하늘이 우리에게 준 시간이 이로서 다한 것이다. 그것은 짧지만 긴 시간이기도 했다.
천지를 뵌 것이 마치 꿈결 같다. 우리에게 문을 열어주신 천지(天池)의 신명(神明)에게 감사했다. 아쉬움을 안개 속에 묻어두고 일행은 비탈길을 더듬어 차가 기다리는 지점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하산 길에 들어섰다. 하늘이 석별의 정을 나누시려는지, 다시금 빗방울이 차창을 적시고 있다.
장백폭포
천지 그 장엄한 모습을 온 몸으로 보고 느낀 감흥에 젖어 있는 사이, 차는 올랐던 길을 되짚어 내려와 여관촌에 닿았다. 일행은 바로 장백폭포를 향해 계곡을 거슬러 걸어 오르기 시작했다. 비는 잠시 소강상태이나 언제 다시 쏟아질지 알 수 없어 모두 우장을 갖추었다. 눈은 아득한 거리의 높은 벼랑에 걸려 있는 허연 폭포를 보고 있지만, 마음은 아직도 천지 그 모습으로 가득하다. 천지를 보았다는 이 엄연한 사실로 해서 모두의 기분은 날씨와는 달리 무척이나 밝고 가벼워 보인다.
상가지역을 스쳐 지나자 길은 계류와 나란히 밋밋하게 오르고 있다. 폭포는 하늘 높은 데서 으르렁 콸콸 쏟아져 내리고 계곡 좌우의 지세는 태고의 원시 그대로이다. 산은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경사는 급하며, 지표는 바위와 토석으로 황량하다. 화산의 폭발과 함께 땅이 파열되고 화구가 솟아오르는 극적인 장면의 흔적이 도처에 남아 있다. 오른 편 저만큼 아래에는 폭포에서 쏟아진 물이 급류를 이루며 세차게 흘러내리고 있다. 이 모든 광경이 마치 파노라마처럼 한눈에 다 들어온다. 천지가 백두의 신비를 품고 있다면, 이 장백계곡은 백두의 장대함을 마음껏 뽐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길을 따라 얼마를 더 오르자 군데군데서 김이 오르고 있는 온천수 구역이 나타났다. 어떤 곳은 손을 댈 수 없을 만큼 뜨거웠다. 유황천이어서 그런지, 물속의 돌 색상이 예사롭지 않다. 온천수에서 삶았다는 달걀을 사서 먹어보았다. 이 구역은 개인 상행위가 금지되어 있는지, 달걀을 파는 행상들의 언동이 무척 은밀해 보인다.
온천수 지역을 지나자 다시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그 빗줄기 사이로 보란 듯이 장백폭포가 갑자기 눈앞에 다가선다. 높이가 몇 척인지 헤아릴 수도 없고, 그 폭이 얼마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다. 폭포 아래쪽은 물보라와 안개로 몸을 감추고 있어 그 실상을 짐작도 못하겠다.
폭포 떨어지는 소리는 단순한 굉음에서 이제는 포효로 변해 나의 온 몸을 때린다. 고구려의 고토(故土)를 지켜 이 장백폭포를 품에 안지 못한 후손들의 원죄를 꾸짖는 듯도 하고, 나라를 반토막 낸 어리석음을 탄식하는 듯도 하고, 천지 반쪽을 남에게 팔아먹은 대역(大逆)을 통탄하는 듯도 들린다. 아아, 이 넓은 동천이 비탄의 메아리로 가득하구나. 두 동강 난 나라는 언제 다시 합쳐 겨레의 비원을 풀어볼 것이며, 잃어버린 강토를 회복하여 언제 민족의 웅비를 도모할 것인가. 역사의 어긋남이 다시금 가슴을 친다.
용정(龍井)으로 가는 길
폭포 보기를 마친 일행은 비에 젖은 몸으로 ‘두견산장’이란 여사(旅舍)에 들어 하룻밤 묵었다. 시설도 불비하고 서비스는 아예 기대하지 않는 것이 마음 편할 정도이지만, 실정을 알고 보니 그리 나무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해 통 털어 문을 여는 날이 혹한기와 그 전후를 빼고 나면 아직은 두세 달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런 사정이고 보니 호텔 운영이 매끄러울 수가 없고, 모든 것이 미비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 아침이 밝았다. 창문이 흔들릴 정도로 몰아치던 강풍은 멎었지만, 비는 그칠 줄을 모른다. 아침 8시경 버스에 올랐다. 어제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가야 한다. 오늘은 용정을 거쳐 연길에 이른 다음, 야간 비행 편으로 심양 행, 거기서 1박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이도진을 지나자 도로와 나란히 흐르는 강물은 밤사이 홍수로 변해 세차게 흐르고 있고, 도로도 손상을 입은 곳이 한둘이 아니다. 날씨 걱정을 하다가도 곤한 잠에 빠져들기를 몇 번인가 되풀이하던 중인데, 갑자기 차가 멎는다. 차창을 내다보니 도로가 100미터 쯤 물에 잠겨 있는 게 아닌가. 덩치 큰 차량들은 그냥 헤쳐가지만, 우리가 탄 버스는 중간치여서 그러지도 못하는 듯. 안내원이 바쁘게 나들더니, 지나쳐 가려는 한 대형 버스를 붙잡는다. 앞차 꽁무니에 밧줄을 매고 우리 차를 끌게 하려는 것이다. 이 일이 잘 풀려 우리는 무사히 어려운 곳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한 시간 쯤 달려가자 이번에는 더 험한 지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오른 편에서 길과 접한 채 흐르던 강물이 범람하여 도로를 덮친 것이다. 강 쪽은 급류이고, 도로가 꽤 깊이 물속에 잠겨버려 길과 강의 경계를 어림하기도 어려운 지경이다. 대소 차량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서성대고 있다. 큰 차들도 자력으로 건너지 못하는 모양이다. 우리 운전자도 망연한 얼굴로 혀를 차고 있으니, 일이 여간 난감한 게 아니다.
우리나라 지방도로에는 길 양쪽에 버드나무 등의 가로수가 있어 어지간히 물에 잠기더라도 길을 어림할 수는 있지만, 이 오지의 도로에는 가로수가 아예 없다. 그냥 헤쳐 가다가는 강으로 곤두박질 할 위험도 있는 것이다. 대책 없이 한창 머뭇거리고 있는데, 저 앞에서 한 대의 소형 차량이 산모퉁이를 돌아 물길을 헤쳐오고 있었다. 다가온 차는 사륜구동의 짚을 닮았다. 차를 돌려 세우더니 밧줄을 메달아 늘어선 차들을 한 대씩 인도하여 물길을 건너게 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맨 앞에 있던 차가 물길을 건너는 데 성공하자 모두 구세주를 만난 듯 얼굴을 펴고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우리 차도 이 도움으로 물길을 건너기는 했는데, 그만 시동이 꺼지고 말았다. 엔진 어딘가에 물이 스며든 것이다. 일행 중의 누군가가 운전자를 도와 응급조치를 했지만, 정상속력을 내지 못해 굼벵이 꼴이 되고 말았다.
영경과 송강진 어간은 물 천지였다. 고지대에 내린 빗물이 여기쯤에서 강으로 다 몰려들었는지, 강은 부풀대로 부풀어나 간신히 걸려 있는 교량을 집어삼킬 듯 기세등등하고, 개천은 개천대로 요란하고, 마을이며 밭이며 길이 온통 물 천지다.
그런대로 숨을 헐떡이며 기어오던 차는 용정 외곽의 포장도로를 만나자 반가운 김에 그만 졸도라도 했는지, 꼼짝을 못한다. 시간은 이미 예정을 벗어나고 있다. 용정을 둘러볼 시간이 그만큼 잘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현지 안내자는 이런 사태에 당황해 하는 기색도 없다. 그는 마침 지나가는 대형 관광차를 세우더니 우리를 그 차에 옮겨 타라고 한다. 다행히 우리를 수용할 좌석이 있었고, 승객들도 뜻밖에 우리나라 청소년들이었다. 한 학생에게 물어보니 이들은 독립유공자의 후손으로 정부의 후원을 받아 독립군 유적지를 순방 중이라는 것이며, 정신문화연구원 박성수 교수가 인솔자라 했다. 나는 앞좌석에 앉아 있는 그를 찾아 인사를 청하고 도움을 주어 고맙다고 사례를 했다. 면식은 없지만, 수년 전에『민족사의 맥(脈)을 찾아서』라는 그의 저서를 읽은 적이 있어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윽고 차는 용정 시내로 들어가 대성중학교 교정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희색 벽돌로 지은 아담한 2층 교사가 남향으로 서있는데, 교정에는 윤동주의 시비가 조촐한 돌에 음각되어 눈길을 끌었다. 방학 중인지 학생은 보이지 않는다. 교사 안으로 들어가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용두레 우물’이며, 이 학교를 세우거나 거쳐 간 인물들의 사적이 유품과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다. 이들은 모두 이방(異邦)에서 겪은 민족 수난사의 생생한 증거들로, 한 점 한 점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한다.
나는 8·15 광복의 순간을 겨우 기억하는 정도로 늦게 태어난 세대이지만, 내가 만일 조금 더 일찍 태어나 다른 동포들과 함께 간도로 건너갔다면, 나의 인생역정이 어땠을까. 나도 바지저고리 차림으로 이 대성중학교를 다녔을 것인가. 나도 죽도와 칼을 들고 일제 놈들에 항거하는 농민 대열에 끼어 있었을까.
오늘날을 살면서 나약에 물던 나 같은 자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만 같다. 선인들의 희생으로 우리는 이렇게 살아남아 있지만, 이 큰 희생에 값할 만한 일을 우리가 해놓은 것이 무엇인가. 대성중학교를 둘러보면서 나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 수 없는 심정이었다.
귀로
연길로 되돌아와 공항에서 심양 행 비행 편을 기다리자니 대기실은 복작대고 후덥지근해서 자못 지루하다. 거기서 뜻밖에 동향 지인인 이종성 부부를 만났다. 그 팀은 지금 북경으로 가는 길인데 그 전 날 도문과 두만강을 보고 왔단다. 백두산은 정상을 두 번이나 올랐지만, 천지는 결국 보지 못했다며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우리야 오로지 백두산만 바라고 왔으니 천지(天池)의 신명이 감응을 할만도 하지만, 도문이다 북경이다 하고 각지를 돌아다니는 자들에게까지 천지가 그 문을 열어줄 턱이 없다는 생각을 하자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심양에서 일박한 후 다음 날 8월 8일, 아침 비행기 편으로 김포에 안착했다. 수유새싹회 일행은 모두 얼굴이 밝고 명랑했다. 나도 그러했다. 3박4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많은 것을 보았고, 감흥도 적지 않았다. 더욱 천지를 뵈었으니 달리 더 바랄 것도 없다. 남의 땅이 아니라 우리 땅을 밟아 무산 삼지연을 거쳐 병사봉을 오를 날이 어서 왔으면 하는 바람만은 한층 더 강렬해진다. (1995년 광복절에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