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재 정선은 장마철 북악산에 올라 인왕산·남산·관악산·우면산·청계산·남한산까지 모두 먹빛 하나로 그려 냈다. 아마도 폴 세잔이 그렸다면 총천연색을 썼을 것이다. 세잔은 화면을 가득 채웠을 테지만 겸재는 비구름, 하늘, 솔바람을 모두 비워서 기운이 사방으로 뚫려 상쾌하다.
서양 그림과 다른 동양화의 특징을 여백이라고 말한다. 여백은 감상자가 상상할 수 있도록 사물을 다 드러내지 않는 데 쓸모 있다. 물이 흘러가는 끝은 여백으로 비워 끝 간 데를 모르게 하고 나무나 바위, 집 또한 다 그리지 않고 부분 비워 두어 나머지는 감상자가 머릿속에서 채우게 한다. 따라서 좋은 그림이란 알맞은 자리를 알맞게 비워서 사물을 돋보이게 하는 그림이다.
문화 절정기 때 여백은 충분하고 알맞다. 고려상감청자의 문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절정기에는 구름 한 점, 학 한 마리를 푸른 청자 바탕에 새기다가 점점 학의 숫자가 늘더니 끝에 가서는 청자 빛깔이 보이지 않을 만큼 그릇 표면을 가득 채운다. 조선 불화도 18세기에는 인물들이 여유 있게 나오는데 19세기에 들어가면 틈 없이 빽빽하게 들어선다. 그러면서 필선은 느슨해지고 색감은 탁하게 된다.
결국 문화가 절정기를 지나면서 사물이 많아지는 것은 창의성 없이 기존 것에 덧붙이기만 하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솜씨를 수량이라도 많게 해 감춰 보려는 것이다. 모든 미술 양식에서 되풀이되는 모습이다.
겸재와 단원 시절에는 나비를 그려도 한 마리만 그리고 매화 한 그루만으로도 화면이 풍성했는데 고종대 후반에는 나비도 떼로 나오고 매화도 여러 그루가 화면을 가득 채운다. 화면엔 빈틈이 없으니 어지럽고 답답하여 나비의 우아함도, 매화의 향기도 맛보기 쉽지 않다.
지금 TV에서 아이돌이 한꺼번에 13명씩 나오는 상황은 문화 쇠퇴기라는 뜻일까. 아마 그럴지도 모르겠다. 모든 아이돌의 얼굴까지 엇비슷하다. 쇠퇴기 미술에서 같은 문양(文樣)이 반복되듯이. 여백에 불안을 느끼지 않고 가득 채워야 한다는 강박증을 버릴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
탁현규 / 간송미술관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