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기 크릭 ▶ 임진왜란에서 저질른 만행과 - 귀무덤의 유래
요기 크릭 ▶일본 조선침략군의 잔학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교토의 귀무덤(耳塚)
게시일: 2014. 12. 6.
일본 교토는 실로 세계의 관광객들이 주목하는 도시이다. 이 도시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급의 명소가
무수히 많다. 것들이 모두 일본의 얼굴이다.
그러나 그 속에는 일본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는 곳도 있다. 그중 한 곳이 교토의 귀무덤(耳塚; mimizuka)이다.
교토의 중심부에 위치한 교토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세계적인 교토국립박물관(京都國立博物館)이 있고
그 박물관 바로 뒤에 토요구니신사(豊囯神社)가 있다. 이 신사는 임진왜란에서 정유재란에 이르는 7년간의
조선침략(1592~1598)을 주도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기리는 신사이다.
토요구니신사 입구의 계단에서 아래로 뻗어 있는 T자형 거리를 내려다보면 약 100m 거리의 왼쪽에
이 귀무덤이 있다. 무덤 앞에 세워진 안내판에도 분명히 쓰여있지만 이것은 조선인의 귀무덤이다.
어떤 사연으로 교토의 한복판에 이런 무덤이 세워져 있는 것일까?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사실상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주도한 7년간의 침략전쟁이었다. 당시의 조선침략에는 일본 각지의 번(藩)에서 출병한 침략군
부대가 조선 각 지방을 나누어 경쟁적으로 작전을 펴면서 총 사령탑인 히데요시에게 충성을 보이기 위해서
그들이 살해한 조선인의 신체 일부(귀와 코)를 일본으로 가저갔다.
구체적으로는 주요직위의 조선군장군의 경우에는 머리를 베어갔고, 나머지는 코를 베어가서 그들의 전과를
증명했다고 한다. 이때 시신의 일부를 떼내어 가는 데에는 부패의 문제가 있기 때문에 잘라낸 코를 소금에
절여서 가져갔다는 것이다.
이렇게 염장(鹽藏)코를 가져가 그들의 전과를 인정받고 쌓인 코를 묻어놓은 것이 이 ‘귀무덤’이다.
그런데 이렇게 염장한 ‘코’를 묻은 것이 왜 지금은 ‘귀무덤’으로 불리는 것일까?
처음에는 이것이 ‘코무덤’(鼻塚; hanazuka)으로 불리웠지만, 코를 잘라왔다는 것이 너무 ‘섬뜩하다’고 해서
‘귀무덤’으로 명칭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논리적으로 생각해도 사람의 귀는 각자 두 개씩이지만,
코는 하나이기에 전과를 인정받는 방법으로는 귀보다는 코를 베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염장해간 코를
왜 무덤을 만들고, 지금과 같이 ‘사적’(史蹟)으로 지정해놓고 있을까? 우리 문화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죽은
사람에 대해서 공양(供養)을 하지 않으면, 그 혼이 화(禍)를 초래한다는 믿음이 강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이 토요토미 히데요시를 기리는 사당 격인 토요구니신사에서 바로 보이는 이 무덤에는
12만6천명이라고도 한다.
400여년 전에 7년에 걸쳐서 조선 전역을 초토화 시킨 일본 침략군의 잔학성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교토의
이 ‘귀무덤’은 생생하게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이 귀덤을 보면서 오늘의 일본국은 이미 400여년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업수히 여기면서
침략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그 염장해간 코를 없애버리지 않고, 일본의 옛 수도 교토의 명당에 모셔놓고 후세에 길이길이 일본 침략군의
잔학성을 증명해주고 있는 것이 너무나도 고마운 것이다
(탐방일: 2014-10-26) 참조: 이와는 전혀 반대로 임진왜란기간에 죽어간 왜군의 시신은 현지에서 매장되어
조선인의 보살핌을 받은 전남 [珍島 왜덕산(倭德山) 일본인 묘지] 사례가 있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